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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7. 본래 부처라!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

17.198608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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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부처라!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

(1986. 8. 3. 태안사 정기법문)

 

어떤 법문은 심리학적으로 또는 심령학적으로 우리 불교 문제를 재조명도 하시고 또는 업사상, 우리가 악업을 짓고 또는 앙화殃禍를 받고, 선업善業을 짓고 여러 가지 행복을 받는 업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깊이 해부를 해주셨습니다. 또 그런가 하면 순수한 불교 신앙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우리 신앙의 자세를 역설해서 적절하게 말씀해주신 그런 법문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사상 신비부사의한 그런 신통 문제를 과학적으로 조명해서 말씀해주신 그런 법문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하면서도 의미 깊은 그런 법문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비단 이러한 어른들은 금륜의 법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전체적인 불교 법사로서 손색이 없는 그런 분들로서 추앙도 하고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헌데 제가 주로 말씀드릴 것은 참선 문제, 참선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사실 참선하는 분들이 굉장히 오랫동안 고생을 했지마는, 정수精髓를 못 잡고 계신 분이 더러 있습니다.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능률적인가? 이런 문제를 제가 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쓴 지도론智度論이란 아주 훌륭한 책이 있습니다.지도론에 보면 겁진소시劫盡消時 우리 천체天體가 성겁 되고, 생물이 사는 주겁 되고, 다시 이것이 파괴되어 괴겁 되고, 다시 텅 비어서 공겁이 됩니다. 이와 같이 4겁을 항시 되풀이해서 명색이 영겁회개永劫回開라 이렇게 되풀이하는 셈인데 우리 중생이 많이 살고 행복도 누리고 불행도 누리고 이렇게 생활한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가 파괴될 때는 자연적으로 선정禪定에 들어갑니다.

 

겁진소시劫盡消時, 겁이 다 해서 천지 우주가 파괴할 때 겁이 불타서 다 멸할 때는 일체중생이 천지 운행이 자연의 힘으로 자연개득선정自然皆得禪定이라 모두 다 고요한 참선에 듭니다. 지금 우리는 참선을 해라, 해야 한다, 성불하려면 참선이 지름길이다.” 하며 참선을 권유합니다만, 천지 우주가 파괴할 때는 가만히 둬도 모든 중생이 깊은 참선을 합니다.

 

참선, 선정, 삼매가 조금씩 다르게 풀이는 되나 거의 똑같은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참선을 하기도 하고 않기도 하고 하려면 고생도 하고 하지마는 천지 우주가 파괴할 때는 저절로 전 중생이 깊은 삼매에 들어가 참선한다. 말입니다. 천지 우주는 보다 대국적으로 보면 지금 참선에 들어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업장에 가려서 대 우주의 자연적인 법칙에 못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 법당 앞에 무엽유화無葉有花라 잎이 없이 꽃만 피는데 그 꽃이 피어 있습니다. 꽃도 역시 선정 가운데서 함부로 동요하면 꽃이 못 핍니다. 고요한 선정에 잠겨서 인욕하고 참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무엽유화無葉有花라 이파리도 없이 꽃이 핍니다.

 

엄마 배 안에 든 태아도 합장하고 고요한 선정에 듭니다. 해부학자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합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배 안에서 못 참으면, 선정 참선하듯이 못 참으면 참다운 어린애로 성장을 못합니다. 이렇듯 우주 만물이 나름대로 자기 위치에서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참선은 보통 고요함에 잠기는 참선이 아니라, 성불이라고 하는 즉 영원의 생명, 영원의 행복을 우리가 얻고자 하는 참선을 말합니다. 헌데 불교가 하도 방대하고 너무 넓어서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 어려운 불법에서도 역시 불법을 총망라해서 불법을 압축해서 가장 골수骨髓법문이 즉 첩경이 지름길이 참선인지라 참선을 더 어렵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참선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아까 말처럼 천지 우주는 지금 참선을 하고 있고 다만 중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천지 우주의 법칙에 못 맞추고 있습니다. 말도 천지 우주에 맞는 바른말을 하고 생각도 천지 우주에 맞는 생각하고 다시 말하면 근본을 안 잊어버리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생은 근본을 잊고 삽니다. 행동도 천지 우주의 법칙에 맞추어서 즉 조화로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살생도 않고 훔치지도 않고, 음행도 않고, 천지 우주에 맞추어 버리면, 그것이 바로 참선이 되고 맙니다.

