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당체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그 인과도 다 초월해 있습니다. 시간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닌데 지나간 것은 과거(過去)라고 하고 미처 오지 못한 그러한 시간은 미래(未來)라고 우리가 인간들이 편의에 따라서 정해 놓은 것입니다.
또 일체존재라는 것도 우리 인간들이 그 사물의 진상을 바로 보지를 못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나다 너다 그렇게 구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일체 존재는 사실은 꿈이나 허깨비나 그림자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업식(業識)으로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는 것이지 깨닫는 그 분상에서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는 것도 이도 모두가 다 허망한 허상입니다.
대체로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는 이것은 4대5온의 가화합(假和合)이라 그 물질적 존재인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와 또는 정신적 존재인 우리가 감각(感覺)하고 또는 상상(想像)하고 또는 의욕(意慾)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그러한 정신적 존재 이런 것이 잠시간 우리 업식으로 해서 합해져 있단 말입니다. 그 실상적인 실존(實存)의 세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 일체존재의 실상이 뭣인가? 실존이 뭣인가? 이것은 그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존재의 실상을 묻는 가르침인데 이러한 것은 사실은 우리 중생의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는 해답이 안 나옵니다.
눈에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러한 존재, 형이상학적인 존재자체 문제 이런데 까지 들어가야 그래야 참다운 실상 세계의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그러한 바른 깨달음이 있게 됩니다. 신앙(信仰)이라는 것은 마음이 편안하고 그야말로 불안의식(不安意識)이 없어야 그래야 인제 바른 신앙이 되지 않습니까. 신앙의 발생 자체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불안의식을, 그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 없앨 것인가? 그런 데서 기독교나 또는 다른 종교 그 유태교나 이슬람교나 다 그런 종교도 인간의 불안의식을 없애는데 있어서 인간의 구도일념(求道一念) 때문에 여러 가지 종교와 철학 체계가 발생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가르침 가운데서 우리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가르침을 다 통합을 하고 다 포괄한 그런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불교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만법(一切萬法)의 실상(實相)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다시 쉽게 말하면 부처님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하면 당연히 그때는 종말도 있어야 되겠지요. 그 우주를 창조하고 종말이 있고 우주를 창조 했다고 생각할 때는 창조한 하나님과 또는 창조를 당한 피창조적(彼創造的)인 그런 우리 인간이나 자연계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과 이 자연계라는 것은 이분법(二分法)이라 둘로 나누어진단 말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고 셋으로 나누어지는, 이른바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이원론(二元論)이라 셋으로 나누어지면 그때는 삼원론(三元論)이 되겠지요. 또 보다 더 많이 나누어지면 그때는 이른바 다원론(多元論)이라, 이렇게 우리가 철학적으로 구분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이 불안의식을 이렇게 나누어지고 쪼개어지고 하면은 인간의 불안의식을 해소(解消)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봅니다.
하나의 생명도 내 생명과 그 우주생명 우주에너지와 둘로 보질 않습니다. 그 달마대사(達磨大師) 하면은 우리 불자님들이 모르는 분이 없이 다 알으시지 않습니까.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의 핵심도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입사행이란 법문이 있어요. 두 이(二)자, 들 입(入)자, 이입사행은 뭣인고 하면은 그 먼저 원리로 해서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진리뿐이다. 하나의 도리다.
이런 것을 말씀하신 가르침이 이른바 원리란 다스릴 리(理)자, 들 입(入)자, 그렇게 그 리입이라, 이치로 해서 먼저 문득 깨닫고 그 다음 행입(行入)이라, 이치로 해서는 우리가 문득 깨달을 수가 있지마는 우리 범부중생이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히 단박 깨달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업장을 녹이는 그런 수행이 거기에 따라야 되겠지요. 이것이 이른바 행입이라, 이러한 어려운 법문을 구체적으로 다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허나 다만 우선 이치로 만유의 실상을 먼저 우리가 깨닫는단 말입니다. 이른바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먼저 바른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어느 철학이나 무슨 종교나 우선 인식을 바로 해야 한단 말입니다. 바른 인식이란 건 뭣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이 그때그때 괴롭고 또 여러 가지 우리 생활에 있어서 모순이 야기 된 것은 뭣인고 하면은 그 생명의 바탕이 원래 하나인데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그런 자리를 우리 중생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하나의 생명인 것을 여실(如實)하게 증오(證悟)라 증명을 해서 아는 분들이 이른바 성인입니다. 근데 여실하게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마음도 역시 본래 마음은 우주를 충분히 다, 불교 전문 술어로 말하면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功德)을 충분히 알 수 있는 힘이 원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업(業) 따라서, 우리 업이라는 것은 이것은 금생에 우리가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으로 짓는 것이나 또는 과거세에 지은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이것은 업에 해당합니다. 업 따라서 우리 마음이 그마만치 어두워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실하게 사실 그대로 우주를 보질 못 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원래 이 내 몸뚱이라 하는 것이 내 존재라는 것은 이것은 원래 무아(無我)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원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어디가 있는고 하면은 불교는 무아를 말씀해 있고 다른 종교는 무아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나라는 존재가 따라간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 그 대목을 이해하시기가 좀 어렵습니다. 나라는 이 소중한 존재가 있으니까 인제 내 식구도 있고 내 사랑하는 그런 자식도 있고 내 명예도 있고 할 것인데 나라는 것이 없다고 그러면 너무나 그 허무하지 않는가.
