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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28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아주 그야말로 잘못 쓰면 그런 요물이 없습니다. 잘 쓰면 그때는 바로 부처가 되니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가 잘못 쓰고 잘 쓰고 함에 따라서 그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요물 같은 그런 마음을 우리가 다잡아서 정말로 그 부처가 되는 그 길로 일로매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별시수행(別時修行)이라 오로지 사흘이고 또는 한 달이고 3개월이고 몇 년이고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지 만은 먼저 우리가 이론적(理論的)으로 체계가 안 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룻길을 가더라도 길목을 잘 모르면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따라서 먼저 논리적(論理的)으로 우리가 공부하는 그런 체계를 명확히 한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어떠한 것이 가장 중요한가? 그러면은 우리가 흔히 많이 알고 있듯이 또는 법문도 많이 듣고 또는 불경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좋은 말씀도 많이 읽어서 알고 있듯이 우리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 우리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면 마음을 깨닫는 그런 가장 지름길인 동시에 확실한 길을 우리가 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내 마음 뭐 내가 충분히 알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랑가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잘 모릅니다. 우리의 그런 번뇌망상으로 분별하는 그 마음 가지고서는 우리 마음의 본바탕을 모릅니다. 우리 마음은 분명이 체()와 용()이 있습니다. 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마음의 그 본래면목(本來面目) 마음의 본래 성품 자리란 말입니다. 용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성품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이루어지는 모든 그런 현상적인 이런 명상(名相) 이름과 하나의 허망한 그런 상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쉽게 인연법(因緣法), 인연법을 들먹이고 예기합니다만 사실 인연법이란 것이 어느 것도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떠한 것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중론(中論)이라는 용수보살(龍樹菩薩), 2의 석가(釋迦)라는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대로 빈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 몸이 그렇고 우리 마음도 그렇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모양을 나투고서 그대로 고정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겠지만 인연 따라서 모양을 나툰 것은 이것은 어떠한 것이든 간에 조금도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고통이 어째서 오는가 하면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고유한 걸로 집착(執着)한단 말입니다. 우선 그런 집착 가운데 우리 망상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 아, 볼 견.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그 마음이 제일 무섭습니다. 왜 무서운고 하면은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그 마음 때문에 모든 죄악(罪惡)이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많이 듣고 많이 알아서 알지만은 불교는 무아(無我)의 길이라, 없을 무, 나 아자 내가 없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무아의 도리만 알면 다른 것은 쭉쭉 풀려갑니다. 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왜 내가 없는가? 부처님 가르침은 이론적(理論的)으로 조금도 흠결(欠缺)이 없습니다. 가장 철학적(哲學的)이고 가장 과학적(科學的)이고 말입니다. 또는 가장 고도한 심오한 종교적(宗敎的)이고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그러한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봐서 조금도 모순도 없고 아까 말씀마따나 체와 용을 근원적인 그런 본체(本體)와 또는 현상적인 용을 갖추고서 조금도 흠결이 없고 또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과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 자리인 부처를 성취한단 말입니다.

 

다른 성자의 가르침도 다 필요한 가르침이나 적어도 하나의 체계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 같이 완벽한 그런 체계는 없습니다. 제 말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연구해본 분들이나 또는 지금은 동서 철학자나 그런 분들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긍정을 다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같이 가장 궁극적(窮極的)인 그런 철학적 진리(眞理)인 동시에 가장 합리적인 과학이고 또는 동시에 그 모든 존재의 생명의 본바탕인 부처를 성취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우리 마음, 우리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확실히 알고 공부를 해야 공부도 쉽고 또는 다른 것에 대해서 우리가 침해를 안당한단 말입니다.

 

근데 쉽게 보통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로 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마음 닦으면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음이 어째서 부처인가? 이렇게 우리가 또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좀 멍해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내 마음 네 마음 그러지만은 모양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복잡한 말로 하면 그때는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없는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모양이 없으면서 내가 지금 살아 있으니까 분명히 마음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부처님은 모양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얘기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나오셨다가 이미 가셔 버렸기 때문에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숭상하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우리가 마음을 닦아서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런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천지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항시 계시는 이른바 법신(法身)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법신 부처님입니다. 원효(元曉)스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나 계시는 참다운 부처님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우주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 근본자리는 바로 법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법신부처님과 화신(化身)부처님의 한계를 모르면 참 답답한 일입니다. 역사적인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인 역사적인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우주의 생명으로 해서 부처님, 우주 생명의 부처님은 항시 계신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다 해도 우리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항시 갔다 왔다 갔다 왔다 그래 버리면 법신 부처님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님하고 같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자꾸 추수리고 마음으로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고 염불(念佛)을 하고 그러면은 그때는 아, 정말로 내가 안보이지만 참말로 부처님은 언제나 계시는구나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부처님의 실존(實存)이 차근차근 깊이 와 닿는단 말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또는 다른 동물이나 우주는 그런 생명으로 해서 다 충만해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미경으로만 거의 겨우 볼 수 있는 그런 소립자(素粒子),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도 내나해야 역시 끄트머리에 가서는 하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 현대과학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런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의 정체(正體)를 현대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잠정적으로 이름을 붙여서 양성자(陽性子)요 중성자(中性子)요 또는 장에너지((energy)요 모다 그러는 것이지 그런 것의 정체를 모릅니다.