 

허나 중생은 업장에 가려서 그와 같이 못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같이 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이렇게 쉽고 자기한테도 행복의 지름길을 가져다주고 자기 가정을 위해서나 누구를 위해서나 제일 수승한 길 인생 최고도의 압축된 문화현상 말입니다. 지금은 참선이 국제화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비단 우리 불교뿐만 아니라 자기 수양을 말하는 사람들도 참선을 말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참선을 말합니다. 아만심 많은 서양인들이 한국에 와서 스님된 것 보십시오. 가히 참선은 국제화 시대입니다.

 

우리가 철학도 안 배우고 별 깊은 학문을 안 했다 하더라도 참선 하나만 하면 인류문화의 가장 첨단 최고봉에 오른 셈입니다. 어떻게 참선할 것인가? 독일에서 말하는 태식법 즉 호흡법이나 또는 서구에서 유행하는 초월적 명상법이나 그런 법들이 거의 참선과 비슷합니다. 요가에서 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참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결제법문 때 안심 법문이란 말을 했습니다. 마음을 안심安心시킨다. 즉 불안한 마음을 없애버린다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선하지 못합니다. 비록 화두를 들고 백날 의심만 하더라도 먼저 안심한 마음이 못되면 참선이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우리 자성 우리 인간성과 우주의 본질을 자기가 아직 증명을 못한다 하더라도 아! 이렇구나 하고 느끼고 해야 참선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참선이 못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을 애쓰고 부르고 가부좌하고 해도 그 모양만 가지고는 참선이 못됩니다. 내 자성 내 생명의 본바탕의 부처님을 느끼고 천지 우주의 생명이 동일한 부처님을 느낄 때 일체 불성 가운데 내 공덕이 들어있다 분명히 확신한 다음에 가부좌도 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를 들어야 비로소 참선입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에 보면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부처라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 본래 자성 내 인간성의 본질이 청정하고 본래 해탈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때 묻어 있지 부처가 본다고 하면 아무리 미운 중생 또는 지옥에 가서 지옥고를 받는 무간지옥 중생이라도 광명이 찬란한 부처님 몸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적인 어정쩡한 견해 때문에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는 것이지 지옥이 있고 축생, 아귀, 사람, 천상이 있다고 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차원에서 가는 것입니다.

 

참말로 옳은 것은 부처님이 보는 하나의 견해뿐입니다. 즉 일진법계라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어쩌다 운수가 나빠 독사한테 물렸습니다. 얼마 징그럽고 무섭습니까? 그러나 그 독사가 없으면 부처가 못 됩니다. 어느 티끌 어느 못난 것 하나가 없으면 부처가 못 됩니다. 부처란, 천지 우주 전체가 바로 부처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버려도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만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남하고 다투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생은 다만 못 봐서 가르고 분별하는 것이지 오직 일원적으로 천지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뿐입니다

 

