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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태안사 하안거 결제 인등법회(1985년 4월15일)

2.하안거 인등법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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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를 하지 않고서 집안에 계시면서 불법을 탐구하시는 우리 불자님들께서나 또는 불법외의 딴 종교도 믿고, 종교를 또 안 믿고 하는 그런 분들이나 모두가 다 한결같이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 합니다. 허나 그러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성이 어떠한 것에 얽매임을 받으면서 참다운 행복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자유라는 자유자래라 하는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민주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사회가 아닌 공산사회까지도 자유나 평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때문에 생명을 받치기도 하고, 또는 전쟁도 이루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야당, 여당 그런 문제, 이것도 역시 자유라 하는, 행복이라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가장 긴요한 조건 되는 그런 자유, 이것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라 하는 것은 방금도 말씀 마따나 우리 인간성이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는 한에는 참다운 자유는 못 됩니다.

 

어떤 것이 참다운 자유인가? 우리는 지금 불교인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행복을 얻고자 하는 가장 확실한 길,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이고, 잘못 수행하면 지지리 좋은 최상의 그런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역시 거기에 알맞은 그러한 자유를 우리가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차원 따라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믿을 신, 먼저 믿음이 있고, 또는 그 다음에는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인가, 바른 믿음이 아닌가 하는, 또는 설사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믿음을 검증하기 위한 그러한 하나의 해석이 있다 말입니다. 믿음과 믿음에 따른 교리해석이 따르면 그때는, 그다음에는 거기에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우리 몸소 행하는 그런 행이 있습니다. 행 따라서 우리가 정작 종교의 진수를 맛보고 체험하는 그러한 증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해행증이라, 믿고 해석하고, 또는 행하고, 또한 증명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자유, 불교서 말하는 참다운 행복이라 하는 것은 신해행증이라, 증까지, 증명까지 못 가면은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현대의 각박하기도 하고, 또는 소잡하고, 이러한 번잡한 사회에서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록 소중하다 할지라도 더러는 믿음으로 끝나버립니다. 또는 믿음을 좀 더 깊이해서 좁은 교리해석으로 법신불이 무엇인가? 화신불이 무엇인가? 성불의 방법은 무엇인가? 사제四諦법문이나 십이인연법이나 그런 교리로 끝나버리는 그런 종교생활도 있습니다.

 

또는 조금 나아가서 참선도 해보고, 염불도 해봐서 그때는 이제 실천을 한다 말입니다. 허나 이것도 역시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하면은 이것도 참다운 우리 몸에 붙은 체험은 못됩니다. 헌데 참다운 종교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서는, 앞서 말처럼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증명까지 가야합니다. 믿기도 하고, 또는 해석도 하고, 또는 실천도 하고, 증명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바쁜 생활 가운데 증명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증명까지 가기위해서 정작 우리한테 갖춰 있는 부처님의 성품, 우리 본래 생명인 부처님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기에 알맞은 우리 몸으로 행동, 우리 언어로 생활, 또는 우리 생각으로 부처님을 여위지 않은 바른 생각,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의 청규를 규범 삼아서 부처님 앞에 맹세 하는 것, 이것이 결제입니다. 오늘은 결제 날입니다.

 

과거 전생에 선근을 많이 심고, 금생에 사람이 진지해서 출가를 안 하고, 또는 결제를 설사 안한다 하더라도 성불한 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수련해서는 역시 결제 해가지고서 우리 몸으로 행동을 부처님 계율戒律에 맞게 하고, 우리 언어생활을 부처님 진리에 맞게 하고, 우리 생각을 부처님한테서 안 여위는 그런 결제를 안 하면 성불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환희일佛歡喜日이라, 이것은 부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날이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제날, 해제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중생의 성불을 가장 반기십니다.

 

따라서 성불하기 위한 제도적인 그러한 청규, 규범, 이것이 결제니까 응당 부처님께서는 결제 날, 또는 결제하고서 공부가 끝나는 그날을 제일 반겨하시기 때문에 불환희일 이라, 오늘은 바로 불환희일입니다. 그런데 결제에는 마음결제, 몸결제가 있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출가한 몸이 되고, 또한 출가한 몸이 아니더라도 집안일을 조금 쉬고, 이렇게 절에 오셔서 결제 같이 하신다 하더라도, 마음이 딴 데가 있으면 마음 결제는 못됩니다. 형식상으로 해서, 형상적인 결제는 되어도, 참다운 결제는 못됩니다.

