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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8. 화안애어(和顔愛語)

18.44-1 1987.05.13 성암사 대중공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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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안애어(和顔愛語)

(1987513일 성암사 대중공양)

 

재물 보시가 있고 그 다음에는 또 법문보시 즉 제일 보시 법보시法布施가 있습니다. 헌데 어떠한 것도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따라서 재물보시가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보답해서 법문보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 신도님들께서 오늘 이렇게 비오는 가운데 고생도 하시고, 또 여러분들이 베풀어 주신 재물보시로 해서 우리 대중들은 찰밥 공양을 참으로 흡족히 잘했습니다. 이렇게 재물 보시를 받았으니 반드시 그 보답으로 법문보시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말하기를 싫어하고 말도 잘 못 합니다만, 보답하는 의미에서 제가 법문 보시를 안 하면 저도 빚이 됩니다. 할 수 없이 빚을 갚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재물 보시와 법문 보시 그리고 또 한 가지 보시는 무외시無畏施 보시가 있습니다. 무외시 보시란 한문자로 하면은 없을 무, 두려울 외자 즉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를 뜻 합니다. 우리는 흔히 재물보시라 하면 사회 복지사업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법문 보시도 여러 가지 강습회나 법회도 많이 있어서 법문 보시는 많이 듣습니다만, 무외시 보시란 것은 조금 생소할 것입니다. 중생의 불안스러운 마음을 없애주는 보시입니다.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아주 옹졸한 사람 옆에 있으면 우리 마음도 괜히 불안스럽습니다. 헌데 아주 평화롭고 공자 같은 분을 표현할 때 춘풍 가운데 있는 기분이라고 말합니다. 덕이 많고 그 분 옆에 가면 어쩐지 향긋하고 봄바람 같은 아늑한 기운이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않고 또는 재물도 베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 표정으로 그와 같이 하는 보시, 봄바람 같고 고향같이 아늑한 느낌을 주는 그러한 보시가 무외시 보시의 하나입니다.

 

관세음보살님 상호를 보면 얼굴 자체가 삼십이三十二 대인상大人相 이라 팔십종호八十種好라 여든 가지의 가지가지 좋은 모습으로 손이나 발, 피부, 머리카락이나 모두 자비와 지혜의 덕성에 딱 알맞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일반 중생은 좀 잘났다 하더라도 눈이 좋으면 입이 좀 재미없고 그와 같이 완전무결한 분이 별로 없습니다만, 부처님 상호는 삼십이 대인상이라 어디나 모두 원만 무결합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원만 덕상도 그냥 우연히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손이 가령 부드럽거나 거칠 거나 하는 그것만도 역시 과거 전생에 공덕의 과보입니다.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금생에 화장을 별로 안 한다 하더라도 부드럽습니다. 살생도 하고 중생들한테 거칠게 대한 사람들은 금생에 피부도 거칩니다. 그런데 부처님 상호는 그러한 모든 덕상이 갖추어 있습니다. 과거 무수 생 동안에 자비와 지혜를 쌓아온 적선공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많이 공덕을 쌓았던지 그런 공덕은, 금생에 나오실 수 있는 부처님 공덕은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백겁 동안 더러는 자기 몸도 희생을 하고 재물도 베풀고 가지가지 쌓여서 그와 같이 금생에 덕상을 갖추신 것입니다. 백겁 장엄이라, 한 겁이란 무량한 세월입니다.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하물며 백겁이니까 더욱더 많단 말입니다. 그동안 어떤 때는 자기 자식도 바치고 어떤 때는 자기 아내도 바치고 그러한 가지가지 공덕을 베푼 그런 것이 금생에 나와서 그와 같이 무량 즉 백겁장엄 이라는 조금도 흠이 없는 덕상을 나투신 것입니다.

