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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5. 태안사 삼년결사 입제 법문(1985년 10월 15일(음))

5..태안사 삼년결사 입제 법문1985,10,1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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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태안사泰安寺 삼 년 결사 입제법문

 

 

 

* 1985년 여름, 중생제도의 원력으로 곡성 태안사泰安寺 오시어서 그해 동안거(1015())를 대중스님들과 함께 3년 결사 들어가시면서 하 신 법문입니다.

 

 

 

 

오늘의 의의 깊은 3년 결사 상당上堂 법어法語는 의당히 조실祖室화상께서 하셔야 할 것인데 본 결사 대중의 특수인연 따라서 산승이 조실화상의 법어를 가름하게 됩니다. 하나의 티끌을 바로 보면 바로 그것이 진리이고, 하나의 티끌을 바로 못 보면 바로 그것이 망집妄執 입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또는 어떠한 사물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고 바로 못 보는 데 허물이 있습니다. 맑은 시냇물은 바닥이 훤히 투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흐린 탁수는 바닥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은 마음이 흐려서 우리 마음 바닥인 자성自性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 흐린 마음을, 흐린 탁심을 정화시키는데 각 종교의 여러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헌데 다른 종교나 우리 불교라 하더라도 역시 다른 법들은 보통은 다 좌로 돌아가고 우로 또는 우회하고 그렇게 해서 빙빙 돌아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만 참선공부, 참선공부는 바로 직통으로 그러한 마음 바닥, 모든 진리의 바닥을 우리가 통달하는 그런 공부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약산藥山 유엄(惟儼, 745~828)선사禪師, 선사가 위대한 그런 선지식이기 때문에 거기 운집한 수천 대중들이 법문을 청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사가 마지못해서 법상에 올라갔습니다. 마땅히 법상에 올라간 대 선지식인지라 사자후가 거기서 우러나와야 할 것인데, 그냥 눈만 가만히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이윽고 내려가신다 말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방장으로 직행해서 가신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주가 따라가서 화상이시여, 대체로 이와 같이 많은 대중이 인연 따라서 모였는데 어째서 한 말씀도 안하십니까?” 이렇게 심문 비슷하게 말씀을 올리니까. 유엄선사가 그때 하시는 말씀이 경에는 강사講師가 있고, 율에는 율사律師가 있고, 나는 선사禪師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렇게 직절로 간명하게 대답만 하시고 말아버렸습니다.

 

따라서 산승도 역시 참선한다는 사람으로 해서 할 말이 별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인연은 우리 사부대중들이 인연 따라서 이와 같이 운집해 계십니다. 마땅히 차원을 낮추어서 문자가 없는 자리, 생각이 없는 자리, 그런 자리를 떠나서 문자와 말을 빌어서 몇 말씀 하는 것이 도리여서 제가 횡설수설 좀 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 승가에도 물론이지마는 또는 일반세속적인 사람들도 역시 승가의 본 따라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하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합니다. 허나 그 말에 포함되어 있는 심수오묘한 뜻, 그런 뜻을 잘못 새겨서 중대한 오류를 범할까봐서 재가 재차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입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라. 여기서 청원靑原 유신(惟信, ?~1117)선사禪師란 분이 계신다 말씀입니다. 이분도 역시 정통 조사의 한 분입니다. 이분께서 상당上堂에서 하신 법문에 있는 말씀인데 어떻게 말씀을 했는가 하면 내가 30년 전에 미처 참선을 모를 때는 견산시산이요. 볼 견[], 뫼 산[], 이 시[]자 뫼 산[]자 견산시산見山是山이요. 산을 보면 바로 산뿐이요, 견수시수見水是水라 물을 보면 바로 그때는 물뿐이라.”

 

이와 같이 그냥 보통 차원에서 보통 세속인들이 선은 선이요, 악은 악이요, 너는 너요, 나는 나요, 이와 같이 보통 차원에서 하는 그런 정도의 산은 산뿐이고, 물은 물뿐이다. 이와 같이 느꼈지마는, 나중에 수승한 선지식을 만나가지고서, 입처入處라 자기 견해가 그때는 생긴다는 말입니다. 입처가 생긴 다음에 그때는 견산불시산見山不是山이요, 산을 봐도 그때는 산이 아니고, 견수불시수見水不是水라 물을 봐도 그때는 물이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자기가 보는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중생의 교만 때문에 가정도 혼란스럽고, 사회도 혼란스럽습니다.

