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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2. 정기법회 용맹정진 회향 법문(198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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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기법회 용맹정진 회향 법문(1987. 08.02)

 

만다라를 풀이 하면은 여러 가지 풀이가 있습니다마는 가장 간명簡明한 적합한 풀이는 성중聖衆, 즉 여러 성현의 무리들이 성중이 법계로 모여 있는 그런 도량 그것이 만다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상 모시고 있으면 불상 뒤에 탱화를 봅니다. 불상 뒤에 탱화에는 보통, 부처님이 한 가운데 계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면 양편에는 문수, 보현입니다. 그러한 보살님이 시위해 계시고 또 아미타불이 계시면 그 양편에는 관음, 세지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두 분이 이렇게 시위해 계십니다.

 

그런 영상회상의 탱화를 보면 그때는 마하가섭, 아난존자, 목건련 사리불 그런 분들이 같이 위호해 계십니다. 아무튼 성중들이 여법히 모여 있는 그 자리가 만다라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오늘 여러분들 모습을 저는 만다라라고 생각 합니다. 조금도 사심도 없어 보이고 다 불심에 사무쳐 보입니다. 우리는 45일 동안 여러모로 우리 힘을 다해서 공부를 했습니다마는 저는 그 동안에 법사님들 법문을 사정 따라서 몇 번을 놓치고서 어제야 들었습니다마는 저는 참 경탄해서 마지않습니다.

 

이것 참 잘못하다가는 우리 중노릇을 못하겠구나! 이럴 정도로 아주 훌륭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만다라 법이 여실한 부처님 회상을 말씀한 것인데 사실은 제가 아까 만다라같이 보인다는 것은 제가 느낌으로 얼핏 보는 것이지 여실히는 저는 못 봅니다. 불성을 제대로 못보고 또는 비로자나불을 우주에 충만한 무량광명을 제대로 못 보기 때문에 제가 보이는 것은 제 나름대로 보는 것이지 실은 실답게 못 봅니다.

 

어떻게 해서 만다라를 봐야 할 것인가.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이래저래 여러 가지 공부하는 방편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따지고 보면 결국은 만다라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법, 하나의 존재도 바로 보면 결국은 이것이 부처님 법아님이 없습니다. 내 동생도 역시 의미를 깊이 새겨서 바로 보고 바로 느끼면 역시 그도 부처님이고 자기 아내 역시 바로 보고 바로 느끼면 부처님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일목일초一木一草 모두가 다 바로 느끼고 바로 새기면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봐야 아까 말씀처럼 만다라를 제대로 봅니다. 즉 뭇 성중들이 모여 있다 말입니다. 우주라 하는 것은 뭇 성중이 모인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법본묘法本妙 추유물정醜由物情이라, 일체 만법은 원래 묘하니 신묘하니 조금도 오염도 없고 조금도 부정적인 것도 없이 다 긍정적이고 또는 초월적이고 상을 다 떠난 그런 것이지마는 추유물정이라 우리 중생의 망정 따라서 우리가 더럽게 본다 말입니다.

 

불교를 몇 십 년 믿었다. 공부를 몇 십 년 했다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물론 한만치는 그마만치 공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문제라던가 어떤 문제에 당해서 해석하는 생활태도 그걸 보면 그냥 불교의 참다운 진리와는 엉뚱한 해석도 하고 판단도 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어째서 그런 것인가 사태를 바로 자기가 증명을 못했단 말입니다. 이치로는 알 듯 말듯 하지만 자기 생리도 정화가 안 되는 것이고 자기 마음의 습기가 아직 못 녹아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45일 동안이나 또는 한 달이나, 삼 개월 동안이나 그와 같이 별스레 공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냥 우리는 구두선口頭禪으로 말로만해서 옳다는 것이 아니라 정작 우리가 삼매에 들어서 사물을 바로 여실히 본다 말입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라 여실히 실답게 진리 그대로 자기 마음을 본다 말입니다. 자기 마음은 무엇인가 자기 마음은 바로 부처입니다. 비록 나한테 있는 마음은 제한돼 있고 옹졸하고 좁다 하더라도 마음 본성은 바로 우주에 감싸 있습니다. 김가의 마음이나 박가의 마음이나 저 저변은 똑 같습니다. 우주가 원래 무량무변한지라 도처가 다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면 이것은 불교만이 도인만이 할 수 있는 소리다 이와 같이 말씀도 합니다마는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천상천하 어디에나 누구나가 다 유아독존입니다. 법본묘추유물정法本妙醜由物情이라 법이 원래 묘하거든 다만 중생의 망정으로 오염시켜서 본다 말입니다. 따라서 오염시켜서 안 보면 도처에가 중심이고 도처에가 유아독존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무한의 길이를 반경으로 하는 하나의 원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원의 반경이 무한하다 그러면 역시 원 크기가 무한하겠지요. 무한히 큰 원이라고 생각 할 때는 도처가 중심입니다. 석가모니만 중심이고 예수만 중심이고 한 것이 아니라 도처 어느 곳에나 중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조금도 우리가 비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당하니 우리 역시 부처님의 모든 지혜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단 우리가 아까 말한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라 여실히 내 마음을 못 본다 말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여실히 보기 위해서 모두 우리가 며칠 이고 공부도 하고 또는 삼매에도 들고 하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 그런 마음가운데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부처 아닙니까마는 마음이 곧 부처다 이러면 도저히 깊이 공부 않은 분들은 감히 안 잡힙니다.

