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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44.

 

 

 

참선(參禪)한 사람들은 참선만 꼭 해야 그래야 성불(成佛)을 한다. 또 경()을 많이 보는 사람들은 이론체계(理論體系)도 없이 참선만 했다가는 그때는 어두운 구렁에 빠진다. 이렇게 말도 하고 또 염불(念佛)한 분들은 우리가 금생에 부처님 명호, 부처님의 원력을 믿고서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금생에도 염불삼매에 들 수가 있고 또 내생(來生)가서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우리가 태어난다. 그보다도 더 좋은 길이 어디가 있겠는가. 이렇게 또 생각한단 말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도 저는 이러한 이른바 법집(法執)이라. 어느 법만 옳다고 주장하는 법집을 지양(止揚)을 시키기 위해서 제가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법집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선은 우리 마음이 열리지가 않습니다. 어째서 마음이 열리지가 않을 것인가. 우리 마음이란 것은 지금 현재는 별로 마음이 신통치 않는 마음일란가 모르지만은 우리 마음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은 한도 끝도 없는 시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生命)자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마음이 얼마나 넓은가? 내 마음이 기껏해야 이 몸뚱이에 들어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겠지요. 부처님 법은 마음을 깨닫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은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제한(制限)을 할 수가 없고 규정(規定)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몸에 있다든가 내 몸 밖에 무슨 몇 킬로라든가 어떤 범위가 있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허공(虛空)같이 끝도 갓도 없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상뿐만 아니라 끝도 갓도 없는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불교우주관(佛敎宇宙觀)은 삼천대천세계 아닙니까. 불교 우주관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 같은 그런 세계가 또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펼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은 그와 같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주의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끝까지도 우리 마음은 다 그대로 미쳐있습니다.

 

따라서 무량무변의 허공 세계가 바로 우리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이 넓은 마음인데 우리 중생들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업을 짓고 금생에도 업을 지어서 우리 마음을 축소를 시켰단 말입니다. 내 마음은 이것은 몸뚱이에 든 것이 아닌가? 자기 마음이 자기 몸뚱이에 들었다고 생각하면은 평생(平生)동안 자기 마음을 폐쇄(閉鎖)하고 자기 마음을 딱 가둬놓고서 해방(解放)을 못 시킨 사람입니다.

 

내 마음을 내 몸뚱이에 국한(局限)시킬 때는 그때는 자연적 (自然的)으로 욕심(慾心)이 나오고 진심(嗔心)이 나오고 치심(癡心)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삼독심(三毒心)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모든 존재(存在)에 있어서 마음을 열어서 우주의 근본 생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 뿐인 것이지 좋은 것에 대해서 욕심내는 탐욕심이나 또는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진심(嗔心)을 내는 성내는 마음이나 그래서 마음은 더욱 어두워지는 어리석은 마음을 제거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어떤 것이 어리석은 마음인가? 우리 마음은 본래로 헤아릴 수 없이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한 무량무변의 것인데 우리 마음은 제한 돼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심(無明心)입니다. 무명심이라, 무지무명(無智無明)이라. 무지나 무명이 나 똑같은 뜻입니다. 없을무()자 밝을명()자 밝지 않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본래로 밝아서 천지우주(天地宇宙)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그와 같이 끝도 갓도 없는 마음이 바로 부처 불()자 마음 심()자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불심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본래 성격은 바로 불심입니다. 부처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각 종교라는 것은 어째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인간존재라 하는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한정돼 있으면서도 무한(無限)을 구한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을 구합니다. 힘도 한정되고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아는 것도 한정되고 중생심(衆生心)이라는 것이 자기 몸에 갇혀 있다는 그런 좁은 맘을 가지면서도 또 마음 구석에서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세계를 동경도 하고 흠모하고 추구를 합니다.

 

본래가 한도 끝도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어떤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스스로 그때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런 것을 구한단 말입니다. 지혜(智慧)도 한도 끝도 없이 다 알고 싶고 자비(慈悲)도 그렇고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 중생들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면에 있어서 한도 끝도 없이 다 알고 다 하고 싶고 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다 알고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정다웁게 나가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면은 또 부작용이 생깁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량무변한 허공 같은 것인데 다만 허공같이 텅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는 한량없는 성품공덕(性品功德)이 가득차 있단 말입니다. 지혜로운 면으로 보나 또는 자비로운 면으로 보나 또는 능력 있는 면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무한의 가능성 무한의 에너지가 거기에는 충만해 있습니다.