 

우리중생은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사승마蛇繩麻라 마치 해거름에 새끼토막 하나가 길가에 있으면 중생은 바른 안목이 없는지라 중생은 그것을 해거름인지라 바로 못 봐서 뱀같이 봅니다. 우리 중생은 그와 똑같습니다. 바른 견해가 없어서 분명 새끼토막이건마는 새끼토막을 뱀으로 잘못 본다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새끼토막이지요. 새끼토막의 또 본체는 무엇인가? 본체는 이것은 삼이나 또는 짚이나 그런 것입니다. 삼이나 지푸라기로 해서 새끼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하는 그런 소박한 차원,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은 마치 해거름에 새끼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견해와 흡사 똑같습니다. 그런데 좀 공부가 되어서 그때는 어느 정도 바른 견해가 나온다 말입니다. 그때 보는 것은 뱀이 아니라 그때는 바로 새끼토막입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라는 그런 것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청원유신靑原惟信 화상의 법문은 거기에 그치지가 않습니다. “내가 정작 휴헐처休歇處, 쉴 휴[], 쉴 헐[]자 말입니다. 휴헐처라, 내가 정작 모든 번뇌를 다 놔버려서, 생사를 마친 그다음에 본다고 할 때는 견산진시산見山眞是山이요. 산은 또는 다만 참다운 산이요, 견수진시수見水眞是水라 물도 또는 다만 참다운 물이니라.”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말씀한 것은 마치 아까 새끼토막에 비기면 새끼토막의 본바탕이 삼이요, 또는 짚이듯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지마는 그것은 보통 우리 중생이 보는 이런 오염된 산은 아닙니다. 오염된 물은 아닙니다. 산시실상산山是實相山이요 산은 바로 실상산實相山이요, 수시실상수水是實相水. 물도 또한 실상의 참다운 물입니다.

 

