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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8. 시국 선언 소참법문(1987년 6월 27일)

8.1987.06.25 소참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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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말씀 올립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십니다만 우리나라 세태는 지금 지극히 혼란스런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때는 역시 우리 불자로써 수행자로서의 어떤 확고부동한 신념이 없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기 앞서서 우선 우리 공부에 관해서 몇 말씀 하겠습니다만 육조六祖혜능(慧能 618~907)대사 밑에 다섯 위대한 법사法師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 청원 행사(靑原行思 ?~740) 선사 다섯 분 가운데도 이 두 분 문선門禪들이 가장 번창도 하고 후대 영향도 끼쳤습니다.

 

헌데 남악 회양선사 밑에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선사 마조 도일 선사가 아주 위대해서 그분의 법제자가 많이 있었고 또, 청원행사 선사 밑에는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 그분이 계셔서 법당을 세우고 그래가지고서 법을 폈습니다. 그래서 마조 도일은 강서지방 양자강의 서쪽지방에 계셨고, 석두 희천스님은 강남지방 즉 중국의 양자강에 있는 봉정호 남쪽 지방에 있기 때문에 호남이라.

 

동정호의 호수라는 호자 하고 남녘 남, 그래서 호남이라 말입니다. 호남 강서 나누어서 서로 피차 법을 날리기 때문에 공부하는 분들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적당한 스승을 골라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강호라, 강호란 말은 지금 천하란 뜻으로도 쓰이고 또는 학문적인 여러 가지 학해學海, 학문적인 여러 가지 경계에도 쓰이고 합니다만 아무튼 그 강호제현江湖諸賢이라, 강호란 말은 그때부터 나온 말입니다.

 

아무튼 그 당시에 그러한 위대한 법사 밑에서 공부 한 것인데 우리가 주로 영향을 주로 받는 것은 마조 도일선사 밑으로 내려온 법의 계통으로 해서 영향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지금 태안사 여기도 역시 마조 도일 밑에 가서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선사, 또는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선사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선사 세분이 계셨는데 여기 동리산 태안사 문중 이것은 서장 지산선사 밑에 혜철국사(惠哲國師 785~861)가 법을 배워가지고서 동리산桐裡山을 계승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도일 선사 그 법선法禪으로 내려온 셈이지요. 그러나 한국불교는 통 불교인지라, 어느 한 가지에 치우쳐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계통만은 그럽니다. 헌데 마조 도일 선사 밑에 가서 위대한 법사가 또 한분 계시는데 그 분은 대매 법상(大梅法常 785~805)이라 대매법상이란 분이 있는데 이분은 고집도 세지만 하여튼 위대한 법사입니다. 이분이 마조 도일선사 밑에 가서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닛고?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렇게 물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조 대답이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말입니다. 앞에 시는 이것이란 뜻이고 심시불心是佛의 뒤에 시는 바로란 뜻입니다. 심시불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한테 불성이 있다 생각 할 때는 내 마음 저 밑에 구석에 있는 것이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마음하고 굉장히 동떨어지게 생각 합니다. 사실은 그와 같이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 바로 지금 남도 미워도 하고 남을 사랑도 하고 또는 옹졸한 마음도 내고 그런 이 마음 바로 그때는 부처란 말입니다.

 

허나 지금 옹졸한 마음을 내고 남도 미워하고 그런 좁아진 그 마음만 부처가 아니라. 불심이라는 우주적인 광대한 마음, 우주를 다 포섭하고도 남음이 있는 그런 광대한 마음 이것이 본마음인데, 본마음 자리를 잘 못 쓰기 때문에 우리는 남도 미워하고 또는 예뻐도 하고 그런 옹졸한 마음을 품는다 말입니다. 즉 잘못 봐서 망령을 부리는 미움 사랑, 이런 좁은 마음인 것이고 허나 그 마음도 역시, 이 마음 떠나서 불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 본체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심시불心是佛이라. 그 법상스님도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마음도 꽤 맑은 분인지라 그 한마디에 그냥 마음이 확 열려 버렸습니다.

 

역시 공부란 것이 애쓰고 해야 만이 어느 계기에 가면 마음이 열립니다. 애쓰고 안하면 그런 계기를 만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전생에 선근도 필요하지만 금생에 애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야말로 복숭아꽃 보고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향음스님 모양으로 대막대기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 듣고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계기는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많이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애쓰고 닦을 때 마음이 정화되고 업장이 녹아지고해서 그런 계기를 잡아서 우리가 깨달아버린다 말입니다. 그래서 대매법상도 마음이 확, 열려 버렸다 말입니다.

