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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0. 백장百丈스님의 인과불매(1987.07.09 법문)

10.87.07.09 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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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초(行事鈔: 南山 道宣지음)라고 하면은 이것은 수행자가 지키는 행제行制에 관해서 행동 강령 같은 그런 책이 이것이 행사초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설법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그런 규범이 있습니다.

 

거기에 어떤 말이 있는가 하면 수삼청守三請이라, 세 번 청하고 그냥 아무렇게나 그냥 자기 말 하고 싶은 대로 자기 권위를 세운다던가 자기 위의를 세운다던가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상대편에서 간절히 법을 바라서 세 번 청하고 세 번 청한다는 규칙을 지키고 종사실宗四實이라. 네 가지 실다운 것 사실 이런 건 뭣인고 하면 불교에서 이것도 한 가지 불교 술어입니다마는 시교리희示敎利喜, 따라서 우리가 분명히 법의 당체를 딱 보이고 교, 보인 그것을 방편으로 해서 충분히 자기 스스로 납득하고 또는 말할 수가 있고 이희라, 그렇게 함으로 해서 상대편한테 이로움을 주고 이로움을 줌으로 해서 희라 즉 기쁨을 느끼게 한다 말입니다.

 

이것이 사실四實인데, 시교이희示敎利喜를 할 자신이 있으면 하고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삼청종사실을 생각한다 할 때는 저 같은 사람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가 없으나, 우리 회상의 사정 따라서 할 수없이 그때그때 무슨 말이던 해야 하겠기에 한 말씀 하는 것입니다.

 

수삼청守三請 종사실宗四實 욕십언慾十言이라 말을 갖다가 열 가지나 해야 되겠다 하면은 구휴거九休去, 말을 열 마디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아홉 마디는 그냥 제해 버리고서 간추리고 간추려서 요점만 딱 한마디 정도만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야말로 보살 삼지의 발광지發光地를 성취해 가지고서 발광지를 성취하면 그때는 법성을 온전히 보고 또는 요설변재樂說辯才라 요설변재를 아울러서 갖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법이 당체 어긋남이 없고 상대편의 근기도 헤아려서 어긋남이 없으면 그때는 뭐 천 마디 만 마디 해도 무방하겠습니다마는 아직 그렇게 못되어 놓으면 수삼청이라 세 번 청하고 종사실이라 시교리희라 법의 당체를 분명히 보이고 가르치고 또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상대편한테 상대편의 정법을 위한 그런 정견正見, 정법正法 이로움을 주고 말입니다. 보통 잡다하니 말을 많이 해 봤자 그것이 정법에 대해서 정견을 못 주면 이로움이 없습니다.

 

상대편의 정견을 확립하는데 이로움을 주고 또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참다운 그런 법의 환희심, 즉 말하자면 환희수지란 말입니다. 법에 대해서 참다운 기쁨을 느낀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수삼청守三請 종사실宗四實 욕십언慾十言 구휴거九休去라 열 가지 말은 하고 싶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이란 것이 말을 내 놓으면 그때는 자기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열 가지 말하고 싶어 하더라도 역시 아홉 가지는 다 제해 버리고서 한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을 많이 안해야 만이 상대편한테 소위 상대편의 법의 수행에 있어서 오류를 안 범합니다.

 

우리는 무문관無門關, 무문관은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십니다마는 무문혜개無門慧開선사가 저술한 책 아닙니까, 불조의 여러 가지 인연 가운데서 사십구칙四十九則 마흔 아홉의 법칙을 골라서 무문관을 세우셨다 말입니다. 무문관의 맨 처음 화두는 무자 화둡니다. 둘째 화두는 제 이칙 화두라 합니다마는 사십구칙 가운데 제 일칙 화두는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고 이칙은 백장야호百丈野狐, 백장대사의 야호 이것은 여우인데 여우 가운데도 아주 꾀 많고 약빠른 것이 야호란 말입니다. 못 알고 알았다한다거나 못 통하고 통했다 한다거나 그런 정도로 해서 하여튼 사기를 잘 부리고, 법도 사기하고 또는 일반적인 사기도 하고 그럴 때에 야호라는 말을 빗대 씁니다. 여우같이 그와 같이 약빠르고 간특하다 말입니다

 

백장야호라는 칙은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마는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이칙에 있는 것이니까 제가 소개 합니다. 백장스님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육조혜능六祖惠能스님 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 밑에 백장회해百丈懷海스님입니다. 백장스님 밑에 황벽희운黃檗希運스님 그 밑에 임제의현臨濟義玄스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통 우리 선종으로 해서는 그야말로 숭앙해서 마지않는 분들이지요. 그리고 이제 우리 선가에서 규칙을 지키는 청규淸規라 하는 것을 백장대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서 부처님 당시의 계율을 적용 해가지고 한 것이지 선방이라 해서 특별한 그런 규칙은 없었습니다.

