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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4. 우주의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1987.11.08)

14.29-1987.11.08 소참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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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법문은 잡다한 말씀보다도 그런 본바탕을 좀 알기 위해서 우리 신앙 핵심을 좀 간단히 말씀 하겠습니다. 그래야 불법이 쉽기도 하고 또는 잘 풀려간다 말입니다. 거일점수擧一漸修라 하나만 들면 쭉쭉 다 따라 온다 말입니다. 뭐 소승이고 대승이고 성문 연각이고 많이 있습니다마는 대승의 구경적인 근본 요체 그것만 딱 들어 놓으면 가장 쉽습니다. 근본을 들고서 근본만 따라가면 됩니다. 근본을 들었다하더라도 못 따라가면 그때는 불법이 더 어렵지요. 근본을 따라가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법은 일체一切가 유심唯心이요 삼계三界가 유식唯識이라 이런 말을 흔히 많이 씁니다. 일체 모두는 그야말로 마음뿐입니다. 삼계가 유식이라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가 그것이 모두가 다 유식唯識이라 식뿐이라 말입니다. 유심이란 뜻이나 유식이란 뜻이나 결국은 같은 뜻입니다. 그때그때 약간 요새말로 뉘앙스만 좀 다를 뿐이지 결국은 같은 것입니다. 일체가 오직 마음뿐이요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삼계,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가 오직 그때는 의식뿐이라 말입니다.

 

의식 이것도 역시 우리가 보통 말하는 안 정도 의식이 아니라 그 보다 더 깊이 있는 말나식末那識이나 또는 제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나 또는 제구 암마라식菴摩羅識이나 모두를 합한 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삼계는 식뿐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굉장히 추상적이어서 우리가 알기가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하늘에 별도 있고, 물질이 많고 현상계가 끝도 없이 많은 것인데 어째서 오직 마음뿐인 것인가.

 

그러나 불교인들은 마음뿐이다 하는 유심唯心을 잘 모르면 아까 제가 말씀처럼 불법이 잘 풀려 못갑니다. 분명히 불교는 마음뿐이다 하는 일체 유심조라 하는 뜻만 잘 알면 쑥쑥 풀려 갑니다. 다행히도 근래 와서는 일반 물리학도 역시 물질은 원래 없다 물질은 결국은 근원에서는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이 지금 증명해 갑니다. 다만 텅 비었지만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지금 그 정도 안 것이지 물리학도 저 원자를 구성한 소립자 그런 단계에 가서는 그야말로 참 무엇인가 알 수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물질이 아닌, 그 무엇이다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그 무엇이 돼서 가사 중성 미립자 같은 가장 미세한 것은 열량도 질량도 없습니다. 열량 질량 이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첨단 물리학은 물질이 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야 그야말로 물리학이 있습니까 뭣이 있습니까. 없기 때문에 산이 있으면 산대로 물은 물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물리학의 혜택으로 해서 텅 비어있는 것을 우리가 차근차근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한 텅 비어서 물질이 아닌 순수한 생명 순수한 에너지,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우리가 쓰는 이 마음도 거기에 포함해서 오직 물질이 아닌 순수한 생명은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유심 그러면 그냥 밉고 곱고 그런 마음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지만 불교마음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 우리 중생한테 와서는 우리가 바로 못 보니까 분별시비하고 밉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고 하지만 근본 마음자리는 우주를 구성해있고 우주를 감싸있단 말입니다. 일체가 그때는 오직 마음뿐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의 원자나 전자나 이것이 결국은 텅 비어서 없어버리니, 없어버린 그 내용이 또 역시 순수한 생명이거니 사실은 산이고 티끌이고 다 마음으로 되었단 말입니다.

 

불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색즉공色卽空도 색을 분석해서 저 뒤에 가면 공이 된다 그런 뜻이 아니라 바로 보면은 색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색즉공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배운다 할 때에, 색은 공이다. 물질은 분석하면 결국은 텅 비어버린다. 이런 정도의 공을 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색즉공色卽空 색은 바로 물질 아닙니까. 물질은 바로 공인 것이고 따라서 그러기 때문에 공은 또 바로 물질인 것입니다.

