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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1. 초전법문(현목회법문 1987. 07.17)

11. 현목회법문 198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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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누구나가 다 완전무결한 행복을 구합니다. 완전무결한 행복을 안 구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어째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 생김생김이나 여러 가지 그런 자기가 배우는 것이나 불안정하고 생김도 불완전하고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미숙한 존재가 왜 그와 같이 완전무결한 것을 구하는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의단을 안 품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런 문제는 앞으로 또 깊이 생각을 해서 말씀 하겠습니다 만은 우리 인간의 본래 면목은 본 고향은 역시 완전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비록 이렇게 제약되고 제한돼서 사람이라는 형체가 생겨있고 또는 배운 것도 부족하다 하더라도 역시 원래 갖추고 있는 본 면목 원래 갖추고 있는 본 생명은 완전무결하기 때문에 우리는 잘나나 못나나 누구나가 다 완전무결을 구한다 말입니다. 행복도 완전무결을 구하는 것이고 또는 아는 것도 완전무결을 구하고 말입니다.

 

지혜나 자비나 어떤 것에서나 완전무결을 구합니다.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 하더라도 기왕이면 완전무결한 걸작을 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이와 같이 멈춤이 없습니다. 허나 우리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놔서 업이 가끔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얼굴 생김도, 우리 사고방식도 차이가 있습니다. 업의 차이에 따라서 얼굴이 생기니까 말입니다.

 

부처님 같이 그렇게 완전무결한 얼굴은 그때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다. 무량 세월동안 닦고 닦아오고 말입니다. 거기다가, 백겁장엄이라 한 겁도 역시 무량 세월인데 백겁 세월동안, 어떤 때는 자기 몸을 희생도 하고 보시도 하고, 또는 그와 같이 가지가지 선행을 쌓았기 때문에 부처님같이 그렇게 완전무결한 얼굴이 나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얼굴 생긴 만큼 자기 업장을 지니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역시 각기 차이가 있습니다. 각기 차이 있는 대로 하기 때문에 무슨 주의 무슨 사상 무슨 이념 해가지고서 가지각색 자기주장 때문에 사회는 혼란스럽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회라도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지금부터 이천오백 년 이상 되는 오랜 세월 전 아닙니까마는 그 당시는 그야말로 인도 인구가 상당히 많다 한다할지라도 거의 다 문맹이라 말입니다. 거의 일자무식들의 첨판인데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나오셔가지고서 40년 설법이다 팔십에 가시고 사십년 동안 설법 하셨다 하더라도 인도 지방 그 지방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삼분의 일정도 밖에 부처님을 몰랐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와 같이 동으로 서로 교화 행각을 하고서 설법을 다 했지만 그 국한된 인내에서도 삼분의 일 정도 밖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하다 이런 분이 나왔다하는 소식을 몰랐습니다. 삼분의 일정도만 알았습니다. 헌데 이런 시대에도 그때 경전 보면 96종 외도라 부처님 가르침 같은 그런 정다운 가르침 정다운 정도외의 그런 삿된 가르침이 96종이나 있단 말입니다. 헌데 하물며 현대와 같이 이렇게 많이 배우기도 하고 고학력 시대라 웬만한 사람들은 대학 나오고 다 그런 때이기 때문에 이런 때는 그야말로 96종이 아니라 몇 백종 몇 천종이 될 것입니다.

 

각 종교의 그런 종파를 보십시오. 석가모니 한분에서 나왔다 하지만은 한국도 십팔 종파라 기독교는 그 파벌 다 합치면 이백 증파가 넘으니까요.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입니다. 혼란스러운 때 인지라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서로 옥신각신 죽이고 죽고, 할퀴고 하는 것은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완전무결한 행복을 구할 것인가 제 아무리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사람의 욕망은 아까 서두에 말씀처럼 완전무결한 행복을 구한다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야말로, 내가 마음도 안심입명하고 행복스러울 것인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 바른 진리를 터득 하는 외에는 없습니다.