 

헌데 그 관세음보살님도 역시 아미타 부처님이나 여러 부처님께서는 그냥 설법상을 하고 계시고 이렇게 정진하는 상을 하고도 계십니다만,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손을 들고 계십니다. 이렇게 손을 들고 계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너희들 중생한테 내가 모두 바친다. 그대들 중생의 소원을 내가 모두 들어준다 하는 무외시無畏施 인 것입니다. 이렇게 손을 든 것이 중생들의 모든 두려움을 덜고 모든 고난을 구제한다는 부처님의 하나의 표식의 상징입니다. 대자대비의 서원이 곧 이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 오신 분들은 관세음보살님의 무외시 형상과 별로 다름이 없는 복이 있는 분들이십니다. 한번 그 사람을 척 대하면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그러한 정도의 인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떠나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고 하는 마음을 먹으면 곧 바로 이심전심으로 해서 형상이라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의 표징인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도 말한바 있습니다만 사람이 사십대가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사십대 이전에 찌푸리기도 많이 하고, 성도 자주내고 한 사람은 주름살이 많이 생기고 얼굴에 좋지 않은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지내고 불교에서 하는 말로 화안애어和顔愛語라 항상 부드러운 말 항상 평화로운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사십대가 되면 그것이 자기의 고정된 얼굴이 되어서 누가 보나 화평和平을 느낍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그와 같이 모두 과거가 훌륭한 분들입니다. 남한테 욕도 안 하시고 성도 안내신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옛날같이 세상의 구조가 단순할 때는 공부하기가 쉽습니다. 수양도 하기 쉬워서 산중에 한번 박혀 있으면 그야말로 방해도 거의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때는 어느 깊은 데에 있다 하더라도 아주 조용한 곳이 귀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산중에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다녀 보았습니다만 그렇게 조용한 곳이 없다 말입니다. 등산객은 조용한 데만 찾아와서 시끄럽게 합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사회는 굉장히 복잡합니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도 많고 화사한 것이 많아서 자연적으로 마음을 끌리게 합니다. 여기에 마음이 끌려가니까 그때는 마음이 더러는 텅 비어버린다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인가 하는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현재라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찾기가 참 곤란스럽습니다. 또 하도 복잡해서 과학적인 지식이 없으면 또 살수가 없습니다.

 

전기에 대한 상식도 알아야 되고 연탄 피우는 사람들은 연탄도 알아야 됩니다. 산중에서 군불이나 장작을 때면 그만입니다만, 사회가 발달되면 발달 될수록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모든 관심을 뺏어가 버리는 것이므로 정작 내가 무엇인가 하는 나의 참다운 아 불교 말로 해서 진아眞我 참 나를 찾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참 나를 어디 두고서 거짓 나만 두고서 사는 사회 같습니다. 바쁘게 지내지만 알맹이가 없단 말입니다. 도시에 가보면 뿌리 없는 나무 모양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바삐 서두릅니다만, 정말 알맹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나의 본 생명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해서 무수한 성인들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면, 내내야 한 말로 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인생의 가치 참다운 가치관을 그 분들은 밝힌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인생의 의의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밝히고 그 뒤에도 무수한 성인들이 그런 길을 지키지 위해서 애써 왔습니다. 가시밭을 헤치고 석가모니 같은 분도 태자로서 나라를 이어야 할 것인데 모두 버리고 출가 했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은 내가 무엇인가, 참다운 나는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 때문에 태어나서 늙어야 되고 아파야 되고 죽어야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정의 주부로서 여러 가지 책임責任을 갖고 계시니까, 우선 학교 잘 다니고, 재산도 모아지고, 무병할 것을 바라겠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딴 종교의 가르침이나 가르침의 현실은 그보다 더 깊은데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되고 입어야 하기 때문에 의식주가 중요해서 그런 것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만, 그렇더라도 가장 더 중요한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문제, 인간의 근본문제 이러한 데에 인간의 핵심문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이러한 핵심만 딱 들어버리면 의식주 등은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만 들어버리면 하루에 한 끼를 먹는다 하더라도 세끼, 네 끼 먹는 사람보다도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합니다. 여러분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몸과 마음이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은 우선 그것을 분명히 명심해 두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마음 이라는 순수한 생명체 위에서 거품 같이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에 불과 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사람뿐 아니라 물체 등 모든 것이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머리, , 발 등이 어떻게 해서 내 마음일 것인가. 이와 같이 소박하게 의심을 품습니다만, 저 나무나 숲이 어떻게 마음일 것인가. 그러나 나무나 사람 모양이나 하는 이런 것은 그림자 같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불교 믿는 분들은 재수를 위해서 기도도 드리고 합니다만 근본적인 것을 딱 치켜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재수나 운수는 거기에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성경도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주어지리라. 사실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구하면 그때는 사소한 문제는 거기에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불법도 어려운 말로 하면 약명요심若明了心 만법구비萬法具備라 만약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으면 만법이 다 갖추어 온다는 말입니다.

