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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3. 전주 원각회 법문(198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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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는 것이 이런 산업 사회에서 정숙을 기할 수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정숙을 기하는 그런 방법, 그런 방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도 많이 가지고 연구도 하기 때문에 이런 때는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三昧라 하는 그 문제에 관해서 관심들이 쏠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삼매 가운데는 청량 삼매라, 청량삼매라는 삼매가 있습니다. 이것은 맑을 청, 서늘할 량자 청량淸凉 삼매입니다.

 

이와 같이 삼복더위에 우리가 청량삼매에 들 수가 있다고 하면 참 얼마나 행복이겠습니까. 우리 몸도 마음도 조금도 어떠한 그런 굴탁도 뭣도 없고 또는 거북한 점이 없이 아주 서늘하고 그야말로 청량 그대로 맑고 서늘한 그러한 것을 우리가 만끽하는 그러한 삼매가 이것이 청량삼매입니다. 허나 우리가 나무 그늘에 가면 시원하기도 하고, 얼음을 마시면 그때그때 갈증도 때우고 또는 더위도 달래기도 합니다만 정작 우리 마음의 청량, 마음의 청량은 그런 걸로 해서는 메꿀 수가 없습니다.

 

청량 삼매는 어떻게 드는가 하면 먼저 탐, , 3독심을 끊어야 합니다. 탐심, 또는 성내는 진심, 또는 치심 이러한 것이 있는 한에는 이러한 독심이 있는 한에는 몸을 제 아무리 식힌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청량은 기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불자님들은 선방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 드리는 그런 주제도 역시 삼매 쪽에다 역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삼매를 닦는 것인가? 지금 참선하고 참선이라는 말씀은 지금 많이 쓰고 있고, 우리가 또 아는바와 같이 지금 인류 문화의 여러 가지 그런 정신문화의 가장 중요한 골수骨髓, 골수는 역시 선쪽에다 두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새 무슨 마인드컨트롤이라든가 또는 기타 명상법이라든가 여러 가지 그런 것을 본다하더라도 역시 빼내야 선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아까 말씀처럼 이와 같이 복잡하고, 자칫하면 그런 우리 긴장 때문에 감당을 못하고서 정신분열증이 안 되면 살 수 없을 만큼 이렇게 복잡다단할 때에 마음을 딱 모아서 청량삼매 쪽으로 우리 마음을 유도한다는 것은 역시 뭐라고 해도 선이라 하는 과거 성자의 예지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서 선에 대한 요청은 날이 가면 갈수록 가중된다고 생각합니다. 헌데, 정작 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상당히 문제가 많다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도 아시는 바와 같이 18종파가 있습니다. 18종파마다 다 자기 나름대로 선을 다 합니다. 허나 그것이 똑같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연구를 많이 하신 분들은 그런 가운데서 선택을 좋은 쪽으로 하십니다만, 연구를 잘 안하신 분들은 그때는 선택이 곤란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정통선법 또는 가장 효과적으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탐, , 치 삼독심을 제거하고서 청량삼매에 들어서 우리가 해탈을 할 것인가? 우리 자성自性을 볼 것인가? 그런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알기라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달마(達磨 ?~526)스님께서 중국에 오셔가지고 아시는 바와 같이 9년 면벽을 하셨습니다. 9년 동안인가 더 되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더라도 일반 기록에서는 9년 동안이라고 되어있습니다. 9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서 공부하시고, 또는 여러 가지 기연機緣이 인연이 있기를 거기서 대기待期 하셨다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다행히 혜가(慧可 487~593)스님을 만나서 정법을 전수 안하셨습니까? 한데, 정법을 전수할 그 무렵에 이것은 있었던 얘기입니다.

 

달마스님을 따르는 분들이 상당히 많지 않은 너무나 숨어서 공부하셨기 때문에 겨우 몇 분만 그때 따랐다 말입니다. 달마스님같이 그런 큰 그릇은 일반 시원찮은 그런 법기로는 상대를 또 안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달마스님하고 혜가스님하고 법을 전수할 때는 우리가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혜가스님이 그야말로 자기 팔을 베어서 바쳤다 말입니다. 그 정도의 표신을, 신표를 안 보이면 법을 안 줄 정도로 그와 같이 엄격하니 법을 전수를 하셨습니다. 그때니까 달마스님을 따르는 분들도 별로 많지가 않다 말입니다. 그래 달마 스님께서 내가 인연이 다해서 서역지방, 내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그대들이 공부한 것은 한번 나한테 말해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니까 그때 도부라 하는 길 도자 버금 부라 한문자는 그렇게 씁니다. 도부道副라는 그 분이 척 나와서 말씀했다 말입니다.

 

제가 아는 걸로 해서는 제가 얻은 그런 지견으로 해서는 문자에 착하지도 않고 또는 문자에 걸리지도 않고, 불착문자不着文字 불기문자라 문자에 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도용을 합니다. 활용합니다.” 그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우리가 얼핏 들을 때는 문자에 안 착하고, 문자를 안 떠나고 그런 중도를 치우니까 상당히 좋은 말 되겠지요.

 

제가 아는 바로 해서는 문자에 착하지도 않고 문자에 얽매이지도 않고 그렇게 하면서 도용을 합니다. 도용은 길 도자 쓸 용자 입니다. 이것은 도용이란 말은 불가에서 어떻게 쓰는가 하면 길 도는 체로 표시하고, 용은 쓸 용자는 그때는 용으로 표시됐기 때문에 본체를 안 떠나고서 활용하는 것 보고 도용道用 그럽니다.

