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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9. 가장 행복한 세계가 화장세계입니다. (정기법회 법문 1987.7.5)

9. 1987.07.05 태안사 정기법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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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처님의 법이 평등무차별해서 원래 차별이 없는 것인데 오늘 이 자리는 이 사람은 이와 같이 높은데 앉아서 편히 지내고 있고 또는 자리가 없어서 서서 계시는 분도 계시니까 제 마음이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이상적인 행복스런 세계를 추구해 마지않습니다. 그 사람의 생활 방법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행복을 구하는 마음은 똑 같습니다. 이러한 행복스런 세계를 우리 불교에서는 화장세계華藏世界라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즉 조금도 그런 오염도 없고 또는 조금도 죄악도 없고 차별도 없고 평등한 또는 자유스러운 진리에 입각한 여법한 사회가 진리에 맞는 그런 사회가 이것이 화장세계입니다. 화장세계를 우리불교에서 또 다른 이름으로 해서 극락세계라 조금도 그런 고통이 없는 안락이 원만 구족한 그런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서는 밀엄국密嚴國이라 이것은 어떤 뜻이고 하면은 비밀스러운 즉 다시 말하면 그런 신비 부사의한 우리 중생의 지혜로 해서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그런 공덕이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자비도 한도 끝도 없이 충만해 있고 또는 지혜도 마찬가지고 여러 가지 공덕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것이나 간에 완전무결한 사회, 이러한 신비 부사의한 사회가 이것이 밀엄국이라 또 불경에서 딴 이름을 들어 보면 청정광명처淸淨光明處. 조금도 오염도 없고 또는 영원한 진리의 광명이 충만한 그런 나라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이상세계를 이렇게 저렇게 불경에서 말씀을 많이 합니다. 화장세계라 마치 연꽃같이 조금도 오염되지 않는 그런 세계 또는 행복이 사무친 그런 극락세계 또는 일체 공덕을 다 갖춘 밀엄세계, 또는 불성광명이 우주에 편만遍滿해 있는 없는 데가 없이 충만해있는 그런 세계니까 청정 광명처라 이와 같이 말씀을 합니다.

 

이런 세계는 지금 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세계는 미래에 있고 현재 오지 않은 세계가 아닙니다. 또는 과거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청정 광명처 또는 극락세계 이것은 과거도 분명히 존재 했고 또는 바야흐로 현재 역시 존재하고 있고 미래 역시 존재 하는 것입니다.

 

즉 영생사회라 말입니다. 극락세계나 밀엄국이나 청정광명처나 또는 화장세계나 이런 세계는 영생사회입니다. 있다 없다는 사회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잘 못 생각해서 바른 견해를 못 가졌기 때문에 이런 세계를 맛을 못 본다 말입니다. , 감견感見을 못합니다.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 중생의 마음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보면 중맹모상衆盲摸象이라 여러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진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일반적인 비유에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마는 가사, 그 코끼리를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말할 것이고, 코끼리 배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반구半球와 같다고 말할 것이고 이와 같이 소경들의 코끼리의 전모, 전신을 못 보고서 자기가 만진대만 따라서 자기 소견을 낸다 말입니다. 따라서 코끼리가 뭣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는 그런 사람들은 각기 서로 자기 의견대로 고집을 해가지고서 싸움도 하고 할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삶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이러한 중맹모상이라, 뭍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져서 따지는 견해와 같이 아집과 독선을 면치 못합니다. 우리 중생은 모든 사태나 사물의 본바탕을 못 본다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 문제에 있어서 상식적으로 생각을 우선 합니다. 가사 사람 몸도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얼굴이 잘나고 못나고 우리가 보통 느끼는 이것은 상식적인 인간의 그런 견해가 되겠지요.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서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는 단지 얼굴이 잘나고 못나고 그런 것보다도 그 사람 몸이 어떻게 어떠한 원소로 해서 구성돼있는 것인가 그 사람 생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가 그와 같이 해부학적이나 분석학적으로 사람 몸을 점검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적인 판단도 있는 것이고 허나 앞서 처음에 말한 상식적인 표현, 즉 말하자면은 그 사람 얼굴이 좀 잘나고 못나고 늙고 좀 덜 늙고 말입니다. 그런 정도의 것이나 또는 과학적으로 각 원소가 모여서 한 세포가 돼있는 그런 사람, 이런 견해나 이러한 것은 인간의 전모를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모를 바로 못 보는 것은 역시 그러한 옅은 견해로 해서는 본 근원을 못 본다 말입니다. 오직, 철학적이고 존재적인 그러한 견해만이 즉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그런 견해만이 인간을 참답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참된 발견이란 말입니다.

