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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5월 태안사 정기법회(1986년 5월4일)

6. 5월 태안사 정기법회1986년 5월4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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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사람을 가리켜서 절에 사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가하다는 중인 저 역시 한가하지 못합니다. 지금 여기 뜨락에 자산홍이 활짝 만개했습니다만, 저는 언제 그 꽃이 머물렀는지, 언제 꽃이 피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가다 오다 보니까 저렇게 만개해서 활짝 피었다 말입니다. 그 정도로 저도 바빴습니다, 따라서 명색이 한가하다는 저도 바쁜데, 하물며 세속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활을 하시는 우리 제가 불자님들은 더욱더 바쁘시리라고 미루어 생각합니다. 동정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인지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기가 쉽습니다.

 

어느 것이나 하나의 것을 바로 보면 무엇인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바쁜지라 지나치고 삽니다. 어째서 꽃은 피는 것인가? 꽃이 피는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불자인지라 인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일체만유가 인연생이라 인연이 화합하면, 이루어지고 인연이 흩어지면 소멸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가장 시초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놓치고 삽니다. 꽃을 피우는 가장 근원적인 인은 무엇인가? 꽃이 피는 연은 우리가 압니다. 씨앗이 있고, 수분, 태양광선, 비료도 있습니다.

 

그런 연은 많이 있습니다만, 정작 인은 잘 모릅니다. 대체 꽃이 피는 가장 시초인 인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가지나 이파리 등 지엽枝葉적인 작은 연 같은 것은 중요시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근본적인 인을 캡니다. 근본을 알아서 근본실상의 바탕을 알아서 거기에 입각해서 생활하고 만사를 처리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마는 겨울 되면 저 자산홍도 나목이 됩니다. 헐벗어 버립니다. 헐벗은 나목에서는 꽃이라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봄이 되면 새잎이 나오고 꽃이 핍니다. 나무의 어느 구석에도 꽃은 없습니다.

 

일본의 중세기中世紀에 한 무사가 있었는데, 그 무사는 자기가 숭배하는 절의 선사禪師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불심佛心 불심 하는데, 부처님 마음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이 추궁 하다시피 물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사 하는 말이 대뜸 내 마음에 있지마땅히 부처님 마음 이니까 마땅히 마음에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무사도 역시 실험 겸 해서 칼을 빼어들고 당신 가슴, 당신마음 어디에 불심이 있는가?” 하면서 마치 선사의 가슴을 찌를 듯이 윽박지르면서 불심의 소재를 추궁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선사대답이 게송으로 해서 대답을 했습니다. “나무를 쪼개 보아도 꽃이 없건만, 봄이 오면 가지가지마다 꽃이 피느니라.”

 

사실 나무의 어디에도 꽃이 없으나, 봄이 되면 잎이 나고 꽃이 핍니다. 정말 하나의 꽃에도 천지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도시에 대부분 계시지만, 도시의 밤 야경을 보십시오. 휘황찬란한 불빛을 보십시오. 물론 발전소가 있고 또는 여러 가지 조작이 있어가지고 전기가 켜지겠지만 과연 그 불빛의 시초 광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광명이 원래 있기에 발전소가 있고 거기 조작이 돼가지고 우리 가정에 불이 켜지지 않겠습니까? 광명은 대체로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것 저런 것 어느 한 가지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에게 심심 미묘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바빠서 사회의 기계적인 여러 가지 조직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바빠서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만 알면 우주를 다 알 것인데 어느 하나도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꽃피는 것이나 또는 하나의 돌멩이 원인, 전기불의 광명의 원인 등 한 가지를 모르고 삽니다. 우리는 어중된 중간쯤만 알고 삽니다. 이렇게 바른 것은 모르면서 근원적인 것은 모르고서, 중간쯤 가정된 사고방식 가정된 가치기준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사회나 우리 개인이나 안심입명安心立命이 없습니다.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같이 가정된 것이 아니라, 무가정無假定의 원리, 제일의 원리, 근본의 원리에서 원리를 깨닫고 원리에서 판단하는 생활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으로 부터서 바른 정통의 법을 이으신 분이 중국으로 따지면 6조 까지 33대가 있습니다. 달마達磨스님은 인도에서 오셨는데 그분은 28대고, 그 뒤에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 그래서 6조가 있습니다. 헌데 4조 도신대사로 부터 홍인대사가 나왔는데, 4조 도신대사에게 하루는 늙은 한 노장이 왔습니다. 그 노장은 출가한 사문중이 아니라, 일반 사회인이었습니다. 노장이 와서 듣건대 도신대사가 수천의 제자를 거느리고 사람을 제도하고 계시니 저도 함께 제도를 받고 싶습니다.” 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승가의 풍속이 퇴소退少퇴로退老, 원래 70이 넘으면 퇴로해서 받아주지 않고 7세 미만은 퇴소라 너무 어려서 받아 주지 않습니다. 원래 출가 길이라는 것은 7세 이상 70세 미만이 되어야 그래야 출가를 합니다. 그런데 그 노장은 70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그대 같은 늙은이는 공부할 수 없다, 출가 안 된다고 거부하니까 노장 역시 선근이 있었는지, “기왕 내가 공부를 못했으니까 차라리 그냥 죽어서 몸을 바꿔 태어나서 공부 해야겠구나하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서원을 세웠지만 기왕이면 다시 몸을 바꿔 태어난다 하더라도 부잣집에 태어나면 그때는 부잣집의 풍족한 생활 때문에 출가를 못하니까, 우리는 출가할 때 보통 보면 서산대사나, 위대한 도인들도 역시 아주 풍족한 환경에서 출가한 분들은 없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무엇인가 비참한 계기가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노장도 역시 내가 부잣집에 태어나면 너무 생활이 풍족해서 출가할 계기를 못 갖는다. 차라리 기왕이면 아주 못난 사람 아주 그런 거지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야겠구나.’ 하고 짐짓코 자기의 호흡으로 숨을 끊어가지고서 서원 세워 태어난 것이 얻어먹는, 아버지도 없고, 아버지도 누군 줄 모르는 그야말로 참 거지 여자한테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여자가 어린애를 데리고서 얻어먹으러 다닌다 말입니다. 얻어먹고 다니다가 어찌어찌 해서 4조 도신대사가 계시는 절에 갔어요. 거지되는 그 어린애 어머니도 그렇게 속이 실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어린애를 잘못 간수해서 어린애가 법당에 기어 올라가서 법당에다 똥을 쌌다 말입니다. 신성한 법당에 똥을 쌌으니 온 대중이 그때는 소란을 피우겠지요,