 

우리 중생은 보통 활용하면 그냥 이렇게 아무렇게나 체를 떠나 버려서 활동합니다만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그때그때 순간동안 가사, 하나의 미소를 짓는다 하더라도 순간 찰나도 본체를 안 여윈다 말입니다. 그것이 이제 범부와 공부를 많이 하신 분과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도용인데 그와 같이 도부라는 분은 이제 제가 아는 바로 해서는 문자를 안 떠나고 문자를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게 도용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그대는 겨우 나의 껍질 밖에는 알지 못했구나.” 이와 같이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다음에는 니총지라. 니총지라는 분이 있습니다. 니총지는 비구니라는 니자 즉, 말하자면 여자 중, 니자입니다. , 말하자면 니총지라. 총지는 이름이지요. 그 당시가 양 무제 때인데, 양무제의 딸이 총지總持입니다. 헌데, 입산해서 달마스님 그야말로 제자가 되었으니까 비구니이니까 니총지가 됐지요. 니총지도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니총지가 나서더니만 제가 아는 것으로 해서는 마치 아난존자가 아촉불阿閦佛을 한번 뵙고 다시 못 뵈옵듯이 그러한 것이 참다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제가 아는 걸로 해서는 아난존나와 같은 그런 위대한 도인이 아촉불阿閦佛을 한번 뵈옵고 다시 못 뵈온 정도로 저는 압니다.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달마대사는 그 말끝에 그러면은 그대는 겨우 내 살, 아까는 껍질인데 이제는 조금 들어가서 더 깊이 들어가서 내 살을 얻었도다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다음에는 도육이라 하는 길 도, 가르칠 육자 하는 도육道育이라는 스님이 나와서 제가 얻은 걸로 해서는 저는 사대가 본래 공이요, 일체만유를 구성한 지··· 사대四大 각 원소로 구성된 그런 지수화풍 사대, 사대가 이것이 본래 공이요, 우리 중생이 봐서 있는 것이지, 본래는 이것이 실제로 봐서는 공이요, 또는 오온五蘊이 본래 공이라. 오온 이것은 사대에다가 수···이라. 우리가 감수하고, 또는 우리가 상상하고 말입니다.

 

의욕하고 분별하고 하는 것이 우리 마음 작용 안 되겠습니까만 지수화풍사대의 색에 다가 우리 정신활동인 그때는 수나 상이나 행이나 이것이 합해서 오온 아닙니까? 물질인 사대가 원래 바로 보면 다 공이요, 또는 우리 정신까지도, 합한 그것도 역시 공입니다. 따라서 일체가 본래 저는 없음을 압니다.”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이것은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그런 경에서 말씀하신 제법공諸法空의 사상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사대가 원래 공이요, 오온이 본래 공임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일체 만유는 다 허무합니다.”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하니까, 달마스님께서 그대는 나의 뼈를 얻었구나.” 뼈는 살 속에 있기 때문에 살보다는 법이 더 깊겠지요. 맨 나중에 혜가스님, 혜가스님은 아시는 바와 같이 달마스님 다음에 이조二祖스님이라, 즉 말하자면 달마스님한테 정법안장, 부처님의 정통법을 계승을 받은 분이 혜가 스님 아닙니까? 혜가 스님은 그냥 그때는 아무 말도 없이 달마스님 앞에 가서 절만 너붓이 하고서 자기 자리에 가서 가만히 앉았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이 무릎을 치면서 그대가 겨우 내 골수骨髓를 얻었구나!” 아까 맨 처음에는 우리 사람으로 비기면 그때는 껍질 피부를 말하는 것이고, 그다음 분 니총지는 살을 말하셨고, 그다음에 도육은 뼈를 말하셨고 맨 나중에 혜가스님이 비로소 그야말로 골수를 드러내는 그런 법문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법문은 말이 있는 법문이 아닙니다. 말을 떠난 문자 이전의 법문을 했습니다.

 

따라서 참선이라 하는 것은 실은 문자로 표현이 안 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원래 참선은 본체를 드러냅니다. 우리 중생은 입장이 가리어서 현상 밖에는 못 봅니다. 따라서 현상만 보는 우리 중생의 제한된 시야로 해서는 본체를 못 봅니다. 본체를 못 보니까 말이나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나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그런 경계를 혜가스님은 그와 같이 절만 너붓이 하는 걸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대 사회에서 이런 복잡한 때 이렇게 불안한 때 꼭 실은 삼매가 필요합니다. 꼭 선이 필요합니다만 선은 이와 같이 본체本體를 문제로 하기 때문에 실은 어려운 것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잘못 지도하면 그때는 사람들이 불신不信을 느끼고 또는 너무나 왕양감이라 어떻게 갈 바를 몰라 버립니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나 그 뒤에 계계승승으로 이어 내려온 육조 혜능까지 삽삼조사卅三祖師 이런 정통조사는 조금도 흠축 없이 부처님을 드러냈지만은 그 뒤에 분들은 역시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도인이 긴가 아닌가 우리가 확실히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승을 구할 때는 꼭 정평있는 도인들을 딱 구해야 합니다.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625~702), 서산(西山.休靜 1520~1604), 보조(普照.知訥 1158~1210), 태고(太古.普愚1301~1382) 그 분들은 정평 있는 도인들 아닙니까? 그 외분들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할 때도 역시 주로 육조혜능까지 정통 조사의 어록을 봐야만 우리한테로 참다운 오류가 없는 양식이 됩니다.

 

이러한 것은 선이 그만큼, 참선이란 것이 어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삼매를 닦아야 할 것인가? 꼭 현대인들한테 필요한 것이고, 또는 우리 본래 가운데, 우리 불성 가운데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무한의 가능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청량삼매라 청량삼매에 들면 그야말로 몸도 마음도 서늘해서 아주 행복의 절정에 이른다고 되어있습니다만, 이것은 누구나가 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전에 사명당그 영화를 보자고 해서 저도 가서 봤습니다만 사명당(四溟堂 1544~1610)이 사신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말입니다. 일본 들어가서 그네들이 시험하려고 아주 이렇게 철판 방을 만들어가지고 그 위에다 어떻게 깔아가지고서 사명당을 누워서 주무시게 해가지고서 불을 땠다 말입니다. 사명당이 법력이 없는 분 같으면 그냥 뜨거운 방에 철판을 깔아놓은 방에서 그때는 데어서 돌아가시겠지요. 한데 아침에 보니까 얼음 냉자를 딱 써가지고서 방에다 붙여 놓았는데 그 고드름이 방의 네 귀에서 주렁주렁 열려있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영화에서 나와 있었습니다만, 그런 것은 참 서투른 일입니다만 아무튼, 우리가 생각할 때는 ! 그런 것은 불교에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신통한 것은 그야말로 외도나 할 것이지 불교는 없다이렇게 합니다만, 실은 그런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째 가능한 것인가 하면, 우리 불성, 우리 자성 가운데는 일체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람을 생각하면 자기 몸에서나 자기 마음에서 바람이 한 없이 나옵니다. 불을 생각하면 자기 몸에서 불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나중에 기회 있으시면 부처님 때부터서 육조혜능까지 그 분들이 열반 들으신 광경을 사기로 보십시오. 대부분 다 십중 칠팔은 모두 다 화광상매火光三昧라 자기 가슴에서 불을 내서 자기 가슴에서 낸 불로해서 자기 몸을 태웠습니다.