 

, 우리 인간이 상식적이라던가 또는 과학적인 분야에서는 내가 무엇인가 하는 인간의 자아自我를 참답게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 철학적인 깊은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실은 사람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잘 모릅니다. 그걸 잘 모르기 때문에 상식적인 견해 또는 과학적인 견해 그것만 가지고서 우열優劣을 따지고 사회나 여러 가지 현상을 따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지금 여러 가지 우리나라, 우리 국민이 행운이 도래해서 활짝 열려있는 그런 복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서 역시, 각기 구구 합니다. 이렇게 된 데는 어떤 사람이 공이 많다던가 이것은 전적으로 누구 힘이라던가 이렇게 한 가지만 가지고 따집니다. 이렇게 되면 아까 말씀 마따나 상식이나 과학적으로 밖에는 사태를 모르는 그런 견해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바른 견해인가 이것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그런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같은 종교철학 가운데도 부처님 가르침 같이 무가정의 원리라 가할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원리로 해서 말씀한 가르침은 없다고 생각 합니다. 부처님의 견해로 해서 이러한 어떤 사태를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인연생이라 좋은 것도 인연생 나쁜 것도 인연생 개시, 모두가 다 인연생입니다. 무수한 인과 연이 합해서 하나의 사태가 딱 돼있다 말입니다.

 

사람이 누가 죽었다 하면 죽은 그것은 하나의 원인만이 아닙니다. 가지가지의 종종 무변의 그런 원인인 연과 인이 합해져서 그러한 죽었다하는 사태가 이루어졌다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이 개방된 분위기에 지내는 것 역시 이것은 어느 한 사람 또는 어느 한 단체 그것만의 공로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과 연이 무수무량의 인과 연이 합해져 있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천지우주의 일체 중생의 여러 가지 생명력이 같이 곁들여져 있다 말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우리가 지금 활짝 열려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든 원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넓은 큰 사태뿐만 아니라 하나의 풀포기라 하더라도 이 앞에 지금 여러 가지 화초가 있습니다마는 이런 꽃 한 송이 역시 다만 하나의 원인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태양기운 물기운 또는 땅기운 나아가서 천지 우주의 모든 기운이 직접 간접으로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걸 모르고서 어느 한 가지만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까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 합니다. 나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아까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비록 우리중생이 미처 지금 다 수용은 못하고 느끼고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천지우주는 이것은 바로 극락세계. 화장세계란 말입니다. 옛날 미개할 때는 이렇게 저렇게 우리가 올라가서 법문을 알았지마는 지금은 아주 개명된 사회인지라 개방된 사회인지라 부처님 범문도 역시 가장 고도한 법문을 단박에 알아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지금 바쁜 때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 분들은 총명한 분들입니다.

 

즉 우리 중생은 상식적으로나 또는 중생의 여러 가지 분별시비로 보는 것이니까 미처 바로 못 보고서 극락세계를 극락세계인줄 모른다 말입니다. 허나 우리 마음이 정화가 돼서 참다운 마음 본래 마음을 가지면 바로 이 사회에서 극락세계를 희구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는가 우선 우리 인간의 마음을 한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 불교에서는 열 가지 경계로 우리 인간의 마음을 구분을 합니다.

 

제일 나쁜 마음 제일 못된 마음은 지옥 같은 마음 남을 미워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그런 모질스런 그런 마음 그런 마음 이것은 지옥 같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 쓰는 순간 그 사람 마음이 지옥 같은 것이고 또는 그렇게 마음 씀으로 해서 그 사람 죽으면 꼭 지옥가고 마는 것입니다. 방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나 내세에나 분명히 지옥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조금 나은 마음 그 마음은 아귀 같은 마음이라 아귀 이것은 욕심만 내는 자기 외에는 모르는 그런 귀신이 아귀 아닙니까. 아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보다 좀 나으면 그때는 축생 같은 마음이라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는 지혜가 없어서 어두운 지혜 때문에 금생에 사람 몸 못 받고 또는 천상도 못가고 그냥 개나 소나 돼지 그런 몸 받았다 말입니다.

 

그 보다 나은 마음은 무엇인가. 아수라 같은 마음 아수라라는 것은 서로서로 악쓰고 우리는 지난 며칠 전에 그와 같이 우리 사회가 온통 아수라 같은 아수라장 같은 그런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싸움 좋아하고 서로 때리고 화염병 던지고 말입니다. 이런 싸움 바닥 이것이 아수라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 보다 나은 마음은 우리 인간 같은 마음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처 같은 마음 단박 냈다가 그냥 순간 찰나에 나쁜 마음 된다 말입니다.