 

마침 예불시간이 되어 4조 도신대사도 같이 예불모시고 나오시다 그런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말입니다. 그래 가지고 모두 옆에서 그냥 꾸짖으니까 겨우 세 살 나기 어린애가 하는 말이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부처님 몸은 법계에 두루 있는데, 어느 구석에도 부처님이 안계신데 없이 불신충만어법계라 부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의 몸은 법당이나 똥간이나 어디에나 가득 차 있는데, 부처의 몸이 없는 곳이 있다면 거기에 가서 똥을 누겠다고 말했습니다. 법당에도 부처의 몸이 있고 똥간에도 있고 다 있는 것 인데 부처의 몸이 없는 자리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알려 주면 내가 가서 똥을 싸겠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그 말이 어린애 말이지만 답변할 말이 없다 말입니다. 부처님 진리, 천지우주가 바로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부처님 진리뿐 인데 부처가 없는 빈틈이 없다 말입니다. 그럼 결국 똥을 눌 장소가 없겠지요.

 

그래서 온 대중들이 그냥 어린애이지만 하도 기특해서 모두 앞에 가서 합장하고, 도신대사한테 스님이시여, 이 아이가 보통애가 아니니, 빨리 거두시어 위대한 법사를 만듭시다.” 라고 말했다 말입니다. 그러자 도신대사 말씀이 “7세가 넘어야 중이 될 것인데 아직은 너무 어리다하니까 그 아이가 언제는 늙어서 중 못된다고 하고, 오늘은 또 어리다고 못 된다고 하면서, 짜증을 내니까 그 어머니한테 부탁해서 그 근처에서 키워서 5조 홍인대사로 만들었습니다. 6조 혜능대사는 거기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정말로 부처님은 법계法界에 충만하건마는 중생이 못 봅니다. 중생은 법계의 모든 것의 실상을 모른다 말입니다, 참다운 모습을 못 본다 말입니다. 참다운 모습을 모르니까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을 볼 까닭이 없습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하니, 부처의 몸이 법계에 가득 차있어서 보현일체중생전普賢一切衆生前이라, 두루 일체 중생 앞에 항시 나타나 보이신다 말입니다. 바늘 구멍만한 틈도 없이 부처님은 다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너와 내가 따로 떨어져 있고, 부처와 내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고, 부처와 더불어서 같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 말도 오직 부족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의 몸입니다. 천지 우주가 부처님 몸 덩어리, 하나의 몸입니다. 두루 일체 중생 두두물물頭頭物物 앞에 부처님이 항시 계십니다.

 

천지 우주 자연이 바로 부처인데, 어디에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있겠습니까? , 중생의 눈이 어두워서 근본실상을 못 본다 말입니다. 마치, 아까 말했지만 전기원인이 분명히 광명光明으로 있건 만은 중생이 광명의 원인을 못 봅니다. 자산홍 나무에서 꽃이 피는 심심 미묘한 진리가 있는 것인데 중생은 그걸 못 봅니다. 꽃이 피면 피는가 보다, 잎이 지면 지는가 보다 합니다. 그와 같이 중생은 근본을 못 보고 그때그때 지나치고 삽니다. 지나치고 사는 그런 어설픈 지혜로써 내가 옳다, 네가 옳다 하니까 투쟁과 분열이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가정假定에서 산다 말입니다. 가정假定의 원리에서 우리가 판단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일체 성자는 무가정無假定의 원리에서, 영원적인 진리에서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니까 바로 봅니다. 따라서 그르침이 없습니다. 즉 여법이 본다 말입니다.

 

우리가 근본을 알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쓴 만치 법성게法性偈에도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하니, 비와 같은 그런 보배 심심미묘한 부처님의 진리가 허공에 가득하니, 중생수기득이익衆生受器得利益 중생의 그릇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에 가득한 부처님 몸이건마는 중생의 인연 따라서 우리가 많이 구하면 구한만큼 잘못 되면 잘못 구한 만치 거기에 얻고 갚는 것입니다. 심심 미묘한 부처님의 진리가 허공에 가득 차 있어서 중생의 그릇 따라서 얻습니다. 그렇게 해서 있는 곳 마다 보리좌菩提座, 바로 진리를 닦고 성불하는 최상의 행복으로 가는 자리입니다. 자기 직장이나 가정, 법문 듣는 이 자리나 어느 곳이나 우리가 도를 닦고 성불하는 수행도량이 아님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이 충만하거늘 어느 곳이 부처님 도량이 아닌 곳이 있겠습니까?

