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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4. 적십자소년 평화 순례단 법문(1985년 8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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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싱싱하고 또는 총명聰明한 분들은 그러지 않겠습니다마는 옛날 비유담 보면 그러니까 원숭이도 말도 하고 할 때가 있었던가 모르겠어요. 이것은 하나의 비유담에 불과 합니다마는 원숭이란 놈이 자기 동아리를 같이 데리고 가다가 어느 못가에 갔습니다. 못가에 가니까 그때 마침 달이 휘영청 밝아서, 보름달이나 열나흘 달이나 됐겠지요. 아주 휘영청 밝은 달이 못에 비친단 말입니다. 어느 정도의 그런 슬기만 있다 하더라도 못에 비친 달이 참다운 달로 못 볼 것입니다. 허나 미혹한 원숭인지라 못에 비친 달이 거짓된, 하나의 그림자의 달이 아니라 참다운 달로 봤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달이 있을 때는 밤이 밝지마는 달이 없을 때는 컴컴하니까 이 미련한 원숭이가 못에 가라앉은 달을 건져서 달이 없는 캄캄한 밤에 비춰야 하겠다, 그러면 모든 중생들을 광명의 길로 인도 할 수 있고 편리하게 할 수 있겠다이렇게 생각해가지고 원숭이는 자기 동아리랑 같이 그 못가에 있는 큰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맨 처음에 자기가 매달리고 그 다음에 딴 원숭이가 같이 매달리고 그렇게 차근차근 자기가 가지를 잡고 있고 다른 원숭이들은 뒤 꽁지를 잡고 매달리겠지요.

 

못의 깊이가 꽤 깊었지만 원숭이가 이렇게 매달리다 보니까 맨 나중에 원숭이가 겨우 못에 닿을 듯 말듯 하게 되었습니다, 매달려가다가 맨 나중 원숭이가 앞의 원숭이 꼬리에 매달리고서 막 물에 들어있는 달을 건지려고 하니까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서 가지가 뚝딱 부러져버렸단 말입니다. 그래 원숭이들은 모조리 못에 떨어져서 한 번에 죽어버린 셈이지요.

 

이런 비유담이 있습니다. 이런 비유담은 어떤 의미에서 나왔는가 하면 자기 분수分數를 모른단 말입니다. 원숭이가 지혜도 부족하고 또는 아무능력도 없는 원숭이가 달을 건져가지고 세상을 밝혀서 중생을 광명의 길로 인도하려고 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서 한 행동은 바르게 못 갑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을 인도도 하고 또는 지도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이 자기 스스로의 역량, 자기 스스로의 능력 없이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여러분들은 자기 수양이나 자기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오늘 이 사람이 말해야 하는 제목이 평화라 하는 거창한 제목입니다만, 이런 평화 역시 참 말로는 쉽지요. 어떤 누가 행복을 바라지 않고 평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행복을 바라고 안락을 바라고 평화를 바랍니다. 허나 그러한 것이, 바라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따라오지 않습니다. 어째서 안 따라 오는 것인가? 그것은 각자 우리 인간이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해서 그럽니다.

 

기독교 바이블에도 있는 말씀 아닙니까마는 진리만이 우리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만이 우리인간을 행복스럽게 합니다. 참다운 진리를 모르고서는 제 아무리 평화를 말하고 통일을 말하고 한다 하더라도 바른 통일 바른 평화가 못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지도하시는 선생님들한테 강의도 많이 들으시고 학교에서 공부도 많이 합니다마는 우리 같은 이런 산중에 있는 수행자는 또 진리라는 그런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말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똑같은 말씀만 하면 여러분에게 별로 도움이 못 된단 말입니다. 우리 수행자가 진리를 볼 때에, 참다운 견해를 볼 때에 어떻게 보는가? 이런 것들은 여러분이 참고로 하셔야 합니다.

