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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5. 불성佛性 가운데는 일체공덕이 들어있습니다.

 

(청화淸華 큰스님 생신법회 1987.12.26.)

15. 큰 스님 생신 법회 198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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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심 깊으신 재가 불자님들로 부터서 만반진수滿盤珍羞의 향연을 받아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은 대중공양의 의미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외 딴 의미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향연을 받고 보니 역시 그냥 그대로 말면 빚이 될까봐 그래서 제가 또 몇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우리 생명이 다 아시는 분을 아십니다만 본래는 생명자체는 이것은 생사가 없고 장단이 없습니다. 삼차원세계에서 우리가 하나의 모양이 있으면 모양 따라서 장단과 시비와 여러 가지 그런 수명도 한계가 있습니다만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도 없고 기타 모든 중생적인 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다 그러기에 모양에 집착 않는 성자聖者 경계에는 영축자제盈縮自制라 자기 생명을 자제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선정에 미처 못 들어가서 미숙할 때는 그렇게 안 됩니다만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 즉 우리 번뇌의 습기를 녹여서 불성 자체가 딱 되어버리는 그런 경계에서는 영축자제盈縮自制, 길고 줄이고 하는 것을 자제한다 말입니다. 이런데서 용수보살龍樹菩薩 같은 그런 어른들은 칠백세란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물론 길고 짧고 한데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그와 같이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용수보살 다음에 용지보살龍智菩薩도 역시 칠백세 팔백세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 백 사오십 세 그런 분들은 보통 흔합니다. 조주趙州스님 그런 분도 백 이십 세까지 사셨습니다.

 

이런 것이 별 큰 의미는 없다 하더라도 하여튼 그와 같이 삼매에 들어서 깊은 삼매에서 이른바 멸진정滅盡定이라 우리 번뇌가 다 없어져 버린다 말입니다. 우리 번뇌만 끊어져 버리면 그때는 우리 불성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 저 같은 사람은 나이는 많이 먹었습니다만 우리 젊은 훌륭한 스님이 사이에 끼어서 나이 먹은 줄을 모르고 사뭇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슨 생일이라는 그런 말이 나와 놓으면 괜히 자기 나이를 의식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정말 내가 육십이 넘었구나! 결국 저한테는 그것이 손해가 됩니다. 평생에 팽팽하니 젊은 그대로 괜히 나이 의식하면 곤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으로 봐서는 감사 합니다만 공부하는 분상으로 봐서는 그것이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말 제가 먼저 말씀 올립니다만 우리 지금 도반들 가운데서는 저와 같은 연배가 5, 6분계십니다. 헌데 이 평등 자비 문중에서 저 같은 사람 생일이라 그래서 오시고 또는 딴 스님 생일이라 해서 안 오시고 하면은 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들 바쁘신 분들이 또 그때그때 마다 오실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승가에서는 부처님 생일날 딱 모시고 그 외에는 우리가 정식의 불사가 있는 때 아니면 생일날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안 오시는 것이 그것이 법에 맞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여법이 법에 맞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 불자님들이 하실 일입니다. 허고 또 한 가지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하다가 잊어버릴까봐 먼저 드립니다만 절하는 문제, 가사, 저하고 다른 스님하고 같이 앉아 있다 하더라도 저한테는 세 번 절하고 옆에 스님한테는 한 번 밖에 절 안할 때는 그때는 또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공부 하시는 스님들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세 번하나 한 번하나 옆에 스님께서는 상관이 없으시겠습니다만 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요새 아시는 바와 같이 권위주의 타파라는 말이 어디에나 유포되는 말아닙니까. 마땅히 타파가 돼야 합니다. 저 인도에 2500년 전이라던가, 중국에서 천 년 전이나 다 그런 때 하던 행습을 지금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불교란 것은 상에 집착 않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상에 집착 않는 것이 불법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부처님한테 우리가 참배할 때는 물론 삼보三寶에 귀의 또는 삼업 청정이라 불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또는 삼업청정三業淸淨이라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이 청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세 번 절하는 것은 무방합니다만 우리 스님네 한테는 제가 생각 할 때는 한 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 번 할 바엔 그때는 다 같이 세 번 해야지요. 나이 젊다고 해서 법력이 빈약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우리 승가에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양주로 막 들어와도 깨달으면 도인 되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기로 하십시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갈등도 심하고 또는 복잡할 때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지향점,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면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석가모니께서도 불안스러운 인생고를 해탈하기 위해서 그렇게 출가하셨습니다. 종교나 철학이나 모두가 다 인생고의 불안을 떠나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영생 행복을 위해서 다 이것저것 추구해서 인생을 바치고 합니다.

 

인류 문화란 것은 인생고를 떠나는데서 인류 문화의 발상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인생과 우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교 아니고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소박하니 하나님이 창조 했다던가 그런 정도로 안다던가, 또는 알 듯 말 듯 한 신앙 가지고서는 인생고를 해석해서 떠날 길이 없습니다.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또는 수행해보고 어떻게 해보던지 간에 역시 부처님 법문이 아니고서는 인생고의 뿌리를 뽑을 수가 없습니다.