 

어째서 마음이 부처인가. 마음 이것은 자취가 없습니다. 마음은 본래 상을 떠난 것입니다. 자타나 시비나 모든 것을 떠난 순수한 생명 이것이 마음입니다. 마음 그러면 내 마음이다. 남을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는 내 마음이다 물론 그도 마음입니다마는 그 마음 이것은 현상적인 색에 오염된 즉 말하자면 상대 대상에 오염된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 그것이 초점은 될망정 마음 전부는 아닙니다. 마음의 본성은 아까 말씀처럼 상을 여읜 라는 상 라는 상 또는 중생이란 상 또는 생명이 길고 짧다는 그런 상을 여읜 그 자리면서 많은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법사님들 법문에서 우리가 갈앙심渴仰心을 가져야 한다 아주 훌륭한 말씀들 하셨습니다.

 

헌데 우리가 갈앙심渴仰心을 가질 때 우리 마음의 공덕을 여실히 못 느끼면 갈앙심을 갖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현상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무상을 느끼고 허망 무상을 느끼고 실상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흠모하는 간절한 그런 추구심을 못 느끼면 갈앙심이 잘 안 나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보는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 집착을 많이 한다 말입니다. 사실은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다만 삼차원 밖에는 못 본다 말입니다. 어떤 존재나 내 생명이나 또는 앞에 있는 모두가 다 시간 공간이 밀접해서 결합돼서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시간은 저만치 떼어 버리고 공간성만 가지고 봅니다.

 

시간을 거기다 도입을 시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존재나 존재라는 것은 시간 공간이 결함이 안 되면 그것은 존재가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헌데 우리 중생은 시간은 안 보이는 것이니까 그냥 공간성만 가지고 있다 없다 밉다 곱다 합니다. 한번 시간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은 순간 찰나고 머물지가 않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절대 정지는 없습니다.

 

물질이 있다고 생각 할 때는 절대 정지는 없습니다. 만법유종萬法有終이라 그냥 시시각각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과거요 현재요 미래요 하지만 이것은 우리 중생이 어느 물질 따라서 지나간 것은 과거요 지금 변하고 있는 것은 현재요 아직 안 오는 것은 미래요 이와 같이 우리가 설정한 것이지 따지고 보면 사실은 과거 현재도 미래도 공간성을 떠나서는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이렇게 변해가는 것을 못 본단 말입니다. 못 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무상을 잘 못 느낍니다. 그저 몇 십 년 가서 센머리가 나오면 그때는 겨우 좀 느낍니다만 그냥 시시각각으로 일분일초로 변해가는 그런 자기 존재는 못 느낀다 말입니다. 숨 한번 내 뱉었다가 못 들이쉬면 바로 죽음인데 말입니다. 시간성을 도입할 때는 바로 무상입니다. 항상이 없습니다. 시간성을 도입할 때는 바로 무상입니다. 어떠한 순간도 우리 생명은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어떠한 순간도 우리 존재가 공간성을 뗄 수 없으니 사실은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존재도 바로 즉 공이라 색즉공이라 바로 색 바로 그것이 공인 것입니다.

 

허나 중생은 그냥 시간성을 떼어서 공만 두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냥 비약적으로 우리 본래 면목을 딱 봐 버리고 불성을 봐 버리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사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생명이란 것이 한번 흘러 내려오면 그 근원자리는 가사 독사가 됐던 또는 어떤 것이 되었던 근원자리는 변치가 않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런 것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은 조금도 변치가 않습니다. 사람이 되나 개가 되나 하늘에 별이 되나 변치가 않습니다마는 한번 각 원소 각 성분으로 물질화돼서 굳어 버리면 그대로 순수해지는 발동을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원자핵 하나 파괴하려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렇게 힘을 많이 들여서 중성자나 뭐나 쏘아 붙여서 원자핵을 파괴 합니다. 원자핵을 파괴하면 그런 무시무시한 원자폭탄 같은 힘이 나오지 않습니까. 또는 그와 같이 한번 굳어 버리면 우리 염파念波가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서 굳어버리면 그때는 파괴하려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굳어 버렸다 하더라도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또는 뭣이 되고 이렇게 굳어 버렸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 자체는 조금도 변치가 않습니다. 성자란 것은 그런 불성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한번 물화物化된 그것밖에는 못 봅니다. 순수생명은 못 봅니다. 우리가 다 흔히 아는바와 같이 반야심경에 항시 예를 듭니다마는 역시 그 공사상空思想 부처님 법문도 보면 어떠한 법문이나 부처님께서 공사상 즉 말하자면 반야지혜를 말씀 안 하신 데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반야지혜가 없이는 우리가 해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불교란 것은 인생고 해탈인데 인생고를 해탈하고자 한다고 할 때는 반야공般若空, 반야지혜가 없으면 해탈은 못 합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여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 고액苦厄을 제도 하려면 싫으나 좋으나 간에 우리가 오온이 비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이렇게 소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히 이렇게 내 앞에 있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이렇게 있고 내가 아끼는 내 재산과 내 소유가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한에는 인생고는 못 떠납니다.