 

바른 인생관 바른 우주관을 확립시키는 외에는 우리 마음이 인심입명하고 자기 구하는 무한의 행복을 추구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그 사람의 과거 선근이라던가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서 조금만 얻다가 말수도 있는 것이고 좀 더 얻을 수도 있는 것이고 더러는 그야말로 용맹정진 해가지고서 많이 닦으면 그때는 온전히 우리 본래면목 자체가 완전무결한 부처인지라 온전히 다 얻을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우선은 그러면 어떠한 것이 정견인가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바른 도리인가 우리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을 많이 했었으나 그러한 것을 가장 간추려서 불교를 통관한 진리가 삼보사체라,

 

진실한 체인데 사제라고 발음합니다마는 삼보三寶, 사제四諦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압축시킨, 말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정수란 말입니다. 물론 같은 삼보 풀이도 스승적인 풀이가 있고 대승적인 풀이가 있습니다. 또 같은 사제법문四諦法門 풀이도 역시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소승에서 말하는 사제법문이 있고 대승에서 말하는 사제법문이 있고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우리는 부처님 법문을 통 털어서 팔만 사천 법문을 통 털어서 그 골수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 할 때는 내내, 삼보 사제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공부를 좀 많이 했단 하더라도 경도 많이 읽고 했다 하더라도 역시, 삼보 사제는 항시 새롭게 관심을 가지고서 다시보고 다시 새기고 해야 할 큰 문제입니다.

 

세상에 보배가 많다 하더라도 삼보같이 위대한 보배가 없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가사 다이아몬드라든가 그런 보배도 귀중 합니다마는 그런 보배는 잠시간 인연 따라서 내 것 되었다가 그냥 가버리는 것이고 또는 다이아몬드라는 그 존재 역시 마멸되고 마는 것이고 영생불멸 할 것은 없습니다. 그 물질 자체가 영생불멸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는 우리한테 그것이 소유가 되어서 내 소유라 하는 소유도 역시 무상한 것이라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고 하는 것이라서 그런 것은 우리 참다운 보배가 못 된다 말입니다.

 

허나 여기 있는 삼보, 이것은 부처님과 또는 성불하기 위한 그런 법과 또는 성불하기 위해서 부처님 법 따라서 행동 하는 사람과 이 불, , , 즉 말하자면 삼보, 이와 같이 부처님, 부처님 법, 그 법 따라서 행동 하는 사람 세 가지 같이 가장 위대한 보배가 없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니 이것만이 인간이 추구해서마지 않는 영생불멸의 참다운 행복을 우리한테 가지고 온단 말입니다. 지위라든가, 권속이나 어떤 것이나 우리한테 영생불멸의 행복을 가져 올수가 없습니다. 다만 순간 찰나라던가 그때그때 몇 십 년, 한 평생, 또는 왔다 갔다 하는 다 무상한 것뿐이지 사실은 완전무결한 행복을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삼보만은 이것은 금생뿐만 아니라 금생에 우리가 마음이 편할 뿐만 아니라, 미래 영원히 영생토록 이것은 완전무결한 행복을 갖다 주기 때문에 삼보는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또 부처님 법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과 그러면 부처님이 무엇인가, 불교를 믿는 분들이 우리 신앙 대상인 부처님에 대해서 애매모호 하면 그때는 바른 신앙이 못생깁니다. 바른 신앙이 못 생기니까 부처님을 믿는다 해도 혼란스러울 때는 엉뚱한 행동을 해버립니다.

 

혼란스러울 때는 학교에서 배우고 사회에서 보고 듣고한 그것이 가치 기준이 되어서 아무렇게나 해 버립니다. 가만히 보면 불교를 믿는다 해도 부처님 법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건 무엇인고 하면은 우선 부처님에 대한 개념 자체가 확립이 안 돼있단 말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 이것은 우리 인간 생명의 본질, 본바탕인 동시에 일체 동물의 본바탕이요 또는 일체 식물의 본바탕이고 말입니다. 또는 광물이나 일체 무생물외 본바탕이고 더 나아가서 우주의 두두물물 일월성수의 해나 달이나 또는 기라 모든 별이나 어떤 존재이든 간에 그러한 것의 본 생명 근본 바탕 근본 성품 이것이 부처 입니다.

 

그러면 석가모니는 누군가 석가모니는 하나의 사람으로 해서 근본 성품인 부처님의 이치를 깨달은 분입니다. 석가모니께서도 내가 나오고 안 나오고 상관이 없이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안하고 문제가 아니라 참다운 부처님, 참다운 도리 부처님 참다운 진리의 부처님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존재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 이것이 참다운 부처님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진리 자체의 부처님, 어떠한 것이나 내재해서 안 들어있는 것이 없고 또는 어디에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가히 기독교식으로 표현 하자면 무소부재無所不在가 되겠지요. 없는 곳이 없단 말입니다. 없는 곳이 없으니까 그야말로 우주에 가득 차있단 말입니다.