 

노자老子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은 오랜 나그네 길입니다. 나그네길이 돌아가고자 하는 고향이 확실치 못하면 나그네 길은 그야말로 허무하기도 하고 다시 없이 따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돌아갈 길도 역시 긴가 민가 하는 애매모호한 그런 길 같으면 우리한테 확신도 못 주는 것이고 우리한테 그런 안심입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뚜렷이 우리한테 돌아갈 고향을 제시 합니다.

 

우리가 생활에 있어서 다 경험해 보는 일 아닙니까마는 의심을 한다던가, 뭣인가 확실한 것을 모를 때는 항시 불안을 우리가 해소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서고 확신이 그것이 절대적이고 조금도 흠집이 없을 때는 우리는 마음이 그만치 그걸로 해서 안심입명安心立命과 환희심을 느낄 수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 중에 있습니다. 참선 중에는 되도록 말을 않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그만치 말이란 것은 개념 활동인지라 우리 의식이 분열돼 갑니다. 참선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본래 참 마음 찾는 길 본래 참 자기가 되는 길입니다.

 

참 자기가 되는 인간의 실존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서구 철학이나 동양 철학도 있습니다만 참답게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교 외에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건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니라, 누구든지 해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씀들을 합니다. 그리고 따라서 지금 서구 문명이 몰락된다. 그렇게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도 역시 동양문화의 골수가 되어있는 불교권佛敎圈에서 인간이 갈 길은 이밖에는 없다 하는 그러한 것은 다 말씀들을 합니다.

 

참다운 내가 되는 것 참다운 마음 찾는 길 이것이 불교입니다. 마음 찾는 길 가운데서 가장 고도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마음 찾는 그런 첩경 지름길이 그때는 참선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오셔서 참선하는 길에 관해서 다소라도 도움 되시면 여기 오신 보람이 있으실까 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인가 제가 아는 바로 해서는 참선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참선이란 말을 풀이 해보면 여러 가지 그런 해석이 많이 있습니다만 정심행처正心行處라 우리 마음이 평소에 구부러지고 굴곡 되고 여러 가지 했단 말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잘못 듣고 과거세에 우리가 잠재의식에 누적돼있는 번뇌가 있는 것이고 이와 같이 삐뚤어지고 때 묻고 한 그런 마음을 정심행처라 똑 바로 마음자리로 다시 이제 마음자리로 바로 한다 말입니다.

 

참선 같은 그런 공부가 없으면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을 길이 없습니다. 그저 덮어 놓고서 맹신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바른 도리가 앞서야 합니다. 석가모니가 나오실 때는 그때그때 많이 헤매기도 하고 그 뒤에도 위대한 도인들이 안 나올 때는 공자님 석가님 예수님 그분들이 안 나올 때는 사람들이 헤맸을는지 모르지만은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나온 뒤에는 우리가 너무 쓸데없이 헤맬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들 가르침대로 똑 바로 가면된다 말입니다. ,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헌데 그러면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참선 이것은 마음 깨닫는 길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아는 길이란 말입니다. 벽암록碧巖錄같은 훌륭한 그런 참선에 관한 책은 하도 귀중한 책입니다만 그 가운데는 이제 백 가지나 참선하는 규칙을 말씀했습니다. 무문관無門關같은 책도 역시 48 칙이나 되는 그런 참선하는 모범을 말씀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이 무엇인가 어떻게 마음 깨닫는가? 마음의 부처란 어떤 것인가 헌데 마음과 부처와는 둘로 안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심즉시불불즉시심心卽是佛佛卽是心이란 말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란 말입니다. 허나 일반 사람들은 내가 쓰는 마음이 남도 미워도 하고 옹졸한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 이와 같이 그냥 의심을 품는 분도 계십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마음 이것은 마치 빙산의 일각이라, 바다 가운데서, 바다 표면에 나와 있는 얼음덩어리는 조그마한 한 초점이라 하더라도 바다에 숨어있는 빙산이 산더미만큼 클 수가 있듯이 우리가 쓰는 마음은 하나의 초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잘못 써서 나다 너다 밉다 곱다 하는 이런 마음인 것이지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영혼하고 같이 자리를 합니다. 무량무변의 천지 우주하고 우리 마음은 똑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무명無明 때문에 가리여서 이렇게 태어난 몸 보고서 나다 한다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어쩌다가 이런 몸이 생기고 저런 몸이 생기고 했던 것인데 사실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것인데 이 몸 보고 나라하고 저 몸 보고 너라 한다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고답적高踏的인 말 같아서 그런 것을 우리 일반 신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진리는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갈 때까지 몇 백 년 간다 하더라도 금생에 가다가다 못 가고 내생에 간다 하더라도 진리는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진리로 봐서는 나와 남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못 보니 라고 집착 합니다. 바로 보면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에 우리가 또 하나의 존재로 해서 태어나서 나다 너다 하는 업장이 남아 있고 금생에 태어나서 배운 것은 모두가 다 있다 없다, 나다 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입니다.

