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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7. 12월 태안사 정기 법회(1986년 12월 2일)

7.1986.12.2 태안사 정기법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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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의식이 한번 발달된 뒤에는 인간은 언제나 불만을 면치 못 합니다. 따라서 지난 과거는 항상 좋고, 지나간 일은 추억의 대상이 되어서 .......<녹음불량> 그러나 지나간 과거도 역시 지금 현재와 마찬가지로 불만이 많았던 것이고 미래 역시 인간의 번뇌가 사라지기 전에는 기대하던 미래도 똑같이 현재와 같이 불만스럽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고난이 충만해 있습니다.

 

더러는 과거 원시 공산체共産體 그런 때는 인간이 아주 행복스러웠을 것이다 인간 사회는 별로 모순이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워도 하고 여러 가지 말로도 합니다만,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적 위기 인간사人間史의 위기라 하는 것은 언제나 면할 수가 없습니다. 허나 특히 현대 같이 위험하고 술렁거리고 가치문제가 혼란스러운 때는 과거에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운 분은 다 압니다마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춘추전국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2,400년쯤 전입니다. 즉 중국의 주나라가 세력이 세미해서 각 지방마다 군웅들이 할거해서 싸웠습니다. 따라서 이때는 굉장히 혼란했습니다. 즉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고 또 인민의 고통도 도탄에 빠진 것을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때가 춘추전국 시대인데 이런 때는 선악善惡의 기준 정사正邪의 기준을 세우기가 곤란했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이다, 어떤 사람들은 악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도다. 이와 같이 가지각색의 학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 바른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세운분이 없으면 참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이럴 때 공자가 춘추春秋. 이것은 오경五經의 책이름입니다.

 

춘추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가 하면 이러한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혼란스런 가치관, 혼란스런 사회상, 이런 사회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떠한 가치가 인간의 행복에 알맞은 것인가, 이런 정사正邪를 분명히 가려서 비판한 책이 춘추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춘추필법春秋筆法하면, 조금도 가차 없이 그 시대를 비판해서 옳은 정론을 전개한 이론을 가리켜서 춘추필법春秋筆法 그럽니다.

 

그런 사학史學을 가리켜 춘추필법 그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혼란스러우니까, 지금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를 다스리는 정치인들도 서로 만나면 여당 야당 서로 욕하고 헐뜯고 서로 책임을 전가 시킵니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학생들은 학생대로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각기 옳다고 자기주장을 많이 합니다. 이런 때는 역시 공자가 말한 대로 춘추필법이란 말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 인간의 가장 공변적共變的인 도덕관에 입각한 가치판단을 해가지고 정당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소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분이나 이론이 꼭 필요한 때입니다. 춘추필법이 꼭 필요한 때 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96종외도 부처님 정법 외에도 복잡한 외도, 부처님 가르침 아닌 가르침이 96종이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허나 현대는 그 보다도 훨씬 혼란합니다. 같은 종교도 역시 신구의 대립 때문에 서로 전쟁도하고 불교와 같이 평화스러운 것을 위주로 하는 최상의 진리도 역시 각 종파가 나누어져서 서로 옥신각신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 96종의 외도 이상으로 지금은 보다 더 갈래가 많은 혼란스런 상황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어떻게 믿는 것이 가장 옳게 믿는 것인가?

이러한 것을 대강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신앙이 가장 옳은 것인가? 어떻게 하면 공자가 비판한바 그런 엄정한 비판, 어떻게 비판을 내려야 만이 현 사회에 대한 옳은 비판이 될 것인가? 이러한 것에 우리가 확고부동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혼란한 가운데 자기 자신도 안심인명 할 수 있고, 자기 자녀, 아끼는 사람들을 바른길로 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바른 견해로 공부하는 분을 가리켜서 대수행인大修行人이라, 대수행인大修行人 이것은 바른 견해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서 생활하는 사람이 대수행인입니다.

 

우리는 보통 대승 소승을 가릴 때 소승小乘은 자기 혼자만 닦고, 대승大乘은 남과 더불어 한다. 이와 같이 간단히 구분을 합니다만 원래 대승 소승은 그 보다도 더 심심 미묘합니다. 대승은 법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어느 법 진리를 탐구할 때 중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 끝까지 파헤쳐야 합니다. 이러한 조금도 남김이 없는 조금도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가르침 이러한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 대승이고 미처 거기까지 못가서 어느 중간쯤 되는 그런 좁은 가르침이 소승입니다. 다시 법리론法理論으로 말하면 대승 이것은 중도실상中道實相입니다.

 

중도中道의 그런 정도를 말하는 것이 대승이고, 소승은 그냥 모든 법이 우리가 보는 것은 허망하다. 무상無常하다. 이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허망무상虛妄無常 하니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모두를 다 부정 해버리는 정도 이런 정도는 아직은 소승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법으로 해서는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대수행인大修行人이것은 대승적으로 법의 끝까지 공부할 수 있는 큰 그릇이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것이 대수행인인가 하면, 이것은 여러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만 우선 4가지로 구분하는 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만법萬法이 자심自心의 소행所行임을 관찰한다.

불교에서 만법萬法하면 일체一切의 만유를 말합니다. 법적인 좁은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一切衆生 일체만물一切萬物 모두를 가리켜서 만법 그럽니다. 우리가 만법을 본다 할 때 어떻게 보는가하면, 그 자심의 소행이라,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보통 주체主体와 객체客体를 따로 봅니다. 내가 여기에 있고 우리 대상은 저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상과 자기 주관을 나누어보는 것이 소승입니다. 대승은 대상과 자기 주관을 나누어 보지 않습니다. 같이 하나로 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하는가에 따라서 불법의 요체를 아는가 모르는가, 대승인가 소승인가 하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불교를 좀 했다 하더라도 나는 여기에 있고 대상은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나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는 가장 큰 원인은 라는 존재를 잘 몰라서 그럽니다.

 

즉 주관과 객관의 한계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대승적으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만법이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상有相 무상無相 일체 존재가 다 자신소행이라 자기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아닙니까. 내 마음이 별것도 아닌데 남도 미워하고 사랑하고 옹졸하고 하는 마음이 어떻게 해서 만물萬物을 만들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분별하고 시비하는 마음은 겉에 뜬 부동된 이것은 망령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 참 마음은 어느 누구 마음이나 우주의 마음입니다. 갑의 마음이나 박가의 마음이나 모두 다 마음저변에는 천지 우주를 감싸있습니다. 천지 우주와 더불어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 자신은 지금 내가 쓰는 이 마음도 포함해서 내 마음의 본질을 다 통 털어서 말한 마음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각기 겉에 뜬 마음은 다 다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다 달라도 본마음 은 다 똑같습니다. 여기 계신 분뿐만 아니라 천지 우주 모든 존재가 근본 마음의 본질은 다 똑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 있는 자신 이것은 내가 쓰는 옹졸한 좁은 마음이 아니라 천지 우주를 창조도 하고 모든 존재를 일으키는 근본 제일원인第一原因 근본 순수한 생명체 이것을 말합니다. 만법 이것은 내 마음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를 구성한 순수한 생명체가 나타난 것이 만법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우주를 구성한 순수한 생명체 내 마음의 본질인 동시에 순수한 생명체로부터 나타난 것 이것이 만법이다. 라고 생각해 야만이 비로소 대수행인 또는 대승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소승은 중간 쯤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대승은 역시의 근본 뿌리인 진리를 들어서 일체 만유를 근본 뿌리에서 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하나하나를 실상에서 봅니다. 하나하나를 도에서 봅니다. 하나하나를 부처에서 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대수행인입니다.