 

생명의 본바탕으로 해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헌데 그러한 공간적으로 봐서 우주와 더불어 하고 있는 우주와 크기를 같이 하고 있는 즉 말하자면 부처님의 염력을 그때는 법신불法身佛 그래요. 우주와 더불어 같이 하고 있는, 즉 다시 말하자면 바로 우주 자체인 그런 자리를 가리켜서 부처님의 법신法身 그럽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그런 법신 가운데는 나도 너도 또는 하늘에 있는 달도, 별도 해도 모두가 다 부처님한테 나온지라 부처님한테 들어 있는 포섭돼 있는 공덕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비행기를 우리가 만들어낸다거나 하여튼 어떠한 가지가지 재주를 부리는 기기묘묘한 그런게 다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그런 무한 공덕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온 몸은 바로 우주 자체이지마는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공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기술이나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우전왕이 부처님께서 당신 어머님을 위해서 삼개월동안 도리천에 올라가서 설법하느라 사바세계 안 계셨습니다. 안계시니까 우전왕이 부처님을 숭앙하고 하도 흠모해 놔서 부처님이 안 계시니까 어떻게 해서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닮은 모양을 조성을 하고 싶은데 사람 기술로 해서는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우전왕이 부처님을 그렇게 앙모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사무치던가 사무친 마음이 하늘에 통해서 비수갈마천이라 비수갈마천에서 내려와서 부처님 모양을 여실히 조성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전왕優塡王이 조석으로 숭앙을 하고 했다는 그런 말씀이 있는데 기술도 인간의 기술은 숙련공이라 할지라도 한정돼 있습니다. 어떤 분야나 그러나 그런 기술도 역시 인간의 힘으로서는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그런 신묘한 그런 재주 소위 말하는 입신인묘入神因妙. 그런 재주를 부리려면 아까 말한 비수갈마천 천상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천상이나 뭣이나 통 털어서 모든 재주, 자비, 지혜, 행복 통 털어서 아까 말씀처럼 부처님 가운데 그것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 공덕가운데 들어있는 공덕, 자비, 지혜나 그런 공덕을 통 털어서 말 할 때 그때는 보신報身 그럽니다.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해서 닦아서 우리 번뇌가 녹아지면 그때는 우리 스스로가 보신을 증명 하는 것입니다.

 

보신報身 증명하면, 그때는 보신 가운데는 일체 신통묘지神通妙智가 다 들어있어 놔서 우리 스스로도 그때는 굉장한 재주나 신통을 부립니다. 음악으로 보나 미술로 보나 걸작을 낸 분들은 보통은 다 완전무결하게 이와 같은 보신報身은 못되었다 하더라도 영원적인 보신이 갖추고 있는 지혜의 일단은 다 맛본 분들인 것입니다. 문학이나 어떤 분야나 말입니다.

 

헌데 이와 같이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부처님의 원 성품 이것은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법신法身인데 법신에 갖추고 있는 그런 내용 이것은 보신報身인것이고 이 법신, 보신 위에서 일체 우주 만유가 나온다 말입니다. 나나 너나 하늘에 있는 별이나 일체 동물이나 모두가 다 법신 보신을 밑바탕으로 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사 바다로 비기면 바다의 전체 크기 이것은 법신法身에 해당하고 바닷물은 보신報身에 해당하고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 물결들은 그것은 화신化身인 것인데 그런 화신이 즉 말하자면 우리 중생이나 모든 존재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삼보를 해석 할 때는 화신 그러면 화신을 좁게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신이다 이렇게 해석 합니다마는 대승적으로 풀이 할 때는 방금 말씀처럼 일체 존재가 다 화신인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누구나 모두가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조금 잘 안 들어 보신 분들은 생소하실 것입니다마는 현대란 사회는 이와 같이 한 체계로 해서 자기가 믿는 신앙이라던가 자기 신조를 확립을 안 시키면 바로 살아 갈수가 없습니다. 지금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독교는 신학교가 백 개가 넘습니다. 이슬람교도 서울이나 대구나 부산이나 그런 큰 도시에는 이슬람교도 역시 교당이 다 지어져 있습니다. 석유 많이 나오는 그 사람들 얼마나 돈이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불교는 돈도 적고 해놔서 우리가 진리로 해서 무장을 안 하면 자기가 믿는 불교 신앙을 간직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좀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자기가 믿는 신앙에 대해서는 체계를 딱 세워서 믿어야 합니다.