 

불교 외에 딴 것은 다 훌륭한 것이 많이 있지만 보통은 다 나와 남을 구분합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의미에서는 인간이 분열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고 섣불리 선악善惡을 구분하고 그런 차별심을 우리가 못 누르는 한에서는 인간이 분열과 투쟁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분열, 투쟁, 갈등, 이런 것을 해소를 시키기 위해서는 싫으나 좋으나 간에 부처님 교리가 꼭 기조가 되어가지고서 부처님 교리가 하나의 교훈이 돼서, 교훈이 안 되면 그러한 것을 해소를 시킬 길이 없습니다.

 

헌데 그 마음, 마음, 마음 하는 달마대사 관심론觀心論은 마음관찰 하는 법입니다. 도인들 법을 모두가 다 마음 관찰하는 법입니다. 의심을 하나 염불을 하나 간에 모두가 따지고 보면 결국은 마음 관찰하는 법이란 말입니다. 관심의 허두에 가서 심난가심難可尋이라 마음, 마음 우리가 하는 것이 깊은 마음 얕은 마음 또는 좋은 마음 궂은 마음 하는 것이 모두가 그때는 난가심難可尋이라 찾기가 어렵다 말입니다. 내 마음 네 마음 좋은 마음 궂은 마음 우리가 많이 합니다만 그 마음 본질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헌데 성자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마음 찾는 길이란 말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부처라고 처음부터서 이름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주를 감싸있고 우주의 모두를 합한 것 모양도 없고 말로 표현도 못하고 문자로 표현 못하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못하고 하여튼 모든 존재의 근본 되는 것, 또는 모든 존재 그 자체 모든 존재의 근본은 부처고 현상은 부처가 아니고 한 것이 아니라 현상 존재 다 합쳐서 모든 존재 자체 이것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어째서 그럼 부처님은 현상도 부처고 근원도 부처라 하는데 마음만 부처라 하고 현상은 부처라 않는가? 현상도 물론 본질과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입니다만 마음자체 이것은 하나의 일정한 모양이 없습니다. 우주 같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산 같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순수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라는 모양 라는 모양 또는 산이라는 모양은 무엇인가 그 모양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나 허깨비나 같단 말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이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저는 항시 말씀드릴 적에 서투른 물리학적인 술어를 써가지고서 말씀드립니다만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라는 것 라는 것을 이제 부정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꿈을 꿀 때는 분명히 꿈이 존재하고 좋다 궂다, 싸우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모두 합니다만 꿈 깨서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이 마음의 본바탕을 모를 때는 내가 있다, 잘났다, 못났다 이와 같이 합니다만 나의 마음이 깨달아버린 뒤에는 그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을 물리학에서는 증명을 합니다.

 

우리 스님네 가운데도 대부분 3분의 2쯤은 다 대학 나오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물리학 같은 것을 저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만 또는 뒤에 계신 분들은 박사님, 교수님들 위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보다도 교리면 에서는 앞선 분들이십니다. 다만 제가 오랫동안 중노릇해서 참선을 많이 했다고 이와 같이 말씀드립니다만 아시는 바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중에 이것은 식은 있어가지고서 그 존재가 아직은 성불을 못했으니까 역시 분별시비 한다 말입니다. 좋다 궂다 분별하는 것입니다. 무색계 있는 중생도 역시 좋다 궂다 분별시비 합니다. 분별시비하면 좋다는 힘, 싫다는 힘, 그런 힘이 그때는 우주에 편만遍滿돼 있는, 대일여래 비로자나불이란 우리말로 풀이 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두루 있다는 것입니다.

 

헌데, 그와 같이 우주의 어느 때나 하나의 우주가 구성되나 또는 텅텅

비어서 허공 무일물이라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역시 광명변조光明遍照 부처님의 광명은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 충만한 광명이 아까 말씀처럼 무색계 중생, 아직 성불하지 못한 중생이 좋다 궂다 이렇게 분별하면은 그것이 그 힘이 광명에 충격을 주어서 그것들이 즉 말하자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한다 말입니다.

 

무색계 중생이 우주에 편만遍滿한 광명에 충격을 주어서 이루어지는 그것이 즉 말하자면 중성자요, 양자요, 전자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 이것이 우주에 충격을 주어서 그냥 즉시에 우주에 변동이나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돌 한 덩이 못에다가 던지면 파문에서 저 못 끝까지 갑니다. 물론 파장은 좀 강하고 약하고 차이가 있더라도 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각 한번 하면은 그 기운이 우주 끝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저 미국서 누가 생각해도 생각이 우리까지 미처 옵니다. 어떠한 것이나 서로 피차 인과因果의 고리로 해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해서, 텅텅 빈 가운데 무색계 중생의 여러 가지 공업력共業力이라 업력이 모여서 광대무변한 광명세계에다가 힘을 주면은 그것이 힘을 받아서 그때는 어떻게 진동하는가, 진동여하에 따라서 중성자 양자 전자 한단 말입니다. 양자 전자가 어떻게 모여 있는가, 다시 말하면 원자핵의 둘레에서 전자가 몇 개 도는가. 아시는 바와 같이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하나가 돌면 그것은 수소 아닙니까. 여섯 개가 돌면 그때는 그야말로 참 탄소요, 일곱 개면 질소요, 여덟 개 돌면 산소요 이와 같이 돈다 하더라도 역시 그 원자핵과 원자핵을 도는 전자와의 사이는 얼마나 넓은가.