우리는 인과의 법을 믿습니다. 허나 어떤 사람들은 강원도 나오고 공부도 많이 하고 해서 중강中講(중강이란 사찰 강원講院의 강사 밑에서 조교처럼 강사를 받들고 학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중강 소임입니다). 되는 어떤 한 분이 언젠가 와서 삼세윤회三世輪回가 정말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 태도는 저를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안 믿는 것 같아요. 교리야 알겠지요. 이론으로는 중강이니까 알겠습니다마는 자기 가슴으로 믿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염불이나 참선을 많이 해서 우리 마음이 밝아지면 별로 안보여도 경을 안 배워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른 판단이 섭니다만 가령 육조六祖 혜능惠能스님은 일자무식이라 합니다. 긴가민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무튼 학문적인 공부는 별로 안 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5조 홍인弘忍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정통법을 받았습니다. 5조 홍인스님 밑에는 오백제자 기라성 같은 제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수神秀대사가 상수좌上首座인데 이분을 제치고 일년도 못된 행자인 혜능이 5조 홍인대사의 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 닦아서 청정하고 맑고 밝은 마음으로 우주의 본질을 바로 비추어 본다 말입니다. 이래서 받았습니다. 따라서 인과법이나 어려운 문제나 비록 학문을 안 배웠다 하더라도 염불 부지런히 하고 참선을 부지런히 해서 참선과 염불이 원래 둘이 아닌 것인데 부지런히 해서 마음이 닦아지면 알아집니다. 가령 반야심경般若心經한 편을 공부하더라도 참선을 한 철한 때와 두 철할 때의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법문인데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의 마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과법도 역시 마음이 맑은 분들은 안 배웠다 하더라도 금생에 내가 있거니 과거에도 내 생명이 있었겠지 금생에 내 생명이 있고 내 행동이 있으니 내세에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삼세인과를 유추해서라도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것에만 눈이 팔린 사람은 잘 못 믿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어두우니까 잘 못 믿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위성의 수달장자가 부처님한테 공양도 시주도 많이 했는데 수달장자의 창고를 맡고 있는 노파가 부처님을 숭배 안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만 오시면 숨어버립니다. 그러면서 딴 사람한테 우리주인은 스님한테 함부로 베풀면서 소중한 재산을 축낸다고 비방합니다. 수달장자는 부처님을 숭배하는 분이라서 자기 종이 부처님을 헐 뜯고 비방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노파를 구제할 것인가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한번은 왕가에 부처님을 초빙하는 형식을 취해서 부처님께서 왕가에 들어가실 무렵에 자기 종인 노파(비구라)를 심부름 보냈습니다. 그 시간에 부처님과 만날 수 있게 말입니다.

 

노파가 성중城中에 막 들어가려고 하니까, 부처님이 성중에 계십니다. 그 노파는 보기 싫은 부처님이 서 계신지라 금방 돌아서서 나옵니다. 허나 부처님의 신통으로 돌아서서 나오지만 또 자기 앞에 보인다 말입니다. 그래서 손으로 가리니까 손가락마다 부처님이 보입니다. 얼마나 박복하면 삼십이상 팔십종호라 그와 같이 잘생긴 부처님, 만덕을 갖춘 부처님을 보기 싫어 할 것입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손을 뿌리치고 자기 집에 돌아와서 숨어버렸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친아들인 라후라 존자한테 말씀하시길 저 노파는 나하고 인연이 없다. 그대가 가서 제도하라, 그대하고는 인연이 깊으니까, 그대가 가면 충분히 제도를 받을 것이다.” 라후라가 가서 허공에서 전륜성왕 모양을 하고서 노파 앞에 내려서니까 내려서자마자 노파가 고개를 한번 들 때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같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고 모두를 다 아신 부처님도 인연이 없으면 당신 마음대로 제도를 못합니다. 인연중생불가도因緣衆生不可道, 부처님도 인연이 없으면 제도를 못합니다. 이렇게 인연이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부처님과 저 노파는 어떤 악연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과거 무수생전에 나하고 노파하고 부부였는데 내가 나중에 여자 하나를 또 하나 봤는데 그때 노파가 하는 말이 내가 다시는 저 사람을 안 보겠다고 앙심을 품었는데 그 앙심을 못 풀어서 그것이 몇 백 생을 이어오다가 금생에 다시 만나니까 그렇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사 백천겁소百千劫所 작업불망作業不忘이라. 가사 백천 겁 동안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한 번 지은 업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연해후시因緣邂逅時 과보한자수果報限自受라 다시 만나면 보복이나 과보나 앙갚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몸 안 받고 극락에나 올라가면 안 받지만, 이런 사람 몸뚱이를 받으면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인과라는 것은 인과필연因果必然이라,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연입니다.