 

그러나 확 열린 그걸로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해오解悟와 증오證悟, 우리 공부인들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치로서는 아, 그렇구나! 하더라도 과거 누겁累劫으로 지어 내려온 그런 습기 업장 또 금생에 우리가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못 생각하고 그런 업장이 우리 잠재의식에 박혀있다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느낀다 하더라도 정작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무한의 그런 공덕, 부사의한 공덕은 발휘하려면 그때는 우리가 오랫동안 수행해서 그런 습기를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때는 증오證悟입니다.

 

법성法性을 증명해야 비로소 증오입니다 경망한 사람들은 보통 해오만 해가지고 공부가 되었다 해버린다 말입니다. 그래 버리면 교만해지고 괜히 증상만增上慢 내어가지고 빨리 도인 되어서 대우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자기도 그르치고 남도 잘 못 이끌어가는 계기가 되겠지요, 마치 한 소경이 걸어가다가 같이 합류하는 거와 똑 같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대매스님은 그와 같이 마음이 열렸지만 겸허한 사람이고 신중한 분이기 때문에 오랜 동안 보임수행을 많이 했습니다. 보임수행 끝에 그때는 확철대오廓徹大悟 해서 참다운 증오를 했다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법성을 증명해서 소위 시공을 떠나고 인과율을 초월해서 참다운 도인이 되었다 말입니다. 헌데 또 한분 스님네가 그 마조 스님한테 가서 물었습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대매 스님한테 심시불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 했으니 응당 그 스님에게도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할 법한데 그때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딴 스님한테서 그런 말이 나왔으면 모르거니와, 같은 스님한테서, 그 대매 스님한테는 심시불心是佛이라 해 놓고서 또 딴 스님네가 물으니까 그때는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이와 같이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은 이제 역시 그 대매 스님도 위대한 도인으로 해서 정평이 있는지라 그 말 듣고서 대매 스님한테 갔습니다. 가서는 마조 스님께서는 그전에 화상한테는 그와 같이 심시불이라고 말씀했지만 저한테는 비심비불이라고 법문의 각도가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때 대매법상 스님이 하는 말이 마조 그 노장이 어떻게 말했기로서니 지금 나는 심시불만 지키고 나간다. 이렇게 해서 자기 지론을 굽히지 않는다 말입니다. 헌데 그때 비심비불로 법문을 들은 그 스님이 나중에 도인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가는 사기에 없어놔서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면 어떻게 마조스님 같은 그런 위대한 도인이 어느 스님한테는 시심시불이라 해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말씀하고 또 어느 스님한테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와 같이 말씀 했던가. 우리는 그걸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비록 마음이라 해도 마음이라는 것이 원래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이름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양이 없는 생명의 실체를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지 원래 마음이란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부처란 무엇인가 부처란 것이 우주의 근본 생명 우주 자체의 생명을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지 원래 부처라고 이름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어떠한 것이나 우리가 따지고 보면 개념 이것은 우리의 의식 활동이기 때문에 벌써 의미가 제한 돼버린단 말입니다.

 

허나 총명한 사람들은 그런 제한된 의미를 받지만은 결국은 제한된 의미를 초월해서 무제한적인 실상까지를 파악해 버립니다. 분별시비를 좋아하고 미련한 사람들은 그냥 무슨 말하면 말에만 그냥 국집局執해 버린다 말입니다. 국집하면 우리 마음은 좁아집니다.

 