 

아까 제가 말씀처럼 오온법이란 것은 그것은 물질에 오염된 우리 상념 이것이 오온법입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 또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 한 번에 말하면 오온이란 것은 색 즉 물질을 말하는 것이고 수 이것은 우리가 감수하는 작용, 은 상상하는 작용, 이것은 우리 의지 작용, 이것은 분별작용 물질에 대해서 바로 보면 우리가 분별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천지 우주가 바로 훤히 트인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불성이라고 생각할 때는 분별시비가 안 나옵니다. 우리 마음이 황홀찬란한 그런 불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좋다 굿다 또는 무슨 물질이다 산이다 냇이다 하는 분별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헌데 우리가 물질을 바로 못 보니까 분별시비가 나온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분별시비가 한번 나와서 굳어 버리면 우리 마음이 물질이 비었다 하는 것을 되새기고 느끼고 느껴야만 우리마음에 절어있는 물질이 있다 또는 네가 있고 내가 있다하는 습기가 차근차근 뽑아진다 말입니다. 업장 따라서 업장이 가벼운 분은 단박에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그야말로 참 수다원과라 법성을 증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아라한과를 증합니다마는 보통 중생들은 그렇게 안 됩니다.

 

한번 우리가 물질에 따라서 절어 버리면 오랫동안 닦고 닦아 되풀이해야 한다 말입니다. 부처님 경전 보면 구사론俱舍論같은데 보면 우리 마음 인간이 청정한 마음이 물질에 오염돼 가지고서 물질도 사실은 근원은 불성인 것인데 불성 그것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우주가 이와 같이 성겁이 되고 주겁이 되고 이와 같이 하나의 형체가 되어 놓으면 우리 마음의 형체를 바로 못 보면 여기에서 차별 분별시비가 생긴다 말입니다. 차별 분별시비가 생긴 그것이 몇 생 을 두고 익혀 온지라 또는 금생에 교육도 있다 없다 하는 그러한 유물주의적인 교육만 받아놔서 좀처럼 우리마음이 그냥 단박에 그런 물질을 벗어나서 해탈의 청정불심에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경전의 내용이 아까 말씀처럼 그러한 물질계를 떠나서 순수한 불성계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혜충국사(慧忠國師 ?~775)라 하면 이분은 위대한 분입니다. 혜충국사는 육조 혜능스님밑에 오대五代 도인이 계시는데 오대 도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이분은 그야말로 과묵해서 말씀도 별로 않고 말입니다. 40년 동안 하산도 안한 분입니다. 왕자가 만나러 와도 그냥 합장하고 말아버립니다.

 

사실은 우리 출가법이란 것은 불경군주不敬君主라 군주를 공경을 않습니다. 원칙은 삼보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군주한테 머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나러 와도 그냥 합장하고 말아버린다 말입니다. 나가서 마중도 않고서 말입니다. 그런 정도로 되니까 한번은 그 당시 당나라 임금이 와서 대사가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도력이 있다한들 그와 같이 불경스러울 수가 있습니까?” 하고 추궁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 움직이면 나라가 소란스러우니라.” 영원적인 차원에서 항시 움직여서 영원적인 차원을 여의지 않는 그런 도인들이 함부로 행동하면 도리어 그것이 망동이 되고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그런 의미도 있고 또는 일반 중생들이 본체를 여의어서 상만 가지고 왔다 갔다 좋다 궂다 해대면 그때는 그냥 나라가 소란스럽다는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체가 움직이면 나라가 소란스럽다 말입니다.

 

우리 개인적인 수행도 체를 여의면 그때는 수행이 바로 못 됩니다. 단체나 어떤 것이나 영원적인 차원 근원적인 불성에서 비춰봐서 여실히 행동 해야지 체를 떠나고 상으로만 따지면 역시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 각기 자기 개인들의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와서 화합을 못하는 것입니다. 헌데 한 스님이 혜충국사한테 가서 그 정토 삼부경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을 보면 삼인三忍이라 어제 우리 법사님들 가운데서 오인법을 아주 훌륭하게 예를 들어서 말씀했습니다마는 삼인법이라 극락세계는 세 가지 인 삼인법이 무엇입니까? 대무량수경에 보면 삼인법이 있는데 삼인법에 보면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사람이 있고 또 유정중생이 소리도 내고 하면 설사 공부를 못해서 확실히는 몰라도 좀 이해할런가 모르지만 무정설법이라 유정 중생이 아닌 나무나 돌 그런 것도 설법한다 말입니다. 그 무정설법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 보면 극락세계의 칠보 순임 이라 칠보로 이루어진 나무에다가 그 미풍이 그야말로 간드러지는 바람이 불면 거기서 나오는 그런 미묘청정한 소리가 이루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또는 극락세계의 감로수 같은 물이 흘러내리는 시냇물소리 역시 어떻게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중생이 사람이나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유정이 아닌 그런 나무나 시냇물이나 이런 것이 그와 같이 아주 간드러지고 그런 멜로디 같은 소리를 내면서 그런 내는 소리가 마치 염불, 염법, 염승이란 말입니다. 마치 부처를 염하고 진리를 염하고 또는 진리를 따라서 행동하는 그런 승을 염하고 이와 같이 시냇물소리나 바람소리나 그렇게 하는데 이것이 무정설법인데 과연 이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혜충국사 답이 그대가 먼저 무정이 돼야 아느니라.” 우리 중생은 그런 기성관념 기성개념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더 오염돼갑니다. 좋다 궂다

있다 없다 말입니다. 나다 너다 좋다 궂다 하는 관념 이것은 재주가 있어가지고 분별시비도 많이 하고 남도 책망도 하고 똑똑해서 남 흠도 잘 꼬집고 이렇게 잘 할런가는 몰라도 이런 것은 결국은 우리 자성을 차근차근 오염시켜 갑니다. 불성은 원래 평등무차별의 청정미묘한 것이 불성인데 좋다, 궂다, 밉다, 곱다, 잘 됐다, 못 됐다 하는 분별시비 같은 것은 이런 사바세계에서는 그것 잘하면 똑똑할는지 몰라도 사실은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것 같이 큰 마구니가 없습니다. 무정이라 무정이 돼야만이 비로소 무정 설법을 아느니라.