 

한국도 현광玄光대사, 중국 들어가서 혜산선사한테 법을 받는 현광대사는 그 분도 역시 자기 가슴에서 불을 내서 자기 몸을 태웠습니다. 태고선사가 중국 들어가서 법을 받으신 청공화상이라, 그분의 임종 때 게송을 보면 말입니다. 자기가 삼매에 깊이 못 들어가서 자기 가슴에서 자기 몸에서 불을 못 낸 것을 굉장히 한탄했습니다. 우리 불성 가운데는 불도 물도 바람도 다 들어있습니다. 무한의 공덕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쪽으로 삼매만 닦으면 결국 다 나온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계발을 미처 못 해 그럽니다.

 

아난존자는 열반 들으실 때 일반 중생을 제도하려고 해서 내가 어느 때 죽겠다고 자기가 죽는 시기를 말씀했다 말입니다. 말씀하시니까 이제 아난존자가 계시는 곳은 마가타국인데 마가타국왕이 그 열반 들으실 적에 자기가 뵙고자 해서 그때 대기하고 있고, 또 딴 나라에서도 그때는 모셔가려고 한다 말입니다. 열반상을 지켜보면서 공경스럽게 하고 신심을 돋우려고 해서, 그런데 아난존자는 내가 마가타국에서 열반 들면 너무나 환경이 복잡하니까 차라리 강 건너서 갠지스강 건너서 비하리국 가서 내가 열반 들어야겠다. 이렇게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열반 들으실 시기가 임박하니까 자기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비하리 나라 쪽으로 갠지스강 건너서 가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마가타국의 왕자는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이쪽으로 모시려고 한다 말입니다. “대사가 가시면 안 됩니다하고서, 그리고 저 쪽에서는 역시 갠지스강 저쪽 강 언덕 비하리국에서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서 그쪽 왕자가 마중 나오고 있다 말입니다.

 

아난존자가 자기 거취를 잘 못하면 자칫하면 양나라가 자기 때문에 싸우게 되니까 갠지스강에서 나룻배에 올라서 중류쯤 가서 아난존자가 그냥 풍분삼매風奮三昧, 풍분신風奮迅이라, 바람을 내는 삼매에 들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솟아 올라와서 공중에서 화광상매라 불내는 삼매에 들어서 자기 몸을 태웠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사대를 딱 구분해서 양쪽으로 사리를 이렇게 늘어뜨렸단 말입니다. 자기가 이쪽이나 저쪽이나 양쪽이 붙어버리면 결국 자칫해서 치우쳐 버리면 양편이 싸우게 되니까요. 물론 평소에 법력도 강하셨겠지만 그와 같이 자재신통이라, 그런 것을 보였다고 생각할 때에 아, 그 양쪽에 서 있는 우리 불교인들이 얼마나 환희심을 냈겠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삽삼조사卅三祖師가 반수가 훨씬 되는 더 많은 그 분들이 모두가 다 열반에 드실 때는 다 공중에 올라가 십팔신변이라, 십팔가지의 신통을 보입니다. 일반 중생한테 중생이 신심을 넣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여기서 그런 것을 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삼매에 깊이 못 들어놔서 그런 힘을 못 냅니다. 우리는 비록 못 낸다 하더라도 우리 가운데는 어떤 누구나 간에 석가모니나 또는 그런 도인이나 똑같은 잠재한 불성무한의 역량 있는 불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믿어야 하겠습니다.

 

불교신앙은 우리한테 있는 무한의 가능 있는 무한공력을 갖춘 불성을 믿는 것이 불교 신앙입니다. 그걸 못 믿으면 참다운 불교 신앙인이 못됩니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 생활이 힘도 생기는 것이고 참다운 수행력도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비록 어떠한 경우라도 이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은 완벽한 공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들 보시는 분들은 다 알겠습니다만 부처님 이름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또는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또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환희는 아주 맑은 행복이 환희 아닙니까? 환희광불이라, 우리한테 갖춘 우리 자성, 우리 불성은 이것은 환희광불이라, 실은 행복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행복으로 보나 또는 기능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우리 인간성의 본질뿐만 아니라 일체 만유의 본질이 똑같습니다. 우리 소승小乘 불교인들은 사람의 본성만 불성인 것이지 저런 식물이나 또는 요새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나 그런 것이 본바탕은 그것이 불성이라 생각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불교의 불성은 그와 같이 소승적인 불성이 아닙니다.

 

유정有情·무정無情·유상有相·무상無相 일체 존재의 본바탕이 불성佛性입니다. 부처님 경전에서 보면 이런 비유담이 있습니다. 지금 새는 자기 습성 따라서 공중으로 갈려고 하는데 그런 공중으로만 달리고 싶어 하는 그런 새나 또는 뱀이나 개나 또는 원숭이나 또는 악어나 또는 여우나 이런 육축을 한 군데 딱 묶는단 말입니다. 물론 각기 묶을 때도 이렇게 한꺼번에 묶는 게 아니라 별도로 개면 개, 또는 새는 새 이와 같이 별도로 묶어가지고서 이제 한 군데에다 딱 맨다 말입니다.

 

그런데 한 군데다 맨 그 자리가 별로 힘이 없으면 그때는 그냥 악어는 악어대로 해서 이끌라고 하고 또는 새는 새 대로 이끌려고 하겠죠. 그럼 그 가운데서 가장 힘이 센 곳으로 이끌려 갑니다. 그런 육축가운데서 딱 묶어놓은지라, 새는 마땅히 자기 습성대로 공중으로 갈려고 하겠지요. 뱀은 또 구렁으로 갈라고 하겠지요. 개는 또 일반 마을로 갈려고 하겠지요. 악어는 바다짐승인지라 바다로 갈려고 하겠지요. 원숭이는 또 숲에서 사는지라 숲으로 갈려고 하겠지요.

