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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3. 하안거 해제 법문(198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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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지혜를 우리가 터득 못하면 불법佛法을 사실은 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여름 하안거 결제 한지가 어제 같습니다만 어언간 삼 개월이 지나가서 해제가 되었습니다. 어떠한 존재가 모양이 없으면 따라서 모양의 변동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모양 변동이 없으면 시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허나 어느 모양을 우리가 설정하고 모양을 주체화 시켜서 모양을 실제화 시키는 한에서는 변화나 그런 여러 가지 과정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 변동이 있으니 따라서 필연적으로 시간이 있습니다.

 

, 모양이 있으니까 시간이 있단 말입니다. 모양의 변화가 있으니까 경과에 따라서 시간이 거기에서 형성이 됩니다. 허나 모양이 없으면 시간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대상을 그냥 하나의 실존화 시켜서 있다고 고집한다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고 너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범부의 안목에서는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대상이 있습니다. 허나 바른 안목 범부의 번뇌를 떠나 버린 청정한 안목에서는 그때는 다만 과정만 보는 것이지 순간 찰나도 변치 않는 무상한 그런 과정만 보는 것이지, 실존을 못 보는 것입니다. 사실은 없습니다.

 

그런 순간순간 변화가 되어가는 무상無常만 보는 것이지 실존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설정하고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범부의 견해에서만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금강경에 삼세 불가득이라.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 과거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 오는 마음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란 이것은 이미 사태가 지나가버린 지금은 흔적도 없는 지금 현재는 있을 수 없는 하나의 기억에 불과한 것이고 미래는 어디 있는 것인가. 미래 역시 아직 오지 않은 하나의 희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 현재는 무엇인가 현재도, 순간순간 찰나도 멈추지 않고 변화가 되어가는 하나의 사실이 있지 않는 하나의 변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초의 몇 천분의 일도 어떠한 공간속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고 현재 역시 머물지 않으니 삼세심三世心이라 과거 현재 미래가 사실은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 못 봐서 중생의 어두운 안목이 변화를 못 보니까 무상을 못 보니까 있다고 한다 말입니다. 제법이 본공本空하니 무아無我 무소유라 일체 제법은 공한 것이니 라고 할 것도 없고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공부를 합니다. 여러 가지 경도 많이 외우고 그야말로 남이 한 법문도 새기고 합니다. 허나 그러한 무수무량의 그런 소중한 법문을 많이 외운다 하더라도 반야지혜,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제법이 공했다 하는 것을 공지혜입니다.

 

반야지혜를 우리가 터득 못하면 불법佛法을 사실은 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또는 음란한 짓 말고 이러한 도덕적인 문제는 유교도 있는 것이고 이것은 기독교도 있습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방금 말씀처럼 반야般若지혜 공지혜가 우리 마음의 무명을 깨뜨려야 만이 비로소 참다운 불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참선 하는 법문도 부달성공不達性空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우리는 애쓰고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마는 사실은 제법이 공한 자리를 못 느끼면 우리는 공부한 별 보람이 없단 말입니다. 부달성공不達性空이라 모든 법이 나나 너나 또는 우리 대상에 보이는 일체 만법이 텅 비었다는 우리가 거기에 달하지 못 하면 좌선 무익이라 좌선해도 별로 이익이 없단 말입니다.

 

이런 너무 규격적인 생경한 법문은 뒤로 미루고서 우선 같이 쉬운 이야기를 좀 하십시다. 토굴생활에서 하다 보면 매일 아침 이렇게 자기가 좀 먹다가 생반生飯 그래요 생반이란 것은 자기가 먹는 공양하는 음식을 조금 내어서 아귀나 짐승한테 준다 말입니다. 생반生飯, 출반出飯 그래요, 조금 음식을 나누어서 아귀들이나 중생이 안 보이는 안목에도 아귀도 역시 우리 사람 수 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우리 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아귀들이나 일반 짐승들한테 베풀어준다 말입니다. 그렇게 오래 하다보니까 한군데서 한 일 년이나 머물다 보면 그 주변에 있는 짐승과도 친구가 됩니다. 그 생반生飯할 때 시간이 되면 까치도 지저귀고 짐승도 이렇게 마당에 와서 놉니다. 그러면 귀여워서 조금 주고 주고하면 그것이 길이 들어서 어떤 일로 어디 가서 조금 있다 오면 그냥 그 산중에 막 들어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까치 같은 것이 먼저 알아 가지고 지저귀고 숙소로 온다 말입니다.