 

우리 불교 비유담에서 이런 비유담이 또 있습니다. 중맹모상衆盲模像이라 무리 중, 눈이 어두울 맹, 만질 모, 코끼리 상자 중맹모상衆盲模像 이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뭇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말입니다. 물론 소경도 코끼리를 본 사람이 나중에 눈이 어두워서 소경이 된 사람은 코끼리를 조금 알겠습니다마는 아예 코끼리를 안 본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코끼리를 본단 말입니다. 그런 소경들이 코끼리를 본 것이니까 잘 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지금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그런 하나의 비유담 아닙니까마는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사람은 마치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고 코끼리 배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반구와 같다고 말 할 것이고 말입니다. 즉 코끼리는 만지는 소경들이 자기 소견 따라서 바로 못 보니까 그때그때 자기주장대로 말씀합니다.

 

즉 이와 같이 바른 안목이 없어 어두운 소경들이 코끼리를 보고서 이래저래 옳다고 그르다고 각기 의견을 달리하는 그런 것이 마치 우리 중생살이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젊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마는 지금 우리 사회상황을 보세요. 똑같은 문제가지고도 상당히 훌륭한 사람들이 다른 각도로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마는 지금 야당 하는 분들이나 여당 하는 분들이나 다 훌륭한 분들이란 말입니다. 학교도 훌륭한 학교 나오고 애국심도 강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하나의 같은 문제를 가지고 어떤 경우는 정반대의 의견을 내세운다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 모두가 중맹모상衆盲模像이라. 마치 뭇 소경들이 코끼리를 보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를 기둥 같다고, 또한 코끼리의 귀를 만지는 사람은 코끼리는 키와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데서 불화가 옵니다.

 

어떠한 분들이나 이 사회를 지도하는 분들치고 평화나 화합을 안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화합을 바랍니다. 그러나 바라는 화합은 오지 않고서 바라지 않는 갈등과 반목이 온단 말입니다. 가정도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아직 어리고 젊으시니까 새로운 싱싱한 과학적 지식이 있지요. 나이가 드신 분들은 그런 지식이 부족하니까 구세대라, 자칫하면 소외하고 무시합니다. 신구新舊의 대립이라 이것도 역시 바로 보지 못해서 그럽니다.

 

정말로 젊은 사람들이 바로 보고 나이 많은 분들이 바로 본다면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그와 같이 불화합스럽게 평화를 이합離合시키는 가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진리인가? 인류문화사에서 철학이나 과학이나 모든 학문분야에서 다 진리를 탐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역시 뭐라 해도 인류의 스승들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학교에서 배우기는 배우나 그런 분야에 관해서 깊이는 못 배울 겁니다. 허나 뭐라 해도 진리를 우리가 말할 때는 인류를 가장 정직하게 이끌어가려고 애쓴 분들, 자기 생명도 순교로 해 가면서 애쓴 분들 또는 몇 천 년 동안을 통해서 인류가 다 스스로 받든 분들 이런 분들의 가르침은 옳습니다.

 

이런 분들의 말씀은 결국은 둘이 아닙니다. 이런 분들의 말씀은 잘 못 새기기 때문에 분파가 생깁니다마는 이런 분들의 말씀은 근본은 다 똑같습니다. 일체 생물은 죽이지 말고 모든 사람은 서로 훔치지 말고 서로 거짓 말고 욕설 말고 음탕한 짓 말고 그렇게 해서 오직 생명의 진리 참다운 진리로 나아가라는 그런 말씀의 내용은 똑 같습니다.

 

다만 역사적 배경 또는 시대적 배경, 그 성인들의 개성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게 표현은 합니다만 내용은 똑 같습니다. 이런 분들이 어떻게 진리를 구했던가. 우리는 딱딱한 진리이야기만 하면 너무도 무미건조해서 맛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 진리를 구했던 하나의 구도담求道談을 한 말씀 제가 하겠습니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과거에 석가모니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구도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조금씩 표현은 차이가 있더라도 근본 줄거리는 똑같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같이 그런 미개한 때가 아닙니다. 현재는 아주 총명하고 정보가 밝은 때라서 여러분들은 정보를 교환도 하고 서로 대화를 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각 종교는 다 하나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만 자기 마음도 개운하고 자기 가정도 개운하고 나라나 또는 세계인류가 개운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구가하는 평화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보는 견해가 달라서는 화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같은 다 종교사회, 이런 사회에서는 꼭 줄거리, 근본 알맹이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대화하고 서로 지향해서 서로 종합적으로 진리를 구상해야 됩니다. 한데 지금 부인한 분들은 부인하겠지만, 저는 불교니까 불교이야기를 좀 많이 해야겠지요. 그렇다고 불교를 꼭 믿으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나한테 주신 평화라는 제목, 그 제목에 알맞게 하기 위해서 그럽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인간 생명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러한 윤회를 인정합니다.