 

보시해라, 인심을 써라, 또는 자비심을 내라, 이런 말을 않는다 하더라도 내 생명이 무엇인가, 그것만 딱 알아버리면 그때는 자비심도 나오고 지혜도 나옵니다. 내 몸이나 상대의 몸이나 역시 마음이라는 순수한 것으로 구성되어 내 몸도 그림자 또는 그대 몸도 그림자 이런 그림자는 항시 존재 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소멸 되고 맙니다. 세포로 구성되어서 우리 몸이 이렇게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 몸은 단 일초간도 이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진대사를 거듭하면 우리 몸은 순간 찰나 변해 갑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잡히면 그때야 몸이 변해 가는구나, 이와 같이 인간의 감각은 이렇게 느끼지만 사실은 바로 생각할 때는 순간 찰나도 우리 몸은 머물러 있지를 않습니다. 머물러 있지를 않으니까 무상無常 이라, 항상이 없다, 덧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너무나 신수가 좋고 복이 많은 사람은 우쭐해서 이 몸 항상 있겠지, 항시 내가 부자겠지, 항상 감투가 있겠지, 하지만 내 생명이 무상하거늘 나의 재산이나 따른 권속이나 명예 그 따위 것은 더 이상 말할 나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몇 십 년 후에 나라는 존재가 있겠습니까. 몇십 년 후에는 모두 똑 같이 그때그때 인연에 따라서 무덤에 가든가 화장되든가 합니다. 화장하면 재만 남습니다. 무덤에 묻으면 버러지가 먹어서 흙이나 똥이 됩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렇게 미리 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냥 현재만 봅니다. 좀 실패하면 거기에 집착해서 고뇌하고 병이 되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만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지금 고생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고생 그것 때문에 반성도 하고 무상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신앙에 깊이 들어가면 그와 같은 보배가 또한 없습니다. 지금 잘 되어서 잘 풀린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쭐해서 세상을 모르고 살면 그것 때문에 큰 불행을 초래합니다. 인생만사는 새옹지마입니다. 불행이 오히려 나중에 행복의 씨앗이 되고, 지금 잘 되는 것이 오히려 나중에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불교를 믿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잘 모르십니다. 물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소중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세상의 인구가 50억인데 굉장히 많은 수 아닙니까. 이 가운데서 하필이면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종교도 오죽 많습니까.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인도에서는 힌두교내에도 종파가 시크교 등 무척 많습니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제쳐놓고 불교를 믿어 왔습니다. 제가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아전인수我田引水로 중이 믿으니까 불교 좋다고 할 것입니다만 불교는 아전인수를 않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느 법에 어느 문제에 집착을 않습니다. 불교는 모두를 공정하게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만이 옳다는 견해는 좁은 견해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앞에서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내 생명이 무엇인가, 인간이란 대체로 무엇인가 하는 인간의 문제를 풀이한 것은 불교밖에는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즈음 국민들은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대체로 짐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어떻게 훑어보아도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애써서 따라 가다 마는 것이 사람 이어서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비원悲願은 기독교에서는 엿 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알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때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좋게 보아집니다만 아무튼 세계종교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각각 10억 정도씩 가지고 있는데 그런 세계적인 종교라 하더라도 역시 내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 것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불교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도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실존實存을 확실히 말한 데가 없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스피노자, 야스퍼스 등 어느 누구나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기 평생 동안에 연구해 왔지만 끝내는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부처님은 간단명료하고 분명하게 명백하게 사람의 본질을 말하셨습니다. 사람의 본바탕은 곧 부처입니다. 비록 라는 존재는 탐심도 내고 진심도 내며 못나고 옹졸합니다만, 이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나, 실상實相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바로 부처임을 느끼지 못하면 불교신도가 아닙니다. 자기 생명의 본질이 부처임을 느끼고서 부처가 되는 노력 부처가 되고자 해서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불교인입니다.