 

맨 처음에는 그것이 미물이 별나다 했더만 나중에는 그것이 몇 번 겪어 보니까 이렇게 산 보통 토굴이란 것은 산 높은데 있기 때문에 산턱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사뭇 따라온다 말입니다. 그래서 참 옛날 도인들이 산중에 오래 머물면 손바닥에도 새 같은 것이 와서 노닐고 한다더니 이것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법력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와 같이 길들여서 또는 마음에 어떠한 경우에도 저 짐승을 헤치지 않는다는 그 마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딴 신통한 법력은 없다 말입니다. 헌데 인도를 순례 갔다 온 어느 불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이가 어느 숲가로 걸어가니까 그 마을 애들이 놀고 있는데 까치나 여러 가지 산새들이 와서 어린애들하고 같이 희롱한다 말입니다. 머리에도 앉고, 또 곁에 와서 어린애들하고 같이 재롱 하는 것이 보인다 말입니다.

 

이 미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미물이지만 역시 그것이 미물에 그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비가 오려고 할 때에 쥐나 그런 것이 자취 없이 쥐구멍에 다 숨어버리고 기타 여러 가지 미물들로 해서 예조預措를 우리한테 보입니다. 우리는 그걸 본다 하더라도 역시 미물은 미물에 그치지가 않습니다. 다만 식 정도가 우리 불법에서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만법이 모두가 오직 식 뿐이라는 그런 진리가 있습니다.

 

, 의식이란 것은 알 식, 나무가 있고 또는 돌이 있고 하거니 어떻게 그런 것이 식일 것인가 우리 중생은 그럽니다. 허나 중생은 현상만 보니까 겉만 보지 내용은 에너지는 못 봅니다. 내용의 순수성은 못 봅니다. 일반 동물은 그런 식 정도가 우리 사람같이 의식은 미처 발동이 못 되서 의식까지는 미처 진화가 못 되서 분별 시비하는 판단은 못한다 하더라도 오관은 즉 안, , , , 말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또는 냄새 맞고 몸으로 촉각하고 그런 정도의 것은 일반 동물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시비 분별하는 의식만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우리 인간 중생이 사실은 중생 그러면 우리 불법에서는 일체중생을 다 말합니다. 무정無情, 유정有情 또는 그야말로 무상중생無相衆生 또는 유상중생有相衆生 말입니다. 눈에 보이나 안보이나 간에 일체 존재는 모두 다 중생 그럽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하지 못한 일체가 모두가 다 만법 유식이라 식 뿐인 것이고 바로 보면 일체 유심조라 마음뿐이지마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수한 세월동안 인연적으로 해서 마음의 본체를 못 보고서 윤회하는 존재는 모두가 다 중생입니다. 즉 성자가 아니고 부처가 아니면 이것은 다 중생입니다. 헌데 이러한 중생들이 아까도 말씀처럼 비록 의식정도는 사람만치 갖추어져 있지 않다하더라도 역시 오식은 다 있다 말입니다. 일반 돌이나 그런 것은 오식도 없겠지요.

 

다만 그것은 완전히 식별이 잠재해가지고서 모양 즉, 질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질량만 보이는 것이지 그것은 아무런 그런 식도 없습니다. 따라서 일반 식물은 그런 무생물에 비해서는 조금 더 진화가 돼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헌데 우리 인간은 오식五識보다도 한 식이 더 거기에 가산되어서 육식六識이 있어 가지고서 분별 시비한다 말입니다.

 

분별 시비하는 것은 않은 것 보다는 좋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지혜나무 사과를 따먹어 가지고서 지혜가 발동했다는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걸 생각할 때도 우리가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차라리 일반 동물 모양으로 아담과 이브가 의식 활동을 못 했으면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그런 판단을 못 합니다.