 

둘째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견해見解를 멀리 여읩니다.

우리 중생은 뿌리를 못 봅니다. 참다운 실제를 못 봅니다. 따라서 겉만 보기 때문에 일체 존재는 존재가 일으키는 이런 생이 있고 또는 존재가 우선 머무르는 주가 있고 변천하는 리가 있고, 또는 없어져 버리는 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은 실상을 못 보기 때문에 겉만 보기 때문에 생겨나고 변화되고 없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바닥을 못 보니까 겉만 보기 때문에 무엇이 생겨나고 없어지고 변화되는 것을 본단 말입니다.

 

허나 대승인들은 그렇게 안 봅니다. 대승인들은 바닥을 보기 때문에 겉에는 천번 만번 변화가 있더라도 근본 본체 바닥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대수행인들은 대승인지라 생하고 머물고, 변화되고, 없어지고 하는 견해를 없애 버립니다. 이렇게 해야 대승입니다. 죽었다 살았다 생물이 없어졌다 하는 그런 것에 집착할 때는 아직 대수행인 대승은 못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삼에 만법무생萬法無生을 안다는 말입니다.

만법萬法은 일체 존재가 만법입니다. 만법이 일체 존재가 무생無生을 본래 낳지 않음을 안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내가 낳고 풀도 생기고 나무도 싹이 터서 나무가 되고 이런 것을 아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겉은 그러하나 나무 존재의 본질本質 내 생명의 본질 이러한 것은 원래 낳음이 없습니다, 원래 생이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생을 보고 또는 사를 보는 인간들로서는 납득이 곤란 합니다.

 

제가 굳이 납득이 곤란한 것을 얘기하는 이유는 아까 말한 것처럼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란 말입니다.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을 세우려면 조금 어렵더라도 모든 만법을 포함할 수 있는 법이 되어야 합니다. 소승 같이 법이 좁으면 만법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마르크스주의나 기독교나 모든 것을 포함하려면 대승 같은 광대무변한 외연적인 범위가 되어야 포함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 견해로 해서는 분명히 낳음이 있고 변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우리가 본다 하더라도, 본체 바닥에서 보는 본질 그것을 딱 파악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믿어라, 물론 믿으면 믿은 것만큼, 어떻게 믿으나 본질을 아나 모르나 간에 관음보살을 외우고 아미타불을 많이 외우면 공덕을 받습니다. 허나 이렇게만 믿는 것은 아직은 대승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닥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중생이 안목이 짧아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이나 그 후 도인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해야 만이 바른 인생관人生觀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안 보이고 납득이 곤란하지만 대승들이 하는 법을 우리 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인생관을 세울 수 있습니다.

 

즉 분명히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일체 만물은 생주이멸生住離滅 이라 낳고 변하고 멸함이 있다 하더라도, 본바탕은 낳음이 없습니다. 본바탕은 영원히 머물러 있습니다. 상주常住합니다. 낳음이 없거니 죽음이 없습니다. 한번 생겨나야 죽음이 있는 것이지 다시 생겨나지 않는 것이 무슨 죽음이 있겠습니까? 즉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란 말입니다. 불생불멸을 우리가 이론적으로 정립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허두에 말한 대수행인 입니다.

 

지금 안 보이고 납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역시 꼭 우리는 대수행인 대승법을 머리에 두어야 우리 고난도 우리 가정적인 불평도 사회갈등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은 모순뿐 이라서 서로 상충이 되고 반복되고 인간사회의 모든 위기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에 오로지 자증自證의 성지聖智를 구한다 말입니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원래 생이 없다. 모든 것이 다 자기마음에서 나왔다. 또는 우리가 바로 본다 할 때에는 본체本體에서 본다 할 때는 생 하고 멸하고 변화가 없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생사生死를 면치 못 합니다. 그것으로는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 합니다. 우선 이치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이치로 안 다음에는 이치의 참다운 생명을 구합니다. 그럴 때는 자증自證 스스로 증명합니다.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해서 증명합니다.

 

참선, 염불, 주문은 둘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반목을 합니다.

내 것 만이 옳다, 이것만이 옳다 하지만 본체本体 근본을 전부 파악한 뒤에는 주문을 외우나, 염불을 하나, 화두를 드나 똑 같은 것입니다. 본체를 파악하지 못 할 때는 주문, 염불, 참선이 바른 대승공부가 아닙니다. 대수행인大修行人의 공부를 한다고 할 때는 모두가 선이고 모두가 염불이고 모두가 다 바른 공부입니다. 문제는 본체 근본을 딱 들어서 근본에다 우리의 마음을 심어야 됩니다. 한 번 심으면 그때는 옴마니반메훔이나 아미타불이나 무자 화두를 하나 다 그것이 모두가 선이고 모두 참다운 일승적 대승大乘 공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기 스스로 증명하는 성지, 성자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자타自他가 없다, 주객主客이 없다, 이와 같이 아는 정도 이것만 가지고는 성지가 못 됩니다. 성자의 지혜라는 것은 이론과 더불어 본 체성體性 본 근본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영원의 생명이 있다고 하면 영원의 생명은 말로만 해서는 우리가 실감을 못 합니다. 참다운 힘이 못 됩니다.

 

우리가 정말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떠나서 시공時空을 떠나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불성佛性을 파악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증명해서 참선, 염불, 주문, 기도를 공부해서 증명하고 그러한 생명을 체험해서 자기 생명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그렇게 되어야 만이 비로소 성지聖智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대수행인 대승의 공부 방법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대수행인이 되어야 만이 현대인의 갈등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간혜乾慧입니다.

간혜하고 성지聖智는 서로 대척적對蹠的인 반대가 되는 개념입니다.

성지聖智는 영원적인 생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불구부정不垢不淨한 더럽혀지지도 않고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정화시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더러워져야 맑히고 할 것인데 더러워지지 않은 것은 맑힐 필요가 없으니 불구부정입니다. 이러한 영생永生의 존재存在, 영생永生의 생명生命, 불성佛性자리, 이런 것을 증명할 때는 성지聖智인 것이고 증명을 미처 못 하나 이론적으로는 아는 지혜는 간혜乾慧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약적으로 성지聖智는 될 수 없습니다.

 

성지는 오랫동안 닦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간혜만은 신심도 있고 머리가 좋은 사람은 비약적으로 단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꼭 간혜乾慧만은 파악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진리 가장 근원적인 실상 지혜, 중도 지혜 이것만은 꼭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문도 참다운 주문이고 염불도 참다운 염불이고 참선도 참다운 참선입니다.

 

간혜乾慧로 해서 중도실상을 파악하지 못 하면 선도 참다운 선이 못 되고 염불도 참다운 염불이 못 되고 주문도 참다운 주문이 못 됩니다. 그럴 때는 방편공부입니다. 수유지혜雖有智慧,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미득정수未得定水 아직 선정의 물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참선이 선정인데 염불로 하나 주문으로 하나 화두로 하나 똑 같습니다. 다만 자기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분별시비 안 하고 꾸벅꾸벅 혼침도 않고 분별시비 않고 혼침과 분별시비를 떠나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해서 오로지 한 마음을 가지려는 그 마음 한 마음도 역시 나쁜데 얽매이는 마음이 아니라, 부처님 불성만 지향해서 바른 마음이 혼침하지 않고 또는 분별시비 않고 오로지 그 마음이 바로 선정입니다.