 

백장대사가 나옴으로 부터서 백장스님이 하도 위대한 분이라 학인들이 많이 모여든다 말입니다. 몇 천 명 그렇게 모여드니 거기에 따르는 단체적인 규범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백장청규라, 하도 세밀하고 엄격한 청규를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 하루에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그런 것도 바로 백장청규에서 나온 엄격한 선방 규범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임을 맡아가지고 충실을 다하는 것도 백장청규에서 나온 규범의 전통이지요.

 

헌데 백장야호라는 그 화두話頭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면 화두라는 것은, 백장스님께서 백장야호를 내가 만들었으니 너희가 의심하라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백장야호라는 즉 말하자면 하나의 사실인데 후대인들이 화두시 했다 말입니다. 그 백장스님이 회상에 계실 적에 한 노인이 설법을 할 때마다 창문으로 와서 말없이 설법이 끝나면 가곤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노인이 설법을 듣고서 안 나가고 백장스님 앞에 가서 척 서거든요. 그러니까 백장스님께서 그대는 누군고 하니까 그 노인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냅니다. 사실은 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과거 가섭불시대 가섭불은 석가모니 부처님보다도 먼저 지나가신 부처님입니다. 사바세계가 형성 해가지고서 괴멸까지 삼천불이 나온다는 것인데 삼천불로 따지면 가섭불은 천 삼불 째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천 사불 째고 미륵불은 천 오불 째라고 돼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제일의적인 의미에서 보면 석가모니부처님만이 부처이겠습니까? 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는 것인데 사바세계 나와서 중생교화 연 따라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때 그 노인이 하는 말이 저는 가섭불 당시에 이 백장산 이산은 백장스님이 계시던 산인데 아주 험준해서 기암괴석이 그야말로 백장이나 천장이나 높고 험준하니까 그와 같이 백장산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장스님도 다 이름이 있는 것인데 백장산에 계시니까 백장스님이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과거 백장산에서 지금 백장대사 스님같이 많은 회중을 거느리고서 한 회상을 꾸며 놓고 설법하는데 한 중이 와서 묻기를 대 수행인도, 보통 수행인이라 하면 그냥 올라가는 수행자가 되겠습니다마는 대 수행인 할 때는 수행이 상당히 돼서 공부가 성취가 된 분이 대수행인이 안 되겠습니까, 대수행인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 스님네가 와서 그와 같이 물을 때에 제가 그냥 당장에 그 말을 받아서 인과불락이다 인과에 안 떨어지니라 이와 같이 말을 했는데 제가 그와 같이 인과에 안 떨어진다는 그 말을 했기 때문에 허물로 해서 오백생 동안이나 여우 몸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을 했어요. 그와 같이 말씀드리면서 화상께서는 그야말로 대 도인이시기에 오백생동안이나 윤회에 안 떨어진다고 해서 여우 몸을 받은 저한테 화상의 그런 일천어, 제 마음을 홱 돌이키는 즉 말하자면은 무명심에서 바른 정견으로 돌이키는 일천어를 저한테 주셔가지고서 자비로 해서 저의 여우 몸을 바꾸어 주십시오. 그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지금 비인非人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여우 몸인데 이와 같이 잠시간 사람 몸을 받아 나온 비인입니다.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대 수행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물으니까 인과에 안 떨어진다. 이와 같이 답변 하므로 해서 오백생 동안이나 여우 몸 받았단 말입니다.

 

그 잘못이 어디가 있는가, 그래서 그 말끝에 백장스님께서 인과불매因果不昧, 인과에 어둡지 안해야 하느니라. 그 여우 몸으로 오백생동안이나 명색 남의 스승님이라고 해서 당당하니 그와 같이 한 회상을 꾸며서 했지만은 그 몰라서 말 잘못 해가지고 대 수행인도 인과에 안 떨어진다. 이렇게 해서 오백생 동안이나 여우 몸 받았다 말입니다. 헌데 백장스님께서는 인과불락因果不落 그것이 아니라 인과불매因果不昧, 인과에 매이지 않느니라.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 즉 말하자면 우리는 인과에 안 떨어진다는 그것과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그것과 분명히 한계를 가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걸 못 가리면 결국은 남에게 법 말할 때 병도사라 우리 중생을 결국은 바른길로 인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백장스님께서 그와 같이 인과에 어둡지 않아야 되느니라고 말씀하니까 그때 한마디 듣고서 그 노인이, 그렇게 감사한 표정으로 오체투지 하고 화상의 일천어로해서 제가 다행히 여우 몸을 이제 벗어났습니다.

 

제 시신은 저 산 뒤에 바위 구덩이에 있으니 화상께서 죽은 스님들의 예로 해서 저를 화장을 시켜 주십시오. 그래서 백장스님이 나중에 그 말 듣고서 여러 대중들 거느리고 뒤 바위틈에 가서 죽어있는 여우를 끄집어내서 화장을 시켰습니다.

