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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80)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7. 염불과 참선은 본디 둘이 아니건만.(1)

 

1)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불법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사를 끝마치는 일이오. 생사해탈 문제는 너무도 큰일이라. 논하기가 몹시 어렵소. 우리 범부들은 근기가 열악하고 지식도 천박한데다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삿된 스승과 외도(外道)들까지 득실거리니, 생사윤회를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소? 오직 염불법문밖에 없으니, 진실하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염불에 일심으로 정진하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해야 할 것이오.

 

불법 가운데 방편법문이 많으며, 참선을 하거나 교리를 공부해도 모두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염불을 꼭 하라고 권하겠소? 왜냐하면, 참선이나 교리 공부 등은 모두 완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데, 염불법문은 부처님의 원력가피를 함께 의지하여 훨씬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오.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하자면, 자력에 의지하는 참선이나 교리 공부는 홀로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는 염불은 큰 여객선을 타는 것과 같소. 몸소 헤엄치다 보면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기력이 다해 침몰할 염려가 크지만, 큰 여객선을 타면 저편 목적지에 틀림없이 닿게 될 것이오. 이 두 가지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누구나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참선으로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를 끝마치기란, 근기가 아주 뛰어난 대가가 아니면 정말 쉽지 않소. 반면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법문은, 단지 믿음과 발원만 진실하고 간절하며, 수행을 굳게 지속해가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관계를 밝히고, 참선과 정토(염불)의 난이도를 비교한 것 중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한 설법은, 영명(永明) 연수(延壽) 대사의 사료간(四料簡 : 네 수의 게송)이 단연 으뜸이오. 그 사료간에 비추어 본다면, 참선과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도 또한 더욱 열심히 염불해야 하오. 제 아무리 통달했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 결국 염불을 해야 생사윤회를 해탈할 수 있는 거라오.

 

영명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이신데, 중생을 일깨워 건지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베푸셨소. 사료간은 정말로 사바고해를 건너는 자비로운 항공모함(慈航)이며, 대장경의 핵심 요점이자 수행의 귀감이오.

 

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 공덕도 있으면

유여대각호(猶如戴角虎)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 현세에 뭇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내세작불조(來世作佛祖)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무선유정토(無禪有淨土) 참선 수행은 없더라도 염불 공덕이 있으면

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 모두 가나니,

약득견미타(若得見彌陀) 단지 아미타불을 가서 뵙기만 한다면

하수불개오(何愁不開悟)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 걱정 하리오?

 

유선무정토(有禪無淨土) 참선 수행만 있고 염불 공덕이 없으면

십인구차로(十人九蹉路)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음경약현전(陰境若現前) 저승(中陰)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별이수타거(瞥爾隨他去)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무선무정토(無禪無淨土) 참선 수행도 없고 염불 공덕도 없으면

철상병동주(鐵床竝銅柱) 쇠 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만겁여천생(萬劫與千生)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몰개인의호(沒箇人依怙)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이 사료간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정토(염불)이며, 있고 없고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오.

 

()이란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선종에서는 부모가 낳아 주기 이전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고 일컫소. 선종에서는 말을 다 갈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참구하여 스스로 얻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따름이오. 실제로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으며, 고요하면서 밝게 비추는 무념무상의 신령스런 지각(靈知)이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자리(純眞心體).

 

정토란 정토삼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가르침을 깊이 믿고,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지송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법문을 가리키오. 그러나 오직 우리 마음 안에 정토가 있고(唯心淨土), 자기 성품이 바로 아미타불(自性彌陀)이라는 추상 이치에만 치중하는 그런 편협한 의미는 결코 아니라오.

 

참선(수행)이 있다 함은, 참구하는 힘이 지극하여, 생각이 고요하고 감정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러,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진면목을 보는 확철대오를 가리키오. 이른바 명심견성(明心見性)이오. 정토(염불)가 있다 함은, 진실한 보리심을 내어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흔들림 없는 염불수행을 용맹스럽게 지속해 가는 것을 말하오.

 

선과 정토는 추상 교리만 언급하는 개념이며, 선이 있고 정토가 있다는 말은 근기에 따른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두고 일컫는 표현이오. 교리로 보면 항상 변함이 없어, 부처님도 덧보탤 수가 없고, 중생도 덜어낼 수가 없소. 하지만 근기에 따른 수행은, 모름지기 교리에 의해 실천을 시작하고 실천이 지극히 무르익어 교리를 체득함으로써, 그것이 진실로 자기 안에 존재함을 증명하여야 하오.

 

두 쌍의 용어는 표현이 서로 비슷한 같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르오. 그러므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여 그 차이를 느껴야 하오. 가령 참선을 아무리 오래 했더라도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깨달았더라도 철저히 관통(확철대오)하지 못했으면, 참선이 있다고 말할 수 없소. 깨닫기만 하고 증득하지 못하면, 결국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깨달으면 곧 생사가 없다.”는 말은, 전문가(대가)의 표현이 아니오. 깨달음이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에 불과하며, 깨달은 뒤에 비로소 진실한 수행과 실제 증험의 길이 펼쳐지게 되오. 깨닫지 못한 자는 눈먼 소경이 길을 가는 것처럼,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수련으로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져들(走火入魔) 위험이 매우 크오. 그래서 먼저 마음의 눈을 뜨고 깨닫는(開悟) 공부가 수행의 첫걸음으로 매우 요긴한 것이오.(이른바 先悟後修를 뜻한다.)

 

깨달은 바를 증득하여 대가가 되려면, 불에 기름을 끼얹듯 더욱 용맹스럽게 가행정진(加行精進)해야 되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말라빠진 고목처럼 가만히 앉아 죽은 화두나 들고 있는 것을, 마치 대단한 참선(수행)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구려. 이는 정말 크나큰 착각이고 오해라오.

 

또 염불도 추상적인 유심정토(唯心淨土)와 관념적인 자성미타(自性彌陀)에 편협하게 집착하여 믿음과 발원이 없거나, 혹간 믿음과 발원이 있더라도 진실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으면서 유유자적하니 그저 입으로 공염불하거나, 또는 열심히 정진하더라도 마음이 세속에 미련을 못 버리고, 내생에 부귀스런 집안에 태어나거나 천상에 올라가 온갖 복덕과 쾌락을 누릴 생각이나 하든지, 아니면 내생에 스님으로 출가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지혜를 얻어, 불도와 정법을 크게 펼침으로써 중생들을 두루 이롭게 하기나 바란다면, 이들도 마찬가지로 정토가 있다고 말할 수 없소.

 

사료간 중 첫 번째 참선도 있고 정토(염불)도 있다.’ 함은, 공부가 이미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明心見性) 경지에 이른 뒤, 더욱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수행을 일컫소. 참선으로 깨달은 뒤 경장(經藏)의 가르침에 깊숙이 들어가 여래의 권실법문(權實法門)을 두루 통달하고, 다시 그 중에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정토 수행만이, 자기와 타인을 두루 이롭게 할 확실하고 안전한 대도 정법임을 깨달은 자가, 여기에 해당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