 

그와 같이 육축을 이렇게 묶어 놓으면 묶어서 별도로 해 놓으면 각기 힘 강한 대로 서로 가려고 하는 마당에서 제일 강한 쪽으로 쏠리고 만다 말입니다. 비유가 서투르게 표현됩니다만 실은 이런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하면 이것은 육식 안·····우리 눈으로 보고, 또는 귀로 듣고 하는 이러한 우리 중생의 허망한 육식을 비유해서 새나 또는 개나 또는 뱀이나 또는 악어나 또는 원숭이나 그런 방정맞은 것들을 묶어놓으면 서로 피차 갈려고 하는데서 어디로 갈 바를 모른다 말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좋고 또는 귀로 듣는 것이 좋은 멜로디가 들려온다고 하더라도 또는 음식이 아주 맛좋은 음식이 있어가지고 그런 냄새가 고소히 우리한테 오면 그때는 그쪽으로 가겠지요.

 

또는 아무리 음식이 있다 하더라도 눈으로 본 것이 하도 좋아서 풍경이 좋으면 우리가 풍경을 구경하러 간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마치 새나 또는 뱀이나 돼지나 그런 것이 묶어 놓으면 각기 자기 습성대로 가려고 하듯이 눈으로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그런 가운데서 보다 더 자극이 심한 쪽으로 거기에 쏠려서 우리 행동합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 생활입니다. 헌데 이러한 것을 우리가 그런 것에 착하지 않고서 끄달리지 않고서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먼저 실상을 파악해야 합니다. 실상을 파악하지 못 하면 우리 공부든지 또는 바른 경계에서 공부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바르게 못 나갑니다.

 

실상實相을 파악해야 합니다.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이나? 무슨 공부나 실상을 먼저 파악해라. 실상묘법이라, 이런 말씀을 많이 씁니다만, 어떻게 실상을 파악을 할 것인가, 실상은 무엇인가, 그런 문제에서는 간단히 말씀하기가 좀 어려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실상을 파악할 때는 먼저 제법공諸法空을 느껴야합니다. 제법공을 못 느끼면 실상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제아무리 좋게 본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가짜입니다. 바로 못 봅니다. 다 아시는 문제입니다만 삼성三性이라, 우리 중생은 마치 해어름판에 잘못 봐가지고서 새끼 토막이 있으면 해어름판에는 새끼 토막을 뱀으로 우리가 착각한다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지식적知識的으로는 많이 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바로 보는 견해는 아닙니다. 비로소 성자가 되어서 불성, 우리 자성을 볼 때만이 비로소 바로 봅니다. 불교에서 보면 이런 술어를 씁니다. 정성리생正性離生이라, 정성은 바를 정자 성품 성자 떠날 리자 날 생자 정성리생이라,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은 범부의 생을 떠나야만 비로소 정성, 바른 불성을 본다는 말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가 바로 보려면 역시 우리 범부성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떠나는 방법은 집에서나 어디서나 우리가 이제 장소의 그런 차이는 없습니다만 하여튼 우리 범부의 성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이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 다시 말하면 불성의 조명照明으로 보아야만이 바로 비춰봅니다. 여기에 이르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르려면 역시 무간수無間修라 말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수준이 높으시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한데, 무간수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무간수라 없을 무자 사이 간자 무간수無間修라 말입니다. 무간수가 아니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정성리생正性離生이라, 삼매에 들어서 우리 불성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전생에 선근善根 금생에 자기 공부하는 여러 가지 결의에 따라서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만, 아무튼 삼매에 못 들면 정성리생正性離生은 못 봅니다. 즉 무간수無間修, 딴 생각이 거기에 못 끼일 수 있도록 까지 잡념이 거기에 개입이 못될 수 있도록 까지 해야만 무간수가 됩니다. 번뇌가 사이에 낄 수가 없다 말입니다. 무간수가 되어야 수월하니 오직 일매지게 순일하니 나갑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번뇌가 그때는 맥을 못 춥니다. 그래서 그때는 차근차근 깊이 들어가서 우리 본성인 불성이 발로가 된다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실상을 봅니다.

 

한데 그렇게 될 때도, 우주가 텅텅 비어서 제법이 다 공한 자리가 되어야만 비로소 무간수가 됩니다. 무간수無間修를 거쳐야만 참다운 그런 공한 가운데 진공묘유眞空妙有, 묘유의 실체를 본다 말씀입니다. 진공 가운데 들어있는 진공의 실상이 그때는 참다운 실상인데 그것을 음미해야만 우리 몸에서 불도 나오고 또는 물도 나옵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은 명명백백히 이것은 우리 자성한테 갖춘 것인데 우리 중생이 미처 거기에 실상을 못 봐서 우리가 발휘를 못합니다. 현대와 같이 복잡한 때 거기까지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쉬운 일은 아니라 한다 할지라도 역시 목표는 거기다 세워야 만이 불교가 불교인 참다운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원각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범부미도凡夫迷倒. 범부는 미혹할 미자 거꾸로 도자 범부라는 것은 바로 못보고 거꾸로 본다 말입니다. 범부는 거꾸로 보기 때문에 사대위신四大爲身이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합해진 이것을 몸으로 하고, 망상위심妄想爲心이라 망상을 우리 마음으로 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약간 공부를 하고 경을 좀 봤다고 한다 할지라도,

 

역시 우리 범부는 이것을 못 떠납니다. ‘라는 것은 결국은 따지고 보면 망상꾸러기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만 범부심에서는 역시 라는 것은 망상꾸러기입니다. 내가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각 원소가 합해진 세포의 뭉치에 불과합니다. 지금 물리학에서 우리 몸 이라는 것은 탄소, 질소, 수소, 산소 같은 것이 합해진 하나의 결합체가 아니겠습니까? 산소는 무엇인가? 산소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양자하나에 전자가 여덟 개가 돌고, 수소는 무엇인가? 수소는 양자하나에 전자 하나가 돈다 말입니다.

 

지금 제법공諸法空을 증명하는 분들이 그런 것을 인용을 많이 했습니다만,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보다도 수소원자를 생각할 때 양핵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전자가 도는 것인데, 그 양핵과 전자와의 거리가 비율로 봐서 태양과 우리 지구보다도 거리가 더 멉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태양하고 지구하고 얼마나 이렇게 공간이 많습니까. 원자 그러면 딱 붙은 걸로 압니다만 그렇지 않고서 원자핵이 양자하고 그 주위에서 도는 전자 하나와의 거리가 지구와 태양보다도 거리가 더 멀고 비율로 봐서는 더 높다합니다.