 

현재 이렇게 하나의 박아무개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생명은 금생, 즉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떠한 형식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됐건, 개가 됐건, 소가 됐건 과거에도 하여튼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그 생명이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행했는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그러한 행위에 따라서 행위에 걸맞은 생명을 금생에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금생에 살다가 죽어지면 아무것도 없어지고 마는 것인가? 육체의 괴멸과 더불어서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생명 이것도 없어지고 마는가? 불교에서는 이렇게 안 봅니다. 비록 우리 육체는 각 원소로 분해돼서 다 괴산돼 없어진다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다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존재 하는가? 금생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그러한 것들이 모인 생명의 함축된 힘, 응축된 힘에 알맞은 생명을 내세來世에 받는 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석가모니가 금생이 아니라 과거사에 도를 구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는 세상이 미개해서 어떻게 스승을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야 여러분들 지금 훌륭한 스승들 많이 모시고 안 계십니까? 석가모니가 금생이 아니라 전에 생, 몇 천 년 전인가 몇 만 년 전인가 그것은 알 수가 없죠. 그렇게 소급해 올라가서 석가모니가 석가모니로 태어나기 전에 있던 일이라서 오래된 옛날입니다. 자기 마음으로 참다운 진리를 구하고 싶은데 여러분들 잘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비록 학문적으로 안 배운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활동이 있어놔서 사유하는 인간은 꼭 뭣인가 구합니다. 지혜도 완전한 것을 구하고 사랑도 완전한 것을 구하는 것이요, 또는 지위도 완벽한 지위를 구합니다. 따라서 석가모니 전신前身도 학문도 별로 안 배우고 그랬지만 과거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놔서 진리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습니다.

 

뭣인가 참다운 것을 자기가 얻고 싶은데 스승이 없으니 그냥 먹는 것도 별로 살로도 안 가고 진리를 구하는 마음 때문에 몸이 수척해 온다 말입니다. 그 구하는 마음이 하도 간절하니까 그 간절한 마음에 감응 됐던가 제석천帝釋天이라, 여러분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부인해 버리는 그런 현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저 천상天上도 분명히 있습니다. 천상도 분명이 있는 것이고 우리 사람보다 훨씬 더 우수한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안 보이는 사람들은 부인합니다. 헌데 석가모니가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한지라 보다 높은 곳에 있는 한 천상 인간이 시험해 보려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하는 말이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는가?”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석가모니 전생인간이 그야 물론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꼭 진리를 구하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천상인간이 하는 말이 그대가 정작 그와 같이 구한다고 하면 과연 그대가 내가 지금 진리를 말할 테니 내가 말하는 진리를 기록하기 위해서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삼고 또한 뼈를 분질러서 붓을 삼고 또한 그대의 피를 먹으로 해서 내가 말하는 진리를 쓸 수가 있는가.” 그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전생인간이 하도 사무치게 진리를 구하는지라 그야 별로 어렵지 않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냥 즉석에서 자기의 피부를 벗기면서 자기의 뼈를 부러뜨리려 하니까 천상에서 내려온 그 사람은 우선 그렇게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인데 정작 자기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를 삼으려 하고 뼈를 분질러서 붓을 삼으려 하고 자기 피로서 먹을 삼으려는 그런 태도가 완연하거든요. 허니까 그냥 시험해 보겠다는 천상인간, 그 사람 마음은 그냥 감동이 되어서 자기는 사라지고 자기보다도 더 높은 천상인간 그 사람을 초청해서 그냥 석가모니 전신되는 인간한테 진리를 말씀해 줬단 말입니다.

