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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89)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8. 궁금증 풀고 정견(正見)으로 정진(精進)하세(2)

 

1) 이치와 사물(理事)

 

 

"여섯 티끌(六塵: · 소리 · 냄새 · · 감촉 · )이 곧 깨달음이고,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의 삼독이 바로 계율 · 선정 · 지혜의 삼학이거늘, 어찌 마음을 통제하고 몸을 단속할 필요가 있겠는가? 스스로를 묶을 밧줄은 본디 없다."

 

이러한 견해야말로, 이치에 집착해 사물을 내팽개치고, 인과 법칙을 부정하는 가장 나쁜 편견이오. 마치 떡을 그려 굶주림을 채우고, 허공을 휘저어 집을 만드려는 것과 같소. 자신만 그르칠 뿐 아니라, 남들도 망치게 하니, 그 죄가 어찌 끝이 있겠소? 이는 착한 원인으로 나쁜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불쌍한 중생 이라고 부른다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텅 빈 말()만 숭상할 뿐, 실천에는 힘쓰지 않는구려. 정토 법문 수행을 권함에는 마땅히 이치와 사실을 함께 병행하되, 특히 구체적인 사실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 하오. 왜 그렇겠소?

 

이치를 훤히 아는 사람은, 사물을 온전히 갖추면서 이치를 꿰뚫기(全事理) 때문에, 온종일 사물을 통해 수행()해도, 곧바로 온종일 이치에 맞는 수행(理持)이 되오. 그러나 이치와 사물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범부중생은, 이치에 따른 수행을 한번 들으면, 곧 매우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라고 감탄하오. 거기다 자기의 게으름과 염송의 번거로움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합쳐져, 결국 이치에 집착하여 사실을 내팽개치게 되는 것이오. 그렇게 사실을 내팽개치면, 남는 건 단지 텅 빈 말장난뿐이오.

 

우익(補益) 대사도 아미타경요해(阿陀經要解)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사실을 통한 염불 수행(事詩)이란, 서방 아미타불의 존재를 굳게 믿되, 아직 이 마음으로 부처를 삼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단지 결연한 의지로 왕생을 발원하니, 마치 길 잃은 아이가 어머니를 생각하듯, 잠시도 잊지 않고 간절히 지속한다."

 

이것이 이치와 성품을 아직 통달하지 못해, 단지 구체적인 사실(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로 수행하는 것이오. "이치를 통한 염불 수행()이란, 서방의 아미타불은 바로 내 마음이 갖추고 있고,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줄 믿는 것이다.” 고 하셨소. 마음이 갖추고 있다(心具) 함은, 자기 마음에 본디 이러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음을 뜻하오. 또 마음이 만들어 낸다(心造) 함은, 마음에 갖추어진 이치에 따라 수행을 시작하여야, 이러한 이치가 바야흐로 눈부시게 드러날 수 있다는 뜻에서, 만든다()고 하오.

 

마음이 갖추고 있음은 이치의 바탕(理體)이고, 마음이 만듦은 바로 사실적인 수행(事修)을 뜻하오. 또 마음이 갖추고 있음은 이 마음이 곧 부처임(是心是佛)을 가리키고, 마음이 만듦은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짓는 것(是心作佛)이오.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짓는다 함은, 성품에 맞추어 수행을 하는 것(稱性起修)이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수행이 온전해져 바로 성품과 같아지는 것 ()이오.

 

수행의 덕(修德)이 쌓여야, 성품의 덕(性德)도 바야흐로 빛을 드러내는 법이오. 비록 이치를 깨달았다 할지라도, 사실을 내팽개치지 않고 지속해야, 비로소 진실한 수행(眞修)이 되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이치에 집자하여 사실을 내팽개치는 망령된 사견(邪見)으로 타락하고 만다오.

 

그래서 "자기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고, 또 만들어 내는 위대한 명호 (나무아미타불)를 마음 붙들어 매는 경계(방편)로 삼아, 잠시도 잊지 말라."고 하신 거요. 이러한 해석 방법은 일찍이 천고에 없던 것으로, 정말로 중생의 근기와 불법의 이치에 모두 딱 들어맞으며, 추상적인 이치와 구체적 사실이 원만히 융합하는 탁월한 식견이오. 우익 대사 같은 법신대사(法身大士)가 아니면, 누가 이런 경지까지 이를 수 있겠소?

 

사실적인 수행이 설령 아직 이치를 깨닫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치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겠소? 사실적인 수행 자체도 이치 안에 존재하지만, 다만 수행인의 마음이 아직 그걸 원만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오. 그러다가 깨닫는 경지에 일단 이르면, 사실이 바로 이치가 될 터이니, 깨달은 이치가 사실 가운데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치는 사실을 떠나지 않고, 사실 또한 이치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과 이치가 본디 둘이 아니오. 마치 사람의 몸과 마음은 둘이 함께 동시에 운용되며, 결코 피차간에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과 같소.(몸과 마음이 나누어지는 순간 죽음이 되어, 양자는 각기 시체와 귀신으로 변한다. 시체란 마음(영혼 · 의식)이 떠난 몸이고, 귀신이란 몸을 떠난 마음(영혼 · 의식)이다.) 통달한 사람(達人)은 이치와 사실을 융합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코 그럴 수 없소. 단지 미치광이의 망령된 편견만이 이치에 집착하여 사실을 내팽개치고, 이치와 사실을 융합시키지 못하는 것이오.

 

이 마음은 본디 허공처럼 두루 퍼져 있으며(공간상의 무한) 또한 항상(시간상의 무한) 존재하오. 우리들이 미혹되고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온갖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오. 비유하자면, 허공을 잠시 어떤 물건으로 가로막는다면, 허공은 더 이상 두루 펼쳐지지도 못하고, 항상 존재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오. 그러나 두루 펼쳐지지도 않고 항상 존재하지도 않는 것은, 집착으로 말미암은 착각일 뿐이오. 어떻게 허공이 잠시 가로막은 물건 때문에, 정말 두루 펼쳐지지도 못하고, 영원히 존재하지도 못할 수 있겠소?

 

그래서 우리 범부 중생의 마음도, 여래께서 증득하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범부중생이 미혹되고 오염된 소치일 따름이며, 마음 본바탕이 원래 변화된 것은 아니오. 아미타불과 극락정토는 모두 우리들의 일념(一念) 심성(心性) 가운데 있소. 즉 아미타불이 내 마음에 본디 갖추어져 있소. 정말 우리 마음 안에 본디 갖추어져 있다면, 진실로 항상 사념(思念)해야 하리다. 그리고 항상 사념할 수 있다면, 감응의 길이 서로 뚫리게 되오.

 

그래서 후천적인 수행의 덕(修德)이 점차 쌓여 선천적인 성품의 덕(性德)이 바야흐로 드러나며, 사실과 이치가 원만히 융합하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를 수 있소. 이런 까닭에 "내가 갖추고 있는 부처의 마음으로, 내 마음에 갖추어진 부처를 사념하라."고 말하는 것이오. 내 마음에 갖추어진 부처가, 어찌 내가 갖추고 있는 부처의 마음에 감응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