 

그런데 간혜乾慧 이것은 아직 그와 같은 그 마음이 못 됩니다.

한 마음이 못 되어서 분별시비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혜乾慧인데 비록 천지 우주의 진리를 이론적으로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안다 하더라도 아직 선정의 물을 맛보지 못 합니다.

 

선정禪定이 오랫동안 삼매에 잠겨서 우리 번뇌가 녹고 생리가 정화되고 우리 심신心身이 정화가 되어 가지고서 그런 심신 정화의 물로 닦아 내야만이 비로소 간혜가 참다운 성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선 간혜만을 확립시켜 놓아야 합니다. 간혜가 성지가 되기 위해서는 참선, 염불, 기도를 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확 트입니다. 확 트여서 구경지究竟地 가장 끝까지 올라가서 조금도 번뇌가 없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입니다. 거기가 우리의 목표 입니다. 성지가 우리의 목표 입니다.

 

허나 우리 중생은 그런 성지는커녕 아직 간혜도 못 가니까 분별시비하고 고통이 많습니다. 간혜만 되어도 별로 고통이 없습니다. 경계에 부딪히면 진심瞋心도 내고 탐심貪心도 낼지라도 오래가지 못 합니다. 간혜 마저 없다면 거기에 휘말려 환경이나 경계에 부딪혀서 삿된 일도 많이 하고 죄도 많이 범합니다마는 비록 성지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간혜로 해서 이치를 바로 알면 나쁜 일을 오래할 수 없습니다. 업장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릇된 일을 하더라도 그냥 다시 바른 길로 회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이 가치관이 혼란 전도되어 선인지 악인지 모를 때에는 꼭 무엇보다도 간혜지乾慧智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간혜를 구해야 만이 바른 정신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간혜지라도 얻어서 믿는 신앙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따라서 간혜지가 못 되어서 그냥 덮어놓고 믿는 신앙은 참다운 믿음이 못 됩니다. 가령 옴마니반메훔을 일심一心으로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공덕이 큽니다. 안 쉬고 한다고 하면 성근에 따라 성불成佛을 할 수 있겠지요. 허나 그것은 더딥니다. 따라서 마땅히 간혜지를 먼저 얻어야 합니다.

 

염불도 역시 염불만 애쓰고 하면 성불成佛이 됩니다. 허나 간혜지를 얻지 못해가지고 법의 실상實相을 모르면 그것 역시 더딥니다. 참선도 역시 화두를 들어서 애쓰면 애쓴 만큼 공부가 됩니다마는, 간혜지가 미처 확립이 못되어 있으면 공부가 더딥니다. 그러면 간혜지란 무엇인가 법이 원래 둘이 아닙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를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하나의 동일률同一律 이라, 천지우주天地宇宙를 오직 자기와 동일同一한 하나로 봅니다.

 

다만,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체와 용이 있고, 성과 상이 있습니다.

본체에 갖추어 있는 공덕이 많기 때문에 그럴 때는 연 따라 용으로 활용합니다. 현상과 실상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체와 용 성품性品과 상 이와 같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둘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듯이 이와 같이 간혜라는 것은 본체本體를 보는 것이고 동시에 본체本體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하나로 본다는 말입니다.

 

범부어신인중凡夫於信因中 이라, 범부凡夫하면 진리를 모르는 것이 범부입니다. 범부凡夫는 성자聖者와 대립적으로 쓰입니다. 진리를 깨달아서 증명한 사람을 성자聖者, 진리를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은 범부凡夫입니다. 범부凡夫가 신인信因 , 먼저 믿음을 심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계과불공덕契果佛功德이라, 과불 이것은 부처님의 지위를 성취한 원만 성취한 것이 과불果佛 입니다.

 

바로 본다고 할 때는 우리 모두가 부처인데, 우리 모두가 부처라는 그런 차원의 부처가 아니라 닦고 닦아서 애를 써서 정말로 성불成佛해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불교佛敎말로 삼명육통을 다 갖추고 하는 일체 공덕을 갖춘 부처, 그런 부처가 과불입니다. 그런 일체 공덕을 갖춘 부처하고 우리가 딱 맞아서 계합됩니다. 부처하고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신앙을 가질 때 어떻게 갖는가 하면, 그냥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다, 부처님은 저만치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와 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위대한 도인들이 성불成佛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천지우주天地宇宙를 둘로 안보고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자리, 일체 공덕과 일체 지혜를 갖춘 그 자리, 그 자리하고 조금도 내가 다름이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믿는 보통 신앙은 참다운 바른 정신正信이 못 됩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100% 다 믿어야 바른 신앙입니다. 즉 자기 밖의 도를 구하고 자기 마음 밖의 부처를 구하고 이런 것은 정신正信이 못 됩니다. 천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서, 모두를 자기 마음의 표현으로 보는 신앙, 또는 그런 마음 가운데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삼세제불이 갖는 무량한 공덕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분들도 역시 어려운 일에 처하면 마음이 비굴해지고 비하되어서 자기를 과소평가 합니다. 허나 그렇게 하면 그때는 정신正信이 못 됩니다. 내가 지금 내 생명이 당장 끊어진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석가모니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무량 공덕이 있다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당장 내일 죽고, 생명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바른 신앙 그것은 나한테 무량 공덕이 있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내가 못났다, 내가 많이 닦아서 올라가야 한다, 나는 업장이 많다, 그것만 생각해서는 참다운 신앙이 못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참회할 때는 업장 많은 것도 참회해야 되지만 근본적인 신앙, 근본 적인 우리 마음의 줏대만은 부처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안 믿으면 바른 정신正信이 못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정신이라, 바른 신앙을 이루는 것이로다. 차의식此義識 이러한 뜻을 안다면 불자굴不自屈 불자고不自高라 스스로 비굴하지 않고 스스로 높다고 아만심我慢心을 안 부립니다. 우리 중생은 조금 곤란한 경우에 처하면 그냥 비굴해서 자기 비하하고 비관을 합니다. 조금 잘 되면 우쭐해서 자기 아만심我慢心을 냅니다. 이런 것은 역시 나한테 있는 참다운 진리를 참다운 불성을 몰라서 그럽니다. 바른 정신이 학립되면 비굴도 않고 교만도 못 냅니다.

 

왜 못 내냐 하면 천지 우주가 나와 더불어 다 똑같습니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가 나와 똑 같습니다. 본바탕은 똑 같습니다 다만 현상적인 차이만 약간 있을 뿐입니다. 닦으면 내가 석가가 되고 예수가 됩니다. 나한테 내 실력의 개발 여하에 따라 다 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비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못난 사람이 앞에 있어도 그 사람도 역시 닦으면 나 이상이 될 수 있는데 내가 아만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바른 정신正信에 있어서는 교만심도 못 내고 비관이나 비굴도 못 내는 것입니다.

