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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29

 

 

우리 불자님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열반사덕이라. 열반이라는 것은 영생(永生)의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열반은 어째서 영생의 진리인가 그러면은 모든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덕이나 그런 진리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도 많고 끝도 갓도 없이 많은 공덕인지라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고 다만 간단히 간추리면 그때는 4가지라 말입니다. 4가지는 우리가 외어두면은 좋습니다. 간단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야 내 마음의 본성에는 이런 공덕이 있구나, 내 마음에는 이런 부사의(不思議) 한 힘이 있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깨달으려고 또 보다 더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그러겠지요.

 

그런데 4가지 덕은 어떤 것이고 하면은 그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 어째서 항상 상 자를 써서 상이라고 했는가 하면은 우리 생명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있다가 없어지고 또 인연이 생기면 없다가도 생기고. 그러나 우리 생명의 본체인 그 불성 자리는 불성 그 자리는 그때는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생명의 실존(實存)이란 말입니다.

 

실존철학(實存哲學)도 그 어렵게시리 모다 그 여러 가지로 이론체계를 많이 세웠지만 사실은 그 자리를 우리 스님네 같이 깨달아서 성자가 되는 그런 법으로 공부해야지 말로만 제아무리 무성하게 하나의 철학 체계를 세운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그 부처님 공덕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은 그런 4덕을 제대로 체험을 못 합니다.

 

다른 철학자들도 모두가 다 정말로 그것을 체험적으로 알자면 싫든 좋든 간에 부처님 공부를 해야 합니다. 상락아정 이것은 영생불멸(永生不滅)하니까 상 자를 항상 상자를 써서 상 그러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고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고 하지만은 그 우리 진여 불성 우리 생명의 본바탕에 있는 그러한 공덕은 그렇지 않고서 항시 존재한단 말입니다. 영원히 생명도 마찬가지고 우리 생명은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부활(復活)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은 본래로 누구나가 다 부활합니다. 인연 따라서 있는 것만 그때그때 변화가 되는 것이지 그 근본 바탕 진여 불성 자리는 변화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 보고 항상 상자 상()이라고 하는 것이고, 락은 안락할 락()자 말입니다. 우리 생명이 있는 존재는 어느 것이나 안락(安樂)을 다 구합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더구나 우리 사람은 또 의식이 있어 놔서 더욱더 우리가 의식적으로 안락을 구한단 말입니다. 행복(幸福)을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적으로 행복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행복도 그냥 행복이 아니라 완벽한 행복을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을 가리켜서 인간이란 것이 인간 존재가 너무나 욕심이 많지 않은가? 허나 욕심이 많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 성품이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되려는 그런 마음이 본래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가 부처가 못되면 항시 마음으로 불안스럽습니다. 본래 부천데 부처가 되어버려야 그래야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스러울 것인데 본래 부처님인데 부처가 못되어 놓으니까 그때는 마음이 부족을 느끼고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뭐 지금 현대를 가리켜서 위기의 시대라 또는 불안의 시대라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요.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무엇이고 하면 사람들이 지금 옳게 살지를 않고 있단 말입니다. 허망한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감투나 재산이나 그런 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변동하는 것인데 거기다가 마음을 붙여서는 항시 불안스럽고 염려가 됩니다.

 

그 감투도 높은 감투나 쓰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것이 괴롭습니까? 참 정말로 중상모략(中傷謀略)하고 별별 짓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당을 또 만들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걸 보면 굉장히 미련하단 말입니다. 참 미련해요, 그렇지 않고 생긴 대로 살면은 참 좋은 것인데. 부처님 법은 그 아까 말씀마따나 여법히 모두를 다 우주의 진리대로 한단 말입니다. 허나 당장에는 그것이 안 되겠지요.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사람들이 너무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허망한 것 때문에 업을 많이 잔뜩 지어놔서 그런 업을 소멸시키려면 그냥 몇 년 동안에 소멸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가서는 앞으로 몇백 년 몇천 년 가서는 다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안 될 수가 없는가 하면 우리가 본래로 부처님 같은 마음 그 부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마음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고생도 하고 또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 가지가지 그런 고초를 겪은 다음에는 우리가 부처 쪽으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 온 힘을 그리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리다 말았습니다만은 그 우리 행복은, 근원적으로 행복을, 우리 불자들은 행복을 구하는 존재란 말입니다. ()이라 안락 락, 그다음에 나 아. 그 나는 4가지 덕에 있는 나 아자 나는 이것은 그냥 허망 무상한 아가 아니라 허망 무상한 아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사무치게 알고서 말입니다. 참다운 나, 죽지 않는 나, 인연 따라서 생기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는 그런 나가 아니라 인연을 초월한 참나가 이것이 이른바 열반의 4가지 덕 가운데 나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나는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이 보통 그런 현상적인 허망 무상한 그러한 것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든 그런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불경에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팔대자재아 그것은 그 아라는, 깨달아버린 그런 대도인에 갖추어진 아라는 것은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도 나툴 수가 있단 말입니다. 비행자재(飛行自在)라 공중으로 비행도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또는 자기 몸을 우주에 가득 차게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이런저런 불경을 보면 당연히 그런 부사의한 대목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정도가 이것이 거기 열반의 4가지 덕 가운데 나 아자, 아라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말씀을 들으실 때 그냥 건성으로 생각을 마십시오. 참말로 우리한테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금생에 복을 못 짓고 전생에 우리가 업장을 많이 지어서 제대로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을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도록 우리가 지금 태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 그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주 신묘해서 잘못 쓰면 참 옹졸하고 정말로 바늘귀 하나도 안 들어갈 만치 마음이 좁지만은 마음의 또 본바탕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를 다 감싸고 있단 말입니다.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지금 사형수 마음이나 도둑놈 마음이나 그 마음의 본바탕은 다 우주를 감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마음에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락아라 항상 영생,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이 영생하고 또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이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또 구하고 말입니다. 또 구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 신통묘지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런 부처님의 법문을 안 보았으면 그렁저렁 어떻게 살아도 되겠구나. 그렇게 마음먹었을 것인데 그런 것을 분명히 다 인제 봐놓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나도 닦으면 부처가 되겠구나! 부처가 되면 만 공덕을 충분히 할 수가 있구나! 그런 가능성이 나한테 있는데 그것을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나이가 많다고 실망을 마십시오. 학문을 많이 안 배웠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 마음 닦는 공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 무식자고 나이가 많건 나이가 적건 간에 마음 통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조금도 장애가 없습니다.