 

화엄경華嚴經은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이 같이 한 생명으로 인연 관계가 되어있는 중중무진이라, 얽히고설키어 같이 한 생명으로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인연을 말할 때 자기가 아는 어중간한 인과 연만 내세웁니다. 우리 범부는 제 아무리 지식을 축적해 가졌다 하더라도, 어느 하나의 사건, 어느 하나의 존재의 인연은 다 모릅니다. 나무가 싹트면 나무의 인연을 다 알겠습니까? 우주에 있는 어느 한 가지도 다른 한 가지 원인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 있는 꽃잎 하나도 우리한테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한테 악독한 사람이 나오면, 그 책임이 우리의 어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눈곱만한 하나의 것도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생명덩어리입니다.

 

중생은 현상만 보는 것이니까 그런 관계는 모릅니다. 그러나 현상을 지양해서 바닥을 본다면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 어떠한 것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관계성 가운데 얽히고설키어 있습니다. 이런 인연因緣, 이런 중중무진 어느 것도 버릴 수가 없고 지금 당장 살인자가 있다면, 그 사람도 내 생명生命과 관계가 있습니다. 살인자 그 사람이 우주에 없으면 안 됩니다. 살인자 그 사람이 우주에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태어났습니다. 어떤 것 하나도 우주에서 버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인연관계 인연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마승비구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 태도가 점잖아 누가 보면 신심을 냅니다. 마승비구가 미처 도를 못 깨달을 때 탁발을 했습니다. 얼굴이 잘나고, 태도가 위장부니까 도인처럼 보입니다. 그때에 사리불 존자가, 사리불이 스승을 얻지 못하고 외도 밑에서 공부는 하지만 항시 마음엔 불만이 있다 말입니다. 참다운 도는 이것이 아닌데, 참다운 도는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아니다.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서 회의를 품었습니다. 그때 마침 길을 가는데 당당한 위장부가 가사를 수 하고서 탁발을 나오는데 그 사람 모습만 보아도 환희심이 나거든요. 그래서 쫒아가서 존자여 저한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간청 했습니다.

 

그때 마승비구가 하는 말이 저는 아직 미숙합니다. 그러나 제 스승, 세존은 천상천하의 대 도인인데 그분이 제 스승입니다라고 말하자 사리불이 그러면 세존 그분이 당신한테 어떤 법문을 하십니까? 법문 가운데 골수가 무엇입니까? 그 법문을 나한테 들려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때 마승비구가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모든 법은 연 따라 일어나고, 역종인연멸亦從因緣滅이라, 역시 인연 따라 멸하도다. 아사대성주我師大聖主 시아여시설是我如是說 나의 스승인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불상도 조성하고, 탑도 조성합니다. 탑을 조성하면 그때는 응당 사리를 모셔야 하겠지요. 허나 사리가 많지 않으니까 진짜사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생신사리가 없을 때는 법신사리라, 법문 가운데서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을 압축시킨 법문, 오직 하나로 뭉친 법문 그 법문을 법신사리라고 해서 탑에다 모시고, 불상에다 넣어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신사리가 마승비구가 사리불에게 말한 법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일어나고 인연 따라서 멸하도다. 내 스승인 석가모니께서는 항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의 두 글귀는 떼어버리고, 앞에 있는 두 글귀,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라 연 따라 일어나고, 연 따라 멸한다.’ 이것이 부처님 법문의 대요大要입니다. 잘되나, 못되나 이것이 인연이겠지 하며 쉽게 말하지마는 인연은 그와 같이 심심 미묘합니다. 인연의 가닥을 잡아올라 가면 그때는 천지우주를 다 알아 버립니다.

 

아까 말처럼 가장 태초, 시초始初 제일 원인은 무엇인가? 거기 까지 알아야 만이 인연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연도 역시 천지우주가 다 연이 되어 있습니다. 미국사람도, 어디 사람도, 선인, 악인도 누구나 다 나의 행복과 나의 불행, 나의 생명과 나의 멸망에 원인이 있습니다. 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연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아프다면 가까운 연은 잘못 먹기도 하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요. 허나, 부모님부터 조상까지 올라가면, 한도 끝도 없이 내가 아프다는 것이 다 인연이 있습니다. 다만 부처님만이 천지우주 모든 존재의 인연을 다 압니다.

 

그 외에는 인연을 모릅니다. 따라서 인연이라고 우리는 쉽게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 자세는 가장 시초의 원인을 알려고 하는 자세가 있어야 만이 인연의 뜻을 세길 수 있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바로 세기는 것은 실상을 바로 깨달아야 만이 할 수 있지만, 인연법, 인연 이것이 부처님법의 대요입니다. 제일 원인, 무가정의 원인, 이것이 불성입니다.

 

마치 물리학에서 순수 에너지 또는 장 에너지가 가장 시초에너지가 되듯이 우리 존재의 모든 근원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佛性 불심佛心 이것이 제일 원인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불종종연생佛種從緣生이라, 불성이라는 씨앗이 연을 쫒아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경전도 소승경전은 인연법을 말할 때 모두 연과연이 합해서 되었겠지 말하지만, 대승경전은 역시 시초인 제일 원인을 항시 내세워서 말씀 합니다. 인연생이란 것도 그냥 일반적인 해석을 연과연이 많이 합해서 하나가 되었겠지, 꽃이 필 때는 씨앗, , 햇빛 등이 합해서 피었겠지, 이와 같이 말합니다만, 불교 대승적인 해석은 가장 근원적인 제일 원인을 말합니다. 가장 시초의 순수한 생명, 즉 불성까지 올라가서 말합니다.

