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人生)이 허망(虛妄)한 것인데 허망한 인생 가버리기 전에 우리가 힘을 얻어야 됩니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이른바 득력(得力)이라. 득력이란 것은 우리 공부가 행습(行習)이 돼서 다른 삿된 것이 거기 낄 수가 없이 오롯이 이렇게 물이 흘러가듯이 흘러가는 것이 이른바 득력이란 말입니다. 기왕 불교를 믿으면 또는 불교를 믿는 것이 참다운 자기를 찾는 길이고 참다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하면은 그보다도 더 위대하고 급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길은 또 우리가 어디서 누구한테 빌려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른바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은 소를 타고 소를 지금 찾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모를 때는 자기가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는 것을 모르지만은 그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어디가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고 우주(宇宙)의 본바탕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은 소를 타고서 지금 소를 찾는 것이나 똑같은 이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다가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한테 갖추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얼마만치 우리가 습관적으로 우리 마음을 훈련을 시켜서 그 부처님 공부가 계속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단 말입니다.
다 그렇게 돼 놓으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이 흘러가듯이 인제 공부가 흘러간단 말입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머리도 시원해지고 말입니다. 판단도 명석해지고 동시에 하늘에서는 또 그 알 수 없는 신묘(神妙)한 그런 멜로디가 흘러나온단 말입니다. 인생이란 것은 그 여기나 저기나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제대로 그것을 발견을 못 한단 말입니다. 참선(參禪)하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 최상(最上)의 지상의 위없는 길이라고 하면은 위없는 그런 참선의 길을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축복(祝福)입니다.
만약 참선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의 최상의 행복(幸福)을 우리가 놓치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른 종교(宗敎)도 다 숭상을 합니다. 숭상을 하나 우리가 아무리 우리 불교(佛敎)를 겸허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우리 불교는 다른 모든 종교를 다 포함해 있습니다. 지금 이 현대란 사회가 참 그야말로 아주 과학만능시대(科學萬能時代)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더구나 지구촌이고 또는 세계화 시대고 여러가지 그런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만은 이러한 그 복잡다단한 때라 놔서 이런 모든 세계(世界)의 문화현상을 다 우리가 아주 포괄해서 말입니다. 하나의 체계로 딱 묶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할려고 생각할 땐 불교 아니면 그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불교 가운데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나 또는 이슬람교나 그런 세계적인 종교도 다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씀하시는 그런 일신교(一神敎)도 역시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슬람교 일신교도 역시 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철학(哲學)도 가사 그야말로 실존철학(實存哲學)이나 또는 이른바 분석철학(分析哲學)이나 어떠한 철학도 그 체계가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부처님 법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은 어느 부분만 말씀하신 것인데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를 다 원만무결하게 원융(圓融)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우리 불자님들이 지금 불교를 공부 않고 다른 것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우선 그 다른 것을 보다 더 훌륭하게 성취를 시키기 위해서라도 불교를 해 두면은 굉장히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러한 그 보배의 우리가 곳집을 마다고 해서는 자기 인생의 큰 손해입니다. 그러기에 불교(佛敎)를 믿는다는 것은 불교를 믿는 그것이 그보다도 더 큰 축복(祝福)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 하는 사람들이 불교가 그렇게 여러 가지로 해서 공덕(功德)이 많다 하더라도 불교를 공부하려면 그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 한문(漢文)자 일일이 다 배워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다 우리가 독파(讀破)하려면 어렵겠지요. 저 같은 사람도 몇십 년 동안 불경(佛經)을 했다 하더라도 팔만장경 다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자로 해서 그런 교리로 해서 할라고 들면은 그때는 그거는 안 되는 것인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참선 하나 염불 하나 불성이란 그런 관념을 그런 개념을 절대로 놓치지 말으십시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인다 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그 애쓰고 외우면은 우리한테 부처님이 우리를 도와서 가피(加被)를 주신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염불(念佛)은 이것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본래로 부처고 이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때는 염불선(念佛禪)이란 말입니다.