 

따라서 일체 만유가 원자 아님이 있습니까, 일체만유가 전자와 양핵 아님이 있습니까, 한데 그 일체 만유의 본질이 되는 원자 스스로가 그와 같이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참 공간뿐입니다. 또는 핵이 되는 양자는 무엇입니까? 양자 역시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저 같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물리학자가 말을 했습니다. 전자 역시 무엇인가? 전자 역시 그것도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거듭해서 모든 물체가 저 끄트머리는 다 비었다. 이것을 증명했습니다. 물질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물질이 아닙니다. 그 무엇입니다. 다만 물리학자는 그 무엇을 모를 뿐입니다. 그 무엇을 분명히 밝힌 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물리학자도 제법공을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유상, 무상, 유정, 무정이 모두가 다 원자로 구성 안 됨이 없는 것인데, 원자 스스로가 따지고 보면 그것이 갖다가 모두가 다 비어있다 말입니다.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모두는 다 제법은 다 공이다 그 말씀은 벌써 이제 물리학자도 안다 말입니다.

 

다만 공은 무엇인가 그건 모른다 말입니다. 지금은 소승, 대승 할 때에 소승이라는 것은 자기만 제도하고 대승은 남까지 제도한다. 이렇게 우리가 이제 간단히 상식화시켜서 말합니다만 원칙적인 소승, 대승의 구분은 공까지 모르는 정도는 그때는 소승입니다. 비록 법문도 많이 알고 남한테 보시도 많이 하고 한다할지라도 역시 우리 법으로 봐서는 공까지 밖에 모르고 공 가운데 들어있는 참다운 실상, 진공묘유까지를 완전히 모르면 그때는 소승입니다. 공을 떠나서 공이 아닌 참다운 영원적인 실상, 상주부동常住不動하는 영생하는 그런 실존을 알아야만 비로소 그때는 대승입니다. 이걸 아는 사람이 남의 제도를 무시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 범부라는 것은 우선 그런 공도 모르고 또는 공 가운데 우리가 이제 묘유를 알 턱이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 중생은 사대를 이런 몸뚱이를 나로 안다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한에는 우리 공부는 안나가집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한테 대해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은 항시 외우고 금강경을 이렇게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반야심경, 금강경에 모두가 제법공을 말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제법공을 우리가 못 느끼면 어떤 공부를 해도 공부가 안됩니다. 백파스님 같은 분도 화두를 들 때는 먼저 저 허공위에 거염화擧拈花라 허공 가운데 화두를 들라했다 말입니다.

 

제법공만 되면 화두를 들으나 못 들으나 공부는 매일반입니다. 허나 제법공을 미처 못 느끼고서 거기에 나가려고 생각을 않고서 공부 할 때는 퍽퍽합니다. 내가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 내 몸은 이것이 텅 빈 내내야 본질은 텅 빈 것이고, 내 마음도 역시 내내야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하고 금생에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것이 모두 마음덩어리입니다. 실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는 비록 어렵더라도 지금 현재라는 상황이 굉장히 복잡한 사회 아닙니까. 항시 말씀드립니다만 유치원 때부터서 벌써 하나님인가 부처님인가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때라서 우리가 바로 알지 않으면 그때는 우리 후손들은 못 가르친다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법문의 골수 제법공을 우리가 느끼는 문제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비록 내 몸뚱이가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역시 분명히 내 몸이 공인 것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내 몸은 아까 말씀마따나 탄소, 수소, 질소, 산소 같은 그런 각 원소가 합해져 있지요. 그런 것은 무엇인가. 산소 역시 내내야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8개가 이렇게 돌고 있다. 또는 질소 역시 원자핵을 중심해서 전자가 7개가 돌고 있다. 그와 같이 마치 거품 같은 빙빙 도는 그런 것이 모여서 우리 몸이 되었다 말입니다.

 

우리 몸은 무명無明이라 하는 그런 업을 핵심으로 해가지고서 빙빙 돌고 있는 세포에 불과합니다. 바로 보면 텅 비어있습니다. 아무리 예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전자현미경을 쓰고 본다 하면 어레미 구멍같이 얽어있습니다. 범부미도凡夫迷倒하니 범부가 거꾸로 보니 사대위신四大爲身이요. 사대를 내 몸으로 생각하고 망상위심妄想爲心이라 금생에 학교 가서 조금 배우고 또는 망상하고 그런 부스러기가 내 마음인데 그것을 보고 내 마음이라고 소중히 한다 말입니다. 저 높은 차원에서 보십시오.

 

야당 여당이 어떻게 싸울 겨를이 있겠습니까. 원래 진리가 둘이 아닌 것이고, 바로 본다 그러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불성으로 조명해서 본다 할 것 같으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망상들로 해서 옥신각신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문자를 떠난 그 자리 우리 중생의 지식으로 해서는 알 수 없는 반야 그것은 제법공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공은 아주 텅 빈 허무가 아니라 그 가운데는 무량의 공들이 충만한 그 자리란 말입니다.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다 거기에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삼매에 한번 들어보려고 해보십시오. 삼매에 들어서 한철만 공부해 보십시오. 별로 깊이는 못 들어간다 해도 자기 원 따라서 상당히 그런 무한의 공덕 있는 불성에 가까워집니다.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화상이 저 극락의 세계는 이렇게 그냥 시냇물소리도 다 염불소리로 들리고 극락세계는 음향인音響忍이라 하는 한 가지 법상도 있고 또한 음향인을 들으면 그때는 무생인이라 그런 것도 있다. 그런데 과연 음향인이 무엇인가. 극락세계는 참말로 물소리 같은 것이 염불소리로 다 들리는가 이와 같이 의심을 품었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람 저 사람마다 가서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 말입니다.

 

한데 나중에 운암담성(雲巖曇晟782~841)이라, 그분한테 가서 물어보니까 그 분은 그냥 명쾌히 답변했습니다. 그대들이 마음을 닦으면 천지우주에는 본래 음향도 그야말로 참 가장 신묘한 음향이 갖추어있기 때문에 마음 닦으면 절로 이런 극락세계에 갈 것이 아니라 지금 흘러가는 물소리, 지금 바람소리 모두가 다 심묘한 그런 법으로 들려온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실이 그러는 것입니다.