 

즉 차의식此義識 이러한 부처님의 성공덕聖功德을 믿는다 할 때에는 불자굴不自屈 자기 스스로 비굴 할레야 할 필요도 없고 불자고不自高라 스스로 고만해서 교만심을 못 냅니다. 바른 신앙을 못 한 사람들이 자칫하면 교만심을 내고 비굴합니다. 생명이란 원래 죽지 않는 것이고 모양만 바꾸는 것이지 죽음이 앞에 있다하더라도 별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하고 가장 친한 사람이 죽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냥 눈물을 흘릴망정 별로 큰 슬픔도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에 큰 동요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본바탕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의연하게 행동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범부가 믿음을 가질 때는 부처님께서 가지고 있는 무량 공덕에 딱 들어맞아서 분호불수分毫不殊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히 신앙심이 되는 것이로다. 다 아시는 말씀이나, 부처님 법문은 들으면 들을수록 누가 하나 새롭게 우리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아시는 정도의 것도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을 갖추고 있으나 번뇌복고煩惱覆故라 번뇌에 가려있기 때문에 불능득견不能得見이라 능히 얻어 알지를 못합니다. 여래상주如來常住라 부처님께서는 항시 머물러 계시면서 무유변역無有變易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체 중생한테 불성이 있다는 것을 너무 익히 들어서 모르는 불교인은 없을 겁니다. 허나 여래상주如來常住라 부처님께서는 항시 머물러 계시고 바꾸어짐이 없다 이것은 믿기가 어렵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바꾸어짐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시 계십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워서 미처 못 볼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아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기에 나 같은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전 물리학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서는 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말씀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

 

일체 물질이 각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사 하나의 산소를 볼 때 양자 중성자를 중심으로 8개의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자핵과 그 주변에 도는 전자의 거리가 비율로 하면 지구와 태양의 거리보다도 훨씬 멀다는 겁니다. 우리 지구와 태양과의 사이는 얼마나 텅 비어 있습니까? 헌데 일체 만물을 구성하는 각 원소, 원자, 소립자를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의 거리가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보다도 더 멀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은 대부분 공간뿐입니다. 그러한 공간뿐인 것이 모여서 한 세포가 되고 우리 몸이나 일체 만유가 구성 되었습니다. 저 뿌리에서 보면 사실 대부분 비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그런 걸 잘 못 보니까 인간 정도 밖에는 안 보이니까 이런 몸이 있다. 희다, 검다, 예쁘다, 밉다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와 같이 비어있는 존재가 모여 있는데 말입니다.

 

또한 양자는 무엇인가? 전자는 무엇인가? 이것도 에너지의 운동에 불과 한 것입니다. 이런 생명도 오래 못 갑니다. 단 몇 초에 불과합니다. 전자는 전자 그대로 항상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냥 몇 초만 지나면 변화 됩니다. 이와 같이 전변무상轉變無常한 것들이 모여서 텅텅 비어 있는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물질이 된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런 것을 모릅니다. 다만 겉으로 된 것만 보기 때문에 내가 있다 네가 있다 합니다.

 

현대 물리학적인 지혜는 부처님의 예지와 거의 들어맞습니다. 다만 그들의 척도가 짧아서 아직은 부처님의 지혜에 못 미칠 뿐이지 거의 들어맞습니다. 제법諸法이 공이라, 모든 것이 텅텅 비어 있는 그런 공을 현대 물리학은 거의 증명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볼 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이 다 비어있다. 오온五蘊이라는 것은 정신과 물질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참 알기가 곤란합니다. 분명히 있는데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는 어렴풋이나마 짐작도 하고 증명도 하려고합니다. 2,500년 전 옛날에 부처님 또는 도인들께서는 이러한 것을 증명을 다하고 실상을 바로 본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보면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분명히 증명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습니다. 내가 이대로 있고 네가 이대로 있고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고 그것밖에 못 보면 집착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금도 좋고, 은도 좋고, 좋은 것을 보면 집착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집착을 털려면 무상의 길 허망의 길을 알아야만 집착을 텁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상無常 하지 않고 무상을 경과해서 다 그와 같이 원자도 비어있고, 다 비어 있다는 사실은 내 몸도 비어있고 우주가 텅텅 비어있는 것인데 바로 보면 그림자 같은 모양이 여기저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천지우주는 다 비어만 있을 것인가? 비어있는 그 내용 다만 비어있지 않은 참다운 생명 이것이 불성佛性입니다.

 

물질은 없지만 천지우주가 모두 마음뿐이지마는 천지우주가 생명뿐이지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하면 알아먹기 곤란스럽습니다. 이렇게 물질뿐인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왜 모두가 마음 뿐 이라고 하는가? 도인이 보면 마음뿐인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생명의 운동 에너지에 불과 합니다. 헌데 비어있지 않은 참다운 생명 영원한 생명 이것이 불성佛性이고 이것을 인격적으로 표현 할 때 여래如來이고 부처님 입니다.

 

따라서 여래상주如來常住라 부처님은 항시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 인간이 보는 물질은 텅텅 비어 있지마는 참다운 생명 비어있지 않은 영원적인 생명은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가령 천지 우주가 파괴가 되어서 불교에서 말하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허물어지고 텅텅 빈다 하더라도 참다운 생명은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머물러 있으면서 무유변역無有變易이라, 변화하고 바꾸어짐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여기까지 가서 여래상주如來常住, 영원적인 생명의 존재 이것이 머물러 있는 이 자리를 보고 증명할 때가 바로 성지聖智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만이 비로소 내가 공부가 되었구나! 몸은 몇 천 번 바뀌어 진다 하더라도, 생명은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그러기에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멸한다 할지라도 멸하지 않습니다. 모양만 멸합니다.

 

따라서 하심下心할 때도 역시 중생들은 자기를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아만심我慢心 있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굽신굽신하고 겸허하면 누구나 좋아합니다만, 살려고 하면 그렇게 해야 만이 사람 사는 세상은 순탄한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잘 못 되어서 참 고통이 많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겸허 하면 문제는 간단히 풀릴 것인데 만나면 서로 욕하고 헐뜯고 책임전가를 시키니 문제가 풀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심下心하려면 역시 법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법의 본질을 모르면 하심下心도 잘 못 합니다. 법계진시비로불法界眞是毘盧佛이라 법계란 천지 우주를 통 털어 말합니다. 즉 우주 만유가 바로 법계입니다. 법계나 만법萬法이나 거의 같은 뜻입니다. 법계 모두가 바로 비로불이라 비로불이라는 것은 대일여래大日如來 법신불을 가리켜서 말입니다. 모양 나온 화신불化身佛이 아니라, 모양의 본질 되는 본래 부처님 우리말로 풀이하면 대일여래 또는 법신부처님 이것이 비로자나불입니다.

 

금강산에도 비로봉이 있는데 제일봉을 가리켜 비로봉이라는 말을 씁니다마는 하여튼 모든 법의 시초 법신부처님 이것이 비로불입니다. 법계가 다 비로자나부처님이기 때문에 수도誰道 누가 말했던가? 현우귀여천賢愚貴與賤이라, 누가 현명하고 어리석고 귀하고 천하다고 말했든가? 이 글귀처럼 사실 바로 본다하면 다 법신부처님이고 비로자나부처님 아닌 것이 없는데 누가 구태여 잘 몰라서 귀하다, 천하다 현명하다 말했던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법계法界가 다 비로자나부처님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나가 현명하고 어리석고 귀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도다.