 

우리 중생 마음이 깊은 선정에 들어서 즉 말하자면 파동이 쳐서 우리 마음은 지금 파동치고 있습니다. 좋다는 파동 궂다는 파동이 치고 있습니다. 공겁이 되어서 성겁이 될 적에 우리 중생이 이렇게 사바세계에 내려옵니다마는 맨 처음에 내려 올 때는 광명신光明身이라 몸도 광명이고 또는 비행자재라 마음대로 자재했습니다. 이것도 부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말씀은 다 믿으셔야 합니다.

 

태초 인간은 결국은 광명신이라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에덴동산에서 행복만 누렸겠지요. 정말 에덴동산의 훌륭한 그런 세계는 음식도 먹고 싶으면 그냥 생각하면 먹어지고 몸이 광명뿐이기 때문에 몸이 무게가 없습니다. 모든 공덕을 갖춘 광명뿐이기 때문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신통자재를 못하려야 못할 수가 없습니다. 말은 않는다 하더라도 생각을 딱 먹으면 그때는 광명이 갔다 왔다 해서 텔레파시로 해서 같이 알아버립니다. 이것이 태초에 인간이 나올 때입니다.

 

광음천光音天이라 우주가 성립되는 광음천에서 태초에 인간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금같이 이런 유전공학이나 또는 원자력이나 그런 기기묘묘한 괴상스런 힘이 안 나올 때는 잘 안 느꼈지마는 지금 물리학은 그야말로 참 기기묘묘한 힘을 낸다 하나의 우리 눈에도 안 보이는 미세 힘 가운데서 무시무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는 그러한 것의 근본 힘 그러한 것의 순수한 힘 이것이 결국은 불성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불성과 하나가 될 때에 무슨 힘을 못 내겠습니까. 그러기에 부처님 불경 가운데서 그렇게 고구정녕히 불공덕佛功德은 불가설不可說 불가설不可說이라 부처님의 공덕을 어떻게 말해도 다 말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방광등지放光等地라 단위에 척 들어 올라서면 벌써 광명이 훤히 비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그런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 정광靜光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번뇌를 녹이는 그런 광명이 비치는 것입니다. 방광동기放光動氣라 천지우주가 은은히 진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공부를 깊이 해서 삼매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바로 그 자리에서 천지우주의 신비로운 리듬을 맛보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극락세계의 삼인은 세 가지 인인데 그것은 음향인音響忍이라 유순인柔順忍이라 또는 무생인無生忍이라 원래 불생불멸하는 그런 인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야말로 명곡이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음악 들으면 얼마만치 우리 마음이 개운해지고 합니까. 헌데 삼매에 들어서 영원성에서 오는 그런 순수한 리듬을 맛 볼 때는 우리 몸도 뼈도 가슴도 상쾌하고 또한 그러 경계는 자기 몸에 대해서 하등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말합니다만 우리 공부를 인후개통획감로미咽喉開通獲甘露味라 인후는 목구멍 아닙니까. 개통이라 목구멍이 툭 틔어서 감로미라 감로의 맛을 안다 말입니다. 이런 것도 역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공부하다 보면 가슴이 툭 틔어서 천지와 나와 하나가 된 것을 그때는 느끼는 것입니다. 공부가 부족할 때는 항시 목에서 뭣이 있어가지고서 상하가 잘 순환이 안 됩니다. 껍껍하고 다리도 아프고 한다 말입니다. 허나 한번 조화가 잘 되서 상하가 회통할 때는 그때는 어디가 아픈데도 없는 것입니다. 몸이 피로해도 순간 순식간에 피로가 가셔버린다 말입니다.

 

영원의 힘이 우리한테 이렇게 차근차근 비춰온다고 할 때는 그런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음향인音響忍이라 따라서 우리마음의 파동이 고요하지 않으면 음향인은 맛을 못 봅니다. 같은 경계에서 있다하더라도 역시 마음이 거칠면 그냥 바람소리나 듣고 말지만 같은 바람소리도 선풍기를 틀어 놓는다 하더라도 역시 그냥 거칠 때는 선풍기가 선풍기거니 하고 보통 다 그것은 일률적으로 밖에 못 듣지마는 마음이 정화되면 선풍기 소리 역시 그런 하나의 간드러진 멜로디로 들립니다.