 

인과란 것은 분명 합니다. 우리 석가모니께서도 그야말로 참, 아기달 바라문촌에 가서 탁발 했지만은 쌀 한 톨도 얻지 못했다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 말씀처럼 과거세에 그 마을 하고 연이 없다 말입니다. 당시 제방한테 그렇게 짓궂게 당했습니다.

 

그건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 다 과거에 지어서 받았다 말입니다. 석가모니께서 인과를 모르면 저런 나쁜 놈이 괜스레 나한테 핍박한다 하겠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인과를 아는지라 과거에 소급해 올라가보면 결국은 자기가 또 어느 생엔가는 그 제방한테 몹쓸 일을 했기 때문에 금생에 받으니까 그때는 인과에 매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석가모니 같은 그 전 대도인도 역시 사람 몸뚱이를 안 받고 삼매에 잠긴다거나 천상에나 극락에서 가만있으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런 현상적 몸을 받으면 그때는 업보를 받는 것입니다. 물론 도인이 되고 안 되고 가볍게 받고 무겁게 받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업보는 분명히 받습니다. 따라서 인과란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인과에 안 떨어진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인과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과를 아는 것은 그냥 과거세에 내가 뭣 했다 뭣 했다 그런 사소한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인의 재론인 가장 근본 되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재론이 무엇인가 재론이 바로 불성 아닙니까. 과거세에 그야말로 독사가 되었건 뱀이 되었건 간에 과거세에 서로 죽이고 죽건 간에 근본 원인은 불성입니다. 불성 이것은 본래시불本來是佛입니다. 본래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인과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방금 말씀처럼 과거세에 내가 뭣을 했다 원인이 무엇이다 그런 사소한 원인이나 그런 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제일 근본 원인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물 자체, 물 자체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제일의제第一義諦는 내내, 본래시불 본래 부처고 법신불인 것이고 그것이 불성 아닙니까. 일체 중생이 본 근본이 불성인줄 분명히 안다고 생각 할 때는 또는 일체 존재의 원인이 모두가 다 불성이거니 연도 역시 다 불성에서 나 왔기 때문에 연도 역시 다 같은 불성입니다. 도 불성이요. 도 불성입니다. 바로 본다 할 때는 인도 연도 불성입니다. 중생이 못 보니까 인도 따로 보고 연도 따로 봅니다마는 인과 연이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과에 매하지 않으면 사사건건에 그릇 판단 않습니다.

 

지금 세태가 이와 같이 흉흉해서 상당히 불법을 연구한 사람도 지성적인 분도 그릇 판단을 많이 합니다. 그릇 판단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사회도 혼란스럽고 또 인간의 죄악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조금 사회가 빤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 인간 마음에 있는 무명심 인과를 바로 못 보는 무명심과 또 무명심 때문에 삼독심이 나와서, 무명심 없으면 삼독심이 나오겠습니까. 본래 부처요 본래 무한 공덕이 갖춰진 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또는 자기가 본래 자기 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고 너도 부처고, 다 이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탐심貪心진심嗔心치심癡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무명심이 가장 죄의 원흉입니다. 무명심과 삼독심이 죄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동굴 속에 있으나, 그리스시대 디오게네스(?~ BC320)는 통 가운데서 집도 없이 통 가운데서 생활했지 않습니까. 구멍이 뻥뻥난 통도 새 통이 아니라 남이 갖다버린 그런 통 가운데서 통을 집으로 하고 살았습니다. 출가 행자같이 옷도 한 벌 뿐이고 지팡이 하고 비록 그와 같이 누더기 한 벌, 지팡이 한 개밖에 없고 그런 통을 집으로 한다 하더라도 무명심이 없으면 그때는 위대한 그야말로 인과에 어둡지 않은 셈이지요.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를 몇 천 번 휘두른다 하더라도 역시 인과에 어두우면 그만치 공부가 아직 덜 익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그와 같이 인과에 매이지 안해야 됩니다. 인과불매란 말입니다. 인과불매라고 생각 할 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 아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내가 가르치는 학도라던가 내가 가르치는 사회인들은 어떤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그때는 분명해 집니다.

 

그런데 그런 인과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다소 법문을 좀 할 줄은 알고 또는 불교에 대해서 몇 십 년 동안 신봉도 하고 또는 대학자라 하더라도 역시 인과에 매이면 그냥 중요한 문제는 엉뚱하게 풀이 해버린다 말입니다. 엉뚱한 상식적인 풀이를 합니다. 일반 세인들하고 똑같은 풀이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인과에 어두운 셈입니다. 인과불매, 우리는 인과불매를 생각 할 때는 인과 연을 분명히 알아서 인과 연, 이것은 모두 평등무차별 불성 아닙니까. 인과 연이 평등무차별의 불성이거니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할 일은 오직, 삼독 탐치 무명심 이것을 끊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