 

불성佛性, 부처님 몸이 바꾸어져서 부처의 몸이 갖추고 있는 무한의 힘 때문에 자동적으로 우주가 된 것입니다. 연도 역시, 따지고 보면 부처님 몸입니다. 도 부처님 몸이요, 무수한 연도 부처의 몸입니다. 사실은 부처님 몸뿐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인연의 대승적大乘的 해석입니다. 많은 인과 연이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소승적小乘的인 해석이고, 불성 가운데 있는 심심 미묘한 힘이 인과 연 이 되어서 이루어 졌다 이것이 대승적大乘的 해석입니다.

 

조금 더 부연해서 말씀 해 들어가면 제불여래시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이라, 모든 부처님은 바로 이것이 법계의 몸으로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모든 부처님 들이 석가모니라는 몸 자체, 개체의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몸은 겉에 보기는 사람이지만, 석가모니 참 몸은 법계法界, 온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相中이라 일체중생의 마음 가운데 들어계십니다.

 

불교에서 일체중생을 작게는 우리 사람만 말합니다. 조금 더 넓게 들어가면 사람, 동물을 말합니다. 가장 근원적인 해석은 모든 중생 무생물, 생물, 유상, 무상,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중생 그럽니다. 우리가 불교를 해석 할 때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를 대비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 존재의 마음 가운데에 들어 계십니다. 그런고로, 그대들이 심상불시 그대들 마음에 부처를 생각할 때, 우리는 부처라는 것은 우주의 근본이고 바로 우주의 전체 아닙니까. 한도 끝도 없고 부사의해서 말로 할 수 없지만 우주자체 생명자체가 부처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제반이 없고 구속이 없고, 이런 부처님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시심즉시 이 마음이 바로 3280수형호, 우리는 부처님 덕상을 말할 때에 32가지의 대인상大印象을 말하고 또 대인상에 비추어서 80가지의 작은 상호를 말합니다. 즉 만덕을 갖춘 부처님 모습이 사람의 말로도 다 표현 못하고, 일체중생의 지혜를 다 모아서 해도 다 표현 못하는 그런 부처님의 지혜, 그 공덕을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그런 부처님의 법신의 몸이 형상화 되어서 사람 몸이 될 때는 3280상호가 갖추어진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잘생긴 얼굴은 모두가 백겁 공덕입니다. 겁은 무량세월인데, 무량세월 동안에 갖은 공덕을 베푼 것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얼굴이 되고 3280종호 그런 상호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부처님 몸이고, 부처님이 일체 중생의 심상에 항상 계신지라 사람 같이 의식적으로 판단해서 사람마음이 부처님을 생각 할 때는 부처님은 무한의 공덕인지라, 따라서 자기도 역시 무한의 공덕, 3280종호가 그냥 갖추어 옵니다. 부처님 생각하는 공덕은 이와 같이 큽니다. 물론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할 때는, 그냥 반영돼서 우리 몸도 재미없습니다만, 우리가 많은 생각 행동가운데서 가장 수승하고 고고한 생각을 할 때는,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그냥 기분 좋고 몸이 상쾌해 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든 공덕이 우리한테 모두 갖춰오는 힘을 느낍니다.

 

우리는 불교를 이론적으로만 따져서 믿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허나 우리 감성적인 면, 그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무치게 믿는다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나 다른 경 에도 있습니다만, 일념왕생一念往生 이라 또는 십념왕생十念往生 이라 생각을 골똘히 해서 사무치게 믿는다면, 열 가지 생각만 가지고도 극락세계에 갈수 있는 원인을 만듭니다. 또는 더 사무치면 한번만 생각해 가지고도, 우리 몸이 범부凡夫의 번뇌를 녹이고 해탈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감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만 체계를 세우고 감성을 믿습니다만,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 감성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감성은 우리 마음을 비약 시킵니다.

 

일념왕생이라, 비록 지금 때 묻은 중생이라 하더라도, 한 생각 사무치면, 그때는 비약적으로 번뇌를 녹이고 성불成佛도 합니다. 이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이고, 우리 심상 가운데 모든 존재의 중심에는 부처님이 항시 계신지라, 그대들이 만약에 부처님을 생각 할 때는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갖춥니다. 완전히 못 갖춘다 하더라도 부처님 하고 통로를 이룹니다. 그렇게 해서 시심작불卽心作佛이라,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루고, 이 마음 이 바로 부처다.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일체가 다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시심시불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합니다만, 정작 내 마음이 왜 부처인가? 이런 것을 깊이 생각도 못 합니다. 사실은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천지우주는 바로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원자를 만들고, 마음이 물질을 만듭니다. 순수 에너지의 보다 순수한 알맹이도 역시 마음입니다. 지금 고도로 발달된 정밀과학도 역시 그러한 것을 대강대강 증명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원자력의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원자력 때문에 인류가 피해를 입는, 원자핵으로 해서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무서운 힘인데, 그런 무서운 힘의 가장 시초는 무엇인가? 이것은 역시 마음입니다, 불심입니다. 이러한 것을 부처님경전 가운데는 윤곽만 말 한데가 있고, 또는 구사론俱舍論같은 논장에는 체계를 세워서 현대 물리학적인 술어는 안 쓴다 하더라도 체계를 세워서 말씀 한데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뿐인 것인데, 생각하는 힘이, 그 에너지가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물질을 만듭니다.

 

우주가 텅텅 비어서 공겁이 됩니다. 지금 물리학 에서도 역시 종말에 가서는, 우주가 다 비어서 타버려서 제로가 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종말이 다가 와서 공겁이 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러면 종말이 되고서 공겁만 되고 그때는 다시 우주가 형성됩니다. 그럼 그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중생의 생각이 뭉치고 뭉쳐서, 생각 그것이 물질을 만듭니다.

