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법이란 것은 우주의 생긴 모습 그대로 우리 마음의 그 본래 실상 그대로 말씀한 법문입니다.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모든 존재의 참다운 성품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우리 중생이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본래로 불교 말로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끝도 갓도 없이 끝도 갓도 없는 그런 과거로부터서 또는 현재를 거쳐서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자체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왜 진여라고 하는가 하면은 허망 되지 않고서 사실이라 말입니다. 진실하니까 참 진(眞)자를 썼고 또는 같을 여(如)자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서 항상 존재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항상 존재하는 여여히 존재하는 그 생명이라는 뜻으로 해서 같을 여(如)자를 넣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여래(如來)라, 여래는 바로 부처님을 의미 하지 않습니까, 여래라, 여래는 이것은 그 진리 그대로 깨달으신 분이 바로 부처님인데 여래란 말입니다, 여래라!
진리에 조금만 흠결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여래가 못 되겠지요. 진리 그대로 깨달으신 분이 여래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여래가 어디에만 깨달으신 그런 성자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나 우리 마음에나 어디에나 그 여래 부처님이 존재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시이래로 본래로 진여불성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 말씀은 진여불성이 어디 부분적으로 어디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온 천지에 빈틈도 없이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와 더불어서 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할 때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그런 화신불(化身佛) 모양으로 나투신 부처님은 우리가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고 알 수가 있지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언제나 머물러 계시는 참다운 부처님 참다운 부처님더러 그때는 법신 부처님이라 합니다. 법신 부처님이라! 아까 우리 주지 스님께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축원 때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은 제불 보살의 가피(加被)로 그렇게 축원을 다 하는데 우리 주지 스님께서는 갖추갖추 그 법신불도 다 들먹여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 삼신(三身) 부처님의 가피로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편안하게 안온을 기원한다는 그런 뜻으로 축원하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법신 부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존재하는 영원한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깨달으신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모두가 다 법신 부처님이라 하는 우주의 생명자체를 깨달으신 분들이란 말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도 역시 공부를 잘못해서 아직은 온전한 부처님이 다 못됐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또는 그 법신부처님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이렇게 알으셔야 그래야 참다운 우리 신심(信心)이 됩니다. 내 마음 밖에 어디 가서 부처님이 따로 있다. 이러면 그때는 불법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설사 지금 욕심을 부리고 우리 마음이 한치 앞도 못 보는 그런 아주 폐쇄된 그런 마음이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은 부처님과 똑 같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잘못 생각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해서 스스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허물은 우리가 잘못 살아서 보지를 못하는 것이지 우리한테 본래로 갖추어있는 그런 그 부처님 법신 부처님은 똑 같습니다. 그러면은 법신부처님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 몸의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뇌나 뇌세포에 가서 어디 가서 부처님이 계시겠지? 보통 우리 마음이나 의식, 우리 의식 활동 같은 것이나 그런 관념형태도 역시 우리 뇌세포의 조작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법은 그렇게 서투러운 설법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이것은 뇌세포나 심장 어디에 가서 부분적으로 국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몸 전체가 그 불심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잘못 살아서 더러 암도 걸리고 심장병 걸리고 그렇게 우리 몸이 그때그때 병고(病苦)로 시달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몸이라 하더라도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은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그 불성 부처님 성품 그 법신 부처님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조금 여러분이 납득하시기 곤란하니까 제가 부연해서 좀 말씀해 드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몸뚱이 이것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각 원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한 것이 우리 몸뚱이 아닙니까. 우리 마음은 금생에 우리가 느끼고 또는 상상하고 또 그리고 의욕도 하고 분별 시비하고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구성한 것은 아예 모양이 없으니까 우리가 인제 생각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몸뚱이를 구성한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물리학을 좀 배웠으니까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은 원래 무엇인가? 그런 것은 내내야 각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어떻게 모여 있는가에 따라서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의 구분이 있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알 수 없는 하나의 에너지,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자가 말 한 것입니다.
가장 미세한 그런 가장 미미한 그런 전자나 양성자나 그런 것은 어느 물질이 있어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서 그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아닌 에너지 이른바 우주의 기(氣) 우주의 기가 어떻게 진동 하는가 어떻게 운동 하는가 그런 그 운동 상태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또는 양성자가 되고 다 그런다는 것입니다. 기(氣)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이렇게 분석하고 들어가서 보면 나중에는 하나의 우주의 기만 남는단 말입니다. 이른바 에너지만 남는단 말입니다.
에너지 불멸이라, 즉 현대 물리학은 에너지 불멸이라, 그 우주의 기 에너지는 그때는 불멸이라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 양이 조금도 줄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현대 물리학의 결론입니다. 기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 몸뚱이나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끼고 있는 다이아반지나 그런 것도 이것이 원래 본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 우주의 기 우주의 에너지의 하나의 진동, 진동 따라서 운동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낸 것이 또 그것들이 모여서 이른바 금이 되고 은이 되고 인제 다이아몬드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 일체유위법은 모양이 있는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일체유위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이 모양이 있는 이 현상적인 존재, 상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이것은 꿈이요 허깨비요 다 그림자란 말입니다. 그 무슨 형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분명히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림자 자체 그것은 있는 것 같지 만은 사실은 있지 않단 말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그런 허상(虛像) 이것이 분명히 거울에 자기 모양같이 비추기도 하고 다른 또 아주 미운사람 비추면 또 미웁게 보이기도 하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헛된 허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자(聖者)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중생이 봐서는 내 몸 이대로 반드시 있고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고 금이면 금이고 그러겠습니다 만은 성자들은 우주의 순수한 상태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우주의 기 어디에나 충만 돼있는 우주의 에너지를 성자는 바로 감득(感得)한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은 에너지뿐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이상은 모릅니다. 왜 모르는고 하면은 현대 물리학은 증명이 안 되는 것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허나 성자는 증명이 안 되는 그러한 순수 생명 자리도 성자는 충분히 다 감득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에너지 그것이 그냥 보통 에너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그 자체가 바로 광명이 충만한 우주의 생명의 빛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相無相) 모든 존재를 구성한 근본적인 것이 이것이 바로 에너진데 에너지의 그 정체가 바로 불성(佛性)이고 불심(佛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면은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불성과 불심으로 충만 돼있습니다. 불성과 불심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그런 찬란한 광명의 바다위에서 잠시간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진여연기(眞如緣起)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것이 본래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그런 자리로 부터서 이 만유(萬有)가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만유가, 이것이 대승연기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나나 못나나 잘 생기나 또는 고체나 또는 액체나 이 공기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근본이 돼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진여불성이 근본이 돼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치는데 높은 파도 낮은 파도가 있겠지요. 그 파도가 똑 같은 다 물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 같이 그 진여불성 이라하는 그 광대무변한 우주법계(宇宙法界)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 하늘에 있는 태양계(太陽系)요 또는 지구(地球)요 나요 너요 하기 때문에 어느 것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납득이 가시겠습니까? 어느 것도 진여불성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러지만은 그 근본바탕 진여불성을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자라 말입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주만유의 근본성품,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체험했단 말입니다. 체험 못 하면은 그때는 우리보통 범부가 되겠지요.
그러나 참선(參禪) 염불(念佛)을 많이 해서 그래서 우리 마음의 업장(業障)이 녹아져서 모든 습기(習氣)가 다 녹아서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또는 정통조사 같이 우주 만유의 근본 자리를 체험(體驗)했단 말입니다.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36 (0) | 2021.12.13 |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35 (0) | 2021.12.06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33 (0) | 2021.11.22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32 (0) | 2021.11.15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31 (0) | 2021.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