그냥 중생은 그저 선은 선이요 악은 악이다. 강가는 강가요. 박가는 박가다. 이와 같이 낮은 차원에서 한다고 하면 청원유신선사의 참다운 뜻을 모르는 소치입니다. 우리는 본바탕, 본 실상을 아는 이것이 참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이것은 오직 실상지혜, 허망지혜와 가상을 떠난 실상지혜를 우리 중생한테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고, 보이고, 또는 깨닫게 하고 거기에 들게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그러나 이런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은 금생에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이런 번뇌도 많지마는 또는 다생겁내로 쌓아 내려온 그런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 무수만생 동안에 생과 더불어서 누적된 번뇌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청원유신선사의 말마따나 우리가 선지식 만나서 어느 정도 지견이 생겨서 새끼토막이 뱀이 아니라 새끼토막인 줄은 알았다 하더라도, 거기까지는 어느 정도 쉽다하더라도, 참다운 그 본바탕 사단여우사思斷如藕絲라 생각 사[]자 끊을 단[], 같을 여[], 연뿌리 우[], 실 사[]자 연뿌리가 이렇게 딱 휘면 연뿌리는 그냥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나긋나긋하니 실뿌리 때문에 상당히 이렇게 늘어납니다. 몇 번 꺾어도 안 꺾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록 바른 견해는 순간 동안에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근본 번뇌, 우리 잠재의식에 박혀 있는 훈습된 번뇌, 이것은 오랫동안 시일을 두고 녹이고 우리가 끊고 해야 합니다. 마치 연뿌리가 빨리 끊어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런데서 별시別時 수행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의의 깊은 삼동三冬 결제인 동시에 특히 우리 여기 있는 도반들은 삼년결사 결제입니다. 결제라 하는 것은 별시 수행 때문에 마련된 부처님의 제도입니다. 우리 중생이 아무렇게나 그때그때 편리에 따라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계율 따라서 엄격히 규정된 하나의 청규淸規입니다. 따라서 우리 출가 수행자는 마땅히 결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뭣인가 하면 비록 바른 견해를 얻기는 쉽다 하더라도 근본 번뇌를 녹여서 우리 자성공덕, 자성이 갖추고 있는 일체 종지를 발휘하려면 오랫동안 시일을 요합니다. 물론 근기 따라서 빨리 되기도 하고 더디 되기도 하겠습니다만, 보통은 오랫동안 시일을 요합니다. 석존의 6년 보리수 하의 그런 고행, 달마達磨대사의 9년 면벽, 이런 것이 다시 요청되는 이러한 시일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데서 별시 수행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재가나 출가나 심상心想공부라,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의 공부를 해야 하겠지마는 심상공부로 해서는 우리 근본 번뇌, 우리 잠재의식에 누적된 번뇌, 그런 번뇌를 못 끊습니다. 그러기에 삼동三冬결제, 또는 삼하三夏결제가 필요하고, 이와 같이 그런 비장한 각오 밑에서 3년 결사의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출가 법려法侶들은 새삼 제가 군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재가불자님들에 있어서는 아주 쉬운 문제도 회의를 많이 품습니다. 저도 어제 상당히 피로했습니다만, 제 방에는 드나드는 분들이 끊이지가 않습니다. 들어와서 모두가 다 소중한 법문을 저한테 문법問法 합니다. 어떤 때는 이와 같이 쉬운 문제를 모르는가?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를 모르는가? 안타까울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과연 부처가 무엇인가? 삼도三途가 무엇인가? 그런 기본적인 문제마저도 잘 모르는 분이 있다. 말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어째서 부르는 것인가? 부처님의 그런 명호, 그런 이름은 많지마는 각기 부처님은 따로 있는 것인가 이런 기본적인 문제를 잘 해결 못해서 의심을 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려고 할 때는 마땅히 삼 선지식이라, 세 가지 유별의 선지식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는 교수선지식敎授善知識이라 우리가 길을 가려면 마땅히 길의 안내자가 필요하듯이 우리 갈 길을 바로 교시하는 그런 교수선지식, 이분이 필요하고, 한 가지는 또 역시 자기 혼자가면 어려운 험난한 길을 잘못 갑니다. 그냥 싫증이 납니다. 따라서 동행선지식同行善知識이라, 같이 공부하는 그런 도반이 필요합니다. 도반이 있다하더라도 너무나 의식주에 곤란스러우면 잘못 갑니다. 따라서 의식주를 뒷바라지 해주는 외호선지식外護善知識이라, 이것이 필요합니다.

 

헌데 재가불자들은 우선 우리 길을 안내해 주는 교수선지식, 이것부터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침에 여러분들이 앉아서 같이 토론도 했습니다만 그런 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과연 극락이 있는가, 없는가? 과연 기도가 옳은가, 옳지 않은 것인가?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이런 문제 가지고도 논쟁들을 많이 한 것을 들었습니다만, 우리는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놓고서 이 자리에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런 기회를 빌지 않으면 말씀드릴 기회도 없기에 대강 군소리 같은 말씀을 더 하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선四禪비구는 사선정四禪定을 통과해서 상당히 공부가 많이 되었지마는 법의 한계를 잘 몰라 가지고 사선四禪에 들어갈 때, 초선 들 때 그때는 초과初果, 벌써 공부의 도를 깨닫는 첫 자리로 보고, 이선二禪 들어갈 때는 이과二果, 불교 말로 하면 그때는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多含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수다원과라는 것은 맨 처음에 우리가 번뇌를 녹여서 막 들어가는 자리가 수다원과고, 그다음 들어가서 우리 욕망을 끊을 때 욕계 번뇌를 끊을 때 그때는 사다함과斯多含果입니다.

 