 

싫어하는 생각을 하는 마음 씀은 오른쪽으로 유순을 시켜서 전류를 만드는 것이고, 또 좋아하는 생각의 순수한생명은 왼쪽으로 돌려서 양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우주를 구성 합니다. 불교로 말하자면 중생衆生의 공업력共業力이라. 태초의 텅 빈 우주 가운데 중생의 공통共通된 업력이 쌓이고 쌓여서 물질을 만듭니다. 우주를 구성 합니다. 그런 것이 소상히는 안 알려 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경전, 도인들의 논장 가운데는 그런 것이 들어 있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천지우주 가운데 오직 마음뿐 인데,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생각에 따라서 천지우주를 만듭니다. 어떠한 것이나 근본은 마음입니다. 근본은 심입니다. 우리가 비록 느끼고 보지 못 한다 하더라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법유심萬法唯心이라, 일체가 오직 마음뿐이고 모든 법이 마음뿐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것뿐인 것입니다. 다만 중생의 눈이 어둡고, 번뇌에 가려 바로 못 봐서 결과만 보지 근원은 보지 못 합니다. 불성도 못 보고, 불성이 어떻게 해서 되는 것도 못 봅니다.

 

과정도 못 봅니다. 그러나 다행히 현대 물리학은 그런 과정을 근본바탕인 불성을 못 본다 하더라도, 원자도 알고 합니다. 지금 사람 되고, 뭣 되고, 우리 세포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금 물리학은 대강 압니다. 물리학자나 그런 분들이 더욱 더 분발해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서, 정말로 깨달아 버리면 그분들이 다 불성을 봐가지고 참다운 체계를 세우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미처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들 말씀에 거짓말이 없습니다.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천지우주는 오직 마음뿐 입니다. 그리고 천지우주 가운데는 모두가 다 식이 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생물이나 무생물에도 다 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백 개 이상 되는 각 원소를 보십시오. 가령 양자 밖에서 전자 여섯 개가 돌면 탄소 아닙니까? 일곱 개면 질소고 하나가 더 있으면 산소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모든 원리가 하나의 수리적인 단계를 보십시오. 기막힌 우주의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것 저런 것의 근본실체는 불성, 불심입니다.

 

중세기나 그런 때는 종교의 체계 원리를 몰라도 무방했고 또는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하지 않을 때는 그럭저럭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원자력의 원리를 모르면 원자보다 더 깊은 것을 모르면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불안해서 못삽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꼭 그 원리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아신 부처님이나 도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자보다 더 깊은 원리, 원리를 파악하고서 안심하고 원자력도 거기에 맞추어서 적당히 조작합니다. 과학을 지도할 수 있는 것은 원리를 안, 근본바탕을 안 성자의 가르침뿐입니다.

 

이것은 아시는 분들 은 다 아시겠지만, 인생의 무상無常과 허무虛無를 재차 강조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신라의 위대한 거사 아닙니까? 중국에서 방거사龐居士, 인도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 이 세 분은 재가불자의 표본으로 얘기 합니다. 이분의 전기는 대강 아시니까 말씀드리지 않고 게송만 설명하겠습니다.

 

부설거사 사허부운게四虛浮韻偈 네 가지 것이 거품같이 허망하다는 무상을 역설한 시입니다. 처자권속삼여죽妻子眷屬森如竹하니, 처자와 권속이 마치 숲이나 대와 같이 많고, 즉 집안이 좋고, 자식이 많고, 아주 번성한 것을 말합니다. 그 위에 금은옥백적사구金銀玉帛積似邱, , , , 비단이 마치 산더미 같이 쌓여 있으니 즉 부귀를 같이 누리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권속도 많고, 재물도 많다고 하더라도 임종독자고혼서臨終獨自孤魂逝, 죽음에 이르러서 홀로 외로이 간다. 아무리 부귀를 누리더라도, 죽을 때는 혼만 외로이 나갑니다.

 

우리는 살았을 때는 죽음을 미처 못 느낍니다. 아직 못 죽어 봐서 못 느끼겠습니다만, 우리가 죽은 셈 치고 생각해보면 깊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정말로 누구나 자기 혼만 혼자 갑니다. 아무리 아끼고 닦을 지라도 이 몸뚱이는 순간도 가지고 못 갑니다. 운명 떨어지면 이 몸뚱이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아내나, 누구나 다 썩은 몸뚱이는 싫어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닥쳐올 운명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르고 삽니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하는 이 몸뚱이가 꼭 자기 것이고, 영원한 자기 존재라고 생각 합니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자는 자기 몸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범부는 자기 몸을 자기, 내 것으로 압니다. 어쩌다가 자기 업력기운이 각 세포를 긁어모아서 하나의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그랬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산산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것뿐인데 우리 중생은 그걸 모릅니다. 그걸 모르니까, 자기 권속을 늘리려고 애를 쓰고, 또는 재물을 모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자기 혼이 죽어서 혼자 갈 것을 안다고 하면 이와 같이 애쓰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고서, 근본실상, 근본생명을 알려고 애씁니다. 죽을 때는 홀로 혼만 외로이 가는 것이니, 사량야시허부구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이것도 뜬 거품이구나.