 

선방에 앉아 봐도 망상이 조금 나올 때는 모두가 다 그냥 고통입니다만 마음이 맑아올수록 같은 저 시냇물소리도 맑아옵니다. 유마경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살약득정토菩薩若得淨土인댄 보살이 만약 극락정토를 이룩하려고 한다고 할진 데는 선정기심先淨其心이라 먼저 그대 마음을 맑혀라 그 말입니다. 허면은 수기심정隨其心淨에 정토정淨土淨이라. 그대 마음이 맑아짐에 따라서 거기에 비례해서 그때는 정토가 맑아온다 말입니다.

 

우리는 집단적인 제도도 필요합니다만 역시 불교문제는 어디까지나 자아自我 문제입니다. 자기 영혼의 구제문제입니다. 요즘은 신앙도 너무나 정치신앙도 많이 생기고 제도신앙도 생기고 말씀입니다. 제도나 정치나 그런 문제를 너무 거기에 비중을 많이 둡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우리 자아발견, 인간성 정화 문제는 별로 그냥 그렇게 비중 안 둔다 말씀입니다. 이런 한에는 우리 사회의 혼란은 제거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 극락세계의 말씀을 드리다 말았습니다만 극락세계는 삼인三忍이라 석 삼자 참을 인 삼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삼인은 이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맨 처음이 음향인音響忍이라. 또 그다음은 유순인柔順忍이라. 유순인은 부드러울 유자 순할 순자 유순인 입니다. 음향인은 소리 음자 소리 향자 음향인이고 말입니다. 음향인 또 그다음 유순인 그다음은 무생인無生忍이라 무생인은 없을 무자 날 생자 무생인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그러니까 극락세계에 탄생하는 사람들 누구나가 음향인 또는 유순인, 무생인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거든요.

 

한데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너무나 과소평가한 분이 있습니다. 그건 중생들을 하나의 권선징악을 위해서 나쁜 짓을 알고서 이상 유토피아를 우리가 설정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실존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한 분들이 더러는 있습니다. 그러고 정토경을 번역하는 분들도 역시 그와 같은 방향으로 번역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허나 이것은 실존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를 떠나서 저만치 십만의 국토 밖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정화된 만큼 극락의 세계에 우리가 접근되는 것입니다. 천상이나 지옥이나 또는 아귀나 모두가 다 우리 의식이 어떤 수준에 있는 것인가. 우리 의식 정화에 따라서 각 중생 차별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중중한 정화, 부처는 완전한 정화 그런 말씀입니다. 지옥은 가장 덮여있는 그런 상태, 같은 마음, 똑같은 일체유심조의 하나의 천지우주가 마음 덩어리인데 마음이 얼마만큼 가려있는가에 따라서 지옥, 아귀, 축생 그와 같이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의 본 실상은 바로 극락세계인데 다만 중생이 우리 인간이 인간만큼 밖에는 지금 개발이 되지 않아서 바로 못 봅니다. 바로 봄에 따라서 바로 그 자리가 천상 되고 극락이 됩니다. 영원의 실상세계 이것이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앞서 말씀마따나 음향인 또는 유순인 또는 무생인이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우리 지금 현대인들은 지극히 음악을 좋아들 하시고 또는 불교도 범패도 있고 불교음악이 있지 않습니까. 음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그런 주문, 주문도 내내야 주문이란 것도 결국은 음률로 해서 우리한테 진리를 표시했다 말입니다. 옴마니반메훔 그러면은 옴마니반메훔 이라는 음률자체가 이제 우리 자성을 정화합니다. 그런 정도로 음률을 하는 것은 종교에서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따라서 음향인 이것은 극락세계는 그런 음향도 보통 우리가 느끼는 그런 음향이 아니라 아주 심묘한 우리 중생의 마음을 영원의 불성으로 인도하는 그런 심묘한 음악이란 말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명곡 같은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명곡 들으면 우리 마음 차분해지고 또는 이상한 좀 아주 선정적인 음악 들으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산란스럽지요. 재즈음악 같은 것은 얼마나 그것이 우리 마음을 경망하게 합니까. 한데 극락세계 음악은 그와 같이 심묘한 명곡 중에도 명곡 중에 명곡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그런 그야말로 최상의 명곡이 극락세계 이것이 음향이란 말입니다.

 

참선 할 때에 별로 깊이 안 들어간다 하더라도 아주 고차원의 그런 음향인은 미처 못 느낍니다만 그냥 별로 깊이 안 들어가도 약간의 음향인은 느낍니다. 그걸 들으면 그때는 딴 것은 생각이 없다 말입니다. 선객들이 며칠이고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이 남모르는 뭣이 있어서 그럽니다. 바람소리나 또는 시냇물소리가 분명히 그때는 신묘한 음악으로 들려온다 말입니다. 소동파가 읊은 시를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습니다.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이요 시냇물소리는 그야말로 참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대설법 소리요,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이로다. 산 빛깔은 바로 그것이 부처님의 청정미묘의 그런 몸이나 같다는 시냇물일망정 결국은 바로 들으면 그와 같이 하나의 법문으로 들려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소리로 들으면 자연적으로 그때는 우리마음이 누그러워옵니다. 우리 마음이 그때는 유순이라. 아주 유순해옵니다. 유연선심이라 그런 표현을 불교에서는 유연선심柔軟善心 이렇게 풀이합니다. 유연선심이라 부드러울 유자 연할 연자 착할 선자 마음 심자 비록 남들은 너희 좋은 일 해라 부드러운 맘 품어라 또는 화안和顔해라 부드러운 얼굴하고 또는 부드럽게 말해라 이와 같이 권유 않는다하여도 음향인을 해서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그때는 자연적으로 유순한 마음이 들어옵니다. 그때는 나와 남의 한계가 별로 없습니다.