 

심성心性인 공이 인연 따라 현상계의 색이 되는 것이고 현상계로 나왔다 하더라도 분석한 뒤에가 아니라 바로 보면 결국은 우리 중생은 미처 안 보인다 하더라도 저 불심佛心단계 불성佛性은 바로 보면 즉 말하자면 순수한 생명을 바로 보는 그런 성자의 안목에서는 다 텅 비어 버립니다.

 

여러분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있는 그런 구절도 외울 수가 있겠지요. 육조 혜능 스님이 신수대사하고 같이 겨루다가 그렇게 써 붙인 게송의 끝에 가서 본래무일本來無一物 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가서 티끌이 일어날 것인가.

 

물질이란 것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오직 마음뿐입니다. 마음의 근원은 내내 불심 아닙니까. 우리 마음은 빙상의 일각 모양으로 좁은 마음 밖에 못쓰니까 나요, 너요 하면서 우리가 다투지만 우리 마음 이대로 색즉공色卽空 이듯이 우리 마음 이대로 불심인 것입니다.

 

불심佛心의 저변은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깔려있고 끝 쪽은 강아무개 김아무개 하면서 우리가 쓰는 내 마음이다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유심인 자리 그 자리를 설명하려니 제가 말주변이 없으나 이와 같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 보고서 같이 이해를 하십시다. 이것은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도파한 설파한 법문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다 이렇게만 말하면 우리가 알기가, 너무나 막연해서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해설을 너무 많이 하면 그때는 복잡하고 어느 정도로 불교에서 하는 식으로 좀 해야겠지요

 

우리 마음의 초점은 김가나 박가나 모두 그런데 있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데 있는 마음이나 우리 중생은 사람만이 마음이 있다.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동물만이 마음이 있다 이러면 불교는 굉장히 좁습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한테 불성이 다 있다 또는 이런 것은 유정중생의 사람이나, 동물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은 아까도 말씀처럼 산이나 냇이나 별이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바로 본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다 중생인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불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불성이 구멍을 뚫고 들어간 것도 아닌 것이고 사실은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불성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사람 가운데 불성이 들어있고 껍데기는 따로 있다.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가 온전히 다 불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세포를 구성하는데 몸이 있습니까. 세포는 각 분자 구성이란 말입니다. 원소, 원자, 가장 미세한 소립자, 가장 미세한 물질이 순수 생명인 불성으로 이루어졌거니 어떠한 것이나 간에 티끌이나 개나 소나 독사나 불성의 형상화란 말입니다. 불성의 형상화가 물질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불성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불성이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하고 마음은 둘로 안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승적으로 애를 많이 쓴다 하더라도 역시 본래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확실히 몰라 버리면 그때는 헤매기도 많이 하고 또는 근본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때는 괜히 고생만 합니다.

 

참선은 우리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어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 같이 참선을 하려면 먼저 마음 자세가 근원적인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먼저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증명도 하고, 자기가 그렇구나 하고 보이면 모르겠지만 안보이니까 못 느낍니다. 분명히 사랑스런 내 몸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봉양해야할 우리 부모도 있는 것이고 아름다운 경치도 있는 것이고 그걸 본다 할 것 같으면 모두가 다 불심뿐이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이런 마음이 결국은 다시 또 매어지고 만다 말입니다.

 

그렇게 매어지지 않기 위해서 부처님이 고구정녕으로 이 말씀 저 말씀 해서 모두가 다 마음인 것을 그렇게 설파했습니다. 설파해서 못 알아먹으니까 공부를 좀해서 차근차근 업장을 좀 녹이고서 자기가 직접으로 불성으로 하나가 되게 했다 말입니다. 사실은 하나가 돼서 마음자리를 증명을 딱 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로 아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불경에도 증전證前에는 미신이요 불성을 다 증명하기 전에는 항시 그때는 미신이 남고 회의가 남지요. 증후證後에 정신이라 불성을 증한 다음에야 그때는 정말로 그렇구나, 그와 같이 우리가 회심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키웁니다. 그러나 바쁜 현대생활에서 우리 불성을 증명하려면 그것은 역시 시일이 요합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윤각만 알아둬야 만이 불심으로 접근해 갈수 있습니다.