 

즉 여러 가지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우선 그런 정도로만 합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진리를 구한 사람들은 석가모니나 누구나 간에 그와 같이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처럼 자기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하고 뼈를 분질러서 붓으로 하고 자기 피를 먹으로 하고 이런 정도로 자기 신명을 걸어서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요단강 하반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한 사실을 아시지요. 또한 마호메트(570~632)가 히라산에서 3년 동안 동굴에서 명상했단 말입니다.

 

어떤 점으로나 그냥 말로 왔다 갔다 하는 우리 지식인 범부에 속해있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생명의 진리, 비록 인간의 생명은 사라진다 하더라도 영생하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같이 피를 뚝뚝 흘리고 또는 우리 생명을 바치는 그러한 비장한 그런 노력도 하고 구도도 했던 것입니다. 대체로 그러면 그러한 예수님이나 석가님이나 공자나 그 분들이 얻는 진리는 어떤 것인가.

 

우리가 정의를 구하고 평화를 구합니다마는 그런 진리를 모르면 그때는 그런 정의나 평화가 구현되지 않습니다. 제가 허두에 말씀한 것처럼 우주 인류 역사이래 가장 정직한 분들은 역시 성인이란 말입니다. 그런 성인들이 가르친 가르침은 대체로 우리가 옳다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이 분들만이 어려움 없이 사는 인간입니다.

 

문화라는 것도 역시 이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각 여러 가지 문화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우리가 안 볼 수가 없습니다. 헌데 그분들이 얻은 진리는 어떤 것인가. 예수님, 석가님 또는 공자님 이분들이 얻은 진리 이것은 그냥 말로만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주의 생명 자체를 바로 안 진리입니다. 내 인간성 자체를 바로 깨달은 진리, 생명을 바로 깨닫는 진리입니다.

 

그냥 우리가 배워서 아는 축적된 그런 지식과 참다운 생명의 진리와 구분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구분해야만 참다운 평화는 우리 지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진리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 이전, 생각 이전 우리 개인 생명 이전의 것 이것이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내 생명의 본 바탕인 동시에 일체 존재의 생명의 바탕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만 자기 마음 수양해서 깨달아야만 아는 진리입니다. 공자님이 무슨 대학이나 박사학위 그런 어떠한 관문을 거친 분이 아니고 예수님 역시 과학체계나 무슨 난해한 철학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분들은 자기 인간성으로 해서 맑은 인간성, 맑은 마음으로 해서 우주의 근본 되는 진리를 비춰봤단 말입니다.

 

또한 석가모니 역시 6년 고행도 하고 그런 가지가지 고난 끝에 자기가 스승으로 삼던 그런 사람들의 가르침은 참다운 것이 못되는 것이니까 자기 스스로 보리수하菩堤樹下에 앉아서 마음 닦아서 생명의 본질인 우주의 본질인 본바탕인 진리를 깨달았단 말입니다.

 

깨달은 그 내용은 다 똑같습니다. 허나 그런 깨달은 진리 내용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우리가 증명하기 전에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니까 제가 아는 대로 말로 표현해봅니다. 공자님이나 그분들이 깨달은 진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천지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제 말씀을 의심도 해가면서 따지고 책도 보고 해보십시오. 비록 성인이 못된 우리 중생은 미처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의 원리는 근본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진리입니다. 하나의 생명체 위에서 우주 만유가 이루어져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은 물리학도 어느 정도는 인정을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몸 또는 저기 숲에 있는 나무, 모든 것은 모두가 각 원소로 구성되지 않았습니까? 원소는 무엇인가, 원소는 또 역시 양자를 중심으로 한 전자가 몇 개가 도는 가에 따라 구분이 되는데, 가령 수소는 양자를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하나 돌고 있다 말입니다. 또한 탄소는 양자를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일곱이 돕니다. 이와 같이 각 원소라는 것은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양자와 전자 이것은 무엇인가는 알 수 없지마는 순수한 에너지가 어느 동기에 따라서 충동하는 즉 말하자면 선회하는, 진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은 결국 다 이렇게 분석한 뒤에 보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우리가 돌아가고 맙니다. 사람 몸도 각 원소로 안 되어 있는 것이 없고 나무도 원소로 안 되어 있는 것이 없고 말입니다. 물론 원소 구성은 다르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인데 모든 것을 분석하고 나서 끝에 가서는 뭣인가 알 수 없는 걸로 귀결되고 맙니다.