따라서 마조스님께서 심시불心是佛이라 마음 그것이 진짜 우주의 실상생명이고 또는 부처 그것이 바로 마음인 동시에 천지우주의 근본 실상생명인 것을 알아버린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삼스럽게 문제가 없겠지요. 허나 마음을 꼭, 이것은 내 마음이다 너 마음이다 자타自他를 구분하고 또는 불성이 우리 중생한테만 있다 또는 동물한테만 있다 이렇게 불성을 그렇게 제한을 시킨 그렇게 제약을 해버리는 그런 사람한테는 응당 그때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말해야 그런 착심著心을 끊을 수가 있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말하던지 간에 우리는 그런 문자나 그런 형상에 끄달려서는 안 됩니다. 부처나 마음이나 결국은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다 말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라 원래 생겨나지 않고 원래 멸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고 또는 부증불감한 그 실체 이것이 하나의 진리고 이것이 가자假字해서 이름 붙여서 마음이요, 부처요, 실상이요 하는 것이지 원래 그런 이름이 별도로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조 스님께서 그런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해서 그 사람의 근기 따라서 저 사람이 마음이 부처라는 착을 하면 비심비불이라고 말씀했겠지요. 대매법상 같은 그런 마음이 툭 틘 사람들은 마음이라 하나 부처라 하나 그걸 통해서 광대무변한 실상을 파악 하니까 그런 분한테는 그와 같이 보통 씌어 있는 그런 말씀을 했겠지요. 그런 것을 생각해서 어떠한 것이나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방법이나 집착을 말아야 합니다. 아집 법집이란 것은 이것은 하나의 번뇌의 덩어리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셔서 공부에 열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시국이 그야말로 참 어떤 분들은 산중에서 공부하는 우리들한테 굉장히 불편한 말들을 많이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지만 우리 같은 승려끼리도 공문까지 내어가지고 이런 때 산에 죽치고 참선하는 그것이 부처님 일인 것인가. 중생과 더불어서 아파야 할 것인데 중생은 아프다고 아우성치고 몸부림치는데 그렇게 앉아서 편안히 공부만 해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이 공문화 시켜서 문서로 해서까지 온다 말입니다. 그러면은 우리는 과연 그네들의 지적한 바와 같이 과연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기만 좋자고 공부하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는 생각을 먼저 일으켜야 합니다. 현재 부처님이 계신다 그러면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달마나 또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이나 그런 정통조사는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는 임란(壬亂 1592~1598) 때 진묵대사(震默大師 1563~1633)나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나 그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그 분들은 부처님 법을 바로 알고 바로 행동한 분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동도 역시 시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분들의 행동 강령을 과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시기에 따라서 약간 적용 시키는 그런 면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근원 정신은 조금도 우리가 변동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정체를 모르고 또한 경계를 잘 모릅니다. 허나 인간성 문제는 일반 사회인 보다는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깨달아서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못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이나 정통조사의 가르침 따라서 사람 마음이 무엇인가 우리는 다 짐작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비록 우리 마음이 지금 현재 어느 누구 마음이나 범부 마음은 여러 가지 모순도 많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부조리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영원적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은 다 있습니다. 살인 죄인이나 어떤 망나니 누구던가에 지금 쓰고 있는 현상적인 마음은 모순이 있는 것이고 여러 가지 나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 마음 즉, 기왕이면 좋은 일 하고 싶고 기왕이면 남한테 칭찬 받고 싶고 기왕이면 정치도 바로 하고 싶고 이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의 버릇 때문에 좋은 마음이 묻혀 버려서 그것을 제대로 발휘를 못할 뿐입니다. 우리 부처님 법을 편 분으로 해서 위대한 아소카 왕이 있습니다. 아소카왕(재위 BC 268~BC 232)은 부처님 열반 든 후로 해서 삼백년 뒤에 나온 분입니다. 그분은 맨 처음에는 굉장히 폭군이란 말입니다. 세계 역사상 네로 황제가 있고 하지만 폭군으로 해서는 아소카왕 같이 처음에 십년동안에 한 그런 잔인한 폭군은 없었습니다. 생지옥을 만들어 놓고서 사람을 생지옥에다 넣어 죽이고 또는 불태워 죽이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 자기 형제간도 벌써 십여 명이 넘었으나 그 십여 명을 거의 다 살해 했다 말입니다. 한 사람 남기고서 그런 잔인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제수[목건련자제수]라 하는 스님 만나서 그 당시 위대한 도인이지요. 스님 만나서 그 스님 법문 듣고 마음이 회심했다 말입니다. 마음이 회심해서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저 이집트까지 불교를 홍포를 시켰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난 곳은 이스라엘 아닙니까.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집트까지 홍포를 시켰습니다. 즉 이란 이라크 지방도 다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팔만사천 탑도 세우고 하여튼 그 공로가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폭군도 아소카왕 같은 폭군이 없지만은 또 성군도 또 아소카왕 같은 성군이 유사 이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걸 본다 하더라도 인간성은 신뢰해야 합니다. 조금 나쁘면 그 사람을 나쁜 사람 만들어 가지고서 저놈한테는 조금의 선근도 없다 그럽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 순자(荀子 BC 300) 같이 성악설性惡說을 부르짖고 한다면 모르지마는 성자란 것은 보통은 석가모니 같은 그런 위대한 지위까지 미처 못 갔다 하더라도 맹자(孟子 BC 372~ BC 289)만 두고 보더라도 벌써 성선설性善說이란 말입니다. 인간성은 선하다고 그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역시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사람 마음을 대한다고 생각할 때는 인간의 마음이 원래 선량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특히 이렇게 혼란스러울수록 자기가 밉다고 해서 꼬라박아서 그 사람을 나쁜 사람 만들 것이 아니라 역시 저 사람도 똑같이 나와 더불어서 불성이 있고 완전무결한 길을 갈수가 있는 그런 사람이란 것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앙굴마가 외도 가르침을 듣고서 구백구십구 인의 목을 자르고 했지마는 부처님 따라서 부처님한테 귀의해서 한 마음 돌이켜 얼마 안가서 그는 도인이 되었단 말입니다. 사람을 개인적으로 구백구십구 인을 죽였다하니 물론 과장도 있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런 포악무도한 사람도 자기 어머니까지도 죽이려고 안했습니까. 그 사람이 한 마음 돌이켜서 도인 되었다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인간성을 우리가 신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성을 신뢰하는 이것이 우리 불자의 도리입니다. 인간성을 신뢰 않으면 그때는 불교인이라 할 수가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불자는 어떠한 정치 단체나 거기에 가입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런 사회의 몽환포영夢幻泡影인 내내야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 누가 부자가 되고 가난하고 말입니다. 좀 핍박 한다고 안 받고 모두가 몽환포영 아닙니까. 몽환포영을 볼 줄 알아야 그래야 불교인입니다. 사정견四正見이라 객관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부정, , , 무상입니다. 무아입니다.