 

즉 따라서 극락세계에서 음향인音響忍을 느끼는 이것은 마음이 그만치 정화가 되어서 우리 마음의 파동이 그만치 자서 말입니다. 잔잔해가지고서 우주의 그런 리듬 우주에 갖춰 있는 순수한 리듬 그것이 우리한테 배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리 마음이 밉다, 좋다, 돈 벌고 싶다 그런 것이 그때는 싹 가시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경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도인도 파계 할 수 있다. 계율이란 것은 일반 범부가 지키는 것이지 도인은 무애행無碍行이다 도인은 술 먹고 고기 먹고 도인은 이성간에 관계하고 이것은 다 도인은 할 수가 있다 이런 망탄亡嘆을 합니다마는 이것은 성자의 경계를 모독하는 말인 것입니다. 마음이 정화되면 따라서 우리 생명도 정화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화 되어서 욕계 번뇌를 여의었거니 욕계번뇌를 여읜 사람들이 음욕, 잠욕, 식욕 이런 욕심이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한계는 있어서 우리가 몸뚱이를 한번 가지는 한에는 한계는 있지요.

 

그러나 우리 참다운 신에 있어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아까 말씀처럼 우리 마음이 청정이 되고 안정이 되어서 조화가 되어서 음향인이라 그런 영원적인 리듬을 들으면 그와 동시에 유순인柔順忍이라 우리 마음이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그야말로 풀포기 하나와도 대화하고 싶고 인정 많고 마음이 고운 사람들은 그만치 우리 마음의 파동이 별로 없는 분입니다. 즉 업장이 가볍다 말입니다.

 

업장이 무겁다는 것은 그만치 우리 마음의 파동이 거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순한 마음 유순한 마음이 차근차근 깊어지면 자타의 구분이 없습니다. 도 없고 멸멸도 없는 즉 말하자면 생과 멸을 떠나버린 영생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무생이 되어야 불퇴지不退地라 우리가 후퇴가 없습니다. 무생이 돼야 비로소 그때는 성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까 혜충국사가 말씀한바와 같이 무정이 돼야 무정설법을 아느니라. 꼭 그런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분별이 없고 우리 마음이 상을 여의어 버려야만 비로소 그때는 무정중생의 산도 냇도 나무도 돌도 천지 우주가 같이 설법하고 같이 서로 듣고 있단 말입니다. 구설구청俱說俱聽이라 시냇물이 설법하면 나무가 듣고 나무가 설법하면 시냇물이 듣고 말입니다. 우리 법사님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까 말씀처럼 어떤 누구나 간에 내 동생이나 내 딸이나 내 아들이나 간에 바로 보면 의미를 깊이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다 부처가 되고 만다 말입니다.

 

마치 원자를 하나의 원소를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소립자가 되고 또는 그것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공이 되어서 무엇인가 몰라버리듯이 무엇인가 몰라버린 그 자리 물질이 아닌 그 자리 순수한 그런 생명 불교에서는 그러한 자연 과학적인 그러한 시도를 벌써 부처님당시부터 했습니다. 다만 술어가 지금 술어와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 뿐입니다. 지금 현대사회에서 어제 밤에 어느 법사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그야말로 참 서구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불신을 당했는가. 기독교는 현대적인 고도산업사회를 제대로 변증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포섭을 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원자력시대에 무시무시한 힘을 어떻게 변경을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창세기나 또는 사복음서나 그런 걸로 해서는 물론 저는 그걸 존중합니다. 성자의 말씀을 존중합니다. 허나 존중은 합니다마는 그 당시에나 있는 것이지 그 교리로 해서는 유물주의로 팽배한 이러한 억센 주의나 그런 것을 조복할 힘이 없습니다. 극복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지적들을 많이 하신바와 같이 서구적인 이원적인 사고방식 이걸로 해서는 또 역시 현대적인 문명병을 다스릴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학생들이 나와서 너무나 거칠게 날뛴다 이렇게 책망을 합니다. 물론 비판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우리 기성세대가 그런 순수한 젊은이들한테 바른 길을 제시해줄만한 그런 힘이 없습니다.

 

물질은 대체로 무엇인가 유물주의적인 그런 인생관을 가지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유물변증법이 되면 막스주의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유물주의를 최파摧破해야 될 것인가. 불교에서는 그야말로 만법유식이라 만법이라 오직 식뿐이요 또는 일체가 유심조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이와 같이 단순 소박한 이런 말로 해서는 극복이 안 됩니다. 과연 물질이란 것은 어떻게 되어서 끄트머리에 가서는 마음인가. 물질이 왜 어떻게 해서 마음인가 이것을 지금은 변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합리적인 사고를 한 사람들이 비로소 그때는 신한다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현대적인 술어로는 제대로 잘 안 돼 있다 하더라도 불교에서는 이것이 다 돼있는 것입니다. 되어있는데 다만 우리 같은 출가승이 부처님의 불성을 제대로 증명을 못하고 제대로 증명을 다 했으면 그야말로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인데 제대로 못했으니 그와 같이 현대인들이 납득 가게끔 변증을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시인.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 1861~1941)가 우리 한국을 동방의 광명이라고 했고 또 토인비(영국 역사가 1889~1975)가 동방을 상당히 좋게 말했고 또한 어네스트 겔너(영국, 체코 철학자 사회인류학자 1925~1995)도 우리 한국을 좋게 말했는데 그것은 그분들이 다만 우리한테 영합적迎合的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런 맑은 감성들 맑은 지성들이 바로 봤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이 과학적인 여러 가지 문제를 우리 불교로 해서 제대로 변증을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저는 꼭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마당에서는 이것은 틀림없이 유물주의가 설 땅이 없습니다. 유물주의가 설 땅이 없으면 따라서 딴 것도 역시 설 땅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래생명이 무엇인가 우주의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 물 자체가 무엇인가 이것을 풀이 하는 것은 사실은 불교뿐입니다. 변증은 제대로 안 되어있다 하더라도 소박하니 과거 술어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다 되어있습니다.