 

그러나 의식 활동하는 것은 좋지만은 좋다 궂다 밉다 그러한 시비 분별하는 그런 판단이 나와 버리면 그것은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나오게 되면, 자기가 구하는 것을 구하게 되면 좋은데 구부득고求不得苦라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못 구하면 그때는 고민이 생깁니다. 권력을 바라고 또는 이성만을 느끼는 이성을 바라고 또는 돈을 바라고 건강을 바라고 합니다마는 우리 인간이 원래 이것이 실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적인 존재에 불과 하기 때문에 바꿔서 말하면 무상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혜를 얻어도 우리 지혜는 유한 상대의 지혜, 지혜도 역시 오래 못가는 진리 우리 생명도 역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오래 못 간다 말입니다. 순간 동안 사라지고 맙니다. 병불가피病不可避라 병도 피할 수가 없고 사불가피死不可避라 죽음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차라리 우리가 무의식이 되어서 바보같이 저런 일반 동물이나 나무같이 돼버렸으면 좋은 것인데 의식 활동이 한번 된 것은 분별 시비한 것까지는 좋은데 분별 시비함으로 해서 얻지 못하면 우리가 인생고가 발생합니다. 인생고가 한번 발생해 놓으면 거기에서 얼마나 더 얻고 덜 얻고 또는 영원적인 지혜, 윤회하지 않는 참다운 영원적인 지혜를 얼마만치 많이 얻고 적게 얻고 에 따라서 의식의 정도에 따라서 윤회가 있습니다.

 

불교말로 해서 십선十善이라 열 가지 선심을 닦으면 그때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고 의식 활동을 좀 해가지고 사람 정도로 닦으면 그때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생명을 죽여가지고서 잔인한 마음 자비심도 없이, 소중한 자비심을 다 끊어 버리면 그때는 지옥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식 활동을 한번 한 이상에는 아까 말씀처럼 자기가 의식 활동에 따라서 자기 입으로 짓고 몸으로 짓고 그런 업장 따라서 우리가 보를 받습니다. 따라서 윤회는 필연적으로 부수가 됩니다.

 

허나 비록 윤회를 하고 인생고가 있고 또는 여러 가지 그런 각양각색의 천차만별의 동물이 있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의 근원은 역시 우리가 알 수 없는 순수한 생명입니다. 인간의 의식 활동이 조금 더 진화가 되어서 우리 인간 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잠재의식 또는 심층의식이라 파고들어가서 깊이 들어간 생명들은 차근차근 우주의 근본에 있는 그런 참다운 영원적인 생명을 맛을 보는 것입니다.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깊이 맛을 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문을 보면 부처님 법문을 한번 듣고서 환희용약歡喜踊躍이라 머리끝이 쭈삣하고 가슴이 개운하고 몸이 부르르 떨리고 그와 같이 감격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나 부처님 법문 듣고서 그냥 덤덤하니 아무런 감명을 못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생명이 얼마만치 우리 근본 생명 우리 불교식으로 하면 불성佛性 아닙니까. 불성을 인격화 시키면 그때는 부처님 아닙니까. 법신法身 부처님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식이 얼마만치 우주의 근본 생명인 불성과 가까이 돼있는가 가까이 돼있으면 있을수록 환희심을 더 깊이 느끼는 것이고 환희용약이라 마치 부처님법문 들으면 하늘에 올라갈 듯이 기뻐진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 법문만 딱 듣고서, 그냥 그 즉석에서 수다원과須陀洹果라 벌써 범부의 망상을 녹여서 초견성 하는, 불성을 볼 수 있는 자리에 비약적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허나 지금은 부처님 법문같이 그런 여실한 법문을 잘 못하기 때문에 들어도 보통은 덤덤하지마는 역시 업장이 가벼운 분들과 설사, 서투른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부처님 법문을 누가 하나 내내야 무상 법문인지라 영원의 고향으로 돌아갈 그런 법문이기 때문에 그리움과 환희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순중생이라 또는 수순성자라 하는 그런 말을 씁니다마는 우리가 조금도 거부 반응을 느끼지 않고서 거기에 딱 떠나버린다 말입니다. 수순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것에 대해서 위대한 진리나 위대한 분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 않고서 이렇게 따라 버린다 말입니다. 그게 수순인데 업장이 많은 분들은 수순을 잘 못합니다.

 

물론 나쁜 것에 수순하면 곤란스럽습니다마는 진리에 수순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인데 진리에 수순을 못하는 것은 그마만치 자기 업장이 무거운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기성 고정 관념이 우리한테 꽉 박혀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서구적인 사고방식이나 또는 이원적二元的인 사고방식이나 그런 말을 쓰고서 우리불교와 대립해서 그런 말씀들 합니다. 확실히 서구적인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하면은 이것은 이원적인 사고방식이 추가돼 있습니다.