 

어째서 정체를 모르는가 하면 지금 사람의 과학적인 지혜로 해서는 모양이 있는 것은 알지만은 모양이 없는 것은 모르는데 그런 전자나 양성자나 그런 것은 모양을 확실히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동(運動)을 측정하려고 하면 그때는 위치(位置)를 모르고 말입니다. 위치를 측정 할려고 하면 그때는 운동을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주의 모든 것을 구성한 우리 몸의 세포라던가 금이나 은이나 모두를 구성한 가장 적은 알갱이 그런 것은 사실은 현대 정밀 물리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모르는데 분명히 움직이고 또는 운동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 물리학자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아무리 작은 것도 다 그 안에는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포함되어있다, 광자(光子)라 하는 그 눈에 보일 수도 없는 겨우 미시적인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빛 광, 광자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광자 속에도 일 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나 갈 수 있는 그런 무시무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즉 어느 것에나 속에는 그 원자폭탄(原子爆彈) 같은 그런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란 것도 역시 우리가 봐서 물질이라고 간단히 말하는 것이지 캐고캐고 들어가면 알 수가 없어지고 다만 종당에 가서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 에너지 기()만 존재한단 말입니다, 기만. 우주라는 것은 에너지라 하는 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기 위에서 그 기가 어떻게 모아지는가, 어떻게 합해지는가, 상호작용(相互作用)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된단 말입니다. 금이요 은이요 다이아몬드요 하지만은 그런 것도 내내야 우주 에너지가 이렇게 저렇게 모인 상태를 잠시간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가상(假相) 가명(假名)이란 말입니다. 허망한 모습인 것이고 가짜로 임시동안 붙인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몸뚱이도 그렇습니다. 우리 몽뚱이도 우리가 아무리 귀엽게 생각하지 만은 이것도 역시 가상 가명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이 몸뚱이를 구성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이 원래 부처라 하건만은 보통 우리가 쓰는 마음은 본래로 부처인 망정 지금 우리 범부심(凡夫心)이란 것은 내내야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욕(意慾)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그런 부스러기가 모아서 우리 범부의 마음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뚱이나 우리 마음을 분석해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것은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이런 것은 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인연따라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따지고 보면 공()입니다.

 

공이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개공이라 하는 것도 오온이라 한 것은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을 합한 이 존재가 오온 아닙니까. 우리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오온인데 오온도 역시 이것도 결국은 다 빈 것이란 말입니다. 다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오온 이것이 다만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습을 나툰 하나의 가상에 불과하고 김 아무개 박 아무개는 하나의 가명에 불과한데 이것이 고유하게 존재한다 이것이 내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우리의 여러 가지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생기고 고통(苦痛)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인생고(人生苦)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견(我見)이라 나 아, 볼 견자 나라는 존재를 고집하는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공부하려고 애써도 나라는 것이 원래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 그래야 우리 공부가 진척이 빠르단 말입니다.

 

나는 항시 나고 죽고서도 이런 몸뚱이 다시 또 곧 받을 것이고 과거 전생도 이런 몸뚱이 받아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또 과거의 업()으로 해서 그때 또 몸을 받았겠지요. 또 금생에는 과거의 지은 업으로 해서 금생에 그 업을 지운 그대로 닮게시리 금생의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내생은 또 우리 몸뚱이 헌옷 같듯이 아, 그냥 다 벗어놓고 가더라도 금생에 어떻게 살았던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밤이나 낮이나 분별시비하고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우리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아 있다가 그것에 맞게시리 또 금생에 우리가 몸을 받습니다. , 다시 말하면 우리 그런 업식(業識)이라, 업 업, 알 식, 의식이란 식자 말입니다. 업식이라, 우리 업식 따라서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논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조금도 모순도 없고 흠절이 없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 말씀은 꼭 사실 그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른바 여법(如法)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보나 어떤 것으로 보나 조금도 그런 것에 그런 이치에 논리에 어긋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과 몸이 구성되었는데 이것이 나라고 고집하는 존잰데 이 존재가 본래 비어있다는 이 생각을 가져야 공부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게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그런 경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런 경들은 본뜻이 무엇인고 하면은 색즉공(色卽空)이라,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공이란 말입니다. 육조스님께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은 부처님의 정법을 받아오신 33번째 분인데 육조스님께서 그 인가를 받을 때게 하신 그런 법문이 무엇인고 하면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也塵埃),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리요,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가서 티끌이 낄 것인가.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무슨 소식이겠습니까?

 

우리 육조스님도 몸도 있고 여러 가지 그야말로 주변도 다 산도 있고 냇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고 모다 그러겠지요. 그러는데 본래 무일물이라 본래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본래무일물 소식을 알아 두셔야 그래야 불교를 공부했다고 우리가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본래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을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저 억지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무일물이란 것은 누가 억지로 만든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로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보일 뿐인 것이지 모양도 잠시간 가짜요 거기다 붙인 이름도 가짜란 말입니다.

, 지금 김아무개를 부모를 달리 해서 태어나면 박씨도 되겠지요. 인연 따라서 잠시간 가짜로 붙인 것이지 그것이 고정불변한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본래 무일물이라, 그와 같이 모든 존재가 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존재가 다 공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분명이 있는데 본래로 아무것도 없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이것은 참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