 

정말로 내 마음, 내 마음이 우리 주인공(主人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참말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세상에 무서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래 죽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불사신(不死身)이라.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은 이것은 과거에 태어난 것도 아닌 것이고 금생에 태어난 것도 아닌 것이고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처음도 끝도 없이 항시 존재하는 생명 자체란 말입니다.

 

또는 그 마음은 내 마음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내 마음도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고 또 김이라는 사람 마음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 마음도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널려 있고 저 사람마음도 그럴 것이고 모든 중생(衆生) 마음이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서로 이렇게 충돌하고 서로 갈등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란가 모르겠습니다만은 모양이 없어놔서 갈등(葛藤) 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이 아까 말씀마따나 바로 부처 불()자 마음 심()자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정말로 조작도 되지 않고 조금도 흠도 없는 진실한 자리기 때문에 진여(眞如). 참 진(), 같을 여()자 진여(眞如) 그럽니다. 진여란 말입니다. 진리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처 불()자 마 음심()자 불심이란 말이나 또는 진여라는 말이나 또는 법 법()자 성품 성()자 법성(法性)이란 말이나 법 법()자 몸 신()자 법신(法身)이란 말이나 또는 참 진()자 나 아()자 진아(眞我)라는 말이나 진아라. 참 나란 말입니다. 큰 대()자 나 아()자 대아(大我). 우리 중생들 나는 이것은 자기 몸을 자기로 밖에는 모르는 정도니까 이것은 소아(小我)란 말입니다.

 

그러나 본래 참 나는 이것은 큰 대 ()자 나 아()자 끝도 갓도 없이 우주(宇宙)에 충만해 있는 참나 이것은 대아(大我)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참나기 때문에 참 진()자 나 아()자 진아(眞我) 그럽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는 진아를 깨닫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깨닫는 방법도 아까도 제가 허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저 남방불교에서 배우는 분들은 비파사나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비파사나도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 법문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그때그때 중생의 정도에 따라서 거기에 상응(相應)된 법문(法文)이기 때문에 차원이 좀 낮고 차원이 높고 한다는 그런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문은 방편설(方便說)이 있어서 본래 생긴대로 중생의 그릇이 더 확실하고 중생이 영명하고 또는 차원이 높은 사람한테는 조금도 에누리 없이 사실 그대로 말씀을 하시지 만은 중생의 차원이 낮아 놓으면 높은 고도한 법문을 해도 알 수가 없겠지요.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다음에 맨 처음에는 화엄경(華嚴經)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화엄경은 그것은 조금도 가감(加減)하지 않고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법문이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을 말씀하시니까 천상(天上)사람들이나 또는 제불보살(諸佛菩薩)이나 신장(神將)들은 다 알지만은 일반 중생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걸음 물러서서 아함경(阿含經)이라. 중생의 그릇에 맞게 시리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비파사나 남방불교 에서 하는 그런 비사파나 이것은 정도가 낮은 중생한테 부처님께서 초기에 하신 그런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법문도 굉장히 위대한 법문입니다.

 

우리가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 부처님 말씀은 설사 쉬운 법문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깊은 말씀도 다 함축이 돼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을 신뢰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해서 법문을 듣는다고 생각할 때는 차원이 낮은 법문을 듣고도 그냥 즉시에 깨달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법문을 좋다 궂다 함부로 절대로 시비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왕이면은 전체적으로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런 법문을 들으면 훨썩 더 이해도 하기가 쉽고 또는 더 빨리 마음을 통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한된 시간에 이런 말 저런 말 구구한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원통적(圓通的)으로 전부 다 합할 수 있는 그런 말씀만 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우리 불자님들은 어느 누구나가 신라 때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이나 고려 때 대각국사나 보조국사나 이런 분들을 다 숭앙(崇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분들을 우리가 왜 숭앙하는가? 이 분들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 원만스러운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어디에 절대로 치우지지 않았습니다. 꼭 참선만 해야 된다. 그것은 안 된다. 꼭 염불만 해야 된다. 이렇게 한 가지를 치우지게 말씀을 안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언제 본다 하드라도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이나 또는 대각국사나 보조국사나 서산스님이나 그런 분들은 다 훌륭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또 현대란 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종교사회기 때문에 기독교 믿는 사람이 내 며느리가 될 수가 있고 말입니다. 또는 자기 친지도 될 수가 있고 지금 그런 때 아닙니까. 한국은 기독교인의 수가 훨썩 많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런 기독교에 대해서도 우리가 관용적으로 진리 면에서 그렇게 다 포용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바로 살 수가 없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