 

우리 부처님 신앙을 갖는 우리 불교인 같이 불교 공부를 않는 분들은 없다고 생각 합니다. 같은 불교지만 원 불교만 두고 보십시오. 원불교는 거기 들어간 지 일 년만 되면 거기 경전 한권을 거의 외워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정통 불교인들은 가사 몇 년 되었다 하더라도 삼보 사제를 잘 모르는 분도 계십니다. 따라서 조금 난해하고 딱딱 하다 하더라도 역시 한 체계적으로 생각을 하셔야합니다.

 

방금 말씀처럼 비록 모양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존재나 그것의 가장 밑바탕은 역시, 이와 같이 부처님의 법신이란 말입니다. 법신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 이것은 보신이고 말입니다. 나나 너나 일체 존재는 그 법신, 보신부터서 인연 따라서 천차 만파 파도가 일듯이 그와 같이 경계가 일어납니다.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본바탕은 내내야 법신이고 보신인 것입니다. 이런 컵도 바닥은 보신이고 법신이고 말입니다. 저 식물도 역시 바닥은 근본 원리는 보신, 법신이고 어떤 것이나 그 바닥 근본원리는 보신 법신이란 말입니다. 다만 화신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허나 우리 중생은 보신 법신을 못 보고 겉에 있는 이런 화신만 보는 것이니까 나 따로 너 따로 이와 같이 뿔뿔이 생각합니다. 겉에 나오는 현상계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보신이나 법신에서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파도가 천파만파가 나온다 하더라도 내내야 하나의 물이듯이 겉에 뜬 거품은 좀 작고 크고 파도는 좀 높고 낮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똑 같은 물이듯이 우리 중생도 역시, 산이요 냇이요 사람이요 별이요 이와 같이 크고 작고 또는 형체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내용 생명은 똑 같은 보신 법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분들은 먼저 이와 같이 우리 근원, 겉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선 똑 같이 옷 입고 먹고 하는 그런 평등만 우리가 취할것이 아니라 우리가 근원 생명에서 근본 생명이 같은 것을 우리가 확실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교라는 하나의 신앙이 확립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흔히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그런 말을 씁니다. 즉 같은 몸에서 같은 몸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의 참다운 자비심이 나온다는 것인데 우리가 부모님의 피를 받고 나왔기 때문에 부모님이 우리한테 참다운 자비심도 부리는 것이고 자기 몸보다도 더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겠지요. 그와 비슷한 도리로 해서 같은 몸 본래 고향 본래 뿌리는 다 똑 같은 보신 법신이구나! 이와 같이 동체를 느껴야만 참다운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비가 나온다 말입니다. 그래야 네 것 내 것을 그때는 안 찾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생활의 참다운 귀감은 절생활인 것입니다. 그때는 니 것 내 것이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그때는 무소유 입니다. 자기 소유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만, 무소유만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우리 생활이나 주변이나 그때는 저절로 평화스런 사회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체 대비를 모르고서, 이 몸 따로 네 몸 따로 생각한다 말입니다. 생명은 같은 것인데 나와 남이 둘이 없기 때문에 본 생명이 둘이 아니라 놔서 너한테 좋게 하면 바로 나한테 좋게 하는 것입니다. 남한테 잘못하면 바로 앙화가 자기한테 옵니다. 생명의 뿌리가 하나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걸 모릅니다. 보시하면, 남한테 베풀어 버리면 그냥 손해 본다 생각 합니다. 보시하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한테 자기 생명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 대상은 부처님인데 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것이 하나인데 다만 추상적으로 우리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즉 말하자면은 하나의 크기 부처님의 전체의 모양, 전체의 체성, 전체의 본체는 이것을 법신이라 하는 것이고 법신法身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종종무변종종무변의 그런 공덕은 보신報身이라 하는 것이고 또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일체 존재는 화신化身이라 합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처럼 화신 경계에서만 이와 같이 천차만별로 중생차이가 있는 것이지 내내야 보신 법신 이것은 똑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고 염불하고 참선하고 닦아서 가는 것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 근본인 보신, 법신을 증명 하는 것입니다. 수행이 많이 되었다 하는 것은 그마만치 우리는 이렇게 차별 분별 시비하는 화신 경계를 조금 멀어져서 참다운, 우리 근본인 보신, 법신에 가까워지면 그만치 수양이 많이 되었다 합니다. 성자는 누군가, 성인들은 그야말로 참 비록 지금 몸은 화신이지만은 이와 같이 보신, 법신이 딱 되어 버렸다 말입니다.