 

이것은 지금 물리학도들이 비교해본다 할 때 태양과 지구보다도 원자핵 주위에 도는 전자보다도 거리가 비율로 해서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가 더 가깝다 말입니다. 태양과 지구 사이는 지금 텅텅 비어있지 않습니까, 헌데 원자핵과 가장 미세한 원자핵을 도는 전자와의 공간이 지구와 태양보다 더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우리 세포를 이룬다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에 우리 몸은 공취空聚라 부처님 말씀은 그야말로 참 여실한 말씀입니다. 기운이 모여있단 말입니다. 색 기운이 물질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공 기운이 모인 것입니다. 공 기운이 모여서 우리 몸이 되고 산 이 되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공이라는 이것은 우리가 분석하고 분석해 들어가서 저 끄트머리에 가서 빈 것이 아니라 당체가 즉공卽空이라 바로 보면 이 몸뚱이가 비어 있단 말입니다. 성자는 당체 즉공이라 이 몸 그대로 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가끔 예를 드는바와 같이 행각스님 말입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聚하니 꿈속에는 그야말로 참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이와 같이 그런 것이 많이 있어 보이지만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깨달은 뒤에는 그와 같이 우주가 텅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주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우주는 텅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처럼 원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중성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업력이 충격을 주면은 충격 따라서 우주에 있는 순수한 생명이 그야말로 광명이 그때는 진동 한다 말입니다. 광명이 진동해서 뭐되고, 뭐되고 할뿐이지 사실은 그것이 본래 있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바로 비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금강경金剛經에서 얼마나 몽환포영夢幻泡影 소리를 많이 했습니까. 얼마나 그야말로 공한 설을 많이 했습니까. 우리가 아까도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도리가 제법 공법이라 저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바로 당체가 즉공이라 바로 이 몸 바로 공, 감투나 뭐나 결국은 비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에 어두워서 잘못 봐서 그때는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데 있어서는 인생고人生苦는 제도를 못합니다.

 

내가 있고 니가 있으니까, 그때는 분명히 나를 위해서 보다 더 좋은 음식 먹이고 싶고 입히고 싶고 하겠지요. 내가 있으니 파계무참破戒無慙한 짓도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파계할 것입니까. 바로 보면 분명히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그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는 그렇게 본다.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중생이 보는 것은 실체화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텅텅 비어 있다 말입니다. 도인들은 공을 체험하는 것이고 범부는 공을 체험을 못합니다. 을 체험하면 성자고 못하면 범부인 것입니다.

 

그러니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또는 제법 공이라. 오온법五蘊法은 우리가 쓰는 허깨비 마음씨 우리가 자기라고 느끼는 이 몸뚱이 말입니다. 또는 우주의 모든 현상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여러분들 잘 공부 하십시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씀하신 오온법 이것이 나를 포함해서 우주의 모든 것을 두두물물 만상을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체 그런 것은 우리가 쓰는 마음씨라던가 물질이나 그런 것은 오온개공이라 다 비어있습니다.

 

다 비어 있음을 우리가 분명히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를 그때사 구제한다 말입니다. 인생고는 그때그때 좋은 일 좀 하고 조금 염불도 할둥말둥 하고 참선도 좀 하고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근원의 뿌리를 못 뽑습니다. 역시 오온이 다 비어있다 분명히 봐야 합니다. 그러기에 참선해도 그 청계선사 말씀마따나 부달성공不達成功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제법이 공한 도리를 우리가 못 달하면 좌선무익이라 별 이익이 없다 말입니다.

 

외도선外道禪이라 지금 요가 법도 있고 뭐 별것 다 있지 않습니까. 뭐 초월적 정신 명상법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 것도 물론 다 의의가 있습니다. 의의가 있는 것이고 나름대로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참선의 옳은 도리는 못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테크닉에 불과한 것이지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참선은 바른 도리 말입니다. 제법 공 자리를 느끼고 들어가야 그래야 이제 좌선인 것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라 말입니다. 모두가 텅 비었거니 텅 비어 있는 그 자리 텅 비어 있어도 허무하게 비어있으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일체 공덕을 갖춘 그 자리, 인연만 있으면 사람 되고, 우주가 이루어지고 인연이 다 하면 그때는 텅텅 비어 버리고 말입니다.