 

역시 불교는 일체유심조, 마음이 주인이기 때문에 모양으로 제 아무리 가부좌를 틀고 오래 앉았고, 또는 계를 잘 지키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이 딴 데 있으면 그때는 참다운 결제는 못됩니다. 사정 따라서 이렇게 절에도 못 오시고 가정생활을 하신다 하더라도, 마음이 부처님과 더불어 있고 중생을 부처님같이 보고,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서 부처님을 안 여윈다 하면은 그것이 바로 참다운 결제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몸과 마음이 아울러서 결제하는 몸도 결제, 마음도 결제하는, 결제라 하는 것은 맺을 결, 제도 제자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 따라서 성불하기 위한 그런 규범을 지키는 것이 결제인데 말입니다, 이 자리에는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다 결제하는 그런 분도 계시고, 오늘 같이 결제하지만은 그냥 집에 돌아가셔서 마음으로만 결제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결제입니다.

 

우리 성불하는 수행방법이 삼종행三種行 이라, 삼종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말씀해있는 법문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 심상수행이라, 일용 심상 간에 수행을 한다 말씀입니다. 남하고 대화를 하거나, 또는 자기가 하나의 장사를 하나, 또는 잠을 설치고서 비몽사몽간 이라든가, 밥을 먹을 때라든가, 어떤 때나 심상 일용日用 간에 부처님을 안 여위는 공부, 이것이 심상心象공부입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보통 심상공부를 하십니다. 또한 출가한 우리 불자 역시 심상공부를 해야 합니다. 하여튼 우리 일용 간에 우리 마음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부처님과 더불어서 하는 생활, 이것이 심상공부라 말입니다. 심상공부가 있고, 한 가지는 별시공부라 다를 별, 때 시자 말입니다.

 

심상공부로 해서는 우리 마음이, 본래 우리 마음의 본 자성은 부처건마는 부처까지 이렇게 심화되어서 못 들어갑니다. 공부를 했다 말았다, 또 자꾸만 우리 중생이라 하는 것이 견물생심으로, 이것 보면 그것에 끄달리고, 저것 보면 저것에 끄달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의 저 밑에 가장 깊은 곳이 불심인데, 불심까지 미쳐 못 들어가고 맙니다. 따라서 하루나 사흘이나 말입니다, 또 할 수가 있으면 일주일이나,

 

더 할 수 있으면 21일 동안이나, 더 가능하면 49일 동안,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결제모양으로 90일 동안, 이렇게 오로지 공부하는, 이러한 공부, 이것을 가리켜서 별시別時공부라 합니다. 별도로 이렇게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한다 말입니다.

 

이러한 별시공부가 있고, 허나 우리중생은 박복해서 심상일용간의 공부도 미처 못 하고, 또는 별시공부도 미쳐 못 한 분이 있습니다. 하려고 맘은 먹지마는, 부처님이 옳다고 믿지도 믿지만, 게으름 부리고 또는 여러 가지 업장이 무거워서 그때는 심상공부도 못하고 별시 공부도 못 한다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언간 임종 때가 이릅니다. 임종 때가 되면 허무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앞에 나타난 것은 공포뿐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고? 악독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그냥 임종 때가 다가오면 무서운 것이 앞에 나와서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사자가 나와서 그냥 악독한 길로, 저 삼악도의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길로 이끌어 갈려고 합니다. 죽을 때는 분명히 악독한 사람은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평상에 심상공부도 못하고, 별시공부도 못했다 하더라도 임종에 이르러서 그런 악독한 것, 무서운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때 그 순간 마음 잘 먹으면 또 역시 마음 잘 먹는 순간, 순간마음 가지고서 좋은 데로 갑니다. 죽을 때 순간, 천상 같은 그런 선량한 마음 가지면 그냥 천상으로 초승해서 올라갑니다. 비록 자기가 지은 평소의 업장으로 봐서는 결정코 지옥에 갈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도 역시, 죽을 때 마음 자세가 사람 같은 마음, 사람 같은 정도의 그 마음 가지면 그때는 사람으로 인도 환생합니다.