 

인도의 아소카 왕은 인도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성군 아닙니까. 세계 역사 가운데서 아소카왕 같은 성군은 없었다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소카왕도 맨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운 폭군이었습니다. 생지옥을 만들어 사람을 죽게 했다 말입니다. 그러나 제수[목건련자 제수]라던가 또는 혜연 비구나 그런 훌륭한 스님네 만나서 마음을 딱 돌이켰습니다. 그다음부터서는 한번 돌이킨 다음에는 인간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자비롭고 지혜로운 그러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사천 탑을 세우고 또는 가지가지 그런 불법의 홍포를 해서 빛을 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인 쿠나라는 굉장히 얼굴이 잘났습니다. 어떻게 눈이 맑고 예쁘던지 한번 그 사람 눈을 본 사람은 마음이 빨려간다 말입니다. 따라서 아소카 왕의 후궁 한 사람이 자기가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 쿠나라한테 반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후궁이 그 쿠나라 태자를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나 쿠나라는 하도 마음이 성실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인지라 자기 아버지 아내인 후궁한테 마음이 끌릴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래 점잖은 말로 타일러서 오온은 무상한 것 오온은 허무한 것을 말해서 설득을 시켰습니다. 허나 그 말을 후궁은 듣지 않고서 음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저렇게 복잡한 간계奸計를 내어가지고 사람을 시켜서 쿠나라 태자의 안구를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소카왕은 그것을 알 턱이 없지요 나중에 몇 년 뒤에야 아소카왕이 자기 사랑하는 아들 쿠나라의 안구가 자기 후궁, 아내인 그 사람 때문에 빼앗긴 것을 알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소카왕이 진노해 그냥 후궁을 죽이려고 하니까 그때 쿠나라 태자가 결사하고서 말렸습니다. 제가 안구를 빼앗긴 이것은 제 업장인 것이지 업장을 제가 받는 것이지 그 후궁의 허물이 아닙니다. 다 전생의 인연을 잘못 지어가지고서 그 나쁜 일만 했을 뿐이지 오직 제 안구를 빼앗긴 것은 제 허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한테 말씀 드렸지마는 아소카왕은 듣질 않았습니다. 감옥을 만들어 가지고 후궁을 집어넣고 불 질러 버렸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애초에는 폭군이 되었다가 그런 훌륭한 분들 만나서 위대한 성군이 되었다가 또 마음이 한번 진심이 발동하니까 자기 아내도 이렇게 태워 죽였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무상하기도 하고 요물스런 것입니다. 즉 우리 마음은 아까 말씀처럼 사람 같은 마음도 있고 또는 그 보다 더 좋은 마음, 사람 같은 마음은 겨우 오계五戒, 죽이지 말고 또는 훔치지 말고 삿된 음행을 말고 거짓말 욕설 이러한 말도 하지 말고 술 먹지 말고 하는 오계정도 지키는 그런 우리식, 식이 있으면 그때는 사람 몸 받는다 말입니다. 허나 사람 같은 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그냥 제한 받지를 않습니다. 우주까지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천상 마음입니다.

 

천상 마음 가지면 금생에도 천상 같은 복락을 누리는 것이고 또는 죽어지면 그냥 우리 식이 천상 몸을 받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나은 마음은 그때는 성문聲聞이라. 지혜가 별로 수승하진 않지만 부처님 법문 듣고서 이치를 깨달아버립니다. 또 그다음에는 그보다 더 수승해서 부처님 법문 안 듣는다 하더라도 그냥 인연 따라서 우주의 도리를 안다 말입니다. 그것은 연각이라.

 

또 그보다도 더 높은 마음 이것은 자기도 모든 육도만행이라. 보시도 하고 또는 계행도 지키고 모든 좋은 행동은 많이 하지만은 일반 중생과 더불어서 성불의 길을 간다 말입니다. 이는 보살이라 이런 보살 같은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 마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장 구경적인 최상 마음, 이것은 부처의 마음입니다. 우주의 실상을 바로 알고 우주가 바로 자기가 돼버리고 또는 모르는 것이 없고 일체 종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부처 같은 마음 이것이 우리 본래 마음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맨 처음에 있는 지옥 같은 마음 또는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부처 같은 마음자리에 온전히 못될 적에 그때그때 쓰는 것이지 참다운 마음이 못됩니다. 참 마음은 결국은 부처의 마음, 부처 그것이 우리 본래의 마음이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 마음인 부처의 마음을 딱 가져버리면 아까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이 세계는 극락세계고 또는 연화장세계고 밀엄국이고 청정광명국이 될 것인데 우리 마음은 순간순간으로 변한다 말입니다.

