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자님들 확실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적인 문명을 자랑하면서 그 물질을 쪼개고 쪼개가지고서 종당에는 다 하나의 우주(宇宙)의 기(氣)인 에너지만 남는 것인데 그 에너지의 참다움은 무엇인가. 참다운 정체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르는데 부처님 가르침만이 참다운 모양을 안단 말입니다. 이른바 본체(本體)를 안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정체가 불교(佛敎)로 하면은 이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은 진여불성(眞如佛性)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뜻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말한 사람들이 남한테 보시(布施)하고 또는 사회사업을 하고 그런 것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실천 적인 행동의 하나는 되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모든 존재(存在)가 근원적으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걸 모르면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모든 존재(存在) 내 생명(生命)이나니 생명(生命)이나 물질이나 뭣이나 모든 것이 근본 바탕이 이것이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와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어디가 아프나 또는 우리 몸에 있는 폐 균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이 폐 균이나 암 균이나 그런 것은 이 인간들이 인간들 두뇌로 해서 잠시간 좀 부조화(不調和)스러운 하나의 그런 상태가 무슨 암 균이요 또는 폐 균이요 하는 것이지 그런 것도 역시 그런 부정적인 것도 역시 근원은 똑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것은 이것은 우리 사람 눈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다만 우주(宇宙)의 본질(本質)로 해서 언제 어디에나 하나의 가장 작은 알갱이라 하는 이른바 광자(光子) 빛 광(光)자, 아들 자(子)자, 광량자(光量子) 말입니다. 우주(宇宙)의 아주 그 작은 것 보고 소립자(素粒子)라 하지 않습니까. 소립자라. 그 소립자(素粒子)가운데서 또 가장 작은 것이 이른바 빛 광(光)자, 아들 자(子) 자, 광량자(光量子), 광자 그럽니다.
헌데 그런 광자를 볼 수 있는 것은 이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인데 그 광자가 대체로 뭣인가? 이러한 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모릅니다. 왜 모른고 하면은 벌써 광자를 벗어난 저쪽 세계는 그것은 순수(純粹)한 생명세계(生命世界)란 말입니다. 생명세계(生命世界)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세계란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세계는 이것은 생명(生命)의 세계기 때문에 물질적(物質的)인 그런 측정으로 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인간의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경험을 초월(超越)한 세계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것은 이것은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우리 생명(生命)의 근본 바탕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存在)의 근원(根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가 깊이 되면 깊이 될수록 우리는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차근차근 가까워집니다. 공부를 않고서 우리 마음이 흐리멍덩한 사람들은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거리가 멉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생(今生)에 나와서 그 보람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우리가 차근차근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과 접근하는 길입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뭘 많이 한다 하더라도 또는 명상(瞑想) 생활로 해서 제법 깊은 명상(瞑想)을 좀 했다 하더라도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모르고 하는 것과 알고 하는 것과는 천지(天地),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간다 하더라도 길의 순서라든가 그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서 목적지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과 우리가 추구(追求)하는 마음이 있어가지고 길을 간다고 생각할 때는 훨썩 발걸음이 가벼울 것이지요. 그러나 목표의식(目標意識)도 별로 없이 덮어놓고 길을 간다고 생각할 때는 아, 팍팍하고 또는 길도 더디고 나중에 가다가 또 말아버린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인간도 역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르침 따라서 우리 현재는 미처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근본 생명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알고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은 정말로 축복된 인생이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하루 살면 산만치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가까이 간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이것은 원래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생명존재(生命存在)기 때문에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름도 없습니다. 이름도 없는 것을 부처님께서 그 진리(眞理) 이름에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알맞은 이름을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가르쳐 주셨단 말입니다. 그 이름이 이른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만 해도 좋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해도 좋고 다 좋습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생명(生命)의 근본(根本) 자리, 생명(生命)의 실상(實相) 자리, 그런 자리를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이름도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는 부처님의 원력(願力)과 자비심(慈悲心)으로 해서 그 이름을 지어서 우리한테 주셨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를 빼고 그냥 아미타불(阿彌陀佛)만 해도 좋습니다. 