그다음에 불환과不還果라 다시 욕계의 그런 욕망을 안 내는 자리, 그다음은 아라한과, 이와 같이 들어가는 것이 소승법인데, 소승 이것이 하나의 성자의 법인데 사선비구는 그런 한계를 모르니까 맨 처음에 초선初禪 들어가서 이것은 수다원이라, 이선二禪 때는 사다함이라, 삼선三禪 때는 아나함 불환과不還果다 사선四禪가서 아라한과阿羅漢果 이와 같이 그릇해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선을 마친 다음에는 이제 공부가 다 되었구나 이와 같이 아만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선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지견智見도 발동하고, 약간의 신통도 했지마는, 이런 견해가 못됐기 때문에 나중에 임종 때 그때는 퇴타頹惰가 옵니다. 정말로 바른 깨달음을 성취했으면 임종 때라 하더라도 퇴타나 후퇴가 올 수가 없습니다만 바른 깨달음이 못되기 때문에 임종 때는 그냥 뒤로 후퇴를 했습니다. 따라서 임종에 후퇴하는 바람에 그냥 순간에 지옥 불을 봤다 말입니다. 그래서 석존께서 참다운 해탈이 없는데 있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자인데, 내가 마땅히 생사를 초월해야 할 것인데, 나한테 이렇게 후퇴해서 내가 지옥도 보고 뭣도 보고 그런 생사를 보니, 석존이 거짓말을 했다. 이와 같이 방불謗佛, 방법謗法 했습니다. 자기가 사선정법四禪定法과 또는 사과법四果法, 성자의 사과법과 또는 선정의 사선정 법을 잘 몰라가지고, 세존을 비방하고서, 그러한 방불謗佛 방법謗法한 죄로 해서 그냥 자기 목숨을 마침과 동시에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옆에 있는 비구가 부처님께 말씀을 드렸다 말입니다. “지금 방금 입적한 사선비구 이분은 계행도 청정하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과연 지금 어느 곳에 태어났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말씀입니다. 마땅히 물을 때는 그 사선비구는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그냥 극락이나 저 천상이나 그렇게 태어날 걸로 생각을 하고서 물었겠지요. 허나 부처님 대답은 의외로 그 사선비구는 지금 무간지옥에 있느니라.” 그와 같이 엄숙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참다운 법을 몰라서 온 소치입니다.

 

법을 모르면 그때는 암중모색暗中摸索 밖에 안 됩니다. 애쓴다 하더라도 내 공부가 어디만큼 갔는가? 이걸 서로 점검을 못 하면 점검할 선지식이 없으면 그와 같이 엉뚱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마땅히 이러한 암중모색暗中摸索, 이런 암중선暗中禪 이런 것을 금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비록 다소 경도 많이 보고, 어느 정도 한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그때는 문자만 익히고서 참다운 실수實修, 참다운 실천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문자선文字禪이라 이것도 역시 그냥 간혜지乾慧智, 바싹 마른 간혜지만 얻을 뿐이지, 참다운 그런 해탈의 지혜는 얻지를 못합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사부게四浮偈에도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하니, 가사 설법이 여운우如雲雨, 마치 구름과 비같이 유창하고 청산유수 같은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건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 바싹 마른 지혜, 다시 말하면 선정이 없는 지혜, 그런 문자만의 구두선口頭禪, 이것은 생사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깊은 삼매를 통해서 우리가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에 통달하고 또는 누진통漏盡通으로 해서 참다운 번뇌를 끊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아의 뿌리, 자기 아집我執의 뿌리, 또는 법집法執의 뿌리, 이걸 못 떠나면 그때는 참다운 해탈은 못 됩니다. 헌데 간혜지, 바싹 마른 지혜는 제아무리 체계가 잘 선다 하더라도, 어떠한 사자후를 토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통달 못하면, 미래에 통달 못하고 우리번뇌는 근본 되는 아집을 못 끊어 버립니다. 따라서 법집도 못 끊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마냥 범부凡夫뿐이죠.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문자로 체계가 섰다하더라도 마땅히 깊은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깊은 삼매에 들기 위해서 결제가 있고 이와 같이 3년 결사가 있습니다. 어떻게 삼매에 드는 것인가? 우리결사 도반들이나 스님네는 다 아시는 문제입니다만 재가불자님들은 삼매에 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삼매에 들어야만 바싹 마른 간혜지乾慧地, 간혜지를 떠나서 생사해탈의 길로 한 걸음씩 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삼매에 드는 것인가? 여기에서 육조 혜능 스님 단경壇經의 그런 부촉품咐囑品을 인용합니다. 단경』 「부촉품에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참구할지니라.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일상삼매 이것은 한 일[]. 서로 상[],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일상삼매라, 우리 중생은 모두를 나로 보고 너로 보고, 둘로 셋으로 봅니다. 우리 중생은 이원적二元的으로 보고, 삼원적三元的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두가 다 망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은 천지우주가 하나의 상뿐입니다. 하나의 실상뿐입니다.