 

애경노유개유불愛敬老維皆有佛이라 어른이나, 아이나 노인이나 모두가 똑 같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애경하고 사랑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너와 내가 따로 있고 잘나고, 못나고, 이와 같이 귀천과 현우를 가리면 사람을 차별대우하기가 쉽습니다. 허나 사실은 겉의 이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마땅히 본질을 볼 때는 똑같이 비로자나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명하고 어리석고 차이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인이나 어린이나 똑같이 공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항상엄식적광전恒常嚴式寂光殿이라 항상 이렇게 함으로 해서 자기 스스로 마음을 장엄해서 참다운 부처가 되어갑니다. 이렇게 돼야만 비로소 하심下心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겸허하니 겸손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법의 본질을 모르면 우리 행동도 참다운 겸허한 마음을 못 냅니다. 억지로 내면 위선이 되어서 도리어 거북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간혜지乾慧智로 안다고 할지라도 그로해서 부처가 된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우리가 본래적인 당위적 부처님이지만 공부를 차근차근 해 가야만이 부처가 됩니다. 그런 과정을 불교적 술어로 해서 해행위解行位라 즉, 풀이하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말입니다. 해행위를 거쳐서 참답게 법을 증명합니다. 아직은 증명을 못해서 성지聖智가 못 나올 때가 해행위입니다.

 

해행위解行位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순복분順福分이라 미처 복이 부족하면 공부할 때 막힘이 많습니다. 공부하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몸이 아프기도 하고 남들의 방해가 있기도 하고 이와 같이 복이 부족한 사람들은 장애가 많습니다. 허나 복을 많이 지은 사람들은 장애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가 많은 사람도 복을 지어야 합니다.

 

보시도 하고 공덕도 베풀고 할 때는 자기도 모른 가운데 복이 많아집니다. 공부 하려는데 방해가 많다 또는 여러 가지 고난이 많다 하는 분들은 유감스럽지마는 역시 복이 좀 부족합니다. 어떤 분들은 불교는 지혜 닦아 가지고 깨달으면 되지 복이 무슨 필요 있느냐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 할 때는 복이 적은지 많은지 구분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복 많은 분들은 순탄하게 갑니다. 따라서 복을 지어야 합니다.

 

복을 짓는 것은 보시도 필요하지만 계행戒行 닦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오계십선五戒十善이라 살생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삿된 음란한 짓 말고, 거짓말 욕설 또는 이간하는 말 하지 말고, 술 먹지 말고 계행 지키는 것이 복을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공부하는데 큰 장애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남한테 보시하고 계행 지키고 하는 것이 순복분順福分이란 단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이 순해탈분順解脫分이라 해탈을 구합니다. 해탈은 곧 성불이 아니겠습니까. 해탈을 구한다 하더라도 구하는 정도가 미온적일 때는 우리 행동이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해탈을 구하는 마음이 강할 때는 행동으로 옮아갑니다. 행동으로 옮아갈 때, 그때가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 꼭 내가 성불해야 되겠구나! 신명을 다해야겠구나! 이렇게 결단심을 낼 때가 순결택분順決擇分입니다.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보통은 순해탈분에 머물러 버립니다.

 

즉 산현이라 아직은 성지의 경지에 못가고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꼭 내가 해야겠구나 하고 마음먹고 가행정진으로 수행할 때가 순결택분順決擇分입니다. 불교 말로하면 결단간택決斷揀擇이라, 결단심決斷心을 내어 기어코 해야겠다는 서원을 세웁니다.

 

이것이 소위 사가행四加行이라, 결재하고 공부하는 분들은 보통 순결택분順決擇分에 해당합니다. 재가불자님들은 보통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환경이 어렵기 때문에 순해탈분에 머무르고 말아 유감스럽지만, 그때그때 기회를 봐서 순결택분까지 가서 사가행四加行을 해가지고 성불을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순서인 것이고 그분의 서원과 열의가 강하면 비약적으로 순복분에서 훌쩍 넘어서 순해탈분 넘어서, 견성오도 하는 성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 아닙니까마는 그러나 일반적인 순서에서는 신심을 내고 복을 짓는 계행 지키고 보시도 해서 더욱 우리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하면서 나중에 익어지면 꼭 내가 성불을 해야겠구나하고 결단적인 간택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해갑니다마는 가행전의 자량資糧이라, 생활할 때 준비되는 물자가 자량입니다.

 

결단간택이라, 꼭 공부해야지 성불해야지 하는 마음을 낸다고 해도 바른 준비가 없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먼 길을 갈 때에 충분한 노자가 없으면 갈 수가 없듯이 성불을 목표로 해도 성불을 할 만큼 준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란 계체청정戒體淸淨 실상묘혜實相妙慧 참회멸죄懺悔滅罪 이러한 준비가 있어야만 자량이 있어야 만이 비로소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자꾸 중복이 되는 감이 있습니다만 그만큼 중요하니까 재차 중복해서 말씀드립니다.

 

계체청정戒體淸淨이라 성불하려 애를 써도 계행戒行이 청정하지 못하면 성불成佛을 못합니다. 마음으로는 뛰어넘어 부처님 지위에 갔다 할지라도 역시 그러한 것은 아직 자기 관념뿐이지 실지로 자기가 그것을 증명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한 부처님 불성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행이 바르지 못하면 우리가 증명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못하는가 하면, 계행이 바르지 못하면 삼매에 들어가지 못 합니다. 삼매라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산란한 마음 죄스러운 마음을 다 씻어내는 것인데 계행이 바르지 못하면 일념이 되지 못 합니다.

 

살생을 많이 하고 남하고 욕하고 싸우고 삿된 음란한 짓을 하고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계행이 발라서 살생, , 음란도 않고 술도 안 먹고, 그런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 계행 지키는 마음이 앞서야 만이 오로지 삼매에 들 수가 있습니다. 삼매의 정수, 선정의 물, 삼매나 선정은 똑 같습니다. 마음이 하나의 경계, 정신正信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원숭이 같이 굉장히 경망하여 왔다, 갔다 합니다.

마치 바람 앞에 있는 하나의 털끝같이 바람이 안 분다 하더라도 털은 흔들리는데, 바람이 불면 얼마나 흔들리겠습니까? 중생심은 그와 똑같이 산란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조금도 동요 안 할 때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딱 정지가 되어야 하는데 정지가 되려면 먼저 계체가 청정이라, 계행이 맑아야 됩니다. 내 마음과 내 몸에는 조금도 더러움이 없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간혜지乾慧智, 이론적, 관념적으로 아는 것은 계체가 청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간혜지는 둬야하지마는 정작 내가 성불해야 되겠구나 하고서 결단을 내린 다음에는 철저한 계행이 앞서야 만이 삼매에 듭니다. 이와 같이 계체가 청정하고 또는 실상묘혜實相妙慧, 중도실상의 지혜를 해득해야 합니다. 간혜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실상의 지혜 우리가 보는 것은 아무리 실제로 보인다 해도 실제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는 꿈이나 그림자와 같습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 이것도 실제가 아닙니다. 나나 너나 우리가 보는 선이나 악은 실제가 아닙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불교를 정신正信으로 입문 할 때는 마땅히 먼저 허망무상虛妄無常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학식 어떠한 지혜 모두가 다 참다운 중도의 실상지혜가 아니면 그것은 다 허망한 망상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실상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둘이 아닙니다. 오직 우주가 하나의 생명生命 하나의 부처님의 생명입니다.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닙니다. 란 이것은 하나의 그림자를 라고 고집하는 것이지 실제로 있지 않습니다. 오직 있는 것은 우주대의宇宙大義 부처님뿐 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못 한다 해도 이 생각을 굳이 해서 꼭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실상지혜實相智慧가 나옵니다.