 

다만 우리 현대인들이 공부를 잘 못해서 부처님의 그런 진리 불성을 제대로 증명을 못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을 못한다 말입니다. 그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정말로 삼매에 들어서 불성을 증해서 현대 우리 귀중한 후대인들이 알아먹기 쉽게 우리가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처럼 비록 우리는 아는 것을 그냥 의식적인 개념적인 걸로 거쳐버리면 그것만도 중요합니다만 역시 그것을 증명 못 하면 힘이 못 된다 말입니다. 우리 불교라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종교의 그런 여러 형태로 해서 가장 합리적인 완벽한 형태는 역시 신해행증信解行證입니다. 믿고 해석하고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고 증명하고 믿고 내용을 체계를 세워서 해석하고 또는 행으로 해서 실천하고 해서 우리가 증명하고 이와 같이 신해행증을 갖춰야만 참다운 완벽한 종교라고 볼 수가 있는 것 입니다. 헌데 여기에서 본다 하더라도 역시 불교 외에는 신해행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데는 없다고 봐집니다. 물론 믿는 거야 기독교도 있고 이슬람교도 있겠지요.

 

허나 그 믿음 역시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문제 자타를 초월하고 우주의 가장 보편타당한 그런 어떠한 대상 이런 대상을 믿지를 못합니다. 어제도 아주 고구정녕苦口叮寧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마는 사실은 대상을 나와 대립해서 본다 말입니다. 나와 대립해서 보는 이상에는 이원론을 우리가 극복을 못하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포섭한 자리 나까지도 포함해서 우리 한 가지도 버릴 것 없이 다 포함한 자리 그런 자리를 믿는 것은 사실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신해라 또는 해석이라 말입니다. 아까 말씀처럼 창세기나 또는 사복음서나 그런 걸로는 종교철학을 체계를 못 세우는 것입니다. 어찌 세울 것 입니까. 신학에서 각 철학을 도입시켜가지고 한다지만 역시 그도 미흡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불교만이 비로소 종교철학을 제대로 체계를 세웠습니다. 또는 행이라 행도 역시 우리 신과 행이 신과 해가 바로 돼야 행이 바를 것인데 바른 믿음 또는 바른 해석이 못되면 우리 실천도 역시 바른 실천이 못되는 것입니다.

 

바른 실천이 못되거니 바른 증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딴 종교는 우리가 폄하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른 신앙 가장 좋은 정신도 못 되는 것 이고 또는 바른 체계도 못 세우는 것이고 또는 바른 행도 못되고 바른 증명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나 성인들의 슬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도인들이 나오면 어떤 도인이든 간에 꼭 그 시대 문명을 한번 비판합니다.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가사 원효스님이 자기가 깨달은 데서 일대시교 그 당시에 부처님 교리를 비롯해서 모든 학문을 다 비판한다 말입니다. 천태 스님이 나오면 그 당시에 불교 일반을 비롯해서 모든 교학을 총 망라해서 비판한다 말입니다. 그런 교상판석이라 이래가지고서 그 시대에 맞는 교리를 딱 세웁니다. 어느 것 하나를 이렇게 소외를 시켜가지고서 무시를 합니다. 어제도 어느 법사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서산대사께서도 유가귀감, 선가귀감 또는 불가귀감을 다 내세웁니다.

 

다만 불교뿐만 아니라 딴 종교 역시 다 포섭해서 하나의 진리에다 딱 묶어버린다 말입니다. 우주를 하나로 보는 그런 도인들의 원융무애한 광대무변한 그런 자리에서 내가 있고 니가 없거니 내 종교, 니 종교 어디가 구분이 있습니까. 다만 딴 종교는 불교에 비해서 여실히 못 본다 말입니다. 가까이는 가 있지만 여실히는 못 보고 궁극적인 것은 못 본다 말입니다. 그런 차이만 있을 뿐 입니다. 깊고 얕은 차이가 있을 뿐 입니다. 현대는 다 종교 사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 우리 선인들이 그렇게 했듯이 우리도 역시 자시비타自是非他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불교를 통 털어서 통불교를 신봉함과 동시에 딴 종교 역시 우리 품안에다가 다 품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 인구가 벌써 수가 몇 명입니까. 천만 인구가 우리가 믿지 마라하면 안 믿겠습니까. 그네들이 부족한 점 소위 그네들 지성 가운데서 회의를 느끼고 있는 점, 미흡을 느끼는 점 그 점을 우리가 보완시켜 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뭣인가 하나님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나 천지 우주에가 다 있는 것이고 천지 우주가 곧 하나님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회통을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회통이라 어떠한 도인들이나 그 시대에 문명 비평을 다 해가지고서 그와 같이 회통을 시켰던 것입니다.

 

헌데 지금 불가에서는 같은 불교 네에서도 니 공부 옳고 내 공부 그르고 또는 그 반대로 말하고 말입니다. 이래버리면 참 따분한 일입니다. 이러면 결국은 우리 불교도 빛을 못 내고 딴 종교와 같이 화합할 수 없습니다. 아까 말씀처럼 우리 공부는 대체 무엇인가 결국은 본래 청정한 우리 자성으로 돌아가는 길 말입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것이 가끔 가까운 길인가. 헌데 우리 중생들은 역시 근기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심리학으로 보더라도 의지가 강한 분 또 지성이 강한 분 또 감성이 풍부한 분 그와 같이 차이가 있겠지요.