 

바로 보면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천지 우주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영가 현각(永嘉玄覺, 647~713)선사 말씀처럼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깨달은 안목에서는 천지 우주가 무대천이라 삼천세계가 텅 비어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중생이 꿈속에서 보는 것이니까 육도가 있고 지옥이 있고, 아귀가 있고, 뭣이 있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습니다. 일상삼매는 천지 우주를 다만 하나의 실상, 하나의 본바탕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자성自性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는 바른 깨달음, 일상삼매가 없이 우리 현실을 바로 못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그렁저렁 살았다 하더라도 현대와 같이 각 체계와 체계끼리, 각 종교와 종교끼리 서로 다투어 서로 분쟁 할 때는 바른 견해 없이는 바로 못 살아갑니다. 우리는 비록 어렵더라도 당장 이 자리에서 다만 모르는 사람은 일상삼매를 얻어야 합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실상 비록 내가 보는 것은 번뇌에 가리어서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는 바로 하나의 부처님의 상뿐입니다. 무시겁래만생無始劫來萬生 때문에 내가 있고 네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렵고 허망하다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그렇게 봐야 합니다. 천지 우주는 텅텅 비어있지마는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무량광명, 일체 지혜를 갖춘 그런 불성, 이러한 것이 충만 된 바로 삼천 대천 세계의 우주상입니다.

 

우주의 실상,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뿐인 그런 실상, 천지우주가 진여법성뿐인 그런 실상, 이것을 느끼고서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이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를 다 떠나서 오직 청정한 그런 불성뿐인 그런 견해,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해서는 해탈을 못합니다. 이것만으로 해서는 간혜지乾慧地를 면치 못합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있다 이것만은 다만 간혜지에 불과 합니다. 이러한 간혜지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 인과를 떠나고 시공時空을 떠나고, 참다운 실상지혜, 그걸 증하기 위해서 그때는 우리가 공부한다 말입니다. 그런데서 아까 말씀처럼 별시 공부라,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기도를 모시는 것이고, 한 달이고 몇 달이고 참선하는 것이고 이와 같이 삼년결사의 의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상삼매를 조금도 쉬지 않고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이어가는 그런 공부, 일상삼매를 빈틈없이 순수하니 공부해 나가는 공부, 이렇게 해나가는 것이 이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상삼매를 계속해서 쉼 없이 하는 공부 이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우리의 그런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생과 더불어서 우리 마음에 우리 잠재의식에 박혀 있는 훈습된 그런 번뇌, 그걸 뽑아서 참다운 우리가 부처가 된다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처럼 비록 자기는 이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바로 본 분들은 석가모니불이요, 그 뒤에 나오신 정통조사입니다. 따라서 이분들의 가르침 따라서 분명히 우리가 일상삼매를 믿어야 합니다. 이래야 만이 비로소 공부하는 바른 길은 선오후수先悟後修, 선오후수가 되어야 그래야 정수正修입니다. 선오후수가 못 되면 그때는 미수未修입니다. 생명만 낭비하는 것이지 별로 소득이 없습니다. 달마대사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약능요심수도若能了心修道하면 우리가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닦으면 그때는 성공이성省功易成 별로 공을 많이 안 들이고도 쉽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요. 약능불료심수도約能不了心修道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닦으면 증사작반烝砂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이 못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닦는다 하더라도 별로 소득이 없습니다. 비록 내 마음이 지금 어둡다 하더라도, 내 마음의 본바탕은 부처구나, 내 마음의 본바탕은 자비나 지혜나 일체공덕을 갖춘 부처구나 이와 같이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닦아야만 선오후수가 되어서, 아까 말씀처럼 성공이성이라 별로 공을 많이 안들이고도 성취가 빠르다 말입니다.

 

우리 사부대중들은 각기 인연 따라서 아까 말씀처럼 더디 깨닫는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일상삼매, 바른 견해, 부처님의 정견을 바로 해서 팔정도八正道에도 정견正見이 앞에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는 바로 불성뿐이구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진여불성 뿐이구나, 이와 같이 분명히 느껴야 만이 바른 견해인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자기 근기와 인연 따라서, 삼 년이면 삼 년, 9년이면 9, 많이 할 수 있으면 자기 평생이라도 이와 같은 일행삼매로 해서 금생에 생사를 해탈하고 무량 중생을 제도하고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면서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