 

주객主客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주객主客을 초월한 하나의 진리뿐 입니다. 이러한 중도실상의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제법공諸法空인 허망 무상한 것을 깨달아서 하나의 영원한 여래상주如來常住라 영원히 머무르는 부처님 생명 이런 것을 딱 파악하는 것이 실상묘혜實相妙慧입니다. 실상묘혜를 가지고서 공부를 해야 만이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正信입니다.

 

실상묘혜 중도실상의 영원히 멸치 않는 참다운 지혜,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이 옳다, 그르다 하는 이데올로기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원적인 모두 부처라는 하나의 사상思想, 이것이 실상묘혜 입니다. 실상묘혜는 간혜지로서 먼저 얻어야 합니다.

 

다음은 참회멸죄懺悔滅罪라 비록 하나의 진리고 본래로 봐서는 다 부처이고 하지만, 우리 현상계로 한번 나온 뒤에는 상대 유한한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번뇌를 많이 일으킵니다. 우리 가운데는 나다 너다 사랑스럽다, 예쁘다 밉다하는 그런 것이 우리 마음에 딱 절어있습니다.

 

비록 이런 실상묘혜를 느낀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잠재의식에 들어있는 분별 시비하는 그런 생각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멸하지 않습니다. 역시 미운사람 보면 미워지고 좋은 사람 보면 좋아지고 이런 것이 다 죄란 말입니다.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고 죄라 구분하고 하는 그런 것을 참회한단 말입니다. 누가 누굴 욕을 했다 미워했다 내가 훔쳤다 이것도 역시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있고 남이 있으니까 훔치기도 하고 미워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고 남이 없다 하면 미워할 리도 만무하고 사랑할리도 만무합니다.

 

따라서 그런 허물이 근본 되는 라 하는 그 괴물 말입니다. ‘라는 요물 그걸 없애버리면 실상지혜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부처뿐인데 내가 괜히 라고 했구나! 자기라고 망념 하는 그것을 부정한다 말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참회입니다. 이와 같이 참회를 해야 만이 비로소 상대 유한에서 빚어지는 죄를 없앱니다. 이렇게 공부 하는 것이 성불하기 위해서 하는 마음의 충족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우리 불자의 재산인 것입니다. 계행 청정하는 것과 또 한 가지 실상묘혜도 우리 재산 참회해서 둘로 구분 않는 것, 남과 나를 구분해서 차별대우 하는 것 이런 것을 참회 하는 것 이것도 역시 참다운 자산資産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도를 밝힐 때에 먼저 해야 할 것은 계행을 지켜야 합니다. 란 위없는 진리에 나아가는 근본이라 말입니다. 계율로 말미암아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선정禪定이 나오고 선정으로 해서 참다운 지혜가 발합니다. 우리가 주문을 하나 염불을 하나 화두를 하나 뭘 하던 간에 꼭 삼매는 들어가야 합니다. 삼매는 한 달 두 달 하루 이틀 사람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습니다마는 삼매에 들어서 마음이 딱 모아져야만 우리의 번뇌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무시겁래로 지은 산란한 그런 번뇌가 일조일석에 그냥 끊어지겠습니까? 우리 마음 뿌리가 부처님인데 딱 모아서 뭉친 마음으로 밀어붙여야만 마음 뿌리인 불성에 닿습니다. 보통 상대유한적인 범위에서 뱅뱅 도는 윤회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는 깊게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계행을 지키지 않고서 수행을 한다면 옳지 않다는 겁니다. 계행을 지키며 수행하는 사람은 용과 천상이 지킵니다. 우리는 용도 안 보이고 천상도 안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 하는 것입니다. 용 기운이나 천신 기운도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사실적인 실상도 못 보는 것이고 실상까지 미처 못 가서 있는 어정쩡한 중간되는 존재인 용이나 천도 못 보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 마음 따라서 행동 따라서 이러한 용이나 신은 지키고 또는 안 지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럽고 부정하면 용이나 신은 우리 사람 같은 몸이 아니고 보다 미세하고 밝기 때문에 분명히 기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행동을 다 안다 말입니다.

 

몇 자나 되는 철판으로 방을 만들어서 거기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용이나 신들은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적인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바르게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기 양심도 가책을 안 받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사람들은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귀신들이나 이런 신들이 비방도 않고 방해도 않고 우리를 지킵니다. 참다운 진리나 선을 방해하는 마구니들은 우리를 공경하고 부러워서 가버리고 맙니다.

 

계를 파계하는 사람들은 귀신이 말하기를 큰 원수로구나! 물론 우리는 어두워서 이 말소리가 안 들린다 하더라도 귀신들은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물을 죽이고 삿된 음란한 짓 하고 욕설 거짓말한다고 할 때는 귀신들은 벌써 알고 꾸짖고서 걸음걸음 방해를 합니다. 사업이 안 되고 실패합니다. 여러 가지 원인도 많이 있지마는 우리가 바른 행동을 못 취할 때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울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본래 최상의 부처이니까 두려움도 없고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석가와 더불어서 나와 둘이 아니니까 두려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몸이 있을 때는 우리 행동 하나하나 계행을 지키고 못 지키고에 따라서 신이나 귀신이나 영들의 가피나 방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능엄경楞嚴經이란 소중한 경전에 있는 말씀입니다.

가사백천겁假使百千劫 가사 백천겁 동안 무량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소작업불망所作業不亡 한번 지은바 업은 잊혀지지 않는다 말입니다. 자기가 나쁜 일을 했으면 그것이 잊어버려지면 좋겠지마는 한번 지어 놓으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잠재의식이나 천지우주에다 흔적을 둡니다. 즉 훈습熏習합니다. 딱 두었다가 인연회우시因緣會遇時 비록 금생에는 설사 못 만난다 하더라도 인연이 딱 닿는 경우에는 과보환자수果報還自受 스스로 자기가 지은 바를 받습니다. 한 번 누군가를 죽였다면 금생에는 몰라서 넘어가버렸다 해도 나중에 다시 인연이 닿으면 받는 것입니다. 인과因果는 조금도 차착差錯이 없습니다. 꼭 받습니다. 이와 같이 인과因果는 무서운 것이니까 계행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중화大衆化시대입니다. 수행법이 너무 고답적이면 곤란합니다. 누구나가 공부를 쉽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분도 역시 공부 하는 방식을 아주 까다롭게 내어갖고 골치가 아프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공부 방식은 아주 쉬워야 합니다. 아주 쉽고 누구나 해야 하는 겁니다. 지금 기독교가 어째서 그렇게 신도가 많은 것인가. 공부하는 방식이 쉽다 말입니다. 하나님 믿고 십계명 지키고 기도하면 되니까요. 이렇게 간단명료하니까 누구나 따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래라 저래라 굉장히 복잡난해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난해하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될 것인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사실은 이왕이수易往易修라 쉬운 것이 공부가 더 잘될 때가 있다 말입니다.