 

일념종심이라, 일념이 딱 안정되어서 정말로 부처밖에 없다는 생각, 천지 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요, 자기 마음, 남의 마음 차이도 없고, 또는 범부와 성인 차이도 없고, 천지 우주를 모두가 다 부처같이 보는 마음, 그 마음이 결정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 마음 가지고 바로 극락세계의 상품상생에 올라갑니다. 이것이 임종臨終 공부입니다. 죽을 때 이르러서 공부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습니다. 평소에도 공부를 못했거든 어떻게 죽을 임시에 사대괴산四大壞山이라 지수화풍 사대가 각 세포가 이렇게 허물어진다고 할 때 자기 마음을 수습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했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 단말마斷末魔의 고통이라, 고통 때문에 그냥 평소의 그런 선심도 어디로 간곳이 없는데, 하물며 평소에 공부를 안 한 분들이 죽을 때에 좋은 마음을 가지고서 극락세계나 인간이나 천상으로 가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심상공부를 하려고 애써도 일상생활이 하도 번잡하고, 하도 고난이 많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생은 고해 아닙니까?, 괴로울 고자 바다 해, 인생은 고해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낳을 때의 고통, 한번 낳아 놓으면 그때는 살기위해서 생활고, 또는 기타 늙어서 고통, 우리 안 아픈 사람 있습니까?, 아파서 고통, 인생은 바로 고해입니다. 인생은 따지고 보면 고생뿐입니다. 안락한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지, 우리 몸이란 것은 시시각각으로 지금 늙어갑니다. 시시각각으로 늙어가고, 죽어가는 사람이 무슨 안락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미처 몰라서, 순간에 집착해서 죽어가는 사실, 늙어가는 사실을 모르니까 우리가 이제 안락스럽다고 하고서 향락도 하고, 별짓 다 합니다만 깊이 보는 사람들은 순간순간 죽어가는 우리 생명, 늙어가고 죽어가는 생명, 그런 생명을 바로 볼 수 있는 그런 깊은 사람들은 인간을 안락스럽게 안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도 삼계유여화택三界猶如火宅이라, 지옥부터서 저 천상까지 올라간, 다 합쳐서 욕계, 색계, 무색계 아닙니까마는 욕계가 유여 화택이라 오히려 모두가 다 불바다, 불집이나 같다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보면 불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지금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시시각각으로 산소가 연소해서 지금 불타고 있습니다.

 

바로 보는 사람들은 따라서 안락스럽게 안 보고, 삼계유여화택 이라, 삼계가 모두가 다 불바다라고, 불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불집을 떠나는 길은 오직 하나, 성불의 길입니다. 깊이 느끼는 사람은 느끼려거니와, 일반 생활에 얽매인 사람은 미쳐 못 느낍니다. 조금 안락스러운것 같이 보이는 거기에다 딱 집착합니다. 그리고 삼계의 그러한 불집을 떠나는 그런 방법을 잘 몰라서 엉뚱한 방법으로 삼계의 고통을 떠나려 합니다. 재물로 떠나려 하고, 감투로 떠나려 하고, 이성으로 떠나려고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들도 삼계를 떠나는 방법이 못 됩니다.

 

따라서 별시수행 이라, 성불하는 그런 수행방법 가운데 심상수행, 또는 일정한 기간 동안 닦는 별시수행, 죽을 때 하는 임종수행, 이것 가운데 심상수행과 임종수행은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별시수행은 해보면 좀 하기가 쉽다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떠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우선 쉬고서 공부하면 그때는 어느 정도 마음이 맑아져서 불심하고 가까워진다 말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공부, 심상공부는 좀처럼 불심과 가까이 못됩니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가운데 항시 이제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출가승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재가 불자라도 역시 심상공부는 물론 하시지만 별시공부, 하루나,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또는 한 달이나 이렇게 일정한 기간 동안에 세속일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대사가 아닙니다. 죽고 살고 하는 생사문제가 대사입니다.

 

따라서 대사를 하기 위해서 1년 내내 작은 일로 해서 우리가 뛰고, 괴로웁게 하는것 이니까, 1년 내내는 못한다 하더라도, 1년 동안에 다만 1주일 동안, 다만 한 달 동안 정도는 세속일, 대사가 아닌 작은 일을 조금 쉬고, 별시수행기간 일정한 기간 동안에 오로지 공부할 수 있는 그러한 기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결제법회와 아울러서 천등 인등불사 점안식입니다. 인등이란 무엇인가? 생소한 분들도 있고, 더러는 불교에 대해서 상식이 있는 분들도 잘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인등이란 무엇인기? 우리는 지금 법당에 다가 인등불사로 해서 천불을 모셨습니다. 인등이라 하는 것, 이것은 한문으로 하면은 이끌 인, 등불 등자 말입니다. 등불을 켜는 것, 등불을 당겨서 켜는 것보고 인등引燈 그럽니다. 뭐 딴 뜻이 아니라 간단명료하게 등불을 켜는 것이 곧 인등입니다.