또 더 풀이해서 말씀드리면은 같은 염불이나 또는 다른 공부나 말입니다. 다른 공부나 간에 모두가 다 모든 공부가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참선이라는 것은 부처님 성품을 부처님 법을 우리가 깨닫는데 있어서 가장 최상의 길이라고 하면은 그런 최상의 길인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도 역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본바탕을 떠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바탕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안 떠나고 우리가 공부한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疑心)해서 나한테 갖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이렇게 의심을 한다 하더라도 그 본래면목자리 본래 우리 불성(佛性)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불성 자리를 우리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도 역시 훌륭한 참선법(參禪法)이 됩니다.
아까도 얘기 한 바와 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 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우리가 외인다 하더라도 막연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많이 외이면은 그것도 공덕(功德)은 공덕이지 만은 그것만으로 해서는 참선(參禪)이 못 된단 말입니다.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그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고 내 본래(本來) 마음이 본래로 바로 부처님이다.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염불(念佛)을 해야 그래야 이른바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너무 말씀을 많이 드리면은 또 외시기도 곤란스럽고 하실 것입니다. 한데 아까도 이 말씀마따나 인제 불교(佛敎)는 정말로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왜 쉬웁는가 하면은 없는 것을 억지로 구하는 것도 아닌 것이고 있는 그대로 또는 우주의 궤도를 그대로 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장차는 다 부처가 돼 갑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길이 바로 우주(宇宙)의 정다운 궤도입니다. 부처가 안 되는 것은 우리가 궤도를 이탈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궤도, 궤도에 진입해서 궤도를 따라 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삿된 것이 침범을 못 합니다. 우리가 재수나 운수나 모든 것이 나한테 빨리 와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먹을 때도 그 부처의 길을 제대로 따라서 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재수나 운수나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한테 최상으로 인도하는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參禪)하는 법을 제가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제 말씀을 끝맺겠습니다.
참선하는 법은 이것은 최상(最上)의 성불(成佛)하는 지름길인데 한 가지 법(法은) 그 어느 문제를 의심(疑心)으로 풀어가는 말입니다. 의심으로 풀어서 우리가 본체(本體)를 놓치지 않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놓치지 않는 그런 의심을 주로 하는 법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의 그런 참구(參究)하는 법이고, 또 한 가지는 화두공안이 없이 잠자코 명상적으로 말입니다. 마음을 비추어서 명상적으로 우리가 관조해 나가는 그런 법이 이른바 묵조선(黙照禪) 법인 것이고, 그리고 한 가지는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본래 부처고 우리가 본래 또 부처이니까 인제 반드시 앞으로도 부처가 돼야 되겠지요. 부처가 부처 되기 위해서 부처님을 순간 찰나도 놓치지 말고 원칙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지금 놓치고 산단 말입니다.
순간 찰나도 부처를 놓치지 않고서 그 진여불성(眞如佛性) 그 불성을 온전히 우리가 느끼고 찾고 그런 그 불성을 그대로 보존해서 부처가 바로 되어 간단 말입니다. 이른바 염불참선(念佛參禪) 세 가지 법이 있단 말입니다. 세 가지 법 가운데서 여러분들께서 그때그때 생각을 많이 해서 나한테는 대관절 어떠한 것이 가장 맞겠는가? 내 성질이 감성적(感性的)인가? 내 성질이 그야말로 이지적(理智的)인가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해서 역시 감성적이고 정서가 풍부한 분들은 생명(生命)을 생명으로 구하는 그런 참선법이 이른바 염불참선법(念佛參禪法)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리가 불성(佛性) 그러면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님 성품인 것이니까 인격적으로 생명(生命)을 생명으로 구하는 법은 이것은 역시 염불 참선법이고 말입니다. 또는 그 화두로 해서 의심으로 풀어나가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추구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이른바 이지적인 말입니다. 지성적인 그런 쪽으로 인제 나가니까 인제 쉽겠지요. 따라서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이른바 철학적(哲學的)으로 탐색해 나가는 이지적인 그런 법도 좋겠지요. 아무튼 세 가지 법 가운데서 여러분들께서 재량하셔서 스스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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