 

빈다는 것은 우리 중생이 봐서 비는 것이지 성자가 보면 무한신통 자비, 무한신통 지혜 모두를 다 갖추고 있는 이른바 만다라 세계입니다. 화장세계華藏世界란 말입니다. 장엄세계라 또는 광명 정토라. 우리는 지금 참선을 합니다. 참선은 불교뿐만 아니라 아시는 바와 같이 천주교인들도 참선을 하려해서 스님네들을 모셔가고 법사님들을 모시고 합니다만 이와 같이 참선 이것은 인류 문화가운데서 가장 최첨단,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란 것을 다 정평이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불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참선법을 모르면 인류 문화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보배를 그만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선을 하는 것인가 방금 제가 말씀처럼 본래 부처라 본래는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본래가 아닌 것을 우리는 지금 보는 것입니다.

 

<테이프 중간에 끊어진 후>

 

본래 부처라 하는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하는 그런 것이 전제가 돼버려야 참다운 민주화가 됩니다. 남을 숭배 않는데 어떻게 민주화가 될 길이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있고 하느님과 나와 둘이 있고 부처와 나와 둘이 있고 이와 같이 이원적인 사고방식으로 해서는 분열을 면치 못합니다. 자기 마음도 항시 불안스럽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원래 부처거니 비록 생사를 거듭해서 이 몸뚱이 천만번 바꾼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자체는 죽지 않습니다. 다만 허망상인 거품 같은 몸뚱이만 그때그때 변할 뿐이란 말입니다.

 

또한 그런 것이고 내 마음 네 마음도 둘이 아닙니다. 보통 불성 그러면 내 불성 네 불성 둘로 볼런가 모르지마는 그러면 불성 가치가 없습니다. 겉에 나와 있는 초점은 화신化身 경계에서는 천차만별로 있다 하더라도 저 밑에 가면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광명이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내야 파도가 밑에 가서는 하나의 바닷물이듯이 불성도 역시 천지우주는 오직 불성바다입니다. 불성만 충만해 있습니다. 불성위에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두두물물 천차만별로 만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 범부라는 것은 항시 겉만 보고 사는 것이고 도인들은 항시 본질 본바탕을 여의지 않는 것입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참선은 우리가 비록 현상적인 이런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본바탕을 여의지 않는 것입니다. 본체를 안 여읜다 말입니다. 본체를 떠나버리면 이뭣고하나 자 는 선도 뭣도 아닙니다. 본체만 안 떠나면 하나님을 부르나 또는 알라신을 부르나 뭣을 부르나 똥 마른 막대 화두를 부르나 모두가 그때는 다 선입니다. 이렇게 참선을 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 달마스님이 이쪽 중국으로 오신 그 당시 순선시대純禪時代 그때 책을 한번 봐 보십시오. 조금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종파가 생겨서 선종禪宗 교종敎宗 무슨 종 해서 종파가 생긴 다음에는 종파에 따라서 내 종파가 옳다하며 상호비방을 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정통 도인들 한국도 원효元曉, 의상義湘, 진표眞表 또는 고려 때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또는 태고太古, 나옹懶翁 또는 조선 때 와서 기화己和 득통得通, 서산西山, 진묵震默, 사명당四溟堂, 그 뒤에 호암虎巖, 연담蓮潭스님 그런 정통 있는 도인들의 가르침을 새겨 봤습니다마는 그분 들은 모두가 다 종파근성을 최파摧破했습니다. 이른바 회통이라 원래 불법이란 회통인데 불법의 광대무변의 자리를 미처 못 봐가지고 그때그때 종파성을 내세우고 우리만 옳다 하고 남은 그르다 하는 자시비타自是非他를 합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이 좁아져서 불성이 원래 광대무변廣大無邊인데 그때는 광대무변의 하나가 못 됩니다. 즉 말하자면 성불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남하고 반목합니다.

 

따라서 우리 참선 하는 분들 또는 꼭 참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법의 대의大意인 동시에 대본大本이고 또한 동시에 첩경捷徑이라 성불하는 지름길입니다. 또는 그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를 살펴본다 하더라도

가장 최고도의 수행법입니다. 이런 보배를 우리가 놓칠 필요가 있습니까? 설사 학문을 아무 것도 안 배우고 일자무식인 범부라 하더라도 참선하는 법만 알면 그야말로 최상의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법이란 아까 말씀처럼 본래 부처임을 내 마음 이대로 부처임을 딱 믿고서 부처라는 그 자리 체를 안 떠난다 말입니다.

 

염불은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염불은 그런 본체를 안 떠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염불은 치우불置遇佛이라 부처하고 항시 만나서 같이 자리를 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이고 불리불不離佛이라 부처하고 안 떠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은 그런 뜻을 잘 못 알아먹으니까 저 극락세계에 부처님이 계신다 이와 같이 방편으로 하는 것이지 부처님 본뜻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 본체가 원래 부처고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다 어느 것도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그야말로 참 원자의 앞면이나 사자나 뱀이나 이렇게 마음을 툭 열어버리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참선입니다. 무슨 재주나 구하고 신통이나 구하고 이익 구하고 머리가 좋아지고 이런 것은 외도선外道禪입니다.

