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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91)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8. 궁금증 풀고 정견(正見)으로 정진(精進)하세(4)

 

 

1) 이치와 사물(理事)

 

만에 하나라도 이런 그릇된 견해를 지닌다면, 이는 공의 악마에 단단히 들러붙어, 완고한 공(演空: 이른바 無記空: 서양의 허무주의)에 타락한 것이오, 여기서부터, 인과 법칙을 전면 부정하고 제멋대로 방자히 굴기 시작하여, 범부 주제에 외람되게 성인으로 자처하면서, 불법을 파괴하고 중생을 잘못 인도하는, 아비지옥의 종자가 싹트게 된다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고 심오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 이해득실을 대강 언급하는 것이오.

 

만약 실제 이치의 본체로 논한다면, 범부와 성인, 중생과 부처, 원인과 결과, 수행과 증득 따위는 모두 얻을 수 없소. 그러나 수행 법문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여래가 위로 불도를 성취하고, 중생이 아래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모두 인과 법칙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오.

 

이치와 성품(理性)을 분명히 밝히되, 사실 수행을 내팽개치지 않는 것이, 바로 올바른 지견(正知)이오. 반대로 이치와 성품에 집착하여 사실 수행을 내팽개친다면 이는 곧 삿된 견해()가 되고 마오. 터럭 끝만한 차이가 (千里의 차이나 하늘과 땅 차이 정도가 아니라) 부처와 지옥의 차이로 금세 우뚝 갈라진다오.

 

2) 마음과 성품(心性)

 

무릇 마음이란, 고요하게 비추면서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확연히 뚫려 신령스럽게 통하고 걸림 없이 원만하게 생기발랄하며,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이 되오. 비록 미혹으로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범부 중생의 처지에 있더라도, 마음의 본바탕은 곧장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전혀 다름없이 똑같다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다만 모든 부처님은 궁극의 경지를 증득하여, 그 공덕과 위력의 작용이 철저하게 온전히 드러나고; 범부 중생은 온통 미혹과 위배(違背: 불성을 등짐)로 뒤얽혀, 이러한 공덕과 위력의 작용을 가지고 육진(六塵)의 경계 속에서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을 일으키고, 살해 · 도적 · 사음 따위의 죄악을 짓는 것뿐이오. 그래서 미혹과 죄업과 고통의 세 가지는 서로 끌어당겨 일으키면서, 원인과 결과가 끊임없이 뒤바뀌며 이어진다. 그러니 영겁토록 윤회 고해를 빠져 나올 길이 있겠소? 마치 캄캄한 방에서 보배에 부딪치면, 보배를 알아보고 쓰기는커녕, 도리어 몸만 다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오. 미혹된 마음이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 속에 뒤섞이는 것도 이와 같소.

 

여래께서 이러한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중생들이 허망에서 빠져나와 진리로 되돌아오고, 본래의 마음과 성품을 회복할 수 있도록 미묘한 법을 설하셨소. 처음에는 허망 가운데 진리를 궁구하다가, 나중에는 전체 허망이 그대로 진리가 되오. 마치 바람이 자면 물결이 잔잔해지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얼음이 녹는 것과 같소. 물결과 얼음 자체가 물이 되는 것이니, 물결이나 얼음이 물과 더불어 본래 서로 다른 새 물질이 아니지 않소? 아직 물결이 잔잔해지고 얼음이 녹기 전과, 이미 잔잔해지고 녹은 뒤를 서로 비교해 봅시다. 그 본체와 성품은 전혀 다르지 아니한데, 각각에 나투는 작용은 정말로 현격히 차이 나는 것이오.

 

그래서 후천적인 수행의 덕이 쌓여야, 선천적인 성품의 덕이 바야흐로 드러난다(修德有功, 性德方顯)고 말하오. 만약 오직 선천적인 성품의 덕에만 의지하고, 후천적인 수행의 덕에 힘쓰지 아니한다면, 미래세가 다하도록 영원히 단지 불성만 지녔을 뿐, 조금도 믿고 기댈 게 없는 중생 노릇밖에 못하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적에, 오온이 텅 빈 것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액(고통과 재앙)을 건넜다.”고 말씀하신 것이오. 무릇 오온(五蘊)은 그 전체가 바로 진여의 미묘한 마음(眞如心)이오. 다만 중생들이 처음부터 줄곧 미혹되고 등져 왔기 때문에, 허망한 모습을 이루는 것이오.. 허망한 모습이 일단 이루어지면 하나의 진여가 어두워지게 되고, 하나의 진여가 어두워지면 모든 고통이 함께 몰려들게 되오.

 

마치 바람이 불면 모든 물이 온통 물결을 이루고, 날씨가 추워지면 부드럽던 물이 금세 굳게 얼어붙는 것과 같소. 매우 깊은 반야(지혜)로 비추어 보면, 진리(佛性)를 잃어 허망(衆生)을 이루었기에, 허망 자체가 그대로 진리임을 분명히 알게 되오. 마치 바람이 멈추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물결과 얼음이 물의 본래 바탕을 회복하는 것처럼 말이오.

 

그래서 일체의 법이 모두 허망한 감정으로 말미암아 나타남을 알 수 있소. 만약 허망한 감정만 떠난다면, 그 자체가 완전히 텅 비게 될 것이오. 그런 까닭에 사대(四大 : 地水火風)가 모두 본래 성품을 잃고, 육근(六根 : · · · · · 생각)이 서로 뒤바뀌어 쓰일 수 있소. 보살이 고요한 선정에서 일어나지 아니한 채 온갖 위엄과 행동을 나타내며, 눈으로 귀의 불사(佛事)를 하는가 하면, 귀로 눈의 불사도 하는 것이오."

 

땅 속에 들어가기를 물속처럼 여기고, 물 위에 걷기를 땅 위처럼 한다오. 물에 젖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으며, 허공에 마음대로 날아다니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오. 경계란 본디 자기 성품(自性)이 없으며, 모두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변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능엄경은 "만약 한 사람이 진여를 발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若有一人 發眞歸元, 十方虛空 消獨), 고 말씀하셨소. 바로 '오온이 모두 텅 빈 줄 비추어 본다.' 는 실질 효과에 해당하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비춰 보고(廻光返照), 본래의 마음과 성품을 되찾는다(復性)는 뜻이오.

 

물론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비춰 보고, 본래의 마음과 성품을 되찾으려한다면, 먼저 마음을 삼보께 귀의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안 되오. 마음을 삼보께 귀의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할 수만 있다면, 저절로 본래 마음의 근원을 되찾고 불성을 철저히 증득할 수 있소.

 

그렇게 본래 마음의 근원을 되찾고 불성을 철저히 증득하게 되면, 바야흐로 자기 마음이야말로 미혹 속에서도 결코 줄어들지 않고, 깨달았다고 조금도 늘어나는 법이 없는, 지극한 보배인 줄 알게 되리다. 부처는 단지법성(法性)에 순응하는 까닭에 자유자재로이 내어 쓸 수 있고, 중생은 법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도리어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오. 본바탕은 하나이면서, 그 작용으로 말미암은 이해득실은 천양지차가 나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