 

아소카 왕이 생지옥을 만들어 가지고서 무수한 사람을 학살했을 때는 지옥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이것은 비단 아소카왕뿐만 아니라 우리 범부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범부는 여건만 되면, 조건만 있으면 당장에 순간 동안 지옥 같은 마음이 발생 합니다. 자기 어버이를 죽이기도 하고 자기 스승을 때리기도 하고 하는 것 보십시오. 그런 마음은 바로 지옥 같은 마음입니다 허나, 한 마음 돌이키면 그 마음이 또 역시 선량한 마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신임不信任 시대라 서로 믿지 않는 불신의 시대라 합니다. 무엇을 믿지 않는 것인가.

 

자기 마음의 본바탕도 믿지 않고 또는 상대의 본마음 바탕도 믿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의 본바탕을 믿는다 그러면 내가 지금 나쁜 짓을 좀 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본래가 부처구나 내 마음은 영생 할 수가 있고 일체 공덕을 갖추고서 천지우주를 오직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내 마음은 부처구나! 이와 같이 믿는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는 어설픈 마음에다가 자기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은 본래 자기 면목을 몰라서 지옥 같은 마음도 내고 또 축생 같은 마음도 내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나 모두가 다 본래 마음은 부처 같은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알면 아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도 불신 할 수가 없고 남의 마음도 불신 할 수가 없습니다.

 

춘추 전국시대 맹자(孟子 BC 371~289)와 순자(荀子 BC 300~230) 보십시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이라 우리 인간성은 본래 선한 것이다 이와 같이 느꼈다 말입니다. 또는 순자 같이 인간의 마음은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간직한 사람들은 남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는 기독교 신앙같이 원죄라 우리 인간은 모두가 다 그 아담과 이브의 아들로 해서 카인이 제 동생 아벨을 죽였다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진심嗔心을 내어가지고서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자기 친 동생까지를 죽인 카인의 후예다 따라서 인간 마음은 원래 나쁜 것이다 원죄가 있다. 이런 인간의 마음은 원죄로 원래 나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생관으로 해서는 또 역시 우리가 남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불신 풍조가 안 될 수가 없다 말입니다.

 

헌데, 아까 말씀처럼 지금 여기 계시는 분들은 대학 교수님도 계시고 또는 학교 교장 선생님 또는 기타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방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도 계시고 그런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또 대체로 고학력 지도층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문제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를 깊이 생각 하신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 있어서는 그냥 방편적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지금부터 거의 삼천년 전에 말씀 하신 그런 방편적인 낮은 법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바로 인간의 마음을 딱 집어서 넣을 수 있는 그런 말씀을 드려야만 시기상응時機相應 시기적절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쓰는 마음을 사람 같은 마음밖에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마음의 본바탕은 부처 같은 마음이 자기 본질인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만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리 불교 인생관은, 비로자나불이라 이것은 인도어인데 무엇인가 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우주에 두루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불교를 믿을 때는 부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마는 우리가 불타관佛陀觀을 가질 때에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한 말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선 세 가지 범주로 해서 부처님의 공덕을 말합니다. 세 가지 범주는 무엇인가 하면 법신이요 보신이요 화신입니다. 소위 불교를 믿는 분들은 법신, 보신, 화신 정도는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믿는 신앙 대상인 부처님에 대해서 개념이 서는 것입니다.

 