 

이러한 인과도 다 풀어버리고 모든 악연도 다 풀어버리는 가장 바른 길 이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근본 본체를 안 떠납니다. 우리 중생은 보통 근본 본체를 떠나고 삽니다. 경도 보고, 염불도 하고, 기도도 하고 합니다만, 보통은 근본 본체를 떠나고 입으로나 또는 옅은 마음에서 합니다. 그러나 비록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모신다. 하더라도 기도 모시는 마음 자세 근본체가 우리 인간성의 본질을 안 떠나면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런데 지금 법집法執 이라, 내가 하는 법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다른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부처님의 뜻하고 어긋나는 뜻입니다. 달마대사達磨大師6조 대사의 뜻하고 어긋납니다. 어떻게 부르던지 현상적인 것 하고 상관없이 우리 마음이 근본체를 실상을 안 떠난다 말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다 그때는 이뭣고를 부르나, 아미타불을 부르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나 모두 참선입니다.

 

선정 즉 참선, 삼매, 이 풀이를 하면 우리 마음이 본체에 안주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 이것이 참선 선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본체를 못 봅니다. 우리 인간성은 하나인 것인데 본체에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게 되면 말로는 하느님 부르나 부처님 부르나 다 참선입니다. 이렇게 해야 부처님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뜻하고 계합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안 보이는 본체에다 우리 마음을 묶을 것인가 입니다. 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안 보이는 내 마음에 부처를 머물게 할 것인가? 참선이란 말이 우리같이 참선을 평생 동안 해온 사람들은 그와 같이 간절한 말이 없습니다.

 

40년 동안 참선하고 지내왔으니 얼마나 황홀하고 간절하겠습니까? 참선하다가 죽겠다 하는 오직 그런 마음뿐입니다. 오직 가부좌 위에 살다가 가부좌 위에서 가겠다는 그런 마음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참선, 그 말 자체가 감동이나 격동을 일으킵니다. 그 정도로 전율을 일으키는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참선, 아까 말한바 같이 본래시불 본래 부처 자리, 내가 본래 부처다. 말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을 본래 부처 자리에 머물게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고생 고생들 합니다.

 

중국 당나라 때 방거사龐居士, 방거사는 집안에 계시는 거사 아닙니까, 아시는 바와 같이 인도의 대표 거사는 유마거사維摩居士, 중국에서는 방거사, 한국에서는 부설거사浮雪居士니다. 중국 방거사 이분도 굉장히 훌륭한 분입니다. 방거사가 그 당시에 마조 도일스님 이 스님도 아주 훌륭하십니다. 정통 조사이십니다. 이 스님한테 가서 무운법 즉 참문이라 거기에 참배하고 법문을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법에 끌리지 않는 사람입니까?’ 우리 중생은 만법에 끌립니다. 조금 좋으면 탐심을 내고 진심을 냅니다. 우리 중생은 모든 현상에 끌립니다.

 

그때 마조馬祖스님 말씀이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 하라서강수란 양자강인데 우리 한강의 십 배가 넘습니다. 그대가 한 입에 서강수를 들이키면 내가 일러 주마라 했습니다. 물 몇 사발도 못 마시는데 어떻게 양자강을 한 입에 들이키겠습니까? 불교에서 탄토건곤呑吐乾坤이라, 삼킬 탄, 토할 토, 하늘 건, 땅 곤자입니다. 하늘과 땅을 삼키고 토한다는 말입니다. 천지 우주를 자기가 쥐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천지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 경계가 되면 만법에 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쩨쩨한 마음 내가 있고 니가 있고, 재산, 권리, 지위 등 상대유한 적인 것에 끌리는 마음이 있으면 참다운 선을 못 배웁니다. 양자강을 한 번에 들이킬 수 있는 그런 마음 천지 우주를 삼키고, 뱉을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마음이라야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고 만법에 끌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참선할 때는 비록 이것도 저것도 배웠다 하더라도 그때는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다 놓는 공부 그 법문이 반야심경,금강경공부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있는바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입니다.

 

이렇게 보고서 딱 놓아 버려야 만이 양자강, 한강, 천지 우주를 삼키고 뱉을 수 있습니다. 둘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생활인이 되서 이것, 저것 다 뿌리치고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려우나, 참선이란 이름을 붙이고 참선할 때는 그와 같이 놓아 버려야 합니다. 가사 심상心相공부라, 자나 깨나, 앉으나 누우나 대화할 때나 공부할 때는 상대를 의식해야 하지만 정말 내가 참선해야겠구나 하고 맘먹었을 때는 나요 너요, 모든 것은 다 놔버려야 합니다. 다만 부처의 진리와 하나만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생명의 본질 우주의 본질을 부처의 경계에서 떼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려면 사실은 가장 귀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처럼 참선 공부는 제일 쉬운 것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임을 먼저 느끼고서 아직은 부처가 안보이지만 부처를 찾기 위해 애씁니다. 애쓰는데 어떤 방법이 좋을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이 공부할 때에 두 가지 성품으로 나누어서 지도를 했습니다.