 

조조역역홍진로朝朝役役紅塵路하니, 아침마다 밤마다 애쓰고 힘써서, 홍진은 우리 세속에서 사는 고달픈 생활입니다. 작위재고이백두爵位纔高已白頭라 겨우 애써서 벼슬에 올라갑니다. 자기 벼슬자리가 겨우 올라갈 때는 이미 센 머리라, 세속의 길 가운데 애쓰고 애써서 겨우 가까스로 벼슬자리에 올라가면 그때는 이미 자기 머리는 세어져서 백발이 된다 말입니다.

 

염왕불파패금어閻王不怕佩金魚라 염라대왕은 우리 중생을 심판하는 저승의 왕입니다. 꼭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것은 자기 심판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죽어지면 우리 어두운 혼령들, 근본실상을 모르는 혼령들은 갈 곳을 모릅니다. 죽어서 가는 자기 마음이 염라대왕과 같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염라대왕은 원래 우리 마음을 심판하는, 우리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 못 하는데서 느끼는 그런 심판하는 그런 왕 우리가 선악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겠지요. 염라대왕은 불파패금어라.

 

금어金魚 찬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금어란, 옛날 정사품처럼 높은 사람들이 고기 모양으로 된 금으로 만든 주머니가 있습니다. 따라서 높은 벼슬에 올라가지 않으면 금어는 못 찹니다. 염라대왕은 오직 우리가 행동한 선악만 따지고서 우리 행동의 좋은 점만 두려워 할 것이지 금, , 벼슬, 훈장이나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염라대왕은 벼슬이 높아서 금어 찬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벼슬이 높고 지위가 올라가서 훈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런 것은 죽어서 가는 마당에는 죽음 길을 심판하는 염라대왕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사량야시허부구라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뜬 거품이구나.

 

맨 처음에는 자기의 권속, 재물을 말한 것이고, 그다음은 애쓰고 높은 지위에 올라갔지만 이것도 역시 생각해보면 염라대왕은 조금도 두려워않는 것이고, 금심수구풍뇌설錦心繡口風雷舌이요, 우리가 문장이나 글이 많아서 문장을 잘 쓰고, 말을 잘 하고, 마치 우뢰 같이 웅변을 잘 하고, 또는 천수시경千首詩經이라 천수나 만수나 시를 지어서 그 시가 어떻게 훌륭하던지, 만호후萬戶侯, 옛날에는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제후 후 지방을 다스리는 원이나 영주가 후 아닙니까?

 

헌데 우리가 문장이 좋고, 말이 좋고, 그렇게 해서 천수나 만수나 시를 잘 지어서 같은 영주도 천호 가진 영주 있고 만호 영주가 있는데 만호는 꽤 많은 땅을 다스리는 영주겠지요. 그런 만호를 다스리는 영주를 오히려 가벼이 할 수가 있을 정도로 재력이 있다 하더라도, 증장다생인아본增長多生人我本이라 다생의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헤매는 동안에, ‘다 하는 내가 잘 났다, 네가 못 났다,

 

이와 같이 나와 남을 가리는 아상我相 시를 잘 쓰면 시를 잘 쓴다는 상을 낼 것이고, 글을 잘한 사람은 글을 잘한 상을 내겠지요. 우리는 예술가도 많이 있고, 여러 솜씨 있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솜씨 있는 분들이 다는 그렇지 않아도 보통은 자기 재간에 상을 많이 냅니다. 즉 그와 같이 그런 문장이 많이 있고, 웅변이 좋고, 시를 잘 쓰고 해서 만호후를 가볍게 할 정도로 할지라도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다생동안에 아상의 근본만 더 증장하는 것이니,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뜬 거품이란 말입니다. 여기까지 세 번 허망한 거품소리를 얘기 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아주 중요한데 결론적인 중요한 법문이 되겠습니다.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라 가사 진리를 설하는 것이, 여기까지는 일반 세속이지만, 이제 진리로 해서 불법을 많이 배워서 가사, 진리를 설하는 것이 마치 구름 같이 잘 설하고, 감득천화석점두感得天花石點頭라 하늘 꽃이 감동하고, 우리가 보통 말해서는 꽃이 감동 하겠습니까마는, 정말 말을 잘하면 하늘 꽃이 감동하고, 돌이 옳다고 끄덕 끄덕 합니다.

 

중국의 도생대사는 구마라습鳩摩羅什 제자인데 위대한 분입니다. 천제성불闡提成佛이라, 천제란 부처의 종자가 없는 나쁜 사람이지요. 부처의 종자가 없는 나쁜 사람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그 당시에 참다운 대승이 미처 안 들어올 때는, 다시 말하면 도생대사가 나올 때는 구마라습 때니까 지금부터 1500년 이상 되는 세월입니다. 즉 인도에서 대승이 안 들어올 때는 나쁜 사람들은 성불을 못한다. 오직 선택 받은 사람만 성불 하는 것이지 나쁜 사람은 성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도생법사는 벌써 마음이 맑으니까 어떤 누구나 성불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중국에 들어온 학설로 해서는 나쁜 사람이 성불한다는 학설이 없었지마는, 벌써 도생대사는 자기 영감靈感으로 제 아무리 나쁜 사람도 역시 다 성불한다는 학설을 주장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사람들은 안 믿습니다. 부처님 경전에 대해 이설異說을 말할 수 있는가 하여 안 믿습니다. 그런데 영감이 밝은지라 분명히 믿었습니다.

 

비록 경전에는 미처 안 나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대의가 어떤 중생이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강도나 제 아무리 나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꼭 성불한다고 확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벗들도 안 믿으니까, 하도 원통해서 산에 가서 돌을 세워놓고서 돌을 상대로 법문을 했습니다. 과연 부처님 법이 나쁜 천제, 천제는 참다운 천재가 아닙니다. 선근이 없는 착한 공덕이 없는 사람이 천제입니다.

