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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50

 

 

우리 중생(衆生)들은 본래 있는 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자기 업()대로 본단 말입니다. 유명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똑같은 물을 우리가 상대할 때도 물은 우리 중생들이 먹는 것이 물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귀신(鬼神)은 물을 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물을 피로 본단 말입니다. 고기는 또 물을 자기가 사는 집으로 본단 말입니다. 천상(天上) 사람들은 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천상 사람들은 영롱한 구슬로 봅니다. 영롱한 보배로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은 물을 신묘(神妙)한 불성(佛性)으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은 지금 착각(錯覺)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이 본다는 것은 자기 업()의 거울로 본단 말입니다. 업의 거울로 보는 것이지 사실 있는 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 이것이 사실로 보는 거란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실상 대로 있는 것입니다. 생긴 그대로가 이것이 즉 말하자면 부처님의 견해로 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조금도 가림이 없이 하나의 불성으로 본단 말입니다.

 

유명한 유마경이 있습니다. 유마경은 우리 거사님들 재가불자 거사님들을 위해서 설해놓으신 아주 심오한 경전인데 그 유마경 가운데 가서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들 입(), 아니 불(), 두 이()자 모든 것이 둘이 아니고 분열돼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법()이다. 하나의 법으로 들어가는 그 법문이 입불이법문입니다. 입불이법문인데, 우리 중생들은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나누어서 보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바로 보시는 참다운 혜안(慧眼) 참다운 부처님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 다 하나로 본단 말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하나로 보는 견해를 자기가 모른다고 그래서 인정하는가, 않는가,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될 수가 있을 것인가. 꼭 자기 견해(見解)대로 자기가 대학(大學) 나왔으면 대학교 나온 자기 지식(知識)대로 그렇게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우리 불자님들은 업장이 다 가벼운 분들입니다. 따라서 부처님말씀 그대로 믿으셔야 됩니다. 자기 교양(敎養)은 그렇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거짓말 하실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금강경(金剛經)에도 있는 바와 같이 여어(如語).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 하시고 또 진어(眞語)라 부처님 말씀은 참다운 진리만 말씀하시고 또는 불이어(不異語)라 부처님 말씀은 그 헛된 말씀이 없단 말입니다. 또 부처님 말씀은 불광어(不迋語)라 우리 중생(衆生)을 속여서 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정말로 온전히 그대로 인정하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信仰)은 그래야 신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 말씀에 우리가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의 그 좁은 소견대로 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소견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소견을 따르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입불이법문이라. 그 우주(宇宙)를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란 분은 위대한 도인(道人)인데 그 분은 일자무식(一字無識)입니다. 그분은 공부를 전혀 안했습니다. 그러나 도()를 깨달아 놓고 보니까 우주(宇宙)가 훤히 보인단 말입니다. 우주가 말입니다. 우주가 훤히 하나의 생명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양반한테 법문을 들으러 수천 명이 모여드니까 육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들 먼데서 나 같은 사람 법문을 들으러 이렇게 많이 올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문은 제일 간단하니까 꼭, 꼭 이번 한번만 듣고서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부처님 법문은 제일 간단하고 가장 확실한 명백한 가르침인 것이니까 여러 분들이 꼭 믿어 버리면은 다시 나한테 두 번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저 같은 사람 말씀이라도 저는 제가 지어서 하는 말은 절대로 않습니다. 부처님말씀을 저는 그대로 옮김니다. 따라서 저한테 다시 안 오시더라도 부처님의 간단명료한 말씀은 꼭 그대로 신인 하시고 바른 신앙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러면 사실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 말씀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심즉시불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심작시불(心作是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를 다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그와 같이 위대한 부처님하고 대비해서 호리도 차이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이조 혜가스님한테 하신 법문도 마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이신 것 입니다. 이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를 시켜주십시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그러면 그대 불안한 마음을 한 번 내 놔봐라. 내놔보면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시게 해주마. 그래 혜가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불안한 마음이 어디가 있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 인단 말입니다.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디가 아프면은 그 아픈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면은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남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가 따로 있습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모양도 없고 남 미워하는 마음도 모양도 없고 그 똑똑한 척하는 마음도 모양도 없고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고 한도 끝도 없는 모두를 구한단 말입니다.

 

그 아인슈타인 같은 대천재도 내내야 마음 바꿔서 천재가 되었지 자기가 무슨 참 별 사람입니까. 그런 천재적인 아인슈타인 마음하고 우리 마음하고 그러면 다를 것인가?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왜 차이가 없는 것인가? 모양이 없는 것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구분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예수마음이나 또는 맹자 마음이나 마음은 다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똑 같은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집만큼 크다, 방만큼 크다, 마음이 어디 국한되게 시리 그와 같이 크고 작은 걸로 비교할 수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들 맨 첨에 입정(入定) 삼매(三昧)에 든다고 생각할 때 ()은 허공(虛空)과 등()할새라고 그렇게 하셨지요.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마음은 사실 허공과 똑같은 것입니다.