 

사물을 사태를 둘로 봅니다. 선과 악, 또는 나와 너, 하나님과나 이와 같이 대립해서 봅니다. 대립해서 보는 그런 의견들은 필연적으로 흑백논리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궂고 하나가 성하면 하나가 쇠하고 말입니다. 이런 이원적인 사고방식으로 해서는 남을 용서하기가 참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꼭 남의 흠만 잡기가 쉽습니다. 또 서구적인 한 가지 방식은 무엇인가 하면 유물주의라, 모두를 하나의 물질로 봅니다. 물론 물질의 근원인, 물질을 구성한 순수한 생명이 안보이니까 물질로 보겠지요. 허나 순수한 생명은 물질만이 아니라는 그런 말씀을 예수님도 하고 마호메트도 했습니다.

 

또는 위대한 철인들은 대체로다 관념론적인 철학적인 견해였습니다. 허나, 모양만 주로 한 그런 사람들은 유물주의라 모두는 물질뿐이다. 물질 뿐이니까 물질 생산을 많이 하고 물질이 풍요하면 좋고 물질이 빈곤하면 나쁘고 물질을 많이 가지면 좋고 남이 좋은 물질을 많이 가지면 시기심이 나서 꼭 같이 가지려고 애씁니다. 사실은 물질을 조금 더 많이 갖고 적게 갖고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생명이 얼마만치 본바탕인 부처님한테 접근돼 있는가 그게 중요한 것이지 무상은 바로 보면 있을 수도 없는 바로 보면 실제가 아닌 물질이 조금 더 많고 적고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유물주의자는 물질의 공평이나 생산이나 그것만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고 단체를 모아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한다 말입니다. 물론 일반 중생을 위해서 남을 지도하는 분들은 응당 물질의 평등을 딱 지켜야 합니다. 절대로 그야말로 경쟁력의 균등을 도모해야 되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그런데 눈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차할 때 가난할 때 인생을 더 많이 배웁니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마는 그 소녀, 라면 먹고 달려가지고서 우승한 사람 있지요. 라면을 먹고 달리고 달려서 그와 같이 단련된 마음, 꺾이지 않는 정신에서 그렇게 된 것이지 만일 부잣집 딸이어 보십시오. 아마 상을 타고 나중에 몸이 비대하게 되어 놓으면 그때는 달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비근한 예입니다만 우리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물질에 있지가 않습니다. 물질이 적고 많고에 있지가 않습니다.

 

특히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공권력은 반드시 물질의 평등과 정치의 자유를 도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제 하근 중생이 불편이 없습니다. 너무 말이 이리저리 빗나가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 인간의 의식이 한번 발동이 되어 놓으면 시비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시비가 멈추지 않으면 이것은 인간의 본래 면목자리에 못갑니다. 과거 전생에도 우리가 무수생 동안에 사람 되었다가 개 되었다가 우리가 짓고 내려온 업장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 의식 가운데는 잠재해 있다 하더라도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 원래 본능에 갖추고 있어가지고 그대로 이제 그놈을 부정하고 영원적인 길로 가면 좋은데 금생에 나와서 대학까지 나왔다고 생각할 때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사뭇 그 과정이 이원적인 사고방식 물질이 좋다 물질이 있다 그것만 주로 배웁니다. 따라서 그놈의 고정관념을 그런 기성관념을 우리가 부정 하려면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화두도 한번 척 들어서 그걸로 해서 자기 마음에 있는 그런 유한 상대의 관념 유한적인 관념과 대치되는 관념을 씻어버리면 좋지만은 그렇게 안 됩니다. 그것이 잠재의식이 하도 깊으니까 앞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 잠재의식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우리 마음이 고생을 느낍니까. 모순을 느낍니까. 우리가 의식은 미처 못 된다 하더라도 우리 무의식중에도 잠재의식 즉 부정적인 그런 고정관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염불은 그냥 입으로 하고 속에는 그냥 자꾸만 그런 고정 관념이 망상이 나온다 말입니다. 이런데서 우리 수행도 역시 별시 수행이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활하고 책도 보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하면 일상생활은 모두가 다 이렇게 형체가 있는 생활이기 때문에 유한상대의 그런 생활이기 때문에 그런 생활에서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해서는 좀체 우리 마음이 본래 마음자리 영원적인 그런 불성 자리는 잘못 갑니다.