 

이것 보고 지금 물리학에서는 장이라. 모든 존재는 다 텅 비어서 하나의 알 수 없는 장이라. 광명만 파동波動치고 있는 장이라 말입니다. 그리고 양자와 전자는 장이 어떠한 충동에 따라서 응집된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실은 모든 것을 구성하는 원소나 원자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장의 하나의 충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현재 물리학도 하나의 원리를 차근차근 거의 알아져 갑니다.

 

옛날 성인들은 이러한 분석적인 지혜로 따진 것이 아니라 맑은 마음,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은 모든 것을 잘 비추지요. 고요한 물에는 그림자가 잘 비춰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 마음도 산란스러운 마음은 모든 것을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허나 맑은 마음, 예수님 같은 그런 마음 석가모니 같은 그런 마음에는 모든 진리가 그때는 바로 비춰 온단 말입니다. 산에서나 또는 들에서나 금식기도도 많이 하고 또는 우리가 명상도 많이 하고 그런 것은 우리가 마음을 맑은 거울 같이 맑히기 위해서 그럽니다.

 

맑히면 우주의 참다운 진리가 비춰옵니다. 지금 모든 지식을 학문적으로만 축적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그런 분들은 그런 문제를 무시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역시 맑은 마음에서만 참다운 영원적인 본질적인 지혜가 비춰옵니다. 아직은 그런 진리를 비추어 보지 못하는 우리 중생들은 말로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말로 의지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라서 석가님이나 예수님이나 그런 분들이 보신 진리를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말로 옮깁니다.

 

하여튼 천지 우주는 하나의 생명, 하나의 진리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진리, 그것을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되겠지요. 또는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부처님이 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하나의 진리임에는 똑같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진리 이것은 그냥 바짝 마른 이론 체계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산 생명입니다. 하나의 진리에서 지금 생동하는 나무가 나오고 하늘에서 지금 운행하는 별들이 나오고 또는 사람이 나오고, 아까 말씀처럼 인간의 눈에는 미처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상도 나오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진리 위에서 그때그때 인과율因果律에 따라서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따지고 보면 하나의 진리의 변조變造, 하나의 진리의 전변轉變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진리가 변해서 된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먼저 아는 것이 각 성자가 말한 진리입니다.

 

유교에도 천지어아동근天地於我同根 이라,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은 뿌리란 말입니다. 우리는 내 뿌리 다르고 저런 식물뿌리 다르고 그와 같이 근원을 달리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마는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다 같이 봅니다. 비록 현상적인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근본 뿌리는 저 나무나 공기나, 하늘에 있는 별이나 우리 인간이나 근본 뿌리는 하나란 말입니다. 만물여아동체라 만물과 나와는 결국은 본체는 같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지금 분석적인 차별만 공부하는 그런 교육자 밑에서는 실감이 안 납니다. 마음이 맑아서 모든 진리를 훤히 비춰보는 그런 지혜를 즉 예지叡智를 얻는 지혜로 볼 때는 분명히 모든 사람은 뿌리가 같고 근원은 같은 몸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적에 근본 뿌리가 같고 사실은 근원에 가서는 같은 몸이라고 생각할 적에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싸울 수가 있습니까.

 