 

참다운 참선은 먼저 지혜가 앞서서 아직 증명은 못했다 하더라도 바로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바로 부처를 못 느끼고 하는 것은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나한테는 모든 지혜공덕이 갖추어 있다 말입니다. 부처란 것은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보통 부처는 뭐 좀 훤히 알고 우주의 근본이라는 그런 정도로 시원찮게 생각합니다마는 지혜나 기밀機密을 아는 것이나 부처의 공덕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만법을 성취한 도인이 몇 겁을 두고 헤아려도 부처님의 무량공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애쓰고 불성과 하나 되도록 애썼습니다마는 지금도 거기까지 갈려면 천리만리입니다마는 그래도 역시 조금쯤은 맛봅니다. 그 맛보면 그 맛이 어떻게 헤아릴 수 없다 말입니다. 이 몸뚱이 몇 천개 바쳐도 그때는 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 맛보면 얼마나 그것이 황홀 찬란하고 환희에 넘치겠습니까. 그러기에 부처한테 가는 길 성불에 가는 길 성자가 되는 길을 가기 위해서 순교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유동보살儒童菩薩 가섭불迦葉佛 회상에서 공부 하실 때 부처님이 오시는 길이 비가 와서 땅이 질척거린다 말입니다. 그 질척거리는 땅에 주저 없이 한 벌 밖에 없는 옷을 벗어 깔아드렸습니다. 깔아드렸지만 습기가 많아 다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머리를 잘라 깔아드렸단 말입니다. 구도인 들은 이와 같이 법을 위해서 아낄 것이 없습니다. 살타왕자가 대도를 위해서 주린 범한테 몸 바친 것을 보십시오. 수달장자가 도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무상 위없는 도를 위해서 자기 처자를 바치고 나라까지 바친 것을 보십시오. 무상대도無上大道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앞서고 더 귀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하는 마음이 곧 부처라, 자기 마음이 아직 학식도 별로 없고 옹졸하고 그런데 이까짓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부처는 별것이 아니다 허나 우리마음의 본성은 지금 옹졸하고 잘못 쓰고 미워하고 예뻐하고 그런 것이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 알아서 즉 말하자면 무명 때문에 가려서 마음의 전모全貌를 못 보는 것입니다. 전모를 보아 갈수록 참선이라는 것은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서 마음을 차근차근 깊이 파들어 가서, 유식론唯識論같은 논장은 우리 마음깊이를 말하는 논장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안5식을 쓰고 있고 의식보다 깊은 식이 제 7말나식末那識이요, 그 보다 깊은 식은 제 8아뢰야식阿賴耶識이고 그 보다 깊은 식은 근본 청정식인 암마라식菴摩羅識입니다. 암마라식 본체가 불성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하나의 병이나 풀이나 뭣이나 간에 내내야 퍼지면 끄트머리는 불성입니다.

 

해서 지금 현행된 우리 조사선, 최고 상승선 도리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앎과 동시에 존재하고 나하고 하나 됨을 네가 존재의 참다움이 되어버리는 그러한 성불의 길입니다. 헌데 이러한 공부를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어느 사람들은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그르다고 합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복숭아꽃을 보고 깨닫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돌멩이가 대나무가지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닫는 분도 있을 것이고, 중범스님 같이 길을 가다가 맑은 시냇물을 보고 깨닫는 분도 있을 것이고 그와 같이 깨닫는 인연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행된 참선의 법 가운데는 우선 대체로 세 가지 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제일의제第一義諦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

달마스님께서 중국으로 오신 참다운 뜻은 무엇인가?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어떤 것이 부처인가? 이와 같은 물음 따라서 벽암록碧巖錄같은 백 가지 법도 있고 무문관無門關같은 48칙도 있고 합니다. 모두가 다 부처가 무엇인가? 오직 하나의 진리가 무엇인가? 이것을 물었습니다. 이런 물음에 따라 그때그때 근기 따라 뜰 앞의 잣나무니라, 또는 삼세근이니라 이렇게 많이 말해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있으나 내내야 하나의 진리 우리 불심 깨닫는 우리 마음 깨닫는 그 도리입니다.

 

다만 분별 시비가 많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못갑니다. 따라서 분별 시비 그것 잡아버리기 위해서 화두를 주는 것입니다. 화두만 애쓰고 의심하라고 말입니다. 화두가 천지우주의 진리를 딱 보아주는 것이니까요. 도인들의 말은 어떻게 말하나 하나의 말에 천지우주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구분해서 보니까 검다면 검은 것이고 희다면 희지만, 도인들은 설사 말은 검다하더라도 흰 것 붉은 것 다 포함시켜 있습니다. 부처가 다만 뜰 앞의 잣나무 뿐 이리요마는 도인들의 말은 뜰 앞의 잣나무라 말하나 똥 마른 막대기라고 말하나 그 말 한 가지 가운데 우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 의심하다 보면 분별 시비가 녹아간다 말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분별 시비 없이 천지우주가 부처거니 부처를 관찰하면 되겠지 하며 불심佛心 자리를 관조觀照하는 그런 선법禪法이 있고, 또는 과거 전생의 업장도 많고 금생의 업장도 많고 해서 분별 시비가 한도 끝도 없이 많다 그러나 의심하는 것이 괴로운 것이니 차라리 화두를 부처님 명호로 해야 되겠구나 해서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을 화두로 해서 하는 것이 염불선念佛禪입니다. 조사스님이 하신 말씀 따라서 그 말씀을 의심해서 불심을 찾는 그런 선법은 화두선話頭禪 즉 간화선看話禪입니다.