 

그러기에 일주일이나 또는 사흘이나 한 달이나 백일이나 그와 같이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소위 말하는 별시수행別時修行 오로지 우리가 집중해서 공부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싸울 때도 적이 강한데 적을 치다말다 하면은 결국은 승리를 못 합니다. 파산공격으로 그야말로 집중해서 공격을 해버려야만 굴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번뇌 역시 염불 하다말다 화두를 들다 말다 우리가 선방에서도 보면 죽비 칠 때나 좀하고 방선하면 그냥 또 잔소리나 하고 그래버리면 공부는 안 되는 것입니다.

 

놀면서 안하는 것 보다는 낫지만 과거 전생부터서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런 구생번뇌俱生煩惱 우리 금생에 생과 더불어서 나온 그런 번뇌 금생에 우리가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한 분별기번뇌分別期煩惱 이런 번뇌를 녹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데서 여름결제, 겨울결제 같은 그런 결재가 있습니다. 헌데 우리 공부인들의 중요한 요체는 무엇인가 하면 비록 몇 백일동안 공부하고 몇 십일 동안 공부한다 하더라도 먼저 선행적으로 우리 마음 자세가 가장 중요한 문제란 말입니다. 마음 자세가 바로 안 서면 즉, 바꾸어서 말하면 정견正見, 정념正念이 안서면 우리 공부는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먼저 정견 정념이라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분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법의 바른길은 팔정도八正道 아닙니까. 팔정도라, 그냥 길이 아니라 정도란 말입니다. 팔정도 가운데서 일곱 가지는 거기에 부수한 것이고 맨 처음에 있는 정견 바른 견해 이것은 주체입니다. 팔정도의 주체인 정견이 안 서면은 바로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디 가서 공부하던지 간에 비록 출가하나 집안에 있으나 간에 정견만은 이것만은 우리가 꼭 확립을 시켜야 합니다.

 

정견을 확립을 못시키면 바른 공부가 못되는 것입니다. 노이무공勞而無功이라 힘만 쓰지 우리한테 성과가 별로 없단 말입니다. 저는 법문 할 때마다 정견 말씀을 역설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알기는 쉽지만은 그냥 흘려버리면 다시 우리 고정 관념이 회생 되어서 정견이 흐려집니다. 우리 공부란 것은 자꾸만 바른 생각을 되풀이 해야지 그냥 하다말다 듣다말다 하면은 그것이 잠재의식에 박힐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 대체적인 내용이 어떤 법문이나 사제법문四諦法門이 항시 들어 있습니다.

 

표현만 차이가 있지 고집멸도苦集滅道, 인생은 다 고요 인생고의 원인은 집이요 집은 이것은 내내야 탐심貪心, 진심心瞋, 치심癡心 아닙니까. 거기 따른 행동 이것이 집입니다. 즉 말하자면 인생고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다만 고만 있고 또는 고의 원인만 있다 그러면 인생은 살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에 너무나 무상관無常觀이라, , 말하자면 인생고라 하니까 고만 생각하는 행법을 그래서 부처님께서 너무나 그런 인생고를 주장 않는, 보다 긍정적인 쪽으로 법문을 제시했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인생에 고만 있다고 하면 인생은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인생고를 떠나서 영원적인 그런 영생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멸아닙니까. , 번뇌를 멸해서 생사를 떠나버린 영원적인 행복이 있습니다. 극락極樂, , 열반涅槃 또는 실상實相, 진여眞如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영원적인 행복자리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여래장如來藏, 부처님, , 열반, 보리, 극락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가 번뇌를 떠나버린 영원적인 경계 영원적인 생사를 떠나버린 참다운 행복 경계 이것이 소위 멸입니다. 이런 멸을 영원적인 행복에 이르기 위한 방법수단 이것이 팔정도 아닙니까. 팔정도 가운데서 정견 이것이 가장 주체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만 잘 서 놓으면 끄트머리에 가서 더디 가고 빨리 가는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멸이라 하는 영원적인 행복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견이 못서 놓으면 고행도하고 또는 염불도 많이 하고 또는 많이 안다하더라도 그것이 별로 공이 없습니다.