 

선근을 안 닦는 사람도 성불한다는 것인데 돌을 세워놓고 말하기를 부처님 경전에는 비록 안 나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본뜻은 틀림없이 선근이 없는 사람도 다 성불한다. 이것이 나는 옳다고 믿는데 과연 그대들, 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묻는 태도가 얼마나 진지하고 감격스러웠는지, 그런 돌들이 옳다고 끄덕 끄덕 했습니다. 좋은 법문 듣고, 좋은 말 듣고, 돌들이 옳다고 끄덕 끄덕 한 이것이 석점두石點頭입니다.

 

가사, 법을 설하는 것이 구름이나 비와 같이 잘 말씀을 하고, 그래서 하늘 꽃, 땅의 꽃뿐만 아니라, 하늘 꽃이 감동을 하고, 돌마저 끄덕 끄덕 옳다고 할지라도 간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 간혜乾慧는 아직은 생사를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혜乾慧 이것은 삼매에 못 들어서, 우리 마음이 참다운 안정을 취해서, 우리가 영원성 불성을 체험하는 것 아닌 지혜, 이것이 간혜입니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또는 선근이 많아서 그냥 순간에 했던지 간에 불성을 못 증한 이론만 갖고 있는 지혜 소위 구두선口頭禪, 간혜乾慧는 생사를 면할 수 없고 즉 말하면 영생을 모릅니다.

 

바싹 마른 지혜, 즉 참다운 선정을 못 닦은 지혜, 참다운 선정을 못 닦으면 부처님의 공덕이 무량공덕이지만, 그런 공덕을 발휘하지 못 합니다. 신통도 자재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지금 원자력 이상의 힘을 낼 수가 있는 것인데, 선정을 못 닦으면 그런 불성을 체험을 못 합니다. 따라서 공덕을 못 발휘 합니다. 따라서 중생들이 숭상할 수가 없습니다.

 

달마스님 때 달마스님 형님이 돌아가시고, 조카가 왕위를 계승 했습니다. 달마스님은 도인이므로 위대하지만, 조카는 사람이 약빨라서 부처님 법을 안 믿습니다. 달마스님 제자 가운데 웅변가가 많이 있겠지요, 몇 사람이 가서 말하지만 안 믿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면 부처가 됐지, 부처만 믿으면 되지, 달리 말할 필요가 뭐 있는가? 약빨라서 괴변이 심해서 도저히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요새 우리 불법 가운데도 역시 부처님 법문을 조금 외우고, 참선도 조금하고 하면 가짜 도인되기가 쉽습니다. 그런 사람처럼 달마스님 조카도 도저히 안 믿어 버립니다.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으면 있었지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본래 부처인데 깨달을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이와 같이 도저히 말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 그런걸 알아차리고 오색찬란한 구름위에 타가지고, 왕자가 거처하는 침실로 갔습니다. 난데없이 오색찬란한 구름위에 달마대사가 장엄스럽게 서 있으니, 그 모습을 보고서는 자기도 모르게 엎드려서 <법문 끊어짐>

 

중생이 아상我相을 못 버리면, 를 미쳐 못 버리면 악용을 합니다. 그래서 금지합니다. 허나 부처님께서는 신통을 또 한편으로 권장 합니다. 왜냐면 중생들의 교만심을 조복시키려면 위력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부처님께서는 신통을 꼭 보이십니다. 달마스님 조카 되는 왕자도 역시 달마스님이 신통을 안 보였더라면, 그 사람을 조복을 못 시킵니다. 그와 같이 부사의한 힘을 보이니까, 그때는 불성에 들어있는 무한공덕의 힘을 믿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조카를 부처님 문중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헌데 약삭빠른 사람들, 재주 있는 사람, 이런 간혜, 바삭 마른 이론적인 지혜만을 가지고서 알았다고 합니다. 현대 문명의 병폐는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 불교의 침체도 여기에 있습니다. 간혜만 가지고서 전부라고 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아는 것은 해에 불과하고 마땅히 그다음에 행이 있고, 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냥 신행信行이라, 조금 믿고, 조금 해석하고, 여기에만 멈추니까 참다운 힘을 못 냅니다. 마땅히 거기에 후속적으로 행과 증이 따라야 합니다. 부설거사도 얼마나 심각하게 느꼈기에 결론적으로 간혜란 말을 내어가지고, 이런 것은 재주는 좀 있고 남한테 대우도 받고 할런지는 모르지만, 참다운 생사, 자기가 죽고 살고 하는 것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즉 영생을 바라지 못합니다. 법성만이 영생하고, 우리의 참다운 생명인 불성만이 영생하는 것인데, 불성, 법성을 못 본 사람들이 무슨 말로 해서 영생을 얻고, 생사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비록 출가는 못 했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마음은 부처님을 한번 생각 할 때 그 마음이 사무치면 비약하는 힘이 있습니다.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일념돈생一念頓生이라, 한 생각에 바로 성취하는, 비약하는 신비부사의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과 석가모니의 마음과 한 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느끼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원래 성질로 봐서는 예수님 마음, 부처님 마음 똑 같습니다. 우리가 다만 어두워서 그 마음을 모르고 인식을 못 할 뿐입니다. 바로 알려면 간혜를 넘어서 경을 읽던지, 집안에서 염불을 하건 화두를 하건, 몰록 삼매三昧에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들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길을 갈 때에 엑스터시(ecstasy)라 이렇게 한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서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꼭 불교라고 하지 않더라도 망아지경忘我之境, 자기를 잊어버리고 몰두하는 삼매三昧에 들어갑니다. 삼매의 물로 씻어내야만, 비로소 간혜를 면할 수 있습니다. 간혜를 면해야 생사生死를 떠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부대중이 외호해 주시는 덕택으로 해서, 3년 결사하는 스님들도 역시 간혜를 면하기 위해서하는 것입니다.