 

가사 그 사람이 감성이 풍부한가, 지성이 풍부한가, 그렇게 구분해서 감성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풍부한대로 타력적인 그런 면에 역점을 두고 우리에게 지도를 했고, 지성적인 분들은 자력적인 자기 힘을 위주로 하는 그런데 주안점을 두고 지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주 목적이 있습니다. 우주 원력이 있습니다. 모든 중생을 하나로 이끌어가는 인력이 원래 있습니다. 우주가 갖추고 있는 청정한 인력이 인격화시켜서 표현할 때가 바로 원력인 것입니다.

 

중생을 근본 가운데 하나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부연시킨 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이나 더 부연시키면 사십팔원입니다. 부처님의 원력 이것이 물리적 표현으로 하면 만유인력입니다. 중생을 성불시키고자 하는 한 가운데로 이끄는 힘이 원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힘을 인격화시켜서 아미타 부처님은 극락세계에서 우리를 항시 부릅니다. 이와 같이 영원적인 하나의 힘을 하나의 길로 이끌어가는 힘을 아미타부처님은 피안에서 우리를 부른다. 이와 같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고 또는 우리를 몰아서 피안으로 가게 하는 힘, 이러한 것을 석가모니나, 각 도인들이나, 철인이나, 모두 다 하나로 돌아가라. 우리를 극락으로 몰아세우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 말로는 초환발견招喚發遣이라 부를 초, 부를 환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고, 석가모니 부처님, 보살, 도인은 우리를 가라고 재촉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는 척력斥力 인력引力이 합해져서 원력이 되어서, 우리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힘만 타면 좋은 것인데 중생은 그 힘을 못 탑니다. 아미타불은 우리를 부르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를 가라고 하는 그런 힘을 가장 가깝게 타고 가장 온전히 탄 것이 참선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 할 때는 비록 내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주의 생명의 인격적 표현 우주의 어떠한 경우도 멸하지 않는 즉 4겁을 통해서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에도 변치 않고 어떠한 생로병사에도 변치 않는 부처님 이것이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신 부처님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고, 그냥 믿으면 실감이 안 나니까, 법신 부처님의 대명사 명호를 외웁니다. 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극무생至極無生 청정보주명호淸淨寶珠名號아주 지극하고, 생사가 없고 번뇌가 없고, 때 묻지 않은 보배 이름인 아미타불을 우리가 부른다고 하면 수지탁심受持濁心이라, 탁한 마음이 염념지중念念至重이라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죄멸심정罪滅心淨이라, 죄가 절로 멸하고서 마음이 정화됩니다.

 

우리는 보통 염불이다 하면 하근 중생이 한다, 그것은 방편이다 하고 값싸게 방편으로 칩니다마는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가장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거니, 부처님 이름을 외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가깝고, 의의가 깊은 길이 없습니다. 즉 이것이 지극청정至極淸淨 보주명호寶珠名號입니다. 가장 지극하고 보배 같고 영생하는 이름이란 말입니다.

 

이름을 외우다 보면 원래 자기가 부처인지라, 부처가 차근 개발됩니다. 허나 이것도 역시 본체, 본 실상과 하나가 되는 데는 조금 미흡합니다, 그럼 이름만 불러서 될 것인가 하는 의심이 항시 나옵니다. 즉 공부란 지혜와 선정이 같이 아울려야 되는데 우리 마음은 원래 지혜와 선정이 같이 아울려있어 놔서 우리 불성공덕을 모두가 다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도 원만히 갖추어진 공부, 조화된 공부를 안 하면 빨리 같이 합치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름만 불러서는 조화에는 미흡한 감이 있습니다. 즉 이름을 자꾸 부르면 우리 마음을 안정은 시키나 지혜 개발에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이럴 때 부처님, 도인께서는 방편을 나투어서 우리 부처님, 이것은 원래 광명이거니, 우리 중생이 보는 물질광명이 아니라, 초월적인 무장무애無障無礙, 장애 없이 우주에 충만한 광명인지라, 그러한 광명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쇳송하시는 분이 나무아미타불 장엄염불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동명동호아미타불同名同號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 수가 많아서 강가나, 김가나, 박가나 모두가 동명동호同名同號라 여기 계신분이 다 똑같이 같은 이름의 아미타불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똑같은 아미타불입니다.