 

석가모니께서나 공자님이나 예수님이나 그런 성인들은 모두가 비록 사람의 몸은 몸이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무슨 마리아의 동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 같은 똑 같은 몸을 받았으나 다만 닦아서 그마만치 자기 생명의 본바탕인 그런 보신, 법신 하고 하나가 딱 되어 버렸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들의 행동은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 우주의 참다운 도리인 보신, 법신의 도리로 해서 행동 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기를 위해서 남을 희생을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떤 경우는 그분들은 남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는 것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기만 위해서 그만치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또는 법신, 보신 이 자리는 그때는 생멸이 없습니다. 이 자리는 죽고 살고 하는 한계가 없습니다. 다만 겉에 나온 현상에 나온 그것만이 죽고살고, 생멸이 있단 말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별이요 그러한 경계에서만 죽고 살고 하는 것과 변화가 있습니다마는 우리 생명 본바탕인 보신, 법신 경계에는 생멸과 변천이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영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이 영생할 수 있는 영원히 행복한 이 자리를 딱 들어 간 분들이 눈에 보이는 문제가지고서 자기 몸뚱이나 자기 권속을 위해서 부당한 짓 하겠습니까,

 

부처님의 법은 무엇인가, 이것은 내내야 우리가 부처가 되는 즉 말하자면 우리의 본 고향인 법신, 보신이 되는 그러한 가르침 이것이 법이란 말입니다. 즉 성불의 법으로서 사제 법문이나 또는 12인연 법문이나 육바라밀이나 이런 법이 성불의 법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법이 있습니다마는 하여튼 테두리를 보면 사제, 십이인연, 육바라밀 이런 것이 우리가 닦는 성불의 법입니다. 따라서 불교인들은 이런 정도만은 꼭 알아야 합니다.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중 승자는 무엇인가, 중 그러면 우리같이 출가 승만 중으로 생각 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출가한 사람이나 또는 집안에 계시는 분들이나 부처님 법을 불법을 믿는 분들은 다 그때는 중입니다. 무리란 뜻이 중 승자 중이란 뜻인데 같은 무리도 보통 무리가 아니라, 우주의 도리 진리에 따라서 행동 하는 사람, 진리에 따라서 말하는 사람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 이것이 중입니다.

 

중 가운데는 우리같이 가정을 떠난 출가승과 재가승이 있습니다. 출가승은 아시는 바와 같이 비구 비구니가 있는 것이고 또는 재가승은, 우바새 우바이라 즉 말하자면 불법을 믿는 청신사淸信士 남자 신도, 우바이優婆夷 여자 신도 청신녀淸信女 이와 같이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아시는 바와 같이 사부대중 아닙니까. 출가승, 비구 비구니, 재가승, 우바새 우바이 청신사 청신녀, 사부대중이 다 승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삼보三寶 속에 들어가는 승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불법을 그대로 못 닦으면 삼보 속에 못 들어갑니다. 마땅히 우리는 삼보 속에 들어가는 출가승, 재가승인지라, 꼭 부처님 법대로 행동하고 부처님 법대로 생활해야만 삼보 속에 들어가는 우리 자부심을 그대로 만족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 말한 성불의 법이 사제나 십이 인연이나 육바라밀이나 이와 같이 법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런 가운데도 이 사제 법문, 진실한 체자인데 사제四諦라고 언편상 이렇게 발음 합니다. 헌데 사제 가운데 불교의 총 강령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해석 따라서 대승 소승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을 통 털어서 사제 법문으로서 다 해결 시킨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만 확실히 다 알아 버린다면 불법의 윤곽은 잡았다고 볼 수가 있지요. 부처님께서 육년 동안 히말라야 산에서 공부 하시고 그 난행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서 대각을 성취하셔서 대각을 성취하신 법은 무엇인가. 대각을 성취하신 알맹이도 역시 사제 법문입니다. 거기 나와서 녹야원에 가서 오비구라 먼저 같이 공부했던 다섯 비구한테 맨 처음에 부처님 설법한 그것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설법하신 내용도 역시 사제 법문입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입니다.

 

* 마지막 부분은 녹음불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