 

왜 등불을 켜는가? 우리는 얼마 안 된 과거에, 부처님오신 날에 연등을 했습니다. 아주 그야말로 참 정성을 다해서 서울 여의도나, 또는 각 절마다, 또는 더러는 자기 가정에도 등을 만들어서 켜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그렇게 했습니다. 왜 우리는 등불을 켜는 것인가? 보통은 등을 켤 때는 자기 가정에 있는 모든 액운소멸, 또는 자기 가족의 여러 가지 운수대통, 이것을 바라고 켭니다.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인등을 켜는 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물론 생활인 가운데서 재수가 대통하고, 또는 수명도 장운하고, 여러 가지 그런 액운을 소멸 하는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만, 보다 중요한 본질의 문제, 이것은 대사입니다. 보다 큰일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보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 인등은 원칙을 하는 것입니다. 큰일만 하면 작은 일은 거기에 따라 가게 마련입니다.

 

왜 하필이면 인등으로 해서 우리가 큰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진리라는 것, 이것은 하나의 지혜광명입니다. 진리는 바로 광명입니다. 진리가 아닌 어두움, 진리가 아닌 나쁜 것, 이것은 바로 암흑입니다. 인간사회는 음과 양이 있고, 또는 같은 전기도 음전기와 양전기가 있고, 모두가 이렇게 상대가 있습니다만, 그와 마찬가지로 광명이 있으면 광명이 아닌 그림자, 어두움이 있습니다.

 

허나 어두움이 참말로 있는 것인가? 어두움은 참말로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밤이 되면 어둡기도 하고, 또는 우리 마음의 번뇌에 얽매일 때는 우리 가슴도 어둡기도 합니다. 허나 그런 어둠은 본래는 있지가 않습니다. 중생이 미처 진리를 몰라서, 중생이 바로 보지 못해서 어두움이 깔립니다.

 

부처님의 또 다른 공동이름이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한없는 광명의 부처라 말입니다. 부처란 말은 바로 근본 생명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고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무량광불이라 이 말은 무량광명인 생명이란 뜻입니다. 청정광불이라,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청정 빛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바로 생명광명입니다.

 

우리는 우리본래 생명인 우리 본래 본 자성이 부처님이고, 사람뿐만이 아니라 일체동물이나 또는 무기물이나, 하늘에 있는 각 성수나, 모두가 다 본 생명, 본 근본, 본질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으로 부터서 물리적 원칙, 화학적 변칙, 이러한 인연 따라서 각 존재가 이루어 졌습니다. 본바탕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이루어지면 파도가 비록 천파만파가 되고, 거품이 몇 수억의 거품이 있다하더라도 똑같이 물이듯이, 부처님으로 부터서 사람이 되고, 또는 일반 동물이 되고, 무기물이 되고, 각 별이 됐는지라 비록 개별적으로 사람이 되고, 개가 되고, 소가 되고, 별이 되고 했다 하더라도 내내야 본질에서 보면 똑같은 부처님입니다.

 

이와 같이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리 가슴의 어두움은 그때는 차근차근 거두어 갑니다.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님이고, 그런 부처님의 광명, 그 광명으로 부터서 이루어져 있어놔서, 비록 사람이 되고, , 개가 되고, 독사가 되고 했다 하더라도 내내야 똑같은 부처님의 광명입니다.

 

천지우주는 바로 광명뿐인 것인데, 중생이 바로 못 봐서 그때는 어두움이 깔립니다. 우리 중생이 성자가 되어서, 그때는 가슴이 툭 틔어서 저 우리 시야의 지평이 열려서 천지우주를 바로 통관한다 하면은 그때는 어두움은 없습니다. 왜 염불을 하는가? 왜 참선을 하는가? 왜 주문을 외우는가? 우리 마음의 어둠을 헤치기 위해서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그만치 어둠이 적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그만치 어둠이 많습니다. 마음의 어두움이 참말로 개려면 나라 하는 아상이 끊어져야 합니다. ‘라 하는 것이 있으면 그때는 벌써 어두움의 시초입니다. 비록 박사학위를 몇 십 개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라 하는 그러한 아상을 못 끊으면, 사람은 벌써 가슴에 어둠이 있습니다. 범부입니다. 일자무식이라 하더라도 가슴에 나라 하는 어둠이 없으면 그때는 성인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광명이고, 광명의 반대는 바로 어둠입니다. 어둠 이것은 바로 번뇌입니다. 등은 왜 켜는 것 인가? 이것은 우리 가슴에 어두움, 무지,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등을 켜는 것입니다. 본래 광명으로 회귀하기 위해서, 본래 광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등을 켜는 것입니다. 광명은 바로 우리 마음의 고향이고, 우리 참다운 의미인 것입니다. 중생이 무식해서 의의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등을 한번 켤 때 광명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마음의 광명은 그만치 그 정도가 더 빛나는 것입니다. 등을 두 번 켜면 켠 만치 그때는 우리 마음의 광명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의 광명만 빛나버리면 그때는 재수나 운수 같은 것은 절로 우리한테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춘 쓸 때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그런 말 쓰지 않습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아시는 말씀입니다만 소문만복래라, 웃음을 머금은 문에는 만복이 온다는 말입니다. 항시 미소를 띤 사람들은, 그때는 복이 오지 말라해도 복이 옵니다.