하나의 생명을 꽉 잡은 분들이 성인聖人입니다. 여러분들 바이블도 보고 불경도 보세요. 하나의 생명, 그것을 찾기 위해서 각 종교인들은 자기 평생을 희생도 하고 순교도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우리 겉에 뜬 생명의 속에 있는 참다운 생명 그것을 얻어야 만이 인간의 생명은 영생을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인연이 다해서 우리 육체는 한정된 몇 십 년 동안에 없어진다 하더라도 참다운 생명은 나의 구성의 생명의 본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헌데 나의 본체本體를 구성한 나의 몸을 구성한 그런 참다운 본체의 생명, 그것의 본 뿌리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비록 모든 것의, 모든 존재의 뿌리가 하나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그 생명이 별로 가치도 없고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니면 뿌리라 할지라도 우리가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하나의 생명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천지의 하나의 생명 그 가운데는 일체 가능한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행복도 거기는 완벽히 갖추어 있고 지혜도 완벽하고 또는 하나의 예술적인 기능으로 보나 뭘로 보나 그것은 완벽히 갖추고 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얘기를 하지요. 석가모니가 도를 통해서 교화를 할 적에 자기가 가만히 비춰보니까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이렛 만에 자기 어머니는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셔서 멀리 천상에 갔습니다. 불교 말로 하면 도리천忉利天이란 곳에가 있습니다. 원래 위대한 성인들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보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장치나 레이다만 멀리 보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맑은 지혜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저 천상도, 인간의 눈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저 천상도 성자들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자기의 맑은 혜안慧眼으로 보는 것이니까 다 보이는 데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도리천이라는 천상에서 고생한다 말입니다. 같은 천상도 높은 천상, 낮은 천상이 있습니다. 헌데 석가모니 어머니는 아직은 성자가 못되어서 낮은 천상에서 고생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 천상에 올라가서 3개월 동안 거기서 교화했습니다. 물론 자기 어머니뿐만 아니라 거기에 같이 있는 천상인간들을 교화했습니다.

 

그때에 석가모니를 따르는 분들이 흠모하고 사무치게 보고 싶은 나머지 어떻게 그냥 참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전왕이라는 왕자가 석가모니와 같은 모양을 만들어야겠는데 일반 사람들의 힘으로는 똑같은 모양을 만들 수가 없어서 혼자 고민을 하니까 석가모니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떻게 사무쳤던가 비수갈마천이라. 비수갈마천毗首羯摩天이라는 천상은 각 기능을 맡은 하늘입니다. 여러분들은 신화도 같고 미신도 같고 할 것입니다만 사실은 우주 가운데는 그런 천상도 많이 있습니다. 기술을 맡은 천상 또는 힘을 맡은 천상, 한데 기술을 맡은 천상이 비수갈마천인데 천상이 그때는 감흥해서, 감동해서 내려와서는 석가모니와 똑같은 상호를 만들어서 우전왕한테 시주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3개월 동안 안 계시는 동안에 우전왕은 그 비수갈마천이 만든 석가모니 상을 보고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는 이런 말도 있듯이 우주의 진리 모든 것의 근본 되는 우주의 하나의 진리 가운데는 기술이나 뭣이나 간에 다 완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위대한 분들, 문학적으로 위대한 분들 또는 음악적으로 위대한 분들은 완전히는 다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주의 하나의 진리를 다소간 맛도 보고 체험도 한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傑作을 냈습니다. 베토벤(1771~1827) 같은 분도 역시 음악적으로 해서 소리를 그냥 우리 지상에 있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적인 소리, 하나의 진리가 깃들어 있는 영혼적인 묘음, 이런 소리를 들었고 다빈치(1452~1519) 역시 그런 맑은 마음으로 해서 영혼적인 하나의 상을 그때는 자기 스스로 마음을 감동해서 얻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분야에서 보나 하나의 걸작을 낸 분들은 다 마음의 수양 밑에서 영원적인 하나의 진리를 음미도 하고 체험도 했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체험을 한 사람들은 천지 우주가 본래 근원이 같고 또 각 사람끼리 성은 다르고 얼굴은 다르다하더라도 근본 생명은 다 본래 같은지라 사소한 일 때문에 별로 불화합스럽게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가장 소중한 행위가 무엇인가 하면 무엇보다도 사람 사람끼리 화합하는 문제입니다. 화합이 되어야 만이 우리의 마음은 맑아집니다. 맑아져야만 하나의 진리를 비춰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 다 해보지 않습니까마는 우리가 남을 미워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남을 미워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어둡습니까. 남을 사랑할 때는 우리 마음이 광명으로 빛납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집니다. 허나 한 사람만 사랑하고 한 사람은 미워하면 그때는 마음이 별로 밝지가 않습니다. 천지 우주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하나의 생명 가운데는 일체가 가능하다. 기독교말로 해서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능하지 않음이 없다 말입니다. 하나님 마음만 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의 본체 우주의 모든 존재의 본체 그 본체 하나의 생명 이것은 모두가 다 능한 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도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마음도 역시 저 마음의 저변은 모두가 다 능한, 음악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다 완벽한 지혜가 갖추고 있습니다. 인간성은 어째서 존엄스러운 것인가? 이것은 인간성의 본바탕인 하나의 진리, 그것이 모든 진리를 다 갖추어서 그럽니다. 이러한 것이 각 성자가 밝힌 진리의 내용입니다.