 

정견은 무엇인가 항시 말씀을 제가 하고 있습니다마는 나와 모든 존재 일체 중생의 또는 일체 만유의 본바탕이 바로 순수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마르크스주의 같은 하나의 유물변증법 같은 체계는 유물론이라 하는 물질이라 하는, 모든 것은 물질뿐이다 우주의 본질은 물질이다 이 위에서 막시즘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벌써 마르크스주의가 거기에 붙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과 무수한 성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만유의 근본 이것은 하나의 순수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 생명은 단순한 생명인 것이 아니라 일체 공덕을 다 갖춘 생명인 것입니다. 자비 지혜 또는 공덕 행복 어떤 것도 역시 다 갖추고 있는 그런 순수한 생명 이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나, 그런 때는 불성 그러면 아, 사람의 본성은 부처거니 이렇게만 보통은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서는 사람만이 아닌, 소나 개나 동물의 본성만 부처거니 이와 같이 했으나 현대 과학같이 원자가 생기고, 소립자가 생기고 이런 때 와서는 사람의 본성만이 부처거니 또는 동물의 본성만 부처거니 이런 걸로 해서는 불성관이 확립이 안 됩니다. 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와 같이 좁은 범위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일체 중생, 이것은 다만 일반 동물뿐만 아니라 생물이나 무생물, 어떤 것이나 간에 유정, 무정, 유상, 무상 우리 인간이 보이나 안보이나 간에 일체 만유의 근본 순수한 생명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비록 겉에는 천차만별로 만유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 생명인 불성 자리에서는 평등무차별이라, 그때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게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그때는 무장무애無障無礙라 조금도 거리낌도 없고 순수한 생명은 막힘이 없습니다. 하나의 물질이 돼서 질량이 돼야 분석이 되고 막힘이 되는 것이지 질량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는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공간속에나 그야말로 또는 하나의 돌 속에나 머리카락 속에나 어떠한 것이나 소위, 양성자 중성자 그런 원자의 구성체가 아님이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어떠한 것이나 물질이다 하면 각 원소의 결합체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원소, 또는 더 들어가서 전자, 또는 양자 말입니다 또는 더 나아가서 가장 미세한 중성자나 중성 미립자나 그런 소립자, 그런 것도 역시 하나의 불성 내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일체 존재의 본바탕인 불성 인격화 시키면 부처님 말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못 믿으면 결국은 공부해도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이렇게 딱 믿고서 우리는 순간 찰나도 그 자리를 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는 뭐 때문에 있는 것인가 모든 존재의 근원 자리가 불성임을 안 놓치기 위해서 화두가 있는 것입니다. 염불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염불 역시 우리가 그런 자리 안 놓치기 위해서 염불이 있는 것입니다. , 불리불不離佛 이라 부처님을 안 떠나고 또는 치우불置遇佛이라 부처님을 만나서 하나가 되고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화두가 있고 염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정견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행법을 취해야 될 것인가,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그 문제는 벌써 자명한 문제입니다. 이것저것 우리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이라고 딱 믿어버리고 우리가 번뇌에 따라서 아직은 못 느낀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바로 보신 사실은 부처님만이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성자만이 실상을 봅니다. 우리 중생은 실상을 못 봅니다. 고정 관념이나 분별시비나 그런 산심散心때문에 있는 그대로 바른 사태를 못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 정도만큼 인간의 의식 정도만큼 우리는 사태를 봅니다. 마치 누런 안경 쓰고 보면 누렇게 보이고 푸른 안경 쓰고 보면 푸르게 보이듯이 우리 인간은 인간의 의식을 쓰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의 본 바탕을 못 봅니다. 성자만이 비로소 번뇌를 녹여 버린 청정한 안목에서만이 비로소 사물의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상만 봅니다.