 

찌푸린 사람은 아무리 시주를 많이 하고 별짓을 다해도 그때는 큰 복이 못 옵니다. 그 밝은 표정, 남을 부처같이 생각하는 그런 마음, 남한테 자비심을 항시 베푸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면 설사 남한테 물질로 베풀지 않는다 할지라도, 특별히 불교인이고, 기독교인 이고 아니더라도 역시 복은 오게 마련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거니, 부처의 속성인 그런 평화 우리 집안사람의 그런 풍요, 이것을 안 바란다 하더라도 마음의 광명만 보다 더 증가를 시키고 마음이 훤히 트이면 그때는 복은 저절로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불자님들의 그런 마음광명을 보다 더 키워 드리고 근본적인 복을, 더 증장을 더해드리기 위해서, 인등불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인등불사의 시초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불사라는 것은 모두가 여러 가지 또 복합적인 공덕이 있습니다만, 인등불사는 그와 같이 첫째는 우리 마음의 광명을 빛내게 하고, 우리 마음을 번뇌로부터 해방시킨다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번뇌로부터 해방 당하면 당한 만치 거기에 비례해서 우리 가정도 화평은 가증이 됩니다. 우리 마을도 마찬가지고, 나아가서 국가민족, 세계 인류, 내 마음 밝히는 그 문제가 벌써 세계 인류의 평화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 절이라 하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큰절이 되어서 관광수입도 많이 들어오고, 또는 아주 큰 스님이 되어서 훌륭한 부자 신도님들이 많이 도와주는 그런 절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태안사泰安寺 같이 궁벽지고 또는 관광수입도 안 받아서 운영하려면 조금 곤란스럽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지가 그대로 말수는 없습니다.

 

여기 태안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입니다. 혜철국사(惠哲 : 785~861), 도선국사(道詵 : 827~898)가 여기서 공부해서 성취한 성지입니다. 이런 성지가 현대와 같이 살벌하기도 하고, 혼탁한 때에 모범적인 선방하나도 없다는 것은 참 너무나 애석한 일이고 통탄할 일입니다. 이런 성지聖地를 성지답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저 같은 그런, 또는 우리 여기 모여 있는 순수한 수행자, 이런 분들로 해서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인등불사, 천등 인등불사 이것은 아까 말씀처럼 가장 제 일위적인 공덕은 이것은 우리들 각기 마음의 번뇌를 추방시키는 것입니다. 번뇌 무명을 우리가 없앱니다. 이런 것에다가 가장 큰 제 일위적인 목적이 있고, 그 다음으로 부차적인 공덕으로 해서는 그걸로 해서 우리의 선방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한 달에 한등 켜면 5천 원씩 받아서 꽤 많은 셈입니다만, 이걸로 해서 여러분들이 무명 번뇌가 녹아지고 동시에 모범적인 선방이 서서 여러 가지 사도私道로부터 불법을 지키고 하는 정통불교가 선다고 하면은 얼마나 큰 보람이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천등 인등불사를 해서 설치를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천등을 모시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은 좀 지루하실 것입니다만 이렇게 같이 모여서 법문을 하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지루하시더라도 참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필이면 천등을 켜는 것인가? 부처님의 이름이 굉장히 많습니다. 삼천불명경 이라, 삼천이나 되는 부처님의 이름이 계십니다. 그럼 부처님이 삼천불 계시는 것인가?