 

또는 아예 본래 부처거니 가만히 불심 자리를 관조觀照 하면 되는 것이지 성가시게 할 필요가 있나 해서 명상을 주로 하는 분들은 묵조선黙照禪이라 잠자코 비춰보는 것입니다. 또는 화두를 의심하는 것도 괴롭고 기왕이면 부처란 생명인 것이니까 생명을 화석을 안 시키고 생명을 구해야 되겠구나. 우리 범부지에서는 생명을 하나의 원이라든가 화석 된 법문을 내세우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생명인 것이니까 부처님을 인격으로 봐서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불심을 대변 할 수 있는 명호를 화두로 하는 염불선을 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세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우선 개념적으로 이러한 갈래는 아셔야 합니다.

 

되풀이해서 말씀합니다마는 도인들의 말씀은 어떻게 말씀했다 하더라도 하나 말씀에 우주를 다 포함시켰습니다. 우리 중생은 밉다하면 미운 것이고 곱다하면 고운 것이지만 도인들은 어떻게 말하나 표현은 빙산의 일각인 것이지 말 내면은 우주를 다 포함해 있습니다. 따라서 의심하다보면 분별 시비가 자고 딱 우리 본체인 불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임제선臨濟禪 계통에서는 화두선을 주로 하고 있고, 조계종에서도 주로 화두선을 많이 합니다. 원불교, 일본 조동종, 중국 조동종에서는 묵조선 화두 없이 잠자코 불심을 비춰봅니다. 또는 염불선은 주로 회통하는 분들, 이것저것 다 포함해서 하나의 것으로 회통시켜 불법을 보고 싶어 한 분들 영명연수선사라든가 보조, 서산 그분들이 역시 일반 화두도 했으나 염불 쪽을 강조를 많이 했습니다. 기화득통 같은 도인도 염불선을 주장을 했습니다.

 

중국도 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는 염불선을 많이 했습니다. 염불 화두를 많이 했다 말입니다. 이것은 시대조류를 모두 하나로 합하고 싶다는 또는 사회가 복잡해지니까 빨리 마음으로 안심입명을 얻어야겠다는 그런 것이 작용을 했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그와 같이 정평 있는 분들은 보통 선 할 때에 다 합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둘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인간의 심리는 우리가 불성을 안 봤으니까 의심도 나오겠고 더러는 마음이 따분하면 가만히 있고도 싶고 공부하다 보면 바보 같이 가만히 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는 너무 가라앉으면 의심도 하고 싶고 그럽니다. 우리 심리라는 것은 원래 부처이기 때문에 의심하는 마음, 참구하는 마음, 또는 믿고 싶은 마음, 이런저런 마음이 다 들어 있습니다. 본래 부처이나 아직은 우리가 부처가 못 되었으니까 어떤 누구나 방법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부처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철저한 것입니다. 잘 모르니까 재산으로 이성으로 무엇이든 구하려고 하지만 내내야 알고 보면 부처가 되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하다보면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가 없이 완전무결한 행복은 부처가 되는 길뿐인지라 결국은 부처가 되는 길을 안 갈수 가 없다 말입니다.

 

인류문화도 역시 이것저것 다 해봤지마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부처가 되는 길 외에는 자기나 인류사회를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어찌 그런가? 니가 있고 내가 있고 분별 있는 생각에서는 우주를 구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비심을 낸다 하더라도 너와 나와 둘이 있는 데서는 참다운 자비가 못 나옵니다. 너와 나와 둘이 아니고서 즉 동체同體라 산이나 냇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원융한 하나인 한 몸이라는 데서 비로소 동체대비同體大悲라 참다운 자비가 나옵니다. 즉 동체대비가 되어야 그때는 상이 없습니다.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한다 해도 나와 남이 있으면 상이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주상보시를 하기 위해서는 나와 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지금까지 말씀처럼 불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비로소 정견正見입니다.

 

불교를 아는 분들은 보통은 팔정도八正道는 공부를 해서 다 알지 않습니까. 팔정도 가운데 맨 허두가 정견인데 정견이 안서면 공부를 바로 할 수 없습니다. 정견의 가장 요체가 뭣인가 하면 나와 남과 모두가 다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입니다. 일체만유가 원융무애한 간격이 있고 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한 불성의 광명에 딱 닿아 있습니다. 원자와 원자끼리 또는 나무와 나무끼리 나와 남끼리 딱 붙어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바세계 공기가 없는 곳이 있습니까만 그보다 더 더 앞서간 설사 공기가 없는 성층권을 올라간다 하더라도 불성은 거기 다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걸 알아야합니다. 어떤 곳이나 불성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제아무리 멀리가도 불성 없는 곳은 갈 수가 없습니다. 내내야 불성 속에서 뱅뱅 돕니다.