 

비록 선방에 안 온다 하더라도 집안에서라도 우리가 그와 같이 음향인을 맛보셔야합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유연선심이 온다 말씀입니다. 물론 전생에 많이 닦아 오신 분들은 그런 것이 아니라도 벌써 그대로 유연선심이 계십니다만 그와 같이 유연선심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익어지고 또는 청훈이라 청정하게 훈습이 되고 되어나가면 나중엔 무생인이라. 무생인이 되어야 비로소 제법공을 딱 느낍니다. 불생불멸의 참다운 진리를 안다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현상세계가 바로 어떤 면으로 보나 무량의 가능 있는 행복스러운 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번뇌에 가려서 미처 감수를 못하고 감견을 못 할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감수하고 감견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마따나 그 삼매, 삼매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염불로 되어있건 주문으로 되어있건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한데 삼매에 드는 전제 조건만 제가 몇 말씀 올리겠습니다. 너무 또 말씀이 지루하면 오늘 참 더운 때인지라 너무 고단하시고 하셔서 제가 많은 말씀 안 드리고 될수록 간단히 말씀으로 해서 줄이겠습니다만 삼매에 들 수 있는 그런 전제로 해서 부처님 말씀을 소개를 하겠습니다.

 

삼매에 들려면 먼저 실상묘해實相妙解라 실상지혜를 먼저 이론적으로 확립을 시켜야 하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보조국사 말씀에도 선오후수라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으라는 그런 말씀도 있지요. 현대란 사회는 하도 정보가 착종혼란한때 인지라 딱 우리가 갈래를 갈라서 부처님 법문에 대한 그런 실상지혜를 먼저 이론적으로 확립을 시키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 신심이 안 납니다. 또는 다른 복잡한 딴 주의나 사상을 우리가 구분을 못해버립니다.

 

실상묘해라 먼저 실상을 그런 묘해라 묘할 묘자 풀이 해자 비록 증명은 미처 못 해서 우리가 체험을 못했다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실상이 무엇인가 그 정도는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실상묘해를 우리가 쉽게 얻어 보는 그런 법문 가운데서는 보조어록이 참 좋습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바로 부처거든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 번뇌가 없는 그런 참다운 불성을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내가 원래 부처거니 부처를 내가 안다 모른다 하더라도 본래 조금도 번뇌가 없는 불성은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부처고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못 닦아있다 하더라도 나한테 갖추어 있는 내가 석가모니와 똑같은 그런 불성임을 분명히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말씀이 많이 있으나 우선 내 불성, 무한의 역량 있는 일체공덕을 갖춘 그런 불성 이것을 믿는 이것이 바로 실상묘해의 기본입니다. 보적경寶積經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의 업장이 무거워서 무수겁내로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업장이 있다 하더라도 일실상관이라 우리가 실상관實相觀을 한다고 하면 그때는 구습결업舊習結業이라. 익히고 익히고 쌓이고 쌓인 누적된 번뇌를 변즉소멸便卽消滅이라 그냥 소멸시킨다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도의 문제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실상관 비록 내가 못 봐 그런 것이지 천지우주는 바로 불성위에서 이루어지고 내 본래 자성도 부처고 말입니다. 우주만유가 바로 보면 바로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이러한 견해 이것이 실상묘해입니다.

 

이렇게 안 다음에는 그때는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요즘 같이 문란스러운 때 개방적인 사회인 때 또는 서구문명이 범람한때는 자칫하면 계율을 무시합니다. 허나 우리가 지금 보십시오마는 방만한 예수님이 있을 리가 없고 파계무참破戒無慙한 마호메트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느 성자나 다 엄격한 분들입니다. 또는 삼매에 들면 삼매에 들려고 하면은 자연적으로 우리가 엄격히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계행 못 지키고 삼매에 들 수 없습니다. 삼매에 든 분들이 또 계행 파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본적으로 내가 먼저 부처임을 믿고 또는 천지우주가 바로 무한의 가능을 갖춘 부처임을 분명히 믿고서, 믿었다 하더라도 그다음에 우리가 정작 그것을 개발하려면 역시 계행을 갖추어야합니다. 철저한 계행을 갖춰야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부처님의 모든 계율은 그냥 중생한테 아무렇게나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도인들이 행하는 것은 모두가 다 행한 그대로 바로 계율이 되는 것입니다.

 

도인들이 말한 말 도인들의 행위 이것은 모두가 다 계율이 됩니다. 허나 중생은 억지로 지켜야합니다. 지키다가 보면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지라 절로 그때는 차근차근 우리가 불성으로 접근해간다 말씀입니다. 거친 말 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음란한 짓 않고, 또는 술 먹지 않고 이렇게 해보십시오, 자연히 그때는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삼매에 접근하겠지요.

 

따라서 실상묘해, 실상묘해를 우리가 느껴서 내 자성이 부처고 또한 동시에 천지우주의 모든 자성이 본체가 부처고, 보다 적극적으로 말씀드리면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의 덩어리요, 그 가운데는 일체 가능이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이 딱 믿은 다음에는 불교의 하나의 대강령인 삼학도, 삼학도로 돌아와서 계율을 또 앞세워야합니다. 삼학도인 계정혜戒定慧. 불교의 지혜 이것은 실상묘해의 지혜가 기본 되는 지혜입니다. 뭣 닦고 뭐 깨닫고 뭣 알고 법문알고 이것은 사소한 지혜인 것이고 상대유한이 아니고 절대무한적인 참다운 반야 이것은 역시 아까 말씀드린바 실상묘해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임을 분명히 믿어야합니다. 그 가운데는 일체공덕을 갖춘 것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반야이고 실상묘해입니다.

 

물론 재가불자들은 재가불자 나름대로 지켜야 할 계율이 있습니다만 하여튼 재가, 출가 공부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만 역시 기본적인 자기 입장 따라서 계율은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이 삼매에 들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삼매에 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한데 삼매에 들으신데 있어서 말씀이 너무 길어집니다만 역시 지금 갈래가 많으니까 제가 갈래가 많은데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인가 즉 참선하는 때에 그런 마음자세만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화두를 참구 하는 분들은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원불교는 지금 묵주라 단전주丹田住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 합니다. 단전주만이 부처님의 정통선법이라 합니다. 법화경하는 분들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그것만 외워야만 참다운 선이요 참다운 공부라 합니다. 저 티베트 불교나 그런 분들은 옴마니반에훔 그것만이 최상의 공부라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는 참 선택이 곤란스럽습니다. 대체로 무엇이 삼매인가, 어떤 선이 바른 선인가? 특히 일본불교를 상당히 모두 숭상들을 많이 합니다만 특히 일본사람들이 참 불교로 해서 공덕도 많이 짓고 또는 자기나라도 부흥도 시키고 했습니다만 일본사람들이 굉장히 분별을 좋아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조동종과 임제종과 다시 말씀드리면 화두를 드는 선과 묵조 하는 선방끼리는 같이 말도 잘 안합니다.