 

허공이 한도 끝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이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성자(聖者)는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을 그대로 마음을 온전히 열어서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자리를 그대로 간직한 분이 성자인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내 마음 이것은 내 몸뚱이 어디가 무슨 내 머리나 내 심장에 있겠지 마음을 열어서 자기 마음이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사람은 지 몸뚱이도 이것도 지것이 아닙니다.

 

범부(凡夫)로 해서, 우리가 범부와 성자와 그런 구분을 한다고 생각할 때 범부라는 것은 꼭 지것, 지몸, 또는 자기 집, 자기 가정만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남한테 봉사(奉仕)를 하려고 남한테 베풀어 주십시오. 사회봉사(社會奉仕)를 하십시오. 그런 일을 우리가 권장하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결국은 자기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남한테 베풀어도 기왕 베풀어도 남 주고 자기 몫으로 조금 남겨둬야 되겠지 이렇게 돼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자란 것은 조금도 주저가 없습니다. 주저가 없으니까 주린 범한테도 순간도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몽땅 바쳐버린단 말입니다. 그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진리(眞理)를 구하기 위해서 나찰 귀신(鬼神)한테 진리의 가르침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 없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나찰한테, 나찰 귀신한테 자기 몸을 던져버렸단 말입니다. 과거전생(過去前生)의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은 그런 진리를 깨닫고자 해서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모조리 바쳐버린 그걸로 해서 12겁 동안이나, 12겁 동안을 당겨서 성불(成佛)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러 는고 하면은 아까도 제 말씀마따나 자기 몸뚱이를 자기 개인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모양을 나툰 것이지 이것이 꼭 무슨 어느 누구 것이라고 그런 소속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내 몸이나 또는 그대 몸이나 자기 남편 몸이 나 내 몸이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사람 모양을 나투었고 또 금생(今生)에 잠시간 만난 것이지 꼭 내생(來生) 가서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업장(業障)이 같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역시 그냥 또 헤어지고 맙니다. 기왕 만날라면 영원히 만나야 됩니다. 영원히 만나는 것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서 만나셔야 됩니다. 극락세계에서 만나는 것은 영원히 만나는 것입니다. 불이일체(不二一體), 우리가 업장이 같고 또 부처님 공부 잘하고 염불(念佛) 많이 하면은 그때는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순수(純粹)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임종(臨終) 때 죽어질 시에 순식간에 업장을 다 녹여버립니다. 그때는 우리가 극락세계 가서 초월(超越)해서 거기에서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얻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 말씀 요지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하나를 자기 소견(所見)으로 해서 옳다고 고집을 하지 말으시고 모든 문제를 부처님 법에 비추어서 부처님 법으로 따지면은 이런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더 어려운 말로 하면은 그 본체(本體), 본바탕 더 쉬운 말로 하면은 주체성(主體性)이라 우리 사람들이 인생관(人生觀)도 바르게 못 세우고 또는 세계관(世界觀)도 바르게 못 세우니까 함부로 덤벙거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 주체성이라, 주체성 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그냥 어느 정도 아, 소양(素養)이 좀 있으면 주체성이 있다고 보겠지요.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본래적인 부처님 정신, 본래 부처님 성품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진여불성이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 우주(宇宙)의 참다운 실상(實相), 참다운 진리(眞理)인 진여불성이라.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이 우주의 참다운 실상이란 뜻입니다.

 

그 진여불성으로 부터서 천지우주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냈단 말입니다. 모양을 냈지만은 그 모양도 역시 진여불성에서 왔 기 때문에 조금도 그때는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그 바람 따라서 파도가 천파만파 친다 하더라도 똑같은 물이듯이 산이나 냇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다 본래의 자리 본래 근원적인 바탕자리는 다 부처기 때문에 부처한테서 나왔기 때문에 나와 있는 이 모양스러운 현상도 역시 똑같이 사실은 다 부처인 것입니다.

 

사람같이 태어나고 개같이 태어나고 또는 나쁜 짓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한 악인(惡人)이라 하더라도 근본(根本)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다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좀 좋은 일 하면 저 사람은 부처한테 더 가깝고 저 사람은 그야말로 앞으로 부처가 쉽게 될 것이고 나쁜 일 많이 한 사람은 저런 사람들은 영원히 부처가 못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 본 근원(根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좋다 궂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순간적인 우리 중생의 헤아림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일매지게 천지우주가 다 불교 말로 하면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하게 모두가 다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또는 우리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온전히 없애는 그러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