 

이와 같이 느껴버리고 이렇게 노력 하면 운수나 재수 따위는 그냥 따라오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말本末이 전도가 되어서 끄트머리만 구합니다. 재수만 구하고 운수만 구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얻지 못하고 또한 핵심인 맛도 보지 못 한 채로 평생 끝나고 맙니다. 핵심을 구해야 합니다. 시냇물을 건너가는데 경망한 토끼는 펄쩍펄쩍 뛰면서 물위를 건넙니다. 말은 무겁고 덩치가 커서 반쯤 물에 잠기어 건너갑니다. 코끼리는 더 무겁고 덩치가 커서 뚜벅 뚜벅 바닥까지 발이 닿으면서 물을 건너갑니다. 우리의 신앙하는 태도를 부처님께서는 그와 같이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벼운 사람은 마치 토끼가 물을 건너듯이 바닥은 못 보고서 겉만 수박 겉핥기로 보면서 건너갑니다.

 

그러한 신앙 태도는 부처님 가르침의 참다운 핵심은 모르고서 이기적으로 자기 공리 이익만 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정말로 무상한 것인가 하고 부처님 법문을 좀 따르는 것은 말이 시냇물을 건너는 것에 비교할 수 있고, 내 본바탕이 내 본 생명이 부처거니 염불을 하거나 주문을 외거나 부처님께 천 번 만 번 절을 하거나 모두가 자기 성불을 위해서 일체중생의 성불을 위해서 불교를 믿은 것은 코끼리가 물의 바닥을 밟으면서 터벅터벅 건너가는 것에 비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왕 믿으면 토끼 같이 믿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는 업장에 가리어서 못 본다 하더라도 우리의 본바탕은 반드시 부처님입니다. 또는 어떠한 것도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품을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이름을 붙여서 표현하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등이 됩니다. 부처님 불성의 공덕은 한이 없이 많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어떻게 헤아린다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제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 몇 천 년, 만년 헤아린다 해도 부처님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 공덕은 한이 없이 많습니다. 즉 우리의 불성 공덕은 그와 같이 많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역사적인 사람으로서 그러한 불성공덕, 부처님의 공덕을 제대로 온전히 깨달은 분이란 말입니다. 지금 박 아무개 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지금 깨달아 버리면 박 아무개 부처님입니다. 불경 보면 부처님 이름이 굉장히 많습니다. 나무동방유리광여래불, 나무금륜치성광여래불 등 부처님 이름이 굉장히 많은 것은 부처님 공덕이 그와 같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 공덕이 한없이 많으니까, 약으로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부처님 이름은 약사여래란 말입니다. 부처님이 자비심으로 구고구난救苦救難 이라, 중생의 고난을 구제하고 어려움을 건져주는 부처님 이름은 관세음보살이며, 지혜로써 중생의 무명을 깨뜨려주는 부처님 이름은 문수보살, 대혜지보살 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을 모두 모아서 총 대명사로써 부르면 나무아미타불 아미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둘이 있고 셋이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님 공덕은 원융무애 하여 한이 없습니다.