 

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 법문 보면 그러한 인간적인 개성 차이에 따라서 그때그때 부처님의 제도 방편이 선교로 해서 제시가 됐습니다. 의지가 강한 분들은 고행도 시키고 명상도 하고 또는 지성이 풍부한 분들은 관도 시키고 화두도 들고 또는 감성이 풍부한 분들은 그야말로 참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흠모 추구하는 그런 쪽으로 제시를 하고 이와 같이 가지각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허나 같은 사람도 역시 다만 우리 심성에 있어서 감성이 더 풍부한가 지성이 더 풍부한가 약간의 차이 뿐인 것이지 어떤 누구나가 다 되어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성 가운데는 원만구족이라 불성 가운데는 감성도 지성도 또는 지혜도 다 들어 있듯이 지정혜智情慧가 우리 불성 가운데는 원만구족 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비록 지금 업장에 가려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원만구족한 지혜와 정이 다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인연 따라서 업 따라서 어디가 비중이 더 큰가 그것만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사 감성적인면만 주로 해가다가는 또 역시 지성적인 것이 소외를 받으니까 그때는 싫증난다 말입니다. 또는 따지기 좋아하는 그 점만을 공부하면 우리 감성이 소외받아 불만을 품습니다. 공부를 오랫동안 애쓰고 한 사람들은 아, 내 공부를 이렇게 해야 하겠구나 감이 잡히지만 처음 하는 사람들은 하나만 가지고 애를 씁니다. 하나만 가지고 애쓴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처럼 내내야 우리 마음의 본성이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로 모아져서 어느 고비만 넘기면 되는 것입니다.

 

똥 마른막대기를 화두로 들으나 또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나 뭣을 부르나 간에 내내야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됩니다. 음미를 주로 하는 영원적인 순수한 리듬 진언을 주로 하는 그런 쪽에서는 옴마니반메훔이 가장 좋고 말입니다. 앞서 말씀대로 인격적으로 생명은 바로 인격인지라 인격적으로 숭앙하고 싶구나! 내가 인격이니까 우리가 화석 시켜서 볼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그야말로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인지라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을 우리가 인격으로 숭앙해야 하겠구나. 그와 같이 인격적으로 숭앙할 때는 갈앙과 흠모로 해서 부처님을 외우고 부르면 되겠지요.

 

그러나 분별시비를 많이 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역시 본래 내가 부처거니 뭣 하러 그렇게 인격으로 불러야! 거기에서 약간 거부를 느껴가지고서 있는 그런 분들은 그냥 내 본질이 무엇인가 내 본 바탕이 무엇인가 그와 같이 자기를 참구하는 쪽으로 해도 무방하겠지요. 또는 원래 부처거니 새삼스럽게 우리가 구할 필요가 무엇이냐 가만있으면 그야말로 흐린 탁수가 가라앉으면 바닥이 보이듯이 가만히 있으면 본래 부처인지라 마음이 번뇌가 사라지며 그때는 불성이 나타나겠지 이와 같이 묵조 하는 명상만 주로 하는 그런 법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은 성불의 법입니다.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해도 그때는 무방할 것이고 어떻게 해도 무방합니다. 허나 중요한 것은 무엇 인가 하면 어떻게 부른다 하더라도 근본불성 자리는 하나구나 이와 같이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못 느끼면 결국은 그것이 집착이 되어 가지고서 자꾸만 상이 생긴다 말입니다. 어느 분들 보면 관세음보살을 몇 십 년 한분을 가르쳐서 억지로 아미타불하라고 한다 말입니다. 억지로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내내야 같은 것인데 다만 의미부여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용은 같은 것인데 몇 십 년 관음보살해서 힘이 난 분한테 해서 억지로 바꾸어서 아미타불 하라고 합니다. 또 관음보살을 애쓰고 한분한테 억지로 벌써 공부가 되어가지고서 거의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될 만한 사람들한테 그것은 방편이다 화두 해야 된다 억지로 의심을 시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불리불不離佛 치우불置遇佛이라 내 자성인 부처한테서 안 떠나고 또는 치우불이라 부처와 만나는 즉 말하자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뭐를 의심하고 않고 또는 염불로 부르고 주문을 부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자기한테 맞으면 좋지요. 리듬으로 구하는 분들은 옴마니반메훔이 그때는 좋을 것이고 허나 자기한테 안 맞는다 하더라도 본래 불성이 우리 본성이거니 하고 들어가면 결국은 우리가 끄트머리에 안 갈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안 맞으면 조금 더 더디고 할뿐이라 말입니다. 헌데 저는 앞서도 말씀 했습니다마는 그런 융합적인 방법 기왕이면 불법을 통 털어서 하나로 뭉치고 싶다 기왕이면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각 종교를 다 하나로 뭉치고 싶다 지금 지성인들은 다 그럴 것입니다. 지금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젊은이들은 그와 같이 안 느끼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기왕이면 하나의 종교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진리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역시 앞서 말씀처럼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라 즉 말하자면은 여실히 진리를 우리가 봐야 한다 말입니다.

