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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82)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7. 염불과 참선은 본디 둘이 아니건만.(3)

 

 

1)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그러나 정토수행에 특별하거나 기이한 것은 전혀 없소. 단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구하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오. 부처님이 중생을 보호하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함을 알아야 하오. 그래서 지성으로 감동시키면, 반드시 가피력의 응답이 있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본디 지니고 있는 천진 불성(天眞佛性), 태고부터 지금까지 천지 우주를 두루 비추고 있소. 비록 악역무도한 죄인이라도, 그의 본성이 지닌 신령스런 광명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소. 다만 맑은 거울이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과 같소. 어리석은 사람들은 광명이 없어 비추지 않는다고만 투덜거리고, 먼지를 닦아내면 금방 광명이 다시 나타날 줄은 모르는 것이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것은, 부처님 생각에 의지해 잡념망상을 쫓아내는 일이며, 마음의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오. 염불을 하다 보면, 자기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신령스런 광명이 아미타불 광명의 끌어당김을 받아 점차 환하게 드러나게 되오. 자력과 타력이 서로 호응하여 감응의 길이 열리게 되니, 극락왕생의 미묘한 뜻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 염불하는 사람은 단지 지성으로 간절하게 늘 부처님의 마음을 품고, 부처님의 행동을 행하기만 하면 되오. 공경을 다한 만큼 이익을 얻고, 정성을 보인 만큼 받아쓰기 마련이오. 모두 힘써 수행하기 바라오.

 

말법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 중생은 근기가 형편없고 업장은 막중한데,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매우 드무니, 만약 정토 염불을 저버린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되오. 영명 선사께서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사료간으로 후세인들을 일깨우고 계시니,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며,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스승이 틀림없소. 그런데 애석하게도 온 세상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쳐 버리고, 깊이 궁리하거나 음미조차 하지 않으니, 이는 중생들의 사악한 업장이 가로막는 탓이오.

 

정토염불 법문을 수행함에는, 마땅히 믿음과 발원과 실행(信願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믿음이란 부처님 힘(佛力)을 독실하게 믿는 걸 뜻하오. 아미타여래께서 원인자리에(因地)에 계실 때 48대 서원을 발하여, 매 서원마다 중생을 제도하기로 다짐하셨소. 그 가운데 나의 명호를 염송하고도 나의 국토에 생겨나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소. 이제 그 원인 수행이 원만하여 그 과보로 아미타불이 되셨으니, 우리가 지금 아미타불을 염송한다면, 반드시 극락왕생할 수 있소.

 

다음으로 부처님께 자비력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믿어야 하오. 자식이 어머니만 그리워한다면, 어머니는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품안에 받아들일 것이오.

 

그 다음으로 정토법문을 믿어야 하오. 영명 선사께서 사료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토법문과 다른 법문이 그 크기나 난이도 및 이해득실에서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 분명히 알고, 비록 다른 스승들이 다른 법문을 몹시 칭찬한다고 할지라도 동요되지 말며, 설령 여러 부처님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다른 법문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할지라도 이끌려 가지 않아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서원이란, 바로 이생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오. 머리(목숨)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면 할수록, 미혹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오. 아울러 서방정토에 왕생한 뒤 다시 사바 고해에 되돌아 나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발원도 함께 가져야 하오.

 

실행()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의 대세지보살 염불삼매장에 보면, “육근을 모두 추스리고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 라는 말씀이 나온다오. 육근을 모두 추스리기 전에, 특히 두세 근(두세 개의 감각기관)만 우선 추스릴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와 입()과 마음()을 가리키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 (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 : 독경) 또한 마찬가지라오.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잡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데(寫經), 얼마나 일심(一心)으로 전념했던지, 오직 베껴 쓰는 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 그래서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어두운 줄 모르고, 여전히 쉬지 않고 계속 베껴 쓰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와서, “날이 이렇게 어두컴컴해졌는데 (불도 쓰지 않고) 어떻게 경전을 베껴 쓸 수 있습니까?” 라고 놀라 물었다오. 그러자 경전을 쓰던 사람은 그만 감정 생각이 생기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소.

 

무릇 밝고 어둡다는 분별은, 중생들의 허망한 견해(妄見)이자, 속된 감정이오. 그래서 일심으로 전념할 때는 망상과 감정이 모두 텅 비어 버려, 오직경전 베껴 쓰는 것만 알고, 날이 어두워진 줄은 몰랐던 거라오. 그러다가 남이 옆에서 끄집어 흔들면서, 그만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감정 생각이 갈라졌소. 망상이 움직이자 광명과 암흑이 즉각 판연히 구별되고 더 이상 경전을 쓸 수 없게 된 거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