 

기독교는 , 주여!하고 하나님 한분 믿으면 그만인데, 우리 불교는 그냥 약사여래, 지장보살, 또는 동방일광불 등 그와 같이 부처님의 이름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와 같이 많으니까 더러는, 지금 현대인들은 마치 불교를 다신교, 원래 미개한때의 다신교 모양으로, 그와 같이 불교는 신이 많아서 그렇게 부르는 부처님 이름이 많은 것인가? 또는 불교를 꽤 오랫동안 믿으신 분이고, 절에 많이 다니신 분도 역시 지장보살 따로 있고, 관음보살 따로 있고, 이와 같이 부처님이 모두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부처님 이름이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 삼천불의 이름이 각기 다 있습니다. 그런 경이 다 있는 셈인데, 따로 있는가 하면 부처님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자님들, 이것을 명확히 아셔서 바른 정견을 갖으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우주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틈이 있고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부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틈도 없습니다. 앞에 있는 저 범연스님과 저와의 이런 사이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보지요. 그것은 이렇게 사람 모양 된, 응집된 존재의 거리가 있는 것이지, 부처님의 광명은 이 사이도 꽉 메워져 있습니다. 이 사람 몸이나, 범연스님 몸이나 광명으로 충만 되어 있습니다.

 

우주는 바늘 구멍만한 틈도 없이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한계가 없는, 즉 말하자면 이와 같이 제반이 없는 그런데다가 이부처, 저 부처, 부처의 한계가 있겠습니까? 딱딱 떨어져서 이렇게 구분 지어야 따로 부처의 이름을 붙일 것인데, 딱 붙어있는 광명, 하나의 광명인데 어떻게 우리가 거기다 따로 붙이겠습니까? 그것을 불교에서는 원융무애圓融無碍, 하나의 순수한 부처님의 영롱한 광명뿐이란 말입니다. 헌데 부처님의 광명은 무량공덕이 있습니다. 불경에 보면 아라한 도를 성취한, 아라한 도를 성취하면 소위 무학도라,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대 도인이 아라한 아닙니까?

 

아라한 도를 성취한 그런 대 도인들이 몇 억 사람, 항하사 수, 중국의 양자강이나 인도의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아라한도을 성취한 도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몇 억년을 두고서 부처님의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다 헤아릴 수 없다 말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공덕은 많은 것입니다. 자비로운 것도 한도 끝도 없고, 지혜도 한도 끝도 없고, 행복스러운 것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아무튼 어떤 연으로 보나 완벽 무결한 것이 부처님의 공덕입니다.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간격이 없이 가득 차 있는 그런 광명은, 그런 완벽한 행복, 지혜, 자비 모두가 거기에 딱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말 이라는 것은 한정이 있지 않습니까? 자비로운 의미에서 관세음보살이라, 이렇게 되면 또 역시 자비로운 면을 우리가 표현을 했지마는, 또 지혜로운 면은 표현을 못한다 말입니다. 그때는 대세지보살, 또는 문수보살 이와 같이 지혜로운 면을 표현한다 말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공덕은 우리 중생의 병고를 우리가 아프면 아픔을 다스리는 또 그런 공덕도 완벽히 있습니다.

 

그러나 관음보살이나, 또는 지혜만 표현해 있는 문수보살이나 그런 보살로 해서는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그런 이름까지를 다 표현 못한다 말입니다. 그런 때는 약사여래불이라, 약으로 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라 이름을 붙인다 말입니다. 또는 중생이 금생에 살다가 죽어서 이 몸뚱이는 버리고서, 헌옷 벗듯이 몸뚱이는 버리고서 그때는 영혼만 가지고 저승길에 들어갑니다. 저승길에는 누가 인도를 하는 것인가? 부처님 힘은 충만해 있고,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는지라, 또 저승길을 인도하는 부처님이 계시거든요. 부처님 힘이, 공덕이 계신다 말입니다. 부처님 공덕 가운데서 우리 중생의 저승길을 안내하는 그러한 의미에서 일로왕보살이라, 또는 지장보살이라 그런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뿐입니다. 공덕의 이름뿐입니다. 공덕이 하도 끝도 없이 많아서 자비로운 공덕을 표현할 때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공덕을 표현할 때는 대세지보살 또는 문수보살,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그런 공덕을 표현할 때는 약사여래, 우리 중생의 영혼을 구제하는 그런 의미에서는 지장보살 또는 일로왕보살 이라 말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삼천불명이나 되는 그런 많은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의 원융한 부처님, 부처님의 공덕 따라서 청정광불이라, 또는 무량광불이라, 상대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대광불이라, 행복이 충만하다는 의미에서 환희광불이라, 이와 같이 이름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원융한 부처님입니다. 중생들은 하나를 못 봅니다. 중생은 겉만 보고서, 바다가 있으면 바다에 일어나는 그런 거품이나 물살밖에 못 봅니다. 물 자체는 못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은 자꾸만 시비하고 갈라 버립니다. 그러나 도인들이나 부처님은 하나로 봅니다. 불성 하나 뿐이구나, 따라서 불성을 딱 본분들은, 그때야 시야비야是也非也 할 시비를 잘 안 가립니다. 허나 불성을 못본 사람은 비록 하나의 박사라 하더라도 역시 아직 범부니까, 하나의 것을 못 보니까 자꾸만 갈라서 시비분별 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부처님은 여러 분이 계신다 하더라도 그런 오직 하나의 부처님, 하나의 부처님의 하나의 공덕 따라서 표현된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원리는 그렇고, 현상으로 봐서는 천태가 이루어져서 천태가 괴멸할 때까지 삼천부처님이 나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보면 다 부처일망정, 하나의 모양으로 해서 성불을 한 부처님 말입니다.