 

마음 이것은 어떻게 말로 풀이를 못하고 또는 문장으로 표현도 못하지만은 부처님의 그런 대승경전, 불심이나 진여나 같은 의미 아닙니까마는 그런 불심이나 진여를 말로 표현도 못하고 문장으로 표현도 못하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못하지만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여실히 문자로 해서 표현한 것이 경전 아닙니까. 여실히 문자로 표현한 경전에 따르면 이 마음크기는 얼마나 큰 것이고 그때는 청공심계靑空心界라 마치 텅 빈 허공 같아서 허공은 실은 끝도 한도 없는 것입니다.

 

지구가 있고 태양계가 있고 은하계가 있고 은하계가 몇 천개 몇 만 개

있다 하더라도 역시 아직도 공간은 끝도 갓도 없다 말입니다. 이런 한량없는 공간세계 이러한 청공세계 이런 것이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넓이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역시 무량무변한 것입니다.

 

지금, 조금만 기분 나쁜 일 있으면 성내고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하는 그런 마음 나만을 위해서 애쓰는 그런 마음 자기 권력, 자기 이득을 위해서는 친구도 뭣도 모르는 그런 마음을 설사 부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초점뿐인 것이지 빙상의 일각인 초점뿐인 것이지 마음의 저변은 어떤 누구나가 이와 같이 광대무변한 천지우주를 다 감싼 것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개나 돼지나 소나 어떤 것도 역시 그 근본 마음은 역시 천지우주를 감싸있습니다. 즉 어떤 누구나 간에 마음의 크기는 그것은 공간성을 같이 합니다. 무한성을 다 같이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이 좁을 때는 옹졸할 때는 내 마음의 근본 자리인 광명만을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고향은 그야말로 광대무변한 것인데 내가 어쩌다가 내 업장 때문에 좁은 마음을 쓰는가, 자기 딸 자기아들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이와 같은 마음도 이것도 역시 광대무변한 근본자리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사람돼가지고서, 인연 따라서 그렇게 됐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제한된 나라는 마음, 즉 말하자면 또는 내 것이라는 마음 그걸 못 태워 버리면 우린 근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성불成佛은 무엇인가 성불은 그야말로 간단명료합니다. 이것저것에 얽혀있는 마음 다 가닥가닥 풀어서 본래 마음자리 광대무변한 마음자리로 돌아가서 광대무변한 마음과 하나가 딱 되면 성불이란 말입니다. 참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업장이 무거우면 결국은 이런 몸뚱이에 얽매이는 것도 하도 강하고 나한테 얽매이고 너한테 얽매이고 물질한테 얽매이고 또 감투에 얽매이고 그래 놓으면 결국은 해탈을 못합니다. 못 풀면 그때는 본래 마음자리에 못 간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자리는 청공 심계라 끝도 갓도 없이 한도 없이 넒은 것인데 그 자리가 이것이 무슨 물리적인 공만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생명인데 내 마음의 근본 자리가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천지우주는 생명뿐인 것입니다. 산은 산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생명이고 말입니다.

 

바위나 돌이나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티끌이나 뭣이나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생물로 보이고 또는 하찮게 보인다 하더라도 바로 보면 근본 뿌리에서는 모두 생명 아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자리 일체 중생의 마음자리인 광대무변의 자리도 역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가리켜서 불교말로 하면 법신法身이라 그럽니다. 광대무변한 우리 마음자리를 법신 그럽니다.

 

허나 이와 같이 텅텅 비어서 비어만 있으면 사실은 우리하고 별로 관계가 별로 없죠. 무관한 것이지만 마음자리는 텅텅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광대무변한 그 자리에는 일체 공덕을 갖춘 여러 가지 가능성이 원만히 포함돼 있습니다. 광대무변한 마음자리에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어떤 기운이나 어떠한 것이나 광대무변한 마음자리는 다 포함돼 있습니다. 찬란스런 광명이나 하여튼 모두가 다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불성을 우리 마음자리를 확실히 믿고서 불성공덕을 인식해야만 불성과 우리가 하나로 되려고 하는 것이지 불성이 별것도 아니면 우리가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불성 가운데는 어떠한 것도 따를 수 없는 행복이나 모든 가능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이런 것도 역시 우리가 컴퓨터나 또는 원자력이나 보면 대강대강 불성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 수가 있겠지요. 원자력 그런 것은 불성 가운데 있는 힘의 한 부분적인 아주 극소한 부분에 불과 합니다. 그런 무한의 힘을 갖춘 것이 불성인 것인데 그러한 경계가 한도 끝도 없이 그것보고 이제는(테이프 끊김)