 

생명은 오직 저 뿌리에 가서는 하나의 길로 다 통일되고 맙니다. 마치 바닷물이 있으면 바닷물 위에서 천파만파 바람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고 거품이 만개 몇 억 개가 일어난다고 해도 똑같은 물이듯이 천지우주는 이와 같이 모든 현상적인 천차만별의 차별의 상이 있다 하더라도 차별상의 근본원리, 근본 생명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파도가 많아도 똑같은 물이듯이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이것이 각 성자가 우리한테 모범적인 진리를 찾는 그런 길을 몸소 보이시고, 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하나의 진리를 우리가 추구하고 따라하는 그 마음이 없으면 인류사회에서 참다운 행복이나 정의는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터득한 사람들이 우리 현상적으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것만 말씀을 하고서 제 말씀을 마감하겠습니다마는 불교에서 사섭법四攝法이라. 이러한 법문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은 일반 중생을 구제하는 위대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의 생활규범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진리, 우주의 본체를 이루는 하나의 진리를 터득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행동규범을 말했다 말입니다. 그것이 네 가지 속성인데 한 가지는 화안和顔이라. 평화로울 화자 얼굴 안자입니다. 얼굴표정을 항시 평화스럽게 한단 말입니다.

 

남 미워하고 나쁜 짓 많이 한 사람들은 평화로운 얼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남한테 돈도 주기도 하고 또는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합니다마는 우리는 그런 것을 하나의 사회사업으로 알고서 합니다마는 물론 그것도 한 가지 사회사업이고 좋은 일이나 그보다도 더 좋은 일은 뭣인가 하면, 어떠한 누구한테나 화평스런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즉 자기 얼굴을 항시 평화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평화스럽게 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어두울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평화스러운 얼굴, 이것이 화안和顔입니다.

 

그다음에는 애어愛語라 사랑스러운 말, 부드러운 말이란 말입니다. 요즘 사회에는 그야말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별것도 아닌데도 그렇게 꼬집어서 말합니다. 같이 무릎 맞대고 같이 대화하고, 부드러운 말로 하면 통할 수 있는 말도, 한번 거칠게 말하면 상대하기가 싫습니다. 상당히 배운 분들도 그렇게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될수록 부드러운 말 사랑스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들은 그렇게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근본이 같으니 비록 지금은 인연 따라서 박가가 되고 김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근본생명은 같거니 또 과거사까지 우리가 쭉 훑어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생명은 몇 만생 동안 우리가 되풀이해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자기 원수라 하더라도 과거 몇 만생 전에는 자기 어버이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은 남하고 불화합스럽게 지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분들은 화안이라. 항시 부드럽고 미소 띄운 얼굴을 안 지닐 수가 없다 말입니다. 이것이 남한테 베풀어 주는 가장 큰 봉사입니다.

 