 

물론 도인들은 성불로 봅니다만 같은 도인도 역시 완벽한 부처님, 완벽한 성자, 이것은 부처님이죠. 즉 말하자면 견성오도 하면은 완벽은 미처 못해도 부처라고 보통 말합니다. 그것은 존재에서 말한 것이고, 참다운 부처님은 견성오도를 해가지고 완전무결한, 번뇌의 뿌리까지 다 뽑혀서 삼명육통을 다하고, 석가모니 같이 무불통지無不通知 하는 그러한 부처님, 그런 도인이 그때는 참말로 부처님이죠.

 

원리에서 보면 다 부처고, 또 좁은 존재에서 보면 견성오도 막 해도 그때는 부처입니다. 허나 참다운, 완벽한 부처님, 우주와 딱 하나가 되어 부처님의 공덕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그분이 그때는 참다운 화신 부처님입니다. 그런 분이 천지우주가 형성되어가지고 다시 괴멸될 때에 천지우주가 이루어지는 성겁이라, 중생이 사는 주겁이라, 다시 괴멸되는 괴겁이라, 다시 텅 비는 공겁이라, 이와 같이 사겁 될 때 까지, 화신부처님으로 완벽하게 나오신 분들이 삼천불이 되신다는 그런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삼천부처님 가운데서 과거 천불, 미래 천불, 현재 천불 이라, 우리 중생들이 살수있게 된 이 마당, 이런 경계에서 천불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천불가운데 네 번째 분입니다. 이런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헌데 부처님은 한 분이라 하더라도, 부처님 한 분이 천지우주 모든 부처님을 다 대변합니다. 내내야 내용은 다 광명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불로 해서 삼천불도 대변하고 또한 일체 만불, 천지우주 부처님 덩어리를 바로 대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천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천불의 점안식點眼式, 점안식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조성한다고 하면, 그냥 천지우주가 부처가 아님이 없는지라, 부처님의 신령기운이 거기에 깃드는 것입니다만 보다 더 우리가 하나의 법식을 갖추고서, 지금 법당에 모신 부처님한테 천지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부처님의 신령기운이 거기에 갈마羯磨 있게 해 주십시오이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 점안식입니다. 이것을 오늘 이미 우리는 더 구체적인 것은 했고, 오늘은 마무리만 간단히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의의 깊은 여름 결제 날입니다. 앞서 말씀처럼 우리가 그냥 듣는 걸로 해서는, 교리를 많이 듣는 것도 역시 우리 잠재의식에다가 문종이라, 부처님 종자를 심습니다. 허나 부처님 종자 그것이 익어서 성불로 가려면 실제로 행하기도 하고 또는 우리가 참선염불도 해서 그것을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성불이 될 것인데, 그냥 들어만 가지고는 성불이 못 됩니다.

 

물론 그도 근기가 수승해서 선근이 높은 분들은 일문십지一聞十地, 또는 일문一聞에 돈오頓悟한다 이렇게 해서 빠딱 깨달은 분도 있습니다만, 보통은 단번에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아까 말씀처럼 결제를 해서 몸도 부처님 법문에 맞는 그러한 행동, 말도 부처님 법문에 맞는 그런 바른 말, 우리 생각은 천지가 바로 부처님인 것이니까 부처님 생각은 떠나지 않는, 나나 너나 또는 일체중생의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무량한, 다 한 가지 신령스러운 기운이구나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바른 생각입니다.