 

이와 같이 일체성품이 가득 차있는 무량무변이 생명 가운데 그때그때 우리 인연 따라서 인연의 힘도 역시 이 가운데 포함되는 것입니다. 인연이 밖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가운데 자비나 지혜나 마이너스나 플러스나 모두가 거기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러한 힘의 작용 따라서 일체 만유가 태어난다 말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사람이요 별이요 광대무변한 불성의 바다에서 그때그때 연따라서 자리를 굳히는 것입니다. 일체 현상은 아까도 말씀처럼 불성의 하나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사람이요, 개요, 뭣이요 하지만 내용은 그야말로 다 청공심계靑空心界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그런 우리 마음세계에 가득 차있는 무한의 가능성 여기에서 산, 냇이요, 별이요 모두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근본에 있어서는 비록 현상계에서는 사람도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두두물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일어난 모든 중생, 무한의 광대무변한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일어나는 무수한 파도 무수한 거품 천파만파, 또는 몇 수억 개나 되는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무수한 거품 그런 것이 마치 법신法身 보신報身 바다에서 일어나는 현상적인 여러 가지 중생과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내내야 잘나고 못나고 차이가 없이 모두가 법신, 보신이 일어나는 하나의 화신이란 말입니다. 석가모니만이 화신이 아니라 바로 보면 전부가 다 화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백억 화신이라 그 새벽 마다 스님네가 아침에 장엄염불을 합니다. 쇳송을 울리죠. 그 장엄염불 속에는 이런 대목이 있어요.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이라. 아미타불이 어디 저만치 상징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십일만 구천오백이라, 그렇게 동명 동호라 같은 이름 같은 명호의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본다 할 때는 부처님은 저만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은 불안 청정의 번뇌를 떠나 버린 청정의 불안佛眼, 부처의 안목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산이나 냇이나 사람이나 모두 가 다 아미타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번뇌에 가려서 미처 못 본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 눈은 다 가짜에 불과 합니다. 즉 말하자면 망념에 불과 한 것입니다. 중생은 사물을 바로 못 본다 말입니다. 바로 못 보는데서 고집부리면 그때는 큰 탈이지요.

 

사회가 왜 혼란스러운 것인가. 근원을 보고서 행동하면 문제가 없을 것인데 근원을 못 보고서 가짜로 본 것을 참말로 생각하고서 그냥 고집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무리 학식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성자의 바른 안목을 갖지 못 하면은 바로는 못 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떠나고 탐심을 떠나고 진심을 떠나고 그러한 청정한 마음에서 바로 보인다 말입니다. 맑은 물을 보십시오.

 

물이 맑아야 바닥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성이란 것은 부처 마음이 우리 마음의 가장 저변인데 혼탁한 혼란스런 마음에서 우리 마음의 저변인 불성이 보일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우리의 근본은 이와 같이 법신이요 보신인데, 인력因力이라 인연의 힘 따라서 윤회 가운데서 사람의 몸을 받아 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화신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이것이 셋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끄트머리 우리 마음의 근본성은 이것은 법신인 것이고 마음의 근본성에 들어있는 일체 가능성 이것은 보신인 것이고 여기 이러한 나와 더불어 일체만유는 화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화신단계에서만 너요, 나요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때는 보신, 법신을 하나가 되어버린다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 합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는 이것은 화신化身경계를 말하는 것이고 미는 보신報身경계를 말하는 것이고 타는 법신法身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셋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오직 하나의 아미타불이단 말입니다. 관음보살이나 일체 부처님의 명호는 내용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뭣인가 하면 이것은 저는 법문 할 때마다 말씀을 많이 합니다만 중요하니까 다시 또 되풀이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비록 부처님의 명호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불체佛體가 부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공덕이 무량무변 하니까 자비도 한도 끝도 없고 지혜도 한도 끝도 없고 또는 중생을 제도하는 그런 것도 한도 끝도 없고 어떤 면으로 보나 다 갖추갖추 구족 원만이라, 원만히 갖추고 있어놔서 한말로는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무량 공덕을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 다 표현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부처님의 이름 따라서 자꾸 따로 있다 그래버리면 그때는 다신교가 돼서 참 곤란스럽지요. 불교는 다신도 다 포함해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진리기 때문에 그와 같이 딱 한 번에 설정해서 우리가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처럼 부처님 공덕은 내 마음 니 마음 하나인 것인데 그 자리는 그야말로 일체가 다 포함돼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말로는 표현을 못한다 말입니다.