그 가짜 나는 없어도 진짜 나는 있습니다. 가짜 나는 뭣인가? 가짜 나는 우리중생이 나라고 고집하는 그런 나는 이것은 가짜 납니다. 진짜 나는 뭣인가? 진짜 나는 이것은 천지 우주의 실상인 그 진여불성과 나와 둘이 아닌 그 깨달음을 얻는 그 자리가 진짜 납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은 진짜 나가 아닌 것을 나라고 고집한단 말입니다. 그 나라고 고집하는 것은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짜 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인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허망하고 아무리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우선은 그렇게 납득이 안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가짜 나 이것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러한 것이 잠시간 그 업으로 해서 합해진 것이 내 몸뚱이 육체고, 내 마음이라 하는 것도 그때그때 우리가 감수하고 감각적으로 우리가 지각(知覺)하고 말입니다. 상상하고 분별하고 느끼는 그런 것이 나라고 지금 우리가 고집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짜 나를 우리가 못 떠나는 한에는 우리는 금생 뿐만 아니라 다생겁래(多生劫來)로 금생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내생 가서 또 그대로 태어나고, 소같이 살았으면 내생 가서 틀림없이 소가 되는 것이고, 또 십선(十善)을 닦아서 보다 더 잘 살았으면 그때는 천상(天上)도 올라가고 사람만치 밖에는 못 살았으면 다시 사람으로 인도환생(人道還生)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인과(因果)라는 그것은 호리불차(毫釐不差)라 조금도 차질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대로 다 받습니다. 가사백천겁(假使百千劫)하니 소작업불망(所作業不忘)이라, 그 한 겁도 무량 세월인데 백천 겁은 그 백배 천배나 되니 더욱 무량세월 아닙니까. 그 백천겁 무량세월 동안 우리가 다시 태어나고 생사를 거듭한다 하더라도 소작업불망이라, 우리가 한번 지은 업은 절대로 소멸이 안 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같이 삼아승지겁을 닦아 오신 그러한 대성자(大聖者)도 과거전생에 지으신 업은 다 받으셨습니다. 자기 종제(從弟)한테 그렇게 시달림을 당하고 말입니다. 또 부처님도 더러는 남의 비방을 듣고 부처님도 탁발(托鉢) 나가서 동냥 나가서 그 밥 한 숟갈도 못 얻어서 하루 종일 탈탈 굶기도 하시고 그런 것이 모두가 다 과거 전생에 부처님께서 업을 지으신 과보입니다. 그러거든 하물며 우리가 과보를 안 받겠습니까. 좋은 남편 만나는 것도 자기가 지은대로 받는 것이고 훌륭한 자식들을 만나는 것도 다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금생에 우리가 할 일은 념염상시 참회(懺悔)라, 항시 참회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십선업(十善業)만 닦았어도 천상 들어가서 우리 인생고(人生苦)는 받질 않을 것인데, 그 인간 정도 밖에는 못 살았으니까 사람 몸 받아 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업이라는 것은 우리 의지에 따라서 짓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금생에 우리가 그 과거세에 지은 업으로 해서 과보로 해서 인생고를 한도 끝도 없이 지독한 고(苦)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마음 따라서 우리 의지 따라서 우리가 바로 도업(道業)을 지으면 됩니다. 선업(善業)을 지으면 됩니다. 도업이라는 것은 일체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님뿐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다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도업을 짓는 것입니다.
선업은 우리가 자기나 남을 위해서 착하게 사는 것이 선업 아닙니까. 선업 지으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10가지 십선업 지으면 그때는 틀림없이 천상 태어납니다. 그러한 그 백천 겁 동안을 우리가 흘러간다 하더라도 한번 지은 업은 절대로 소멸이 안 됩니다. 우리가 꼭 다 받아야 됩니다. 따라서 지금 고생을 받는 것은 지금 현세 인생고를 받는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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