 

우리가 보조국사 어록을 본다 하더라도 선오후수先悟後修, 참선 할 때는 꼭 선오후수를 해야 합니다. 즉 말하자면,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아야 한다 말입니다. 깨닫는 것은 미쳐 증명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과 풀이로 해서는 먼저 깨달아야 한다 말입니다. 선오후수 먼저 깨닫고 닦지 못하면 참선이라 말을 못 붙입니다. 불자님들,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일반 공부와 참선공부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것은 일반 공부는 미처 먼저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냥 부처님이나 도인들 법문 따라서 우리가 애쓰고 합니다.

 

부처님이 무엇인가도 모르면서도 우리가 염주를 헤아리면서 염불을 한다 말입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은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 나하고 떨어져서 저 멀리 계신다, 극락세계는 저만치 십만 억 국토 밖에 있다, 이런 식으로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공부입니다. 이것도 부처님 공부입니다. 그것도 애쓰고 하다보면, 순수하게 하다보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가 원래 부처인지라 차근차근 깨달아 옵니다.

 

어느 분들은 그런 방편공부,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는 공부, 이런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고 함부로 비방합니다만, 부처님이나 도인들 말씀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방편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방편을 하다보면 그때는 그냥 진리 쪽으로 흘러갑니다. 이런데서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지혜가 있습니다. 비록 극락세계를 저 밖에서 구하고 아미타불을 저 밖에서 구한다 하더라도 하다보면 그때는 자기 업장이 녹아지면 원래 우리가 부처인지라 그때는 부처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구나이렇게 느껴진다 말입니다.

 

허나 참선이라 하는 것은 그냥 바로 자성미타自性彌陀, 모든 부처님이 바로 내 본질이구나 우주가 바로 부처님 덩어리구나, 우주는 부처님의 공덕으로 가득 차 있구나, 이와 같이 바른 견해, 이것보고 정견이라, 이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팔정도를 외고, 십이인연법을 외고, 육바라밀을 왼다 하더라도 내 본질, 천지우주의 본질이 바로 부처임을 못 느끼면 정견은 못 됩니다. 무자를 들고, 또는 이 뭣고!를 들고 판때기 이빨을 들어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역시 내 본질과 우주의 본바탕이 부처임을 못 느끼면 그때는 참선이 못됩니다. 선방에서 아무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하더라도 그만치 본 생명이 바로 부처임을 못 느끼면 그때는 참선이 못됩니다. 비록 자기 입으로는 똥 마른 막대기 화두를 하건, 또는 아미타불을 부르던, 하나님을 부르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문제가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임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고 하면 형상적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똥 마른 막대기라는 화두도 있듯이,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부르나, 관음보살을 부르나 그때는 그것이 나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선이라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어느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마음이 순간 찰나에도 부처님의 본체를 안 여위어야 한다. 내 본바탕이 일체 공덕을 갖춘 부처다.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덩어리다. 천지우주는 부처의 광명으로 충만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 생각, 하나의 생각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어려운 말로 일상삼매一相三昧,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님으로 보는 그 생각, 그 생각이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잡념이 안 끼고 그 생각이 쭉 이어가는 생각, 이어가는 공부, 이것이 참선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말씀했습니다만 우리 마음이 본체를 안 여윈다. 우리 마음이 불성을 안 여윈다. 장사를 하건, 또는 누구와 싸움을 하건 그런 것도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불성을 안 여위면 바로 참선입니다. 참선은 앉아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워서나 또는 길을 가든지 간에 우리 마음이 불성을 안 여위면 됩니다.

 

오늘은 결제날, 부처님의 환희일입니다. 우리 출가 하신 분들, 또는 다행히 동참되어서 공부하시는 우리 처사님들, 또는 보살님들, 꼭 이번 여름동안에 우리 본래 생명인 내 마음과 바로 직결되어 있는 그런 부처, 부처와 내 마음과 거리가 없습니다. 바로 맞닿아 있는 부처, 그 부처를 꼭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동참하신 우리 사부대중들, 꼭 집에 가셔서 아까 말씀처럼 심상수행, 일용심상수행을 해서 부처님을 순간도 안 여위도록, 남하고 대화할 때도 저 사람이 바로 부처구나, 물건을 팔 때도 바로 부처님의 화신이구나, 순간 찰나도 부처라는 생각을 안 여위시고서 심상수행 가운데서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오늘 법어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