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90)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8. 궁금증 풀고 정견(正見)으로 정진(精進)하세(3)

 

 

 

1)이치와 사물(理事)

 

사실 선종에서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치와 성품만 가리키며, 구체적인수행은 언급하지 않소. 왜 그런가 하면, 수행자들이 원인과 결과(因果), 수행과 증득(), 범부와 성인(), 중생과 부처(生佛)에 전혀 관련되지 않은 이치를 먼저 안 뒤에, 그 이치에 따라서 원인을 닦아 결과를 증득하고(修因證果),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에 들며(超凡入聖), 중생으로서 불도를 이루는(卽衆生而成佛道) 사실을, 차례로 해 나가길 바라기 때문이오..

 

불법의 큰 요체를 논하자면, 진제(眞諦)와 속제 ()의 두 도리()를 벗어나지 않소. 진제는 한 법도 존재하지 아니하고(一法不立), 티끌 하나도 받지 아니하는(不受一處), 이른바 실제 이치의 자리(實際理地)라오. 반면 속제는 갖추어지지 않은 법이 하나도 없어서, 이른바 불사의 문 안에서는 한 법도 내버리지 않는다(佛門中, 不捨一法)는 말로 대표되오.

 

교종에서는 진제와 속제를 함께 펼치지만, 대부분 속제로 말하게 되오. 반면 선종에서는 속제로 진제를 말하면서, 속제의 모습을 깡그리 쓸어 내버린다오. 그러나 진제와 속제는 본래 같은 몸으로, 결코 서로 다른 두 물건이 아님을 알아야 하오.

 

비유하자면, 크고 둥근 보배 거울이 본디 한 물건도 없이 맑고 밝게 텅 비어 있지만,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 모습이 나타나고, 왜놈이 오면 왜놈이 나타나며, 삼라만상이 모두 오면 삼라만상 모두가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오. 비록 수많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지만, 거울에는 여전히 어떤 한 물건도 전혀 없소. 또 어떤 한 물건도 없으면서, 수많은 모습이 아무 거리낌 없이 모두 나타나오.

 

선종은 수많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는 곳에서, '어떤 한 물건도 전혀 없다'는 이치만 오로지 강조하오. 반대로 교종은 어떤 한 물건도 전혀 없다'는 곳에서, 수많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는 현상을 상세히 말하는 것이 | . 이는 선종이 구체적인 사실 수행에서(事修) 추상적인 이치와 성품(理性)을 밝히므로, 구체적인 사실 수행을 결코 내팽개치지 않음을 뜻하오. 마찬가지로 교종도 추상적인 이치와 성품에서 구체적인 사실 수행을 논하기 때문에, 결국 이치와 성품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오.

 

이것이 곧 성품에 알맞추어 수행을 하고(稱性起), 수행이 온전해져 바로 성품과 같아지며 (參性), 변함없이 인연에 따르고(不變), 인연에 따르면서 변함없다(緣不變)는 경지가 아니겠소? 구체 사실과 추상이치가 모두 원만하며, 선종과 교종이 둘이 아닌 것이오.

 

염불삼매(念佛三昧)라는 것은 말하기는 쉬운 듯한데, 실제로 몸소 얻기는 정말 어렵소. 단지 마음을 추스려 간절히 염불하기를 꾸준히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저절로 얻어지게 되리다. 설사 현생에 염불 삼매를 얻을 수 없을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마음을 추스려 청정하게 염불한 공덕은, 틀림없이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확실하게 받아, 업장을 짚어진 채로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오.