세상이 하도 바쁘니까 참선(參禪)을 좋아한 사람들은 귀의(歸依)한다는 나무를 빼고서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렇게 불러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든 간에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우리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자리 이름이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한 번 외이면 그냥 그것이 아무런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막대한 이익을 준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어느 때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깊은 내용과 깊은 즐거움과 말입니다. 동시에 깊은 우리한테 이익을 줍니다. 성자(聖者)의 가르침은 그와 같이 꼭 우리한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그냥 보통 우리가 마음만 좋고 좋은 복이 좀 오고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깊은 뜻과 깊은 행복감과 말입니다. 또는 우리한테 막대한 막중한 그런 이익을 줍니다. 참다운 신앙(信仰)은 꼭 그래야 됩니다. 우리한테 기쁨과 또는 행복 (幸福)과 이익(利益)을 준단 말입니다. 그 반대로 진리(眞理)가 못되는 것은 우리한테 가시 같고 또는 우리 살이 곪아서 터지는 종기나 같고 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생의 근본생명(根本生命)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대명사(代名詞)가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한 번 외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눈에 보일 때는 그때는 별로 흔적이 없겠지요. 무슨 어떠한 증상이 안보이지만은 우리가 한 번 외이면 외인만치 우리 생명(生命)의 빛은 더욱더 빛나는 것입니다. 사람도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 제한된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별로 변함이 없지만은 한 번 좋은 생각하면은 ‘남을 내가 도와야 되겠다. 남한테 뭘 베풀어야 되겠다.’ 한 번 좋은 생각하면은 좋은 생각 한만치는 우리 몸이 더욱더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더욱더 맑아지고,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인 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이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바로 내 생명(生命)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생명(宇宙生命)의 근본인지라 한 번 외이면 외인만치 그만치 우리 몸이나 우리 마음이나 광명(光明)으로 빛난단 말입니다.
지금 나쁜 나찰 귀신(鬼神)이 우리한테 와서 병도 줄라하고 우리를 또 나쁜 길로 인도 할라고 한다 합시다. 그러는 경우도 속으로 자기가 그냥 소리 내서 하기가 곤란스러우면 속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렇게 지성(至誠)으로 외인다고 생각할 때는 그 광명(光明)에 눌려서 그 광명(光明)에 질려서 나쁜 존재가 우리한테 침범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행복(幸福)은 먼 데가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간단한 가장 쉬운데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 제 말씀마따나 그냥 보통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한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고 우리한테 이익을 준단 말입니다.
오늘 부처님오신 날 우리 불자님들 이렇게 참 좋은 계절에 얼마나 행복스럽습니까. 우리가 많은 종교(宗敎)가 있고 이 다종교사회(多宗敎社會), 다종교 사회는 참 살기가 어려운 사회 아닙니까. 한 가정도 기독교인, 불교인 모다 한 번에 모여서 살면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그런 사례도 많단 말입니다. 자기는 불교(佛敎) 믿는데 자기며느리가 또 기독교(基督敎) 믿는 집안에서 와 가지고서 한사코 그 쪽만 믿을라고 하는 집안도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아내와 남편도 역시 종교(宗敎)가 다른 분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大統領)되신 분도 역시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분은 가톨릭을 믿고 있고 아내는 또 개신교 믿는단 말입니다. 그런 집이 한두 집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때는 꼭 모두를 다 포괄해서 하나의 진리(眞理)로 통합(統合)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필요 한데 통합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 외에는 없습니다. 제가 승려(僧侶)라 그래서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사 하느님은 어떠한 것인가? 또 부처님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 모든 어려운 개념(槪念)들, 그런 개념(槪念)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만이 풀린단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란 것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저 하늘에 계시는 어떤 창조주(創造主)다. 이렇게만 생각해 버리면 안 풀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누구나 똑같이 모두가 다 나무나 뭣이나 똑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이루어졌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核心)인데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표현은 좀 다르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으로 하면 다 풀려간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우리가 뜨거운 화롯불에다가 한 줌의 눈을 넣으면 그냥 녹아 버리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 속에다가 부처님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르침 속에다가 모두는 다 본래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조금도 차별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 가르침 속에다가 다른 것을 집어넣는다고 생각할 때는 다 그리 해소가 돼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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