 

서기 200년 전에 성세존자는 일곱 살에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했습니다. 다라표 비구는 부처님 당시에 14살에 승려가 되야 가지고서 16세에 아라한도를 성취해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나이 적고 많고 또는 세간적인 지식이 많이 있고 또는 없고 하는 그런 것에 구애될 필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굴이 못난 것도 그런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은 마음자리는 다 똑같습니다.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자리는 김가 마음 박가 마음 또는 석가모니 마음 예수 마음 똑같습니다. 그분들 성인들은 보다 더 마음을 잘 쓴 분들이고 우리는 마음을 잘못 써서 지금 범부중생(凡夫衆生)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맑을 정(), 맑을 정(), 청정(淸淨)이란 정()자 말입니다. 그 정은 무엇이고 하면은 이것은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본래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것인데 우리가 괜스레 자꾸만 분별을 내어서 망상한단 말입니다. 본래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망상할 건더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 내 몸뚱이도 아까 말씀마따나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것이 잠시간 모여서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돼 있고 내가 쓴다는 지금 마음도 마찬가지고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모다 군더더기가 잔뜩 많이 들어서 좋다 굳다 밉다 사랑한다 모다 그러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허망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 중생 마음은 청정할 정자 청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불성을 깨달아서 불성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면 그때는 그러한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거꾸로 뒤바꿔 보고 그런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훤히 틔어버리기 때문에 우주를 다 내다본단 말입니다. 과거도 끊임없이 보고 미래도 끊임없이 본단 말입니다.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 하니 한 생각에 무량겁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우리가 통해서 보니,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을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봐서 자꾸만 막히고 껄끄럽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 그 영생불멸한 것이 우리 불성 자리 불성을 깨달은 그 자리의 마음이고, 또 낙이라 안락 락자 말입니다. 즐거울 락자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때문에 우리 나쁜 생각 때문에 우리가 안락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을 사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고통스럽게 느낄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가 병들어서 아프다 하더라도 아, 이 병든 병 이것이 어디가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인가? 마음으로 아프다 하는 것도 이것이 마음이 괜히 그러는 것이지 마음이란 것은 원래 모양도 없고 또는 자취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플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아프다 하는 것이지 말입니다.

 

따라서 그 가장 원만한 그런 행복은 또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나 아, 아라 이것도 역시 나 아자 아는 잘못 생각하기가 싶습니다만 모든 신통 자재를 갖추어 있는 그런 이른바 대아(大我) 큰 나 또는 참 진 자 나 아자 진아(眞我)라 이런 단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한테 우리 이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것은 본래면목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금생에 받은 데다가 금생 나와서도 아, 부모한테 이렇게 저렇게 배우고 학교 가서도 그 세속적인 지혜를 이것저것 배우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잡탕 되어서 느끼는 이런 것은 사실은 허망한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알고자 할 수가 있고 그러한 것이 참다운 내 본래면목이고 또 번뇌도 조금도 없고 훤히 튀어서 천지 우주 어디에도 다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참 신묘(神妙)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 좋을 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마음이 그 쾌적할 때 도인의 마음은 미처 못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툭 틔어서 과거에 막힘이 없고 미래에 막힘이 없고 현재에 막힘이 없이 산이나 벽이나 아무것도 걸림이 없이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지혜가 본래로 갖추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내 나이가 벌써 50이나 먹었는데 본래로 갖추고 있더라도 인제는 가망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도의 협존자는 나이 70에 출가했단 말입니다, 나이 70에 집을 버리고 출가했단 말입니다. 출가 안 해도 무방하겠지요. 나이 70에 출가해서 3년 동안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통달하고 또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했습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 통했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특수한 사람만이 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는 없습니다. 좀 더디고 빠른 것은 있겠지요. 이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누구한테나 개한테나 소한테나 어느 누구한테나 다 최상의 희망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자기 집에서 지금 키우고 있는 개라 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개인 것이지 과거에도 꼭 개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친아버지고 자기 친어머니가 자기가 키우고 있는 개가 된 그런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것이든 간에 사람 사람끼리뿐만 아니라 개를 보나 소를 보나 하나의 독사를 보나, 그대 발보리심(發菩提心)하라, 보리심을 내란 말입니다. 우리는 개미를 보나 무엇을 보나 그대 보리심을 내서 빨리 성불하라 그래야 그것이 보살 마음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떠한 그런 비참한 예도 있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