 

역시 급하고 하더라도 생사를 초월하는 길, 자기가 내쉰 숨 한번 거두어 못 들이면 그러면 죽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 사람이 몇 년 뒤에는 여러분한테 말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만 생명은 그와 같이 무상한 것입니다. 보살한테 문병할 때는 고, 무상無常, , 무아無我, 인생은 모두 괴로운 것이고 인생은 모두 무상無常한 것이며 또는 공인 것이고 또는 내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無常·무아無我를 알아야만 고··무상無常·무아無我에 사무쳐야만, 참다운 상락아정常樂我淨 이라 <녹음 끊김>

 

내가 없는 것을 중생은 있다 하고 괴로운 것을 중생은 낙이라 합니다. 대통령 되기도 얼마나 괴로운 것입니까. 그것이 사실은 괴로움뿐인데 좋다하여 하려고만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 사명감도 있겠습니다만, 인간세상은 부자나 감투나 무엇이나 괴로움뿐입니다. , 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현상계는 모두가 고··무상無常·무아無我, ··무상無常·무아無我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금으로 만든 행운의 열쇠 같은 선물보다도 고··무상無常·무아無我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무상無常·무아無我를 바로 보아야만 참다운 불성佛性을 보아서 불성의 공덕 즉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며 안락무위해서 영원히 행복한 것이고 또한 신통 자재하는 대아大我를 성취하는 것이며, 조금도 번뇌가 없이 청정한 것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성취해야 우리는 비로소 생사를 떠난 영원의 세계에서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록 우리가 더디게 간다 하더라도 여기에 오신 분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서 돈오頓悟를 하셔야 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돈오頓悟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나한테 막히고 너라는데 막혀 있습니다. 그러한 폐쇄된 구속된 마음을 활짝 열어서 본래 부처라. 천지 우주는 물질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마음뿐이라. 심성心性이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서 물질이 되는 것이지 물질은 사실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병의 뿌리가 없듯이 사실은 물질의 뿌리도 없습니다. 다만 거품이 모아서 된 것이 우리의 몸과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공취空聚, 우리 몸은 텅 빈 공기운이 모여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잘 못 보기 때문에 내 몸, 내 손하며 거기에 집착한단 말입니다. 죽은 뒤의 우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화장한 뒤에 무엇이 남습니까. 내 눈, 내 코, 내 예쁜 손도 그때는 없습니다. 없는 것을 위해서 우리는 너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영생하는 것은 오직 마음입니다. 마음 단장에 힘써야지 몸은 결국 썩고 마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흔적도 없다는 말입니다. 흔적도 없는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다만 최소한의 것에서 우리는 만족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죽음을 생각 합니다. 죽은 뒤에는 내가 지은 업장만 남습니다. 내 불성위에 더덕더덕 낀 업식業識만 남습니다. 그걸 따라서 욕심이 많으면 아귀로 가는 것이고 남 미워하고 살생 많이 했으면 지옥 가는 것이며, 잘해야 사람으로 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분명히 알고서 우리의 주인공은 마음뿐이니까 불심에다 단장도 하고 장엄도 하고 해서 비록 금생에 성불은 못해서 증오證悟는 못한다 하더라도, 해오解悟한 가운데 한 걸음 한 걸음 자성불自性佛, 자기 불성佛性자리에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가 할 인간대사人間大事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상無上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꼭 이 자리에서 마음을 열어 돈오頓悟를 하셔서 그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모두가 부처뿐이구나, 사실 물질은 허깨비이구나, 이와 같이 느끼셔야 합니다. 허깨비, 거품, 그림자, 메아리 이런 것이 물질인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 모이신 공덕으로 정진대중은 모두 해오解悟를 하신 분들입니다. 오직 문제는 결국 증오證悟 남았습니다. 증오證悟를 꼭 하셔서 명년 해제 때는 반드시 그야말로 구해탈俱解脫하는 선정해탈 · 지혜해탈 모두 해탈 하는 명실상부한 사문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재가 불자님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여기 오셔서 그때그때 공부하시기 바라고, 또는 집안에 계시더라도 염불念佛도 본체本体를 여의지 않으면 참선인 것입니다. 염불念佛이나 주문이나 본체 불심佛心을 여의지 않으면 모두가 참선인 것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셔서 한 걸음 한 걸음 불성에 가까워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이만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