 

사일심(事一心: 사실상의 한결같은 통일된 마음)도 우익(補益) 대사께서 판단하신 내용으로 본다면, 오히려 현세 수행인의 신분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리일심(一心: 이치상의 한결같은 통일된 마음)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소? 보고 생각하는 미혹(見思感)을 모두 끊어야 바야흐로 사일(事一 : 사실상의 통일)이 되고, 무명(無明)을 완전히 쳐부수고 법성(法性)을 증득하여야만 리일(理一 ; 이치상의 통일)이라 부를 수 있소, 밖으로는 범부 모습을 드러낸

 

만약 안으로 은밀히 보살행을 닦으면서 밖으로는 범부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 두 가지 일심(一心) 모두가 정말 그리 어렵지 않소, 그러나 실제로 범부 중생에 불과하다면, 사일심도 오히려 얻기가 어려운 법이오. 하물며 리일심을 얻으려고 생각한단 말이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이를 호지()하고 보임(保任)하면서 남은 업습()을 녹여 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분명히 알 것이오. 그러므로 미리 누구에게 물어 볼 필요도 없소.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 보면, 차고 뜨거움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과 같소.(如人飮水 自知.) 물을 마신 사람이 설령 100% 정확히 물의 상태를 묘사해낸다고 할지라도, 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그 물이 무슨 맛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법이 오..

 

그러니 무생법인 깨닫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여, 혹시라도 자기가 깨달은 뒤 보임(保任)과 호지(護詩)를 잘하지 못하여, 남은 업습에 다시 뒤덮이고 얻은 무생법인을 도로 잃을까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소. 진실한 무생법인은 정말로 그렇게 작거나 쉬운 게 아니오. 무명을 쳐부수고 법성을 증득하는 경지요. 최하의 경우에도, 원교(圓敎)의 초주(初住: 十住 중 첫번째 發心) 보살로, 별교()의 초지(初地)에 해당하거늘, 쉽게 말할 수 있겠소?

 

그러므로 내 글에서 말한 대로 열심히 수행하여, 정토 법문의 근본 이치를 모두 알고, 믿음· 발원 · 염불수행 (信願行)을 함께 확립하시오. 그래서 어떠한 선지식이나 이단 학설에도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매진하시오. 그런 다음에 남는 힘이 있거든, 비로소 뭇 대승경론(大乘經論)을 연구하여 지혜와 식견을 틔우고, 정토법문을 널리 펼치는 방편근거로 삼아도 괜찮겠소.

 

이와 같이만 한다면, 비록 범부 중생이라도 보살도를 행하면서, 근기에 따라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가 있소. 절대로 지나치게 높고 먼 곳에 뜻을 두려는 망상일랑 하지 마시오. 혹시라도 사실과 이치도 제대로 모르고 악마에 붙들릴까 두렵소. 나도 정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깨닫고 난 사람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은, 비록 그 수행이야 같지만, 그 마음 생각(心念)이 판연히 다르다는 것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무생법인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은, 바깥 경계가 아직 이르기도 전에 먼저 나아가 맞이하려 하고,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거기에 달라붙어 끌어안으며, 경계가 이미 지나간 뒤에는 되돌아보고 생각하기 일쑤요.

 

그러나 무생법인을 깨달은 사람은, 비록 경계가 생겨났다 사라지더라도, 마음은 전혀 생기거나 사라짐이 없소. 마치 맑은 거울에 어떤 형체가 다가와도 달라붙지 않고, 또 사라져도 흔적이 남지 않는 것과 비슷하오. 마음이 경계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과 같소. 터럭 끝만큼도 집착이나 미련의 생각이 없다오.

 

(금강경(金剛經)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으면, 얻을 수 없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마음에 집착함이 없어져, 대자유를 누리는 해탈의 불심(佛心도심(道心)과 합치되고; 무생법인을 아직 깨닫지 못하면, 과거 · 현재 ·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니, 이것은 바로 번뇌망상에 사로잡힌 중생심(衆生心)이고 인심(人心)이 된다.

 

비록 경계에 대해 무심(無心)할지라도, 무릇 세간의 윤리 도덕과 불도를 펼쳐 중생을 교화하는 일은, 반드시 하나하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실행해야 하오. 비록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걸 건너뛰려 해서는 안 되오. 경계에 대해 무심하다고 해서,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고 불도를 펼쳐 중생을 교화하는 일까지, 모두 내팽개치는 것으로 오해하면 절대 안 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