 

불성뿐입니다. 불성 위에서 존재가 인연 따라 이것 되고 저것 되고 했습니다. 따라서 불성을 느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서 불성을 계발하는 일, 불성이 내 본질이고 참다운 내 고향입니다. 불성되고자 하는 작업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인간이 할 일 가운데서 가장 큰 일입니다. 다른 것은 다 허망무상虛妄無相합니다. 따라서 불교 믿는 분들은 비록 불성되는 것이 금생에 못 되고 몇 만생 윤회한다 하더라도 불성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고 느껴야합니다. 그렇게 못 느끼면 불교를 안 믿는 것입니다.

 

불성하고 하나 되는 일이 용맹정진 더 많이 하고 사무치면 더 빠르겠지요. 게으르면 늦겠지요.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성불皆當成佛이라 일체중생이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안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게으르면 윤회뿐입니다. 불교인들은 지금 얼마만치 불성과 접근해있는가 안 해있는가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불성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검기는 칠보다 검고 밝기는 태양보다 밝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나와 항시 더불어서 있지마는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고!’ 내내야 불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말로 해서는 공이 다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웬만하면 알지마는 증명 즉 하나가 되는 건 닦아야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念佛三昧라 부처님을 되새기고 부처가 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니까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닌 것을 관조하고 음미하고 이것이 염불의 참뜻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차근차근 불성하고 접근되어 간다 말입니다. 불성에 접근되어 가면 무한의 환희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그냥 환희심에 날뛰는 것이고 업장이 무거우면 자기하고 불성하고 상당히 거리가 멀어놔서 사실은 붙어있지만 별로 환희심을 못 느낍니다.

 

즉 따라서 우선 정견으로 이치를 해오解悟라 해오를 해버려야 조사선祖師禪 참다운 선이 되는 것입니다. 해오 못하면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은 되어도 참다운 조사 문중의 조사선祖師禪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일체만유가 둘이 아니고 일체만유가 평등무차별의 불성뿐이다. 이와 같이 느끼고서 불성 가운데는 일체공덕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부처이고 이 마음을 성취한다. 이렇게 느끼고서 참선을 해야 참다운 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업장이 녹아져서 증오證悟라 참다운 깨달음이 있다 말입니다.

 

한데 일체를 깨닫는 해오解悟 또는 참다운 증명을 깨닫는 증오證悟의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미처 못 가가지고도 갔다하고 거만함을 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그때그때 부처님의 경전을 보고서 더욱더 깊이 새겨서 한계를 혼돈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선하실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암증선暗證禪이라 한계를 모르고서 뭣이 앞에 나오면 그것에 집착執着해가지고서 좋다고 얼마만치 했다고 한다 말입니다. 미처 잘 몰라가지고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이 암증선이고 또는 문자선文字禪이라 문자를 많이 읽어 경을 많이 배워서 한계는 알지만 실제로 참선을 안 해봐서 이런 때는 알기는 알지만 증명을 미처 못 하는 것입니다. 또는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란 놈이 꾀가 많아가지고 거드름을 한다 말입니다.

 

어느 단계를 미처 못 증하고 증했다 하는 것 못 통하고 통했다고 하는 것 이게 야호선입니다. 이렇게 암증선暗證禪 문자선文字禪 야호선野狐禪 하면 참 곤란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쓸데없이 평지풍파를 일으킵니다. 정평 있는 도인들은 쓸데없이 풍파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 가지 선을 피해서 정다운 그야말로 어디까지나 겸허한 비록 본래 부처일망정 아직까지는 범부인지라 우리는 겸허해야 합니다. 따라서 법당 가서 참배할 때는 지극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무슨 복으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금생에 나와서 부처님의 무상심심無上甚深 위없는 법을 만났습니다. 인류문화 가운데서 최고상승 수행법인 참선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아까 말씀처럼 정견正見이 앞서야 합니다. 정견이 앞서서 화두를 드나 염불을 하나 옴마니반메훔주문을 하나 결국은 본체만 안 여의면 다 선입니다. 주문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부르기 좋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 부르지 말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내용 의미 부여만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진리다. 천지우주가 평등무차별의 생명이 딱 닿아있는 원융무애한 하나의 진리다 이렇게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나 엄마를 부르나 똥 마른 막대기를 부르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마음을 확 열어서 광대무변한 마음에서 비록 내가 다 못 증했다 하더라도 성자와 나와 둘이 아니다 석가모니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예수 마음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현상에서 모양만 다르게 나왔지 내용은 똑 같습니다.

 

이와 같이 광대무변한 마음에서 공부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보답하는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