법신은 무엇인가 그 법신이란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인도 말로 해서, 비로자나불입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것은 광명전려, 불성 광명 생명광명이 우주에 두루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즉 법신法身이란 말입니다. 그다음에 보신報身 이것은 법신 보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신은 법신 가운데 들어 있는 일체의 공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럼 화신化身은 무엇인가 화신은 법신 보신이 일체 우주의 종종무변의 그런 현상들을 말한다 말입니다. 비교해서 말하면 여기 한 그릇의 밥이 있다고 합시다. 밥 담겨있는 밥 전체 이것은 법신입니다. 밥 그릇 안에 있는 밥만은 보신입니다. 또는 하나하나의 밥알, 낱알 이것은 화신입니다. 다시 보충해서 말하자면 불교에서 일월삼신一月三身이라 그런 비유도 있습니다. 그건 무엇인가 하면 달의 전체 모양 이것은 법신이고 달의 광명 이것은 보신인 것이고 달그림자는 화신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부처님인데 전부 한 번에 부처님의 체를 말할 때는 법신이라 하는 것이고 부처님가운데 들어있는 일체 공덕은 보신인 것이고 이러한 일체의 현상은 화신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이와 같이 장엄스런 법회가운데 있습니다마는 우리 중생은 두두물물 보면 모두가 다 이것이 화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근원은 어느 사람이나 간에 내내 그 사람 근원은 보신, 법신입니다. 이런 풀도 역시 근원은 보신 법신입니다. 이 컵도 역시 근원은 법신 보신인 것입니다. 다만 화신의 경계에서만 그때는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근본은 똑 같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근원이 하나인 것을 아는 것이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입니다. 이것이 정견正見입니다.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이 있다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이와 같이 근원적인 정견을 파악 못하면 불교를 바로 모르는 것입니다. 또는 현대와 같이 가치관이 혼란스러울 때는 부처님의 정견으로 해서 바른 가치관을 딱 세우는 것이 누구한테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비록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 근원은 내내 똑 같은 보신, 법신이란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나 어떤 사물이나 또는 유정 무정 모두가 다 보신 법신으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셋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비유해서 말씀드리자면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거품이 일어나고 파도가 일어납니다. 천파만파 파도가 일어나고 또는 몇 수억의 그런 거품이 있다 하더라도 내내 물에서 일어났거니 똑 같은 물입니다. 그와 똑 같이 우리 인간도 역시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생명은 보신 법신인지라 이렇게 화신의 경계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똑 같다 말입니다. 거품과 거품이 똑 같은 물이듯이 우리 인간도 역시 박가 김가 정가 우리 중생 두두물물 똑 같은 보신, 법신인 것인 사람뿐만이 아니라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불교를 딱 바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 가운데 법신, 보신, 화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김가, 박가, 그런 현상적인 데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근원적인 보신 법신은 똑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 참다운 자비심이나 참다운 도리 같은 것은 법신, 보신을 알아야만 참다운 자비심, 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 천지가 한 몸이다 아까 말씀처럼 성악설이나 원래 인간의 원죄가 있다 우리는 죄스런 것들이다 그럴 때는 남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어느 강도가 있다 하더라도 강도짓 하는 행동은 나쁘지만은 그것은 겉에 뜬 현상뿐인 것이고 강도 역시 똑 같은 보신 법신인 것입니다. 그 마음 돌이키면 그때 그냥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천상 갈 수 있는 복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경에서 앙굴마라가 있습니다. 앙굴마라는 아시는 바와 같이 구백구십구 인의 사람 목을 베었단 말입니다. 천사람 사람 목을 베면 도를 통한다는 외도를 알아서 그런 말을 듣고서 미련한 사람이 구백구십구 인의 사람 목을 베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천사람 째 목을 베려 하다가 천사람 째 자기 어머니 목을 베려 하다가 부처님 만나서 마음을 순간 돌이켰다 말입니다. 구백구십구 인의 목을 베었다 하더라도 마음 돌이켜서 그냥 성자가 되었습니다. 성자가 되어서 아라한 도를 성취 했습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나쁘다. 저 사람은 회심할 길이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을 불신한다 말입니다. 불신풍조를 씻는 가장 근원적인 가르침은 불교에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바로 보면 지금 나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 근원까지 본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즉시에 그 사람 가운데 있는 법신 보신이 보인다 말입니다.

 

가나제바 존자尊者란 분은 인도 분입니다. 부처님 정통법을 받으신 분이 서른세 분 33조사 아닙니까, 달마達磨스님은 28대고 육조 혜능慧能스님은 33조사 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있으나 우선 전래에 내려온 것은 정통 조사를 33분으로 칩니다. 33분 가운데서 열네 번째가 용수龍樹보살이고 열다섯 번째가 가나제바 존자입니다. 가나제바 존자는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지금과 달라서 아주 미개한 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제바 존자가 사는 나라의 왕자가 외도를 믿고서 불교를 배척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가나제바 존자가 외도꾼을 내가 최파摧破해야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온 나라가 전부 그렇게 외도에 일색 되어서 부처님법문을 어떻게 알아듣게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 존자는 자기가 지원해서 왕궁의 수위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성자가 수위守衛가 되었으니 벌써 행동이 다르겠지요.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는 것이나 슬기로운 것이 다르니까 수위가 됐지만 그 수위가 왕자의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루는 그 왕자가 하도 기특해서 그대는 어떤 사람인고하니, 일체 진리 입니다. 모두를 다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말입니다 왕자 앞에서 감히 일체 진리라, 모두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왕자가 그야말로 괘씸하게 생각 했겠지요. 그러니까 왕자가 그대가 과연 뭘 아는가’, 그렇게 말하니까 임금님께서 제 말씀을 믿지 않으시면 그냥 임금님이 신봉하신 그분들을 다 부르십시오. 저하고 말 한번 대적해보십시오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나제바 존자하고 외도들하고 같이 토론을 시켰다 말입니다. 그러나 정견, 우주의 본질을 다 아는 일체 종지를 다 아는 그런 분인지라 그냥 몇 마디 안가서 외도꾼을 최파해 버렸습니다.