 

자비로 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그런 면에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 해서중생을 구제하는 그런 면에서는 문수보살 또는 대세지보살, 우리 영혼을 죽어서 가는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그런 면에서는 지장보살 이렇게 공덕 따라 되는 것이지 결국은 딴 몸이 아닙니다. 불교 말로해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하나의 전체, 우리는 분리해서 나와 너를 이렇게 둘로 보면 그때는 범부인 것입니다. 나와 너와 둘이 아니고, 나와 식물과 둘이 아니고, 나와 별이 둘이 아닌 것이고, 지금 당장에 나를 잡아먹으려는 범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 것이고 나와 남의 사이에 간격이 없습니다. 다 불성으로 충만 돼 있습니다.

 

별과 지구 사이에 간격이 없습니다. 공기가 없다 하더라도 불성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무한량 없는 우주의 구석까지 다 불성은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런 불성의 바다인 법신 보신에서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인연因緣따라서 각 중생작용이 나온다 말입니다. 어떤 때는 순수한 불성으로 공겁空劫이 되었다가 또 몇 백억 년 세월이 흐르면 그 가운데 인연으로 성겁成劫이 되었다가 그 뒤에 다시 몇 십억 년 지나서 중생이 사는 주겁住劫이 되었다가 다시 파괴하면 그때는 괴겁壞劫되었다가 다시 텅 비었다가 이와 같이 되풀이 하지만 결국은 불성은 조금도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불성의 실상은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더 하지 않고 줄지 않고 또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청정과 오염을 초월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불성인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업을 지어서 스스로 고생을 받고 좋다 궂다 하는 것이지, 원래 근본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즉 말하자면 부처 아닙니까.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의 총 대명사가 아미타불인 것이고 자비로운 대명사가 관세음보살, 지혜의 대명사가 문수보살 이와 같이 이름만 다른 것입니다. 알맹이는 결국은 원융무애한 하나의 전체 생명입니다. 따라서 진짜 내 이름은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 진짜 내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로운 마음 품으면 그때는 관음보살이고 말입니다. 하여튼 우리의 본 생명은 이와 같이 법신法身 보신報身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시 법신 보신이 본래 가고자 하는 우리 성불의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은 경 따라서 중생 제도의 방편 따라서 어떤 때는 여래장이요, 어떤 경우는 여래如來, 각자覺者, 또는 진여眞如, 법성法性이요, 보리菩提, , 실상實相 실재實在, 일물一物, 그 무엇 또는 주인공主人公 대아大我, 참 나인 진아眞我 열반涅槃 극락極樂 본래면목本來面目 다 같은 뜻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적으로 딱 안 다음에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성불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목적론이 있다 하더라도 방법론이 애매모호하면 그때는 목적을 성취 못합니다. 내내야 목적론이 있는 분들이 지금 공부하는 화두나 참선이나 염불이나 주문이 하나의 성불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호에 따라서 인연 따라서 주문도 외이고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고 별스런 부처님 경전에 따른 공부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좋다 궂다 시비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부처가 돼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라는 관념, 부처라는 생각을 놓치면 우리가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못됩니다. 가사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하더라도 관음보살은 저 만치 계시고 우리가 부르면 우리한테 복을 준다, 이런 식으로 상대적이면 안 부르는 것보다는 낫지만 우리한테 큰 공덕이 못 되는 것입니다.