 

먼저 이러한 개념적인 자기 이해가 앞서야 합니다. 개념적인 이해가 앞서지 않으면 꼭 자타시비를 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면 우리 마음이 하나로 뭉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일체 만유를 하나로 딱 만들어 버려야 합니다. 불교말로 하면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진리로 딱 되 버려야 한다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로 딱 되어 버려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개운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의 체증이 딱 내려간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바와 같이 인후개통이라 목구멍이 확 트입니다. 역시 그러한 진리를 하나로서 해결을 다 시켜버려야 우리 마음이 개운하다 말입니다. 조사 스님들 법문에 가서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하나의 방법 따라서 화두나 옴마니반메훔그런 주문이나 관음보살 아미타불이다 말입니다. 오랫동안 하다보면 결국은 업장이 녹는다 말입니다.

 

탁수라도 물이 흘러가고 흘러가면 물이 자정작용을 해서 맑아집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공부도 역시 하나의 방법 따라서 하다보면 결국은 염념지중念念之中죄멸심정罪滅心淨이라 생각하고 생각하면 죄는 멸하고 그때는 이제 우리마음이 정화 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의 본래 자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이론적으로 모두가 부처인 것을 알면 되겠지 거기 따라서 도덕적인 우리 생활만 하면 되겠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마는 역시 불교라는 것은 뭐라 해도 성불하는 가르침입니다. 성불은 못 하면 자기가 깊이는 어느 정도 이해는 할런가 모르지마는 부처님의 참다운 실상은 못 봅니다. 참다운 실상을 못 보면 역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불경에서 병도사病導師라 남을 바로 이끌지 못하는 도사라 공부를 좀 해서 이론적으로 내가 옳다 내가 이만하면 행동에 별 하자가 없다 이와 같이 도덕적인 면에서 자기 스스로 하자를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을 미처 못 정해놓으면 법부입니다.

 

어느 고비 어느 경계에 부딪치면 역시 마음의 동요가 옵니다. 마음의 동요가 오면 역시 무슨 판단에서 바른 판단을 못 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불생불멸의 자리를 딱 정해야만이 바른 판단이 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판단을 못 할 때는 사실은 결국은 병도사를 면하기 어렵다 말입니다. 우선 저부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런 멸진정을 통해 아라 하는 나의 근본 아상의 근본을 딱 뽑아 버리면 모르지만 못 뽑을 때는 아직 범부지는 남아있단 말입니다. 그런 때는 항시 겸허하니 부처님 말씀을 여실히 증하려고 애쓰고 또는 부처님말씀 따라서 우리가 나가야 합니다. 우리 공부할 때 구구순숙久久純熟 오랫동안 익히고 익혀간다 말입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고양이가 쥐를 앞에 놓고서 한 눈 팔면 쥐는 도망가고 맙니다.

 

그렇게 노려보듯이 우리는 해야 합니다. 응심凝心이라 또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어미닭이 계란을 품듯이 경망해서 계란을 품다가 훅 떠나버리면 계란은 부화를 못 합니다. 진득이 그와 같이 우리가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랫동안 익혀가면 그때는 자연내외타성일편이라 내 마음 내 밖이 하나가 딱 되어 버린다 말입니다.

 

우리는 그걸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다보면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가 딱 되어 버립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팍팍한 길입니다. 험준한 산길이지만 가면 갈수록 차근차근 더 쉬운 것입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상이 떨어지면 질수록 우리 환희심도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영원의 리듬 영원의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지옥 역시 분명히 있듯이 우리 기분 나쁘면 지옥이고 하는 단순한 지옥이 아니라 실제의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실제 극락이 분명히 있습니다. 실제로 있는 극락이 무엇인가 사실은 이 세계가 그대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아까 말씀처럼 법본묘法本妙추유물정醜由物情 이라 원래 이대로 광명세계고 이대로 다 금, , 유리가 박힌 세계인데 다만 삼독심에 가려서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다만 망념에 가려서 그걸 미쳐 못 본다 말입니다. 있는 것은 결국 극락세계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보면 이 자리가 바로 만다라의 화장세계입니다. 그렇게 되시기 위해서 염불이나 또는 화두나 주문이나 인연 따라서 애써서 하십시오.

 

내가 생명인지라 내 생명이 우선 불안스러우니까 부처님을 갈앙하는 간절히 그리워하는 그것이 우리 마음을 굉장히 비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념왕생이라 열 번만 잘 부르면 그걸로 해서 비약되어 아까 말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무생법인을 증한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4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삼차원에서 보는 공간에다 시간을 도입한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무상無常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은 사실은 있지가 않습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다 공이란 말입니다. 오온이 바로 텅 비어 있습니다.

오온이 공이거니 나요 너요 내 것이요 이것이 모두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하니까 무상하지 않은 영원적인 것을 우리가 갈망한다 말입니다. 무상을 느껴야 비로소 갈망이 오고 갈앙이 옵니다. 이렇게 해서 구구순숙하니 익히고 익혀서 그야말로 참 타성일편이라 오직 하나의 진리로 딱 되어서 내가 부처가 되고 네가 부처가 돼서 우리 현세 이대로 극락세계지만 역시 우리 중생의 업장은 두터운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될수록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철저한 민주화, 철저한 평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불자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서 촉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내가 부처님이 되기 쉽고 내가 공부하기 쉽고 남도 공부하기 쉬어서 자타일시 성불도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인연 공부에 따라서 정진하셔서 성불하시기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