 

그래도 상당이 많고 영향 있는 외도꾼들인데 그와 같은 자기 스승들이 가나제바 존자한테 무시를 당해 버리니까 무안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말입니다. 특히 그 가운데서 과도한 제자가 있었던가 앙심을 품어가지고서 가나제바 존자가 처소處所로 와있을 때 그냥 칼을 들고 와 존자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말입니다. 칼로 가나제바 존자의 배를 찔러서 몇 번 이렇게 휘저어서 그러니까 창자가 튀어 나온다 말입니다. 그때 가나제바 존자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 이것은 그대의 허물이 아니도다. 이것은 내가 숙세에 지은 업장이 칼로 되어서 나를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것도 없지만 다만 그대는 아직은 범부니까 옳다 그르다 하는 내 스승 남의 스승 하는 그런 법집法執 때문에 그대는 죄를 범했는지라 마땅히 그대는 그런 법집을 떠나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를 죽인 살인자한테 설법했다 말입니다. 법집이라 나만이 옳다 또는 내가 지키는 법만이 옳다 하는 법집을 떠나야 한다. 이와 같이 설법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역시 주변이 소란스럽게 되어가지고서 삼십 명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가나제바 제자들이 알았다 말입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원성을 부리니까 그 아픈 가운데 저쪽 구석진 밀실로 데려가서 그대가 그대로 있으면 제자한테 발견되어서 그대가 필경 죽을 것이니까 지금 저 내 처소로 가서 내가 쓰던 발우와 가사가 있으니까 가만히 도망가라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인 그 자객을 도망을 시킨 다음에 자기 본 처소에 오니까 그때는 그냥 자기 제자들이 와가지고서 스승을 죽인 놈이 어디 갔느냐고 울부짖을 것 아니겠습니까 울부짖는 그런 가운데서 그때 또 가나제바 존자가 마지막 법문을 했습니다. 제법본공諸法本空이라, 모든 법은 본래 비었도다. 우리는 이러한 제법본공이라이런 말씀은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그냥 방편적으로 믿을 때가 아닙니다. 방편적으로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방편적인 가르침에서는 기독교나 또는 이슬람교나 공산주의나 그러한 어떠한 이념을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때는 불교의 방편을 떠나버린 참다운 진실을 바로 믿어야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지금 대학 다니는 자기 아들, 딸 또는 사회의 고학력적인 여러 가지 높은 수준을 같이 비교를 하고 제의 할 수 있습니다. 제법본공諸法本空이라 제법이 본래 비었거니 제법 이것은 일체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나, 너나 산이나, 나 하늘의 별이나 모두 현상을 다 제법 그럽니다.

 

제법본공이라 제법이 본래 비었거니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반야심경에 있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오온이 비어있단 말입니다. 일체 만법을 구성한 이것이 바로 오온 아닙니까. 산이나 냇이나 사람이나 일체 존재를 구성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것이 오온입니다. 따라서 오온개공이라 오온이 다 비었다는 그 말이나 제법 본공이라 제법이 비었다는 그 말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제법은 본래 비어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중생의 본질을 못 보는 그러한 상대유한적인 견해기 때문에 내가 있다 네가 있다 하는 것이지 참다운 견해로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그냥 그대로해서 보신, 법신, 부처님으로 본다 말입니다. 나와, 너요, 이쁘고 밉다 하는 분별시비를 바른 눈으로 안 보는 것입니다. 중생이 바로 못 보니까 내가 있다 니가 있다 좋다 궂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본다고 할 때는 제법은 분명히 비어 있는 것입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우리가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이라 일체 고액을 우리가 제도한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제법이 비었다 하는 그런 바른 견해를 못가지면 인생고를 우리가 제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순을 우리가 못 끊는 것입니다. 그저, 미봉책으로 호도해서 끊는 것이지 더 근원적인 번뇌는 못 끊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분들은 비록 지금은 어렵더라도 지금은 감이 잘 잡히지 않더라도 오온이 비어있다 제법이 비어있다 바로 보면 본래 비어있다는 그 소식을 우리가 화두로 해서 꼭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이 인생의 모순을 제거 합니다.