 

우리가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우주실상을 본다 할 때는 그때는 바로 우주가 일미평등한 화장세계지 마는 거기까지 못가서 객관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 객관적인 정견으로 본다고 할 때는 부정이요, 더럽고 또는 고요 또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 입니다. 우리 몸뚱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가 청정한 곳이 한군데나 있습니까. 어머님 배안에서나 또는 나와서나 현재 우리 창자나 눈곱, 콧물 또는 침, 오줌, 똥 우리 몸 어디에 청정한데가 있습니까.

 

냉정히 본다 할 때는 결국은 이것은 하나의 부정법이라 말입니다. 또는 인생고라. 인생은 그야말로 개시고皆是苦입니다. 생노병사라는 한계 상황에 이르러서 우비고뇌憂悲苦惱. 또는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 또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 또는 원수와 만나는 고 말입니다. 이런 사고팔고四苦八苦를 위시해서 다 결국은 고 뿐입니다. 바로 못 본 사람들이 인생은 낙이다. 조금 부정스러우면 책임은 남한테 묻는다 말입니다. 자기는 책임 없다 합니다. 못사는 것도 결국 부모책임 또는 정부책임 남 책임입니다.

 

우리 불교인이란 것은 자업자득이라 우리가 적어도 그런 인과를 모르면 불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불교의 근본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사회를 그렇게 봐야지 이따금 대학교수도 만나고 학생들을 상당히 많이 만납니다마는 불교를 믿는다면서 그분들 말 들어 보면 내내 결국은 따지는 것은 상대적인 차원이란 말입니다.

 

인과라던가 아까 말씀마따나 고공무상 무아나 그런 부처님의 법 그런 객관적인 법을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볼 때에 어디가 무상 안한 것이 있습니까. 결국은 무상이란 말입니다.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주를 하나의 화장세계 하나의 일미평등한 불세계佛世界로 안 본다 하더라도 그렇게 보는 것은 그것은 도인의 경우인데 우리 중생이 과학적으로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아까 말씀처럼 부정이요 또는 고, 무상이요 무아란 말입니다. 따라서 지성인들은 적어도 부정이요 고요 또는 무상이요 무아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전혀 없이 즉흥적으로 꼭 일반 속인들이나 시정의 부인들이나 좋으면 좋다하고 느끼는 그런 견해를 일반 지도인들이 가지고 있다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거기서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저 같은 말을 학교나 강의실에서 한다고 할 때는 학생들에게 각목을 맞을 것입니다.