 

똑같은 하나의 광명의 생명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무장무애無障無礙라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리학에서 배워서 공간속에는 산소, 수소가 있다는 것을 다 압니다. 산소, 수소가 없을 때는 공기가 아닙니다. 공기 없는 공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 위의 성층권에 올라가면 몰라도 우리가 사는 공간에는 공기가 다 있습니다. 따라서 공기가 있다면 산소, 수소가 다 있습니다. 그것이 있거니, 우리 몸도 역시 그러한 원소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하고도 딱 붙어있습니다. 또 엄밀히 말하면 떨어져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각 원소로는 붙어있는 것입니다. 즉 어떠한 공간도 원소 따위가 차 있으니 원소를 구성하고 원자를 구성하는 광명, 우주의 순수에너지, 그것은 어느 공간도 빈틈없이 우주에 충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광명이 없는 공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생명의 광명, 우리 근본자리, 순수한 장 에너지 자리, 이것을 우리는 상상으로 이미지 합니다.

 

이런 말들은 제가 하는 말씀이 아니라, 위대한 도인들이 무수히 말씀하셨습니다. 서산대사의 염불하는 게송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즉염불경계心卽念佛境界, 마음은 곧 염불경계라, 부처의 경계, 생명의 광명이 충만한 경계입니다. 억지불망憶持不忘이라, 생각하고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구즉칭명불호口卽稱名佛號, 마음은 부처의 경계에 머물러 잊지 않고, 입으로는 부처의 이름을 외워서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경계를 잊지 않는 그 마음과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명호가 하나가 되면 팔만사천의 번뇌를 녹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은 법문들이 무수무량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하기 쉽고, 공덕이 많은 공부를 딱 하나 외워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저것 방법상 많은 문제를 말하더라도 너무나 혼란스러우면 우리가 외울 수가 없습니다.또는 이런 법은 특수한 도인뿐만 아니라, 정통 조사인 세친보살世親菩薩은 부처님 정통 조사 가운데서 이십일대 분이십니다. 이분도 역시 정토론淨土論이라. 법문에서 이와 같이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면서 부처님의 생명 있는 광명을 관하라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용수보살龍樹菩薩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부처님의 원력 믿고서 이름을 부르면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자기 힘이 아니라, 부처님의 원 따라 성불成佛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선정과 지혜, 우리 마음을 고요히 하는 그러한 점. 우리 마음을 비추어보는 그런 지혜, 이것이 같이 되어야 만이, 마치 새가 날개가 둘이 있어야 날듯이, 공부도 역시 우리 마음 가운데 지혜智慧와 선정禪定이 갖추어 있어서, 지혜쌍수라, 정혜쌍수라, 이와 같이해야 공부를 빨리할 수가 있고 싫증이 안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부 방식 따라서, 다른 공부도 많이 있지마는, 다른 것은 재가 불자로서는 어려운 것이니까, 재가 불자로서 일용간에 하기 쉬운 공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공부, 기도하거나, 참선하거나, 법당에서, 직장에서, 조금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공부는 역시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제일 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부처님의 이름만 불러서는 미흡하니까, 즉 지혜와 선정이 아울러야 되는 것이니까 불심이 갖춘 지혜와 선정을 같이 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가지고 계신 광명, 그 광명을 관조觀照하면서 합니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광명을 관조하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외웁니다. 이렇게 해가다가 심상 간에는 공부를 하기가 어려우니까, 될수록 자기가 기회를 만들어서, 별시別時 수행이라, 별시에 수행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어떤 때에는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기간을 정해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우리 마음에 깊이 박혀있는 번뇌를 녹여서 성불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의심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고, 너무 치우치게 느끼면 곤란스러운 것이니까, 제가 조금 더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참선하는 법은, 염불선念佛禪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고 부처님의 광명을 염하는 선 그런 선이 있고, 또 한 가지는 화두를 참구하는 선이 있습니다. 화두란 도인들이 우리 근기에 맞추어서 무슨 문제를 줍니다. 그럼 그 문제를 의심하면서, 의심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입니다. 이것도 역시 훌륭한 방법이니까 이걸로 해서도 상당히 공부가 진척되는 것이고, 위대한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이 참선만 주로 많이 하는 사람들은 모르거니와, 여러분 같은 재가불자님들은 하기가 어렵습니다. 의심 이것은 선방에서는 모르거니와 법당에서 기도 모실 때라든가 일할 때는 의심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생각하고, 또 한 가지는 묵조선黙照禪이라, 의심 없이 가만히 무념무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법이 있습니다.