 

제법이 본래 비었거니 무아無我라 원래 내가 없고, 제법이 있다 하니까 내가 있는 것이지 일체법이 비었으니 내가 어디가 있겠습니까. 산소가 있고, 수소가 있고 탄소가 있고 거와같이 일체 원소가 있다하니까 이런 세포가 있는 것이지 사실은 그것마저도 다 비었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것이 어디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단 우리 중생이 바로 못 본다 말입니다. 마치 어두컴컴한 길에 지푸라기가 있으면 지푸라기를 뱀으로 그릇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제법이 본래 비었거니 무아無我, 아소我所라 내가 없고 내 소유가 없다 말입니다. 내 집, 내 재산 내 밭, , 금시계가 없다 말입니다. 내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내 것이 있는 것이지 내 몸이 없으면 어디가 내 것이 있겠습니까. 제법이 비었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은 라는 것도 없고 나의 소유도 없다 말입니다. 우리는 불교를 해서 무상의 행복을 누리려고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처님말씀에서 행복을 누리려면 이것은 싫던 궂던 간에 역시 무아, 무소유입니다.

 

제법이 본래 비었다는 소식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결국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제법이 본래 비었거니 나와 내 소유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나를 해칠 것도 없고, 해침을 받는 나도 없고,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고집 때문에 나를 죽이는 자가 있는 것이고 또는 죽임을 당하는 내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거니 죽는 나도 없고 나를 죽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제자들한테 마지막 법문을 하면서 그대들은 이와 같은 참다운 법을 관찰 하고서 법 따라서 공부 할 것이지 괜스레 망상심으로 도망간 그 사람 쫓지 말아라. 이렇게 타일러서 그 자리를 정석으로 만들어 가지고서 임종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위대한 성자란 그렇게 법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법의 실상을 본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假相을 보고 도인들은 그와 같이 실상實相을 보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처럼 부처님 그러면은 우리 중생도 부처님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안 들어간 부처님은 없습니다. 개미 한 마리도 안 들어가면 그때는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천지우주를 다 총망라한 생명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우리 밖에 따로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존재가 다 거기 들어가 있어야 그래야 부처인 것입니다.

 

다 들어있는 일체지一切智 이것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부처님이 아니다. 또는 상대방이 아니다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는 부처님 가운데 있으면 부처인줄은 모른다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법신, 보신, 화신이라 우리 생명의 우리 마음의 불교의 법문가운데서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십니다만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자리가 법신인 것이고 우리 마음에 갖춰있는 공덕이 보신인 것이고 마음이 일어나는 일체 전체가 이것이 화신인 것입니다. 부처 즉 마음이고 마음 즉 부처입니다. 허나 그와 같은 본바탕을 못 보는 것이니까 우리는 바로 못 보는데서 인간만치 밖에 못 보는데서 가지가지 분별시비를 내서 사회가 혼란스럽고 자기 개인도 그만치 불행을 받는다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본래 마음자리인 법신, 보신, 화신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제 아무리 위대한 법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정작 부처가 되는 공부가 합당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본래 마음인 부처가 될 것인가? 이런데도 역시 가지가지의 수행방법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것도 방편적인 수행방법이 아니라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우리가 에누리 없이 그냥 바로 성불하는 가까운 길 우리는 바쁩니다. 바빠 놔서 사실은 복잡한 길은 우리가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가장 가까운 성불하는 길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요. 일체 만유가 본래 부처임을 딱 믿어 버려야 합니다. 안보이니까 물론 다 안 믿겠지만 일체 성자가 다 말한 것이고 또는 지금은 하나의 물리학이나 학문도 역시 일체만유, 일체 존재가 하나로 돌아가는 즉, 무엇인가 모르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물리학에서 말하는 각 분자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결국은 양이온, 음이온, 즉 양자, 전자, 이런 것이 같이 결합돼서 결합 여하에 따라서 또는 진동 여하에 따라서 결국은 각 원소의 구분이 있지 않습니까.

 

각 원소가 합해져 우리 세포가 이루어진다 말입니다. 허면 양자나 전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양자, 전자, 중성자의 본질은 사실은 아직은 다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모르지만은 결국은 물질이 아니다 말입니다. 그 무엇, 부사의한 양자나 전자나 중성자를 구성한 그 존재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 물리학에서 확실히 모르지만은 이것은 물질이 아니라 신비로운 그 에너지 그 무엇이 적당한 운동 따라서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러한 양자나 전자를 구성한 신비로운 그 무엇. 신비로운 그 에너지를 규명한 것 이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분명히 과학을 포섭하고 과학에 앞서 있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현재 과학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 사실 부처님 법문은 그러한 과학보다도 미세하고 과학의 본질을 밝혀 있습니다. 일체 존재의 가장 미세한 소립자인 양자나 전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을 구성한 순수한 순 에너지 가장 순수한 에너지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불성이란 말입니다. 이런 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처럼 법신이란 뜻이 비로자나불이라 광명변조라 하듯이 부처님의 불성 광명은 우주의 어디나 간격 없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주에 충만해있는 부처님의 광명,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장에너지 이런 순수한 생명이 모아져서 여러 가지 것들이 인연 따라서 그때그때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이런 것이 결합돼서 원소가 되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도 역시 저 구경적인 하나의 불심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일체가 다 하나의 진리 어느 것도 불성이라 하는 하나의 진리로 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지금 번뇌에 어두워서 못 본다 하더라도 내 생명의 근원 유정 무정이나 또는 어떤 것이나 간에........