그다음은 이행利行이라. 될수록 남에게 이익 되게 한다 그 말입니다. 지금 보통 극락이나 또는 지옥이나 그런 말을 많이 쓰지요. 불교를 믿는 분들이 아니어도 좋은 것은 극락이요 나쁜 아귀다툼 같은 것은 지옥이라 합니다. 그래서 비유담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한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자의 인도를 받아서 지옥으로 구경을 갔어요. 지옥을 가서 보니까 아주 훌륭한 탁자위에 만반진수珍羞 그런 맛난 음식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자기가 갈 때는 지옥은 음식도 없고 아주 환경도 추잡해서 살기 고약한 곳으로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까 아주 분위기가 좋고 향기로운 꽃도 만발하고 음식이 탁자에 그냥 만반진수로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옥이 정말 이런 것인가 감탄을 했는데 마치 그때 점심시간이 돼가지고 점심 신호를 하니까 탁자에 앉아있는 분들이 서로 먹으려고 아귀다툼 끝에 그와 같이 맛난 음식들을 단 한 개도 못 먹고 그냥 흩어져 버려 싸움판 수라장이 되어서 그와 같이 맛있는 음식들을 하나도 못 먹었단 말입니다. 못 먹으니까 따라서 배가 고프겠지요. 나중에 또다시 식 때가 되어서 또다시 만반진수로 상에 맛난 진수가 올라오지만 또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판에 다 흩뜨려버려서 못 먹는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끼니때마다 결국은 싸움판이 되어서 맛있는 음식들을 못 먹게 되고 따라서 몸은 여의고 다 보다 서로 미워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극락도 봐야겠다 해서 성자의 인도引導를 받아서 극락에 갔는데 극락에 가서 보니까 분위기나 모든 환경은 아까 본 지옥하고 똑같단 말입니다. 똑같은데 정작 식사 때가 되어서 먹을 때가 되니까 극락 사람들은 자기가 먼저 안 먹고서 음식을 남의 입에다 먼저 넣어준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 남을 잊어버립니다. 허나 생명은 원래 같이 어울려있습니다. 따라서 남을 불행하게 해서는 절대로 자기는 행복하게 못됩니다. 우리는 저 다도해 가서 보면 물이 들면 많은 섬이 보이지요. 허나 물이 쓸어버리면 섬은 다 연결되어 보입니다. 그와 똑같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중생이 볼 때는 박가, 김가 차이 있게 보입니다마는 사실은 딱 같이 붙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과 이 사람과 학생끼리 공기 가운데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공기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산소가 있게 마련이고 수소가 있고 말입니다. 사람 사람끼리 어떠한 누구나가 이렇게 딱 닿아 있는 것인데 사람은 우선 겉만 본단 말입니다. 마치 바다 한 가운데서 물이 들면 다도해에서 다 섬으로 보이지만 물이 쓸면 같이 붙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봐서 밑창을 보면, 밑에 본질을 보면 사람 사람들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붙어있기 때문에 한 생명을 해치면 그때는 자기 생명도 해친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하다가 또 옆으로 빗나갔습니다마는 네 가지 속성,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분들이 우리 중생을 구제할 때 행해야하는 네 가지 속성 그것은 화안和顔이라. 그다음은 애어愛語. 그다음은 이행利行이라. 그다음은 동사同事. 이것은 남과 더불어서 남이 고생 받으면 그 차원에 맞게 자기도 같이 고생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각 성자나 생명이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는 네 가지 규범입니다. 평화스러운 표정 또는 사랑하는 말 또는 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과 남과 더불어서 하는 봉사 이것이 불교에서 하는 사섭법四攝法입니다.

 

우리는 아까 허두에서 말씀처럼 마땅히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평화를 바라고 정의를 바랍니다. 꼭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허나 진리가 없이는 평화가 못 됩니다. 진리 역시 그냥 각각인 진리 즉 공산주의 진리 또는 민주주의 진리 그런 일반적인 진리로 해서는 평화는 못 됩니다. 오직 하나의 진리, 어떤 시대 몇 만 년을 가도 변할 수 없는 그런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이것은 각 성자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를 파악해야만 참다운 평화는 옵니다. 이런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조금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앞서 말씀처럼 자기 피부를 다 벗겨서 진리를 베끼는 종이를 삼고 뼈를 분질러서 진리를 베끼는 붓으로 삼고 말입니다. 자기 피를 진리를 베끼는 먹으로 삼고하는 이러한 결의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많은 학문도 배워야 하십니다마는, 우리 생활의 필요를 위해서 많은 기술을 배워야 하십니다마는 우리 인간성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좀 하셔야 합니다.

 

지식의 축적과 더불어서 예지叡智 말입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을 찾고자 해서 여러분들이 노력을 좀 하셔야합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진리의 밑에서 진리를 터득한 그러한 참다운 가치관 밑에서 여러분 개인의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우리 조국의 평화, 세계평화를 이룩하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