 

관법觀法이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현상을 관합니다. 가령, 서쪽에 비친 해를 관한다든가, 극락세계의 물을 관한다, 땅을 관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관조한다 말입니다. 이런 관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선법에는, 염불선, 화두를 참구하는 의심하는 선, 묵조해서 화두를 안 드는 선, 지금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이 세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원불교에서는 묵조선黙照禪 아무런 문제없이 자기 마음의 무념무상으로 명상에 잠깁니다. 조계종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화두선話頭禪을 합니다. 동시에 염불선도 같이 합니다.

 

이런 것이 있다는 걸 아시고서 자기한테 맞는 법, 내가 의심하기 좋아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분들은 마땅히 자기가 숭상하는 스님한테 화두를 받아서 화두를 의심하면 무방하고, 따지기 싫어하고 가만히 앉아서 원래 부처거니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흐린 물을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고 바닥이 보이듯이, 본래 부처인 것이니 가만히 있으면 번뇌가 녹아서 우리 본성이 나오겠지 하고 명상을 좋아하는 분들은 묵조해도 무방합니다.

 

명상을 좋아하지만 따지기는 안 좋아하고, 부처님을 인격으로 구하는 마음 타력적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마음 이런 분들은 염불선이 알맞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으로, 감성으로 구하는 분들은 염불로 해서 고향같이 어버이 같이 구하는 마음으로 해야 들어맞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면 정의가 드러납니다. 제 말씀을 명심하셔서 관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자기가 외우고 싶은 데로 외우면 됩니다.

 

다만 문제는 근본뿌리가 같은 것을 느껴야 합니다. 각 부처 이름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면 참선이 못됩니다.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즉 하나임을 느껴야 합니다. 지장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모두 하나입니다. 다만 공덕 따라서 이름이 있다고 느껴야 참선이 됩니다. 하나의 진리로 뭉쳐버리지 못하면 참선이 못됩니다. 왜 못되는가 하면, 그때는 근본체를 떠나버립니다. 근본 본체를 안 떠나야 참선입니다. 아무리 웅변을 잘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체를 떠나면 참선이 못됩니다. 참선의 의미가 우리 마음이 본체에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본체는 무엇인가? 본체는 둘이 아닙니다. 일체 만법을 다 갖추었지만, 오직 하나인 법신불,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관음보살 따로 아미타불 따로 이와 같이 따로 하면 그때는 진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부르나 부르는 것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장보살을 부르나, 하나님을 부르나, 오직 하나의 진리만 딱 잡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본체와 내가 둘이 딱 맞습니다. 본체의 생명 부처님의 생명이 광명입니다. 그냥 중생이 보는 물질적인 광명이 아니라, 모든 공덕을 포함시킨 신비로운 광명입니다. 천지 우주는 사실 광명뿐입니다. 광명 위에서 각 원자가 생기고 했던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파괴되어서, 우리 중생이 다 천상에 올라가고, 물질이 파괴 될 때 다만 광명은 우주에 남습니다. 이것은 불교 학설입니다마는 텅텅 비어버리고 광명만 남습니다. 천지가 창조될 때는 중생의 공동 업력으로 광운光雲이라, 빛 구름이 우주에 충만해 가지고서 빛 구름 위에서 각 만물이 형성되고 합니다. 우주가 파괴되어도 광명은 남습니다.