 

역시 우리가 남을 불신하지 않고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상대편을 부처같이 보는 것같이 가장 순탄하고 조화스럽고, 화합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헌데 한 말씀 제가 부언해 드릴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공부를 할 때에 우리 감성적으로 공부를 지어나가는 것이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됩니다. 우리 신앙대상을 부처님을 부처님은 하나의 그 무엇이다 이렇게만 느끼고 그냥 참구할 때는 환희심이 덜 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바탕인데 부처님 가운데는 일체의 공덕이 거기 다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행복도 원만하고 지혜도 원만하고 자비도 원만하고 다 원만한 것이 거기는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말해도 다 말할 수 없는 그런 무량 지혜나 무량의 자비 행을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딱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만이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성 가운데는 그런 무량공덕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그런 공덕을 환희심으로 추구하는 간절히 흠모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치를 구한다. 하나의 도리를 구한다. 하나의 도리나 이치를 구하는 그런 냉엄한 마음으로 해서는 우리 마음이 감격스럽게 잘못 나가는 것입니다.

 

내 생명, 또는 내 고향 말입니다. 내 생명의 고향 내가 진정 돌아가야 할 내 님. 이와 같이 생각할 때는 거기에서 감격이 나옵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무량공덕 무량 환희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기 생명의 본질을 그런 환희심으로 구해야지 냥 이치로 구할 때는 그때는 우리 마음이 싫증을 내는 것이고, 또는 오래 못 간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정토경淨土經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일념왕생이라 또는 십념왕생이란 말입니다.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는 그때는 극락세계에 바로 태어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일념 십념이라, 한 생각 일순간 이런 것도 역시 무엇이고 하면은 우리가 환희심으로 구할 때는 그와 같이 그런 몇 번 안 부른 염불이 그와 같은 위대한 힘을 내서 우리 마음을 정화를 시켜가지고 비약적으로 우리 마음이 초선初禪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싹 마른 하나의 도리를 구한다, 또는 이치를 구한다 그럴 때는 우리 마음이 비약을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가 불자님들께서는 지금 바쁜지라 어려운 공부는 지금 하기가 곤란스럽겠지요. 우리같이 선방에서는 며칠이고 몇 달이고 할 수가 있으나. 집안에 계신 분들은 그런 공부를 어려운 것이니까 역시 환희심으로 우리가 부처님을 구하기 쉬운 것은 뭐라 해도 그것은 염불공부입니다. 부처님을 인격으로 구하는 이것이 하나의 환희심으로 구할 때는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어느 공부 방법을 가지고서 공부가 익어진 사람들은 그때는 할 필요가 없지만은 아직 자기 공부가 방법을 못 가진 사람들은 부처님을 환희심으로 구하는 쪽으로 해서 부처님의 명호를 공부하는 방편으로 하십시오. 그러면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구하는 부처님의 공덕을 흠모하는 그런 쪽으로 우리한테 공덕이 훨썩 더 많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름 이것은 명호 부사의라 이름 따라서 이름 가운데 가서 부사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 사람 이름같이 아무렇게나 된 이름이 아니라 부처님의 무량의 성 공덕을 다 포함하고 있는지라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그런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집안에 계신 분들은 다른 어려운 것은 할 겨를도 없는 것이고 또는 그럴만한 여건이 안 닫는 것이니까 방금 말씀대로 하기 쉬우면서도 공부가 빨리 익어지는 그런 염불 공부로 해서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번 부르면 부른 만치 부처님이 우리를 굽어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 주변에 무수무량의 신장이 많이 있다 말입니다. 고급 신, 저급 신 그런 무량의 신들도 역시 가장 존경하는 이름 가장 무서워하는 이름은 부처님 이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의 명호로 해서 쉬운 공부로 해서 원래 자성인 본래 부처인 그 자리를 증하시고서 우리 이상 세계인 극락세계 또는 화장세계, 청정광명처인 그런 자리를 우리 스스로 현상 세계에 바로 이룩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성불하시기 바라면서 말씀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