 

이야 강원 나왔으니까 84천 중요한 것은 다 배웠겠지요. 글로 해서는 생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生命을 못 구제 합니다. 이와 같이 비록 설법이 운우雲雨같이 웅변을 토하고, 또는 그 웅변이 하늘의 꽃을 감동시키고, 돌이 끄덕끄덕할 정도로 잘 한다 할지라도, 이런 지혜는 생사를 면할 수 없으니, 이것도 생각해보면 허망한 뜬 거품이구나!

 

우리는 지금 그야말로 위험한 때 살고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 본다할 때, 좌우의 대립 또는 남북의 대립, 또는 우리나라의 여야의 대립, 학원의 문제 등 무서운 문제가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 다만 이 자리에서 저만치 멀리 있는 부처님 말만 한다고 이렇게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부처님 생각, 이것이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요긴한 열쇠입니다. 근원적으로 여야를 보고, 근원적으로 학원문제를 생각하고, 부처님 법에 따라 생각하고 부처님 법에 따라 말하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떤 문제나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마치 뜨거운 화로의 한 덩이 눈과 같이 녹아 버리고 맙니다.

 

부처님 법으로 본다할 때 원래 원수가 없거니 누구와 싸울 것 입니까? 부처님 법으로 본다할 때 원래 모두가 한 몸이거니 자기 당, 자기 문중, 자기 집안만을 위해서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는 우리가 할 일은 제일 급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를 아는 것이 제일 급합니다. 내가 내 생명을 아는 것이 제일 급하다고 행각할 때에 내가 를 아는 그길, 석가, 예수, 공자가 가르친 그길, 그길로 가는 길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성자가 되는 그런 길을 일로매진一路邁進해 간다고 생각 할 때에, 학원 문제, 무슨 문제 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나, 사바세계의 문제는 부처님 법 성자의 길을 따르는 것이 해결하는 가장 요긴한 길입니다. 우리는 우선 이론적으로 참다운 실상의 진리, 오직 부처님 진리만이 근원으로 안다는 그런 것을 더욱더 깊이 느끼셔야 하고, 설사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역시 그냥 간혜, 이론적으로만 체계를 세운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꼭 우리 생활화시켜야 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립니다만, 사실 우리 생활에 사무치면, 생활에 사무친 도덕적인 행위로 해서라도 역시 우리 마음은 비약적으로 간혜를 면해서 참다운 영생의 지혜를 획득 합니다.

 

그 예로 부처님 법문을 인용하면, 부처님께서 나오시기 전에 애법비구愛法比丘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구하는 비구란 뜻입니다. 간절히 진리를 구하는 비구입니다. 애법비구는 자기 몸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진리만 구하면 그만이다그와 같이 간절한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그 마음을 시험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말입니다만, 악마가 그 앞에 서더니만, “그대는 진정으로 법을 구하는가? 또한 그대가 진정으로 자기 신명을 바쳐 법을 구하는가?” 하고 묻자 과연 그렇다고 대답 했습니다. 그러면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를 삼고, 뼈를 분질러서 붓으로 삼고, 피를 뽑아서 먹을 삼아 부처님 진리를 적을 수 있는가? 하고 묻자 애법비구가 그 말 답변 대신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기 껍질을 벗깁니다.

 

부처님 경전의 표현을 보면 마즉멸신魔卽滅身이라, 최상의 진리를 적으려고 하는 사무친 마음으로, 피부를 벗겨 종이를 만들고, 뼈로 붓을 만들고, 피로서 먹을 만든 그 순간, 그냥 악마는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마즉멸신이라 악마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악마나 번뇌나 똑 같은 풀이입니다. 자기 몸을 바쳐서 진리를 구하겠다는 그 마음, 그 마음만 사무치면, 다시 말해 아집我執만 아상我相만 떠나면 일시에 진리는 빛나옵니다. 마구니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한 생각에 극락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일념돈생一念頓生이라, 한 생각 사무치면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와 같이 비약할 수 있습니다. 심상불시心想佛時, 우리 마음이 부처님을 생각 할 때는, 부처님의 무한 공덕 하고 바로 통로가 생깁니다. 그런 통로를 통해서 사무친 마음으로 성불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공부가 많이 있으나 역시 요긴한 공부는 부처님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이 생각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드나 주문을 외우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인 우리 마음의 실상인 부처님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문을 외나 염불을 하나 화두를 드나 모두가 다 방금 말씀처럼 우리 마음에서 순간 찰나도 부처님 마음을 안 여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안 여의면 본래 부처인지라 순간 또는 다음 순간 또는 늦게 빠르게 성불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제가 불자는 부처님을 안 떠나기가 어렵습니다. 제일 쉬운 것이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을 외우면 자기도 모르게 부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생각과 생각에 딴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나하나의 사건 하나하나의 모든 일을 부처님의 진리에 비추어 해결하는 그런 태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저만치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어떤 것이나 부처 아님이 없는 것을 재인식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순간도 안 떠나는 공부, 이 공부를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겁니다. 즉 염불 하는 것입니다. 제일 쉽고도 제일 빨리 성불하는 공부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간혜지乾慧地, 바싹 마른 지혜가 아니라, 영원적인 생사해탈의 지혜, 부처님의 무한 공덕을 내 공덕으로 하는 지혜를 얻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