 

지금은 대중적으로 집단적으로 성불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방법도 아주 쉬워야 합니다. 출가를 해서 오로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조금 어렵다 하더라도 무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재가 불자들은 공부 방식이 어려우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어린 사람들이 따라 올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쉬운 쪽으로 다 빼앗기고 맙니다. 한데 부처님 되는 공부 가운데서 제일 쉽고 공덕이 많은 공부 이것이 바로 염불 공부입니다. 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어느 큰 스님도 염불은 하근기가 한다. 상근기는 참선해야한다. 이와 같이 한계를 지어서 말씀하는 분도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방편으로 그 분이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염불이라고 해서 하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셨고 사실은 어떤 누구나가 하기 쉬우면서 진척은 제일 빠른 공부인 것입니다. 팔만장경을 보십시오. 어떤 경전이나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이라 부처를 염하고 법을 염하고 승을 염하고 그런 법문 없는 곳이 있습니까. 몇 천 번 몇 만 번 염불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염불은 무엇인가? 부처를 생각하는 겁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가 바로 나의 참 생명이고 우주의 참 생명이고 우주의 실상 중도 이것이 부처 아닙니까. 조금만 고쳐서 생각해보면 염불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본 생명이 부처요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입니다.

 

자타自他 모두가 부처이거늘 부처를 생각하는 그것이 낮은 공부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실상이 부처고 중도가 다 부천데 실상을 생각하고 중도를 생각하는 공부가 낮은 공부이겠습니까. 참선을 하건 주문을 하건 염불을 하는 마음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닥에 깔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공부나 염불하는 마음이 깔려있지 않으면 그것은 간절한 공부가 못 됩니다.

 

부처한테 간절히 가고 싶은 그 마음 부처가 되고 싶은 그 마음 염불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이것 하나 저것 하나 걸음걸음 부처 가까이 가서 부처와 하나 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약염불자約念佛者 만약 염불하는 자는 당지當知 마땅히 알지라. 차인此人 이 사람은 시인중분다리화是人中分陀利花 사람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꽃이라

부처님께서 방편설로 더러 계신다 하더라도 이런 말씀은 방편설이 아닙니다. 같은 경이라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방편설 경이 아닙니다.

 

물론 이 경 가운데도 방편적인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이 말씀은 가장 고도한 부처님의 진실설입니다. 그러기에 관음세지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백천百千 보살이 많이 있으나 백천百千 보살을 대변하는 보살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라는 것은 한 말로 하면 자비와 지혜 아닙니까. 자비를 대변하는 성령은 관음보살이고 지혜를 대변하는 성령은 세지보살입니다.

 

즉 따라서 무슨 보살 무슨 보살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관음 세지 두 보살의 화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 이 보살에 의해서 한 번에 의미가 모아집니다. 하나로 모아지면 부처인 것이고 둘로 구분하면 관음觀音 세지勢至인 것이고 더 구분하면 백천관음百千觀音이 되겠지요. 천지우주가 모두 다 관음하십니다. 백 천 만법이 모두 다 관음하십니다.

 

이와 같이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 향기로운 꽃이니까 가장 고도한 두 보살이 가장 좋은 벗으로 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관음보살 한 번 부르고 나무아미타불 한 번 외우는 것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벗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실상묘혜實相妙慧 참다운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염불을 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 부처님은 내 밖에 계신다.

 

이래 버리면 관음 세지가 자기의 참다운 벗으로 삼질 못합니다.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밖에서 안 구하고 자기 생명의 본질로 구하고 우주 만유를 하나의 부처로 구하는 그런 염불을 할 때만이 천지우주의 참다운 성령인 자비와지혜의 성령인 관음 세지보살이 우리를 좋은 벗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약염력견강若念力堅强 수입오욕적중雖入五慾賊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 만약 우리가 염불하는 힘이 아주 굳건히 강하다고 하면 비록 오욕이라 재물이 있고 명예가 있고 음욕이 있고 또는 이성, 음식, 잠 욕심구덩이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욕심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나 같습니다. 불위소해不爲所害라 능히 헤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줏대가 없이 산란하니까 욕심에 끌려가고 진심嗔心 낼 때는 진심내고 그러는 것이지 정말로 염불하는 마음이 강해서 하나로 모아질 때는 이런 오욕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해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염력강고念力强故 득견아신得見我身이라 화두를 염하고 부처님을 염하고 또는 주문을 염하고 이런 염하는 기운이 강하면 바로 나의 몸, 부처님 몸을 본다 말입니다 즉 부처님의 참다운 영원적인 불생불멸의 법신을 스스로 증합니다.

 

일심불생一心不生만법무구萬法無咎라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이 없다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좀 어렵지마는 우리 생활선상에서 그때그때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일심불생一心不生이라 바로 보면 우리 마음이 부처님이라는 생명뿐인데 너나 나다 좋다 궂다 하는 분별 시비하는 유한상대적인 마음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이 조금도 허물이 없다 말입니다. 시비하고 구분할 때 허물이 있는 것이지 법의 본질을 보고서 분별 시비가 없다고 하면 허물이 별로 없습니다.

 

약능요심約能了心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우리 마음이 뭣인가 깨달아 안다면 만 가지 행동이 갖추어져서 허물이 없다 말입니다. 이것도 내내야 앞에 것이나 뜻이 같습니다. 우리 중생은 마음의 본 바탕을 모르기 때문에 허물도 많이 있고 행동도 그르칩니다마는 마음의 본 바탕을 안다고 할 때는 덕성이나 지혜가 갖추어져서 별로 허물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심화기평자心和氣平者 만복자집萬福自集이라 이것은 채근담菜根譚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가 하도 혼란스럽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만 하면 너무 피상적이니까 구태여 이런 문구를 소개하는 셈입니다. 마음이 화기롭고 평상심이 있는 사람들은 만복자집萬福自集이라 이것도 자업자득이나 같은 말이 되겠습니다.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다 말입니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그럴 때에 불평도 생기는 것이고 박복한 일도 있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항시 화평하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만복이 스스로 모인다는 말입니다.

 

중인유병衆人有病 모든 중생들은 병이 있는데 득문시경得聞是經이라 만약 이 경을 들어서 안다고 하면 병즉소멸病卽消滅 하고 불노불사不老不死 라 병이 곧 소멸되는 동시에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 이것은 법화경法華經』「약왕품藥王品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역시 맨 처음에는 믿기가 어려운 법문입니다마는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생이 지금 병이 없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 병이 있는데 득문시경得聞是經이라 법화경이나 약사경이나 이런 경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참다운 대승경전을 들어서 안다고 하면 병이 곧 소멸함과 동시에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 조금 과장 같습니다만 이것도 우리가 분명히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과 몸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경을 바로 듣고 바로 해석할 때에 아까 말씀처럼 바른 간혜지로 생각한다 할 때는 마음이 확 열려서 웬만한 병은 다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옹졸한 마음이 뭉치고 뭉쳐서 그때는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폐병이면 폐병 하나에도 부처님은 들어 계시는 겁니다. 어떤 바이러스 가운데도 다 들어 계십니다. 어떠한 것이나 부처님이 안 들어 계시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한테 바로 귀의한다고 하면 우리한테 있는 병균도 녹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부정적인 거나 간에 바닥에서 보면 청정미묘한 부처님의 광명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십년 묵은 병도 역시 마음이 확 열려서 내가 부처다 나한테는 무량공덕이 있다 이렇게 정말로 믿으면 병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업장 여하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이고 약도 먹어야 하고 전문가한테 보여야 하는 것이지마는 기본적인 자세 아까 말씀처럼 마음을 확 열어야합니다. 즉 내 마음은 박 아무개, 김 아무개라는 그 마음이 아닙니다. 내 본래 마음은 부처 같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딱 돌려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른 신앙입니다.