 

일본 중세기에 불교 법란法難은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같이 싸워서 상당 사람들이 많이 살상 당했습니다. 이런 때인지라 우리는 일본 불교도 과히 우리가 많은 참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 불교학자들은 대체로 그네들 것을 번역을 많이 합니다만 이런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바른 선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만 각기 종파마다 그때그때 가치를 부여 하고서 보다 보편적인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내 법은 체를 여위지 않는다. 이 말씀을 했습니다. 육조스님은 본체를 주로 한 참선의 대거장 아닙니까. 이분이 내 공부는, 내 법은 체를 여위지 않는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내 공부의 요체는 순간 찰나도 본체를 안 떠난다 그 말입니다. 참선을 다른 말씀으로 표현하면 참선이라 하는 것은 본체를 안 여위는 것입니다. 딴 공부는 그때그때 우리가 현상에 휘말리기도 하고 또는 집착도 하지만 참선만은 순간 찰나도 우리가 본체를 안 떠나고자 애쓰는데서 참선이 성립이 됩니다.

 

따라서 가사 우리가 시삼마是甚麽 화두,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화두에 든다 하더라도 본체를 떠나고서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만 해버리면 그때는 참선은 못됩니다. 비록 똥 마른 막대기라 하는 간시궐乾屎橛을 우리가 화두로 든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이 본체를 안 여위면 그때는 참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이 본체를 안 떠나면 그때는 참선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에 대해서 말이라는 장난, 말이라는 유희, 우리가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지금 사람들은 자칫하면 그냥 표현된 상대유한적인 그때그때 여건 따라서 이루어진 그러한 말에 너무 얽매여있다 말씀입니다. 부처님 하면 이렇게 보이고 하나님 하면 저 밑으로 보이고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라는 속에 들어있는 개념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그야말로 참 우리 법신불과 똑같은 말씀을 했다고 하면 그때는 벌써 똑같지요.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을 자기 밖에서 구하면 그것도 역시 그때는 별로 신통한 것이 없습니다.

 

는 우리 참선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순간 찰나도 본체를 안 떠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체를 안 떠나면 그저 잠자코 하는, 화두를 안 드는 묵조를 하던 염불을 하던 그때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현대적으로 참선을 구하신 분들은 이와 같이 참선의 본래적인 해석을 하셔서 혼동을 마셔야합니다. 묵조를 하는가 또는 주문을 하는가 염불을 하는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문제는 우리 본체를 안 떠난다 말입니다.

 

한데 본체를 안 떠난다는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본체를 안 떠나야할 것인가. 본체를 안 떠나려고 애쓰지만은 어떻게 그것이 쉽습니까. 본체를 안 떠나려면 역시 본체라는 것을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했던가. 그것을 이론적으로 대강 알아야하거든요. 본체는 가장 간단하게 말씀한 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 아닙니까. 진공만도 아니고, 묘유만도 아니고, 진공의 체가 그때는 묘유라 말입니다.

 

천지우주는 바로 텅텅 비어서 텅텅 무애 한데,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그때는 아무것도 없이 인간이 보는 것은 그때는 가상인 것이니까 천지우주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데 다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심심미묘한 불성으로 충만 되어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우리가 본체를 안 여위는 데 있어서 참 참고가 많이 됩니다.

 

그러기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보면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그도 역시 아까 말씀드린바 진공묘유나 같은 의미 안 되겠습니까. 무량광불이라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이란 말입니다. 지금 물리학에도 그런 광명 말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광파라말입니다. 방사선은 그야말로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 모두 그런 방사능 보십시오. 하나의 원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런 방사능 보십시오. 사실은 우주는 광명뿐인 것입니다. 다만 물리학은 그 광명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 광명의 가장 순수한 것 가장 순수 근원적인 것 그것이 바로 불성의 무량광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체를 안 떠난다는 그 문제는 각기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역시 진공가운데 한도 끝도 없이 모두가 텅텅 무애한 그 가운데서 거기에 충만 되는 그런 광명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화두도 하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면 그때는 우리가 체를 안 떠난 것이 된다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하므로 해서 그때는 우리가 진짜 정말로 그때는 우리가 불성에 믿어온다 말씀입니다.

 

화엄경에서도 광촉光觸이라 광촉은 빛 광자 접촉할 촉자 광촉입니다. 우리 중생이 광촉이라 광명에 접촉하면 그때는 병도 낫고 또는 마음도 평온해집니다. 지금 세상은 그야말로 방사선 치료도 있잖습니까. 한데 부처님의 광명은 그보다도 순수한 것인지라 그러한 광명에 우리가 접촉하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신비로운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얻을 것인가? 즉 여러분들이 조사 스님들 그런 어록을 보십시오.

 

어록 보시면 그분들이 열반 들으실 때는 다 차이가 없이 모두가 다 어느 광명을 보고 깨친다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스님이나 보십시오마는 다 광명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한데 그런 광명이 얼마만큼 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부처님의 순수한 광명 그 광명에 접촉하면 그때는 문제는 해결됩니다. 가사 어디가 아프다하더라도 그런 광명에 한번 접촉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때는 광명 자체가 무한한지라 무한의 힘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엄습해온다 말씀입니다.

 

그런 광촉이 되어서 광촉이 보다 더 확장되고서 천지우주가 바로 광명으로 딱 되면 그때는 벌써 깨달아 버리겠지요. 우리 불자님들 어려우시겠습니다만, 아까 제가 말씀처럼 실상묘해, 실상묘해로 해서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그런 덩어리임을 딱 믿으시고서 그다음에 자기 입장 따라서 계행을 지키시고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이면 염불, 화두면 화두, 내내야 참선이나 염불이 둘이 아니라 원래 결국은 우리 마음이 본체를 안 여의면 그때는 다 선입니다. 염불이나 일할 때 하여튼 어떤 때나 우리 마음이 본체를 안 여의면 그때는 다 참선입니다. 본체를 여의면 화두를 들어도 그때는 참선이 못됩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빨리 광촉, 광명에 접촉하시고서 무량의 행복을 누리실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