그 광명이 본체이건만 우리 중생은 탐·· 삼독에 가려서 못 봅니다. 공부하면 공부한 만큼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 광명은 만능합니다. 만능하니까, 그 광명을 본 사람들은 별 신통을 다 합니다.

 

참선! 감격스런 말입니다.

우리 인류문화 가운데 가장 최고봉이 바로 참선의 문화현상입니다. 우리는 무식하다 하더라도 참선만 잡으면 벌써 문화 인류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 참선 가운데서 화두를 참구하는 그런 법, 또는 화두 없이 잠자코 자기 마음만 맑히는 명상법,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면서 부처님의 생명의 실상인 광명을 관조하는 법 이렇게 방법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면서 부처님의 광명을 관조하는 법입니다. 그런 법을 정통조사가 제일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바쁘신 여러분들은 법당에 가나, 직장에 가나 이런 광명을 관조하면서 하는 부처님 법은 제일 하기가 쉽습니다. 또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수 무량의 신들, 저급 신, 고급 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신들로 꽉 짜여 있습니다. 뇌성벽력 가운데도 우리가 공부하라고 날씨가 딱 개인 것 보십시오. 헌데 신장들이 어떤 것을 제일 좋아하는가? 신장도 역시 가장 공경한 것이 부처님입니다.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높은 신이나 낮은 신이나 제일 공경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외우고, 광명을 생각하면 어떠한 신들이나 나쁜 신도 뒤에서 우리에게 침범을 못하고, 좋은 신은 우리를 감싸고 옹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피를 입는 면에서 보나, 또는 호념護念이라, 삼세제불호념三世諸佛護念이라 부처님은 그냥 비단 일원광명이 아닙니다. 일체 생명을 갖춘 만능의 광명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즉시에 우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아십니다.

 

그런 부처님인지라, 더구나 우리가 이름 부르고, 생각하면 우리와 상통합니다. 부처님의 호념 부처님이 보호하고 생각한다는 그런 의미에서나, 천지우주의 신령이 우리를 지킨다는 의미에서나 그러기에 몽수경夢授經에 있지요, 조념관세음朝念觀世音, 모념관세음暮念觀世音 아침에도 관세음 저녁에도 관세음한다면 천라天羅, 지라地羅 신이라 하늘의 신 땅의 신들이 우리를 지킨다는 겁니다.

 

보문품普門品같은 경도 짤막하지마는 굉장히 심수오묘합니다.

부처님 이름도 외우고 높은 분들 이름을 외운다고 하면은, 부처님 이름이 가장 높고 무서운지라, 역시 모든 신들도 한 근본의 고향인지라, 그때는 좋아하고 우리를 지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모든 분들의 받들음을 받는다, 가호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나 우리 본래가 부처인지라 남이 나를 숭배한다는 점에서 보나, 사실 염불을 많이 하면 옆에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좋아합니다. 같이 염불을 많이 하면 이상하게 상통합니다.

 

우리 얼굴은 업장 따라서 얼굴이 나옵니다. 부처님 얼굴은 3280종호라, 부처님 얼굴은 백 겁 동안 모든 선을 쌓아서 부처님 얼굴이 되었습니다. 우리 얼굴 또한 코, 입 전부가 다 과거 전생에 또는 금생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업장에 따라서 알맞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일체 만유는 염파에 따라서 거기에 알맞게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처님의 가장 고귀하고 높고 무섭고 그리운 이름이 사실은 내 본이름인 동시에 부처님 이름입니다. 내 본 이름이 바로 부처님 이름입니다. 내 이름은 가짜고 말입니다.

 

내 참 이름, 가장 높은 이름, 가장 그리운 이름을 외우고서, 부처님의 실상인 광명을 이미지로 상상하는 그런 공부를 한다고 하면 자기 몸 좋고 자기 마음 좋고 부처한테 차근차근 가까워지고 말입니다. 남 좋아하고 귀신 좋아하고 신장 좋아하고 다 좋아합니다. 부처님이 지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가장 쉬운 공부로 공덕은 가장 높이 얻으시기를 바라면서 참선법회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