 

실상에서 본다 할 것 같으면 천지 만유가 평등무차별이라 차별이 없이 모두가 그때는 불성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다 불성위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어버려야 비로소 불교의 정견입니다. 이렇게 믿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 할 때는 우리가 이러한 불성을 온전히 표현하는 그런 화두, 불성을 온전히 표현하는 염불, 불성을 온전히 표현하는 주문, 그 외에는 우리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한테 어느 스님네가 편지가 왔는데 그분은 기도 모시는 분인데 이렇게 편지가 왔어요. 제 한평생 관세음보살 하기에도 너무나 짧습니다. 사실은 그와 같이 우리 인생 따지고 보면 굉장히 짧은 것입니다. 허망합니다. 바로 보면 결국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하나의 옮아가는 과정에 불과 한 것이고 무상한 존재에 불과 한데 그런 존재에서 우리가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법문을 딱 알았으면 그대로 우리 마음 집중하고서 그 외에는 사실은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만 하기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선방에서는 부처님 경도 사실은 못 보게 합니다. 천지 우주가 전부 부처거니 그걸 알아 버리면 되는 거지 이것보고 저것보고 자꾸 흔들어 대면 결국은 우리 마음이 불심에 가는 그 자리 즉, 우리 마음의 산심을 녹이기가 쉽지 않다 말입니다. 비록 지금 현재는 우리 마음의 산심에 흐트러지는 그런 분별시비가 있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부처거니 딱 믿고서 그대가 딱 집중해서 화두, 염불 주문을 한다고 할 때는 그때는 우리 산심은 녹아지고 우리 마음은 차근차근 걸음걸음 불심에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부처님 법문을 딴 법문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법문내에 옴마니반메훔하면 그 가운데 우주가 몽땅 들어 있으면 됩니다. ‘자 하면은 무자 화두 중에 우주가 몽땅 들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상대 유한적인데서만 차별이 있는 것이지 절대를 표현한 그런 말에는 별로 차별이 없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개선箇箇禪이라 격식을 떠나버린 영원적인 차원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만 들으면 소동파가 말한바와 같이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이요. 산의 모양, 산에서 푸른색 누런색 여러 가지 그런 화초나 그런 모두가 다 이것은 부처님의 청정한 몸이고 계성자시광장설溪聲自是廣長舌이라 시냇물 역시 이것이 부처님의 팔만사천의 청정한 법문에 같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듣는다 말입니다.

 

바로만 들으면 자연스러운 것이 그와 같이 하나의 법문가운데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자꾸만 변동하고 분별시비로 해서 꼬아 붙이니까 사실은 복잡하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사실은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아까 말씀처럼 본래 자리 본래 실상인 우리불성을 딱 믿고서 그 불성에 안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참선하고 염불하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걸 잘 못 믿는데서 우리 마음이 혼란스럽고 여러 가지 복잡성이 있습니다.

 

가장 쉽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 이것이 부처님 법문인 것입니다. 인간의 목숨은 아까도 말씀처럼 사실은 시간 가운데도 없습니다. 또는 모양 가운데도 없습니다. 자기라 하는 일정한 모양이 고정된 모양이 일초도 없습니다. 순간, 찰나변동해서 마지않는 이러한 세포 이건만은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법공이라 결국은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이라 하는 지혜, 반야지혜 즉 말하자면, 공 지혜가 반야지혜입니다.

 

우리 인간이 보는 모든 만유가 텅 비어있다는 반야지혜를 바로 딱 못가지면 공 지혜도 별로 실속이 없습니다. 반야지혜를 가져야만 정견입니다. 인생의 목숨은 역시 이것은 소수지어小水之漁라 조금 더 에누리해서 좋게 봐준다 하더라도 역시 지금 햇볕에 말라가는 물에 있는 고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보면 결국은 이것은 텅 비어 있고 우리 인간적인 차원에서 조금 좋게 봐준다하더라도 역시 인간의 생명은 지금 햇볕에 밭아지는 물 가운데 있는 고기나 같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양이나 같습니다.

 

아까 어느 스님 말씀처럼 우리 인생 이것은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또는 화두 하기도 역시 너무나 짧습니다. 세계에서, 이 지구상에서 여러 가지 동물수가 동물학자 말을 들으면 백 만종 이상 되는 그런 종이 있다합니다. 우리 사람은 백 만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구렁이 독사, 악어 그것도 똑 같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진화의 정도가 우리 인간이 좀 앞서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악어가 안 되고 범이 안 되고 개가 안 되고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된 것이 눈물겹게 고마울 때가 깊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참 인간 몸 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무수무량의 종교 그런 종교 가운데서 하필이면 우리는 불교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만이 물질의 근원, 우리 마음의 근원 이걸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근본을 깨닫는 것은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내생까지 미루지 말고서 금생에 한사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증명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