 

허나, 그런 교수들이나 정당한 사람들은 설사 학생들한테 각목을 맞고 쓰러진다 하더라도 소신대로 말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들 말씀이 그러니까요. 예수님이 군중들이 예수님을 송환해서 유대의 왕을 삼으려 했습니다. 그때에 왕자의 것은 왕자에 돌리고 내가 나온 것은 진리를 위해 나왔다 진리를 증거하고 진리를 위해서 나왔다 하면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길을 갔다 말입니다. 십자가로 갈 줄 번연히 알면서 왕자의 갈 길을 자기는 포기했다 말입니다. 성자는 이렇게 판단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 현상을 석가모니께서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생각 해 보면 알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활연대오해서 우주를 일미평등한 화장세계로는 못 본다 하더라도 적어도 과학적인 견해에서 부정이요, 모두가 우리 몸 이것은 더러운 것이고 또는 인생이란 것은 모두가 인생고人生苦의 하나의 구현이요 또는 무상이요 무아요 이것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낀다 그러면 지금 사회적 문제에 관해서 정치인들은 정치인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냥 안다 말입니다.

 

과학적으로만 보더라도 내가 본래 없거니, 내 소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권력이나 어떤 지위나, 어떤 물질이나 그런 것은 우리가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정견四正見 부정, , 무상, 무아, 사정견으로 볼 줄 알아야 그래야 지성인이고 더군다나 불교인들은 그걸 초월해서 화장세계란 말입니다.

 

비록 지금 현재 하나의 살인 죄인이 있다 하더라도 살인죄인 역시 은승창열은隱勝彰劣恩이라 내내 지금 살인 죄인도 역시 바로 보면 결국은 부처인데 부처가 그 졸렬한 나쁜 점을 보이고서 좋은 점을 숨기고서, 우리한테 지금 법문하는 것입니다. 살인 죄인은 살인죄인대로 법문하고 또는 하나의 구데기는 구데기 대로 법문하고 말입니다. 또는 감옥에 있는 교도관들은 그들대로 법문하고 화엄경53선지식 보십시오.

 

바로 보면 결국은 선지식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처럼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견해, 인생 이것이 더러운 것이고 사람 이것이 더러운 것이고 인생이 고에 충만한 것이고 인생이 원래 무상한 것이고 따라서 이것이 라 할 것이 없이 나와 남이 그때는 차이가 없다 말입니다. 나와 남이 단절이 안 돼 있습니다. 결국은 연속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나와 남이 연속이 되어 있거니 나를 위해서 남을 희생 하겠습니까,

 

그런 적어도 사정견을 가지고서 우리가 기분적으로 감정대로 움직일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견해 예수님의 견해 또는 공자님의 견해 그런 성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류가 없다 말입니다. 지금 저 간디가 인도에서 대영을 운영해서 항쟁 했습니다. 그런데 간디는 그와 같이 항쟁 했지만 꼭 진리를 앞세웠던 것입니다.

 

진리를 앞세우고 애쓰고 했지만은 자기는 진리의 화신이 되어서 체험을 하고 체현은 못 시켰지만 그래도 역시 군중이 모여 놓으면 군중심이란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백 명이면 백 명 모인대로 천명이면 천명 모인대로 차근차근 군중은 더 거칠어 갑니다. 만 명쯤 모아 놓으면 그때는 안중이고 뭣이고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간디같이 하나의 성웅도 군중집회를 모여 놓으면 나중에 가서는 서로 싸우자 그러고 몇 십 명은 죽고 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군중집회란 것은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진리에 안 떠나는 생활 진리에 맞는 생활 또는 우리는 그런 몽환포영夢幻泡影은 뛰어 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여기에서 있다 하더라도 우리 생활은 지금 스스로 불성을 개발하는 이것이 우주를 초월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내 불성佛性과 남의 불성이 둘이 아니거니 내 불성을 정화하면 그때는 벌써 그대로해서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자기 자성을 개발하고 자기자성을 정화 시키는 그 작업 또는 모든 중생의 불성을 개발시키고 또는 모든 중생의 성불을 촉발시키고 조성하는 그런 작업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 이것만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생명을 걸고서 가장 위대한 작업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부심 밑에서 하고 있는 이것이 일부 불자들이 아무 필요 없이 중생과 더불어 아파하지 않고서 자기만 위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가장 중생을 아파하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하는 이것이 인류의 참다운 영원한 복지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