 

역시 본래적으로 부처의 도리 따라서 내 생명이나 우주의 본질은 오직부처님뿐이다. 내 본질 우주의 본질로 해서 영원히 빛나 있는 영원히 불생불멸한 그 자리를 상상하면서 관음보살을 불러야 참다운 공부가 되고 공덕이 빨라서 성불도 빨리 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 자기 면목 자리인 부처한테 마음이 딱 머물러서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면 그것이 참다운 참선이고 참다운 염불이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무, 해서 무자 화두를 든다 해도 역시 우리 마음이 이런 단계에 머물러 있어야 참다운 참선인 것이지 괜히 무자를 의심해서 상대유한적인 것을 생각하고 그런 성을 미처 못 떠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때는 참다운 공부가 못 되어서 성불을 못 하는 것입니다. 일반 방편적인 공부는 그야말로 참 이름만 붙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으나, 참선한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아까 말씀처럼 우리 자성自性자리를 딱 짚어서 분명히 인식하고 여기에서 마음이 안 떠나서 안 잊는 공부를 해야만 참선인 것입니다.

 

관음보살을 외이고 옴마니반메훔을 외이고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성불의 법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성불의 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인연 따라서 어떻게 하던지 간에 모두가 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성불成佛이 정상이니까 상관이 없지마는 다만 문제는 그 알맹이, 내 마음이나 우주의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고 불심뿐이다. 불심 아닌 것은 이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도 한 점도 없습니다.

 

물질은 본래 없어놔서 일체공덕을 갖춘 불심뿐이라는 것을 느끼고서 불심 거기에 딱 안주安住를 시킵니다. 머물게 해야 참다운 선이 됩니다. 본체를 안 여의고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불심佛心이고 불심 가운데는 일체공덕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가사 뜨거운 방에 있으면서 그야말로 깨끗한 물 맑은 물을 생각하면 자기 몸도 마음도 시원해 오는 것입니다. 또는 불성 가운데 불도 있어놔서 설사 추운 방에 있으면서 불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이 따뜻해온다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생각이 일체가 마음뿐이기 때문에 우리 체는 마음에 따라 잠시간 이루어진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사무치면 그때그때 순간 찰나 우리 마음이 몸을 지배합니다. 도인들은 그냥 즉각 지배 하는 것이기에 신통을 하는 것이지요. 허나 신통을 미처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불이요 물이요 바람이요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만 생각하면 우리가 그 변화를 맛본다 말입니다. 폐병 균도 역시 근본은 불성인 것입니다. 어느 것도 불성 아닌 것이 없기에 딱 부처님을 생각하고서 바른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사, 폐병 3기가 되었다 해도 페병 균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성을 떠나서 폐병 균이 없는 것이고 또는 불성을 떠나서 나병 균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불성에 사무치면 병을 지배한다 말입니다. 생리나 물리나 병리나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어떠한 결론을 내렸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 가운데는 부사의한 공덕이 원래 있어놔서 불성에 사무치면 무한의 공덕인지라 불성만으로 마음이 딱 일념이 되면 그런 병리나 생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사무치는 신앙 따라서 범위는 차이가 있겠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내내야 자기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금생 행복이나 내생 행복이나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만드는 것입니다. 불행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마음 쓴 대로 과거세 마음 쓴 대로 이 몸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의 눈 하나의 입, 코 모두가 다 전생 마음 쓴 대로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래를 창조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우리 마음을 불성에다 안주를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에서 한시도 안 떠나기 위해서 화두도 참구하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염불이라는 것은 불리불不離佛이라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는 치우불値遇佛이라 부처와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원래 둘이 아니 것만 중생이 어두워서 모르는 것이니까 부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주문도 하고 화두도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에만 딱 든다고 하면 공부는 참 쉽다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인연 따라서 공부 방식은 어떻게 취한다 하더라도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부처 어떠한 물질도 바로 부처 말입니다. 부처 아님이 없고 마음 아님이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이런 근원적인 관념을 딱 심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 빨리 불성에 가까워지시면서 종당에는 불성과 하나가 되어 성불하시길 바라며 금생에 무한의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