 

만약 착한 남자나 여인들이 다만 부처님의 이름만 들어도 무량세월동안 지어온 죽고 살고 하는 죄를 다 없애는데 하물며 부처님을 생각하고 구한다고 할 때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처음 들을 때는 정말 그럴 것인가 하고 의심합니다마는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심심미묘甚深微妙합니다. 이것저것 다 가려서 하신 법문인 것입니다. 깊이깊이 한번 음미를 해보십시오. 바로 안다고 하면 그야말로 본각本覺이라 문득 한 생각 가운데서 우리 죄를 몰록 녹이는 것입니다.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 있는 부처님 사십팔원에 보면 내가 성불하려고 할 때 중생이 극락세계를 가고자해서 내 이름을 진정한 마음으로 열 번만 부른다면 열 번 미처 못 가서 반드시 극락세계 탄생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백 천 번 백만 번 외워도 안 되는 것인데 다만 열 번만 외워도 극락 간다는 말씀이 있다 말입니다. 조금도 에누리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외울 때는 꼭 그러는 것입니다.

 

호리도 의심 없이 딱 믿고서 진실한 마음으로 외운다 할 것 같으면 한 마디에 극락 가고 성불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 순결한 믿음은 우리 마음을 비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잠재의식에 나쁜 것이 많이 들어 있어놔서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좋다 궂다 이런 마음이 들어놔서 의심 없이 못 믿으니까 백만 번 천만 번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분들 중 서른 세분은 위대한 분들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달마가 첫째 그다음에 혜가, 승찬 넷째분이 도신스님입니다. 도신스님 말씀에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 부처를 염하는 마음은 바로 부처요,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 망념은 범부라. 그러니까 대승공부 대수행자의 공부는 지금 우리가 범부라 하더라도 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똑바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하고 빨리 하나 되어 버립니다. 내가 범부다 나는 못났다 이런 차별심 가지고선 공부가 진척이 안 됩니다. 우리가 미처 안 가있지마는 끄트머리를 딱 짚어서 믿어버려야 한다 말입니다.

 

그다음에 맹자의 대학大學의 허두에 나온 말씀입니다. 석가모니 말씀이 아니더라도 2천 년 전에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지도大學之道는 대학의 가르침은 재명명덕在明明德이라 지금 사람들은 모르지마는 대학이라고 할 때는 낮은 공부가 아닙니다. 인간성의 본래 면목을 밝히는데 참다운 대학의 길이 있다 말입니다. 명덕을 밝히는데 요체를 둔다고 할 때 사회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 교육이 명명덕明明德을 잘 못합니다. 명덕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한 이데올로기가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비록 기술은 이것 가르치고 저것 가르친다 하더라도 인간성의 줏대만은 명덕을 밝히는 것을 주장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가치관이 나옵니다. 그렇게 해야만 현대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굉장히 무서운 때 아닙니까.

 

대학지도는 명덕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며 동시에 재친민在親民하며 일반 중생과 친근해서 중생을 가르쳐야 한다 말입니다.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라 그렇게 하면서 마땅히 항시 지극한 선에 머물러야 합니다. 목적은 좋다하더라도 방법이 그르치면 안 됩니다. 방법이나 목적이나 항시 순간 찰나도 지극한 선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명덕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목적만 좋으면 방법은 무관하다 이런 소홀한 말이 나옵니다마는 마땅히 명덕을 밝히는 동시에 수단 하나하나 방법 하나하나를 참다운 윤리 도덕에 맞게끔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공자님 논어와 명심보감의 가르침입니다. 군자는 성인지미成人之美하고 불성인지악不成人之惡하나니 소인은 반시小人反是라 이런 것도 아시는 분은 다 아시지만 지금 현 시대는 너무나 혼란한 시대니까 다 알지만 되새겨야 합니다. 군자는 위대한 사람 바른 도덕적인 사람이 군자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다 군자이십니다. 군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성인지미成人之美라 사람의 좋은 점을 이루게 합니다. 남의 험담이나 하고 남 못되는 거 바라고 시기심이나 하는 것은 성인지미가 못 되는 것입니다. 될수록 남의 좋은 점을 내세우고 남이 성취되게 하는 것이고, 남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그 자리를 북돋아서 좋은 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깎으려고 애쓰면 그 사람은 안 들으려고 합니다.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이루게 하고 나쁜 점은 이루게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소인은 그 반대입니다. 이렇게 혼란한 때는 소인이 참 많습니다. 소인은 모든 일을 남한테만 책임을 지게 합니다. 그다음에 군자는 구제기求諸己하고 소인은 구제인求諸人이라. 군자는 모든 허물을 자기한테 구하고 소인은 모두 남한테만 구합니다. 소인이 될 것인가 군자가 될 것인가. 우리는 군자니까 마땅히 소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괴롭더라도 군자는 꼭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성인지미하고 또한 동시에 책임은 항시 자기한테서 자책해야합니다.

 

자왈子曰 조문도朝聞道하면 석사가의夕死可矣. 다 아시는 말입니다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무방하다 말입니다. 현대란 사회는 비단 선비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당장에 진리를 얻으면 곧 죽어도 무방하다는 뜻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가정도 바른 가정이 서고 사회도 바른 사회가 됩니다. 이와 같이 사상이 혼란한 때는 먼저 바른 가치관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일찍이 영국의 석학인 토인비도 말했습니다. 원자력시대에 있어서는 우리 인류가 불타佛陀가 행한 그런 지위까지 올라가지 않고서는 또는 올라가려고 애쓰지 않고서는 인류가 집단자살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는 정말로 부처님 같은 최상의 지혜로 가려고 하지 않을 때는 정말로 집단자살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실히 그런 조짐을 보이는 것입니다. 마땅히 부처님한테 가는 길 진리를 보는 것이 우리가 심상만 놓는 것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말한 조문석사朝聞夕死라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무방하다는 간절함이 있어야만 참다운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고 지금 혼란한 시대에 자식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이슬람교 기독교 유교 또는 무슨 무슨교 마르크스주의 무슨 주의 이렇게 혼돈 무궤도 한 때 자기 어버이가 바른 사상을 못 가지면 바른 인도를 못합니다. 비록 어렵더라도 우선 간혜지, 중도 실상의 지혜 말입니다. 비록 우리 범부의 안목에서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차별 있게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하나의 생명인데 중생이 잘 못 본다 말입니다. 바로 보는 참 지혜를 내 것으로 해가지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공부입니다.

 

우선 우리 스스로가 죽고 살고 여러 가지 고생이 많은 범부 경계에서 영생해탈의 경계, 영생 행복의 경계로 가시기 위해서 부지런히 바른 지혜를 얻으셔서 가능하면 결택분決擇分이라 한사코 내가 성불해야 한다는 결택분까지 가시고 그렇게 못 간다 하더라도 순순히 라도 보시도 하고 계행 지키면서 염불 참선으로 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사회를 바로 살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을 내시고 제자를 가르치시고 우리 사회가 참다운 평화로운 복지사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