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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20. 부처의 경계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지혜입니다.

20.1986.10.05 정기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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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부처의 경계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지혜입니다.

(1986. 10. 05 정기법문)

 

 

여러분들은 지금 방금 입정入定을 하셨습니다마는 입정이란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삼매에 드는 것인가? 우리가 막연히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삼매에 드는 것은 보통 독서삼매니 뭐니 하는 것은 상대유한적인 것에다 마음을 모으는 것이고, 참다운 삼매란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고,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 하나로 합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즉 범성일여凡聖一如, 즉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고 또 불범일여佛凡一如,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고, 또는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고, 이와 같이 일원적으로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 삼매입니다. 그래야 참 삼매입니다. 우리가 공부 할 때나 법문할 때 입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분산된 마음을 하나의 진리로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삼매가 되고 입정이 됩니다. 삼매에 드는 것이 입정이란 말입니다. 즉 정 이것이 삼매입니다. 삼매가 정이고 정이 삼매입니다. 입정의 정 이것은 고요할 정자가 아니라. 정할 정[] 마음을 진리에 정해버리는 정할 정자 그 정에 드는 삼매에 드는 이것이 입정入定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한없는 것을 구합니다. 욕심을 내는 것도 한 번 성내는 것도 한도 끝도 없이 불같이 성을 냅니다. 자기 몸을 희생도 하고, 불살라 버리기도 하고, 이것이 끝도 한도 없는 성[]입니다. 마치 그럴 때의 불같은 마음으로 해서는 천지 우주를 다 불태워 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 지혜로 역시 공부를 해본 사람은 생각해보면 알지만,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습니다. 음악도, 미술도 다 하고 싶습니다. 이와 같이 어느 쪽으로나 우리 중생은 한도 끝도 없이 무한을 구합니다. 가령 욕심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 산보다 더 큰 금덩이가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금덩어리를 구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화나 재물이나 한도 끝도 없이 구하려고 합니다.

즉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느 것이나 무한을 구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 몸 자체가 유한한 존재 인지라 항시 유한적인 것에 멈춰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만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즉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구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순입니다.

 

이러한 무한을 구하는 마음이 어느 때에 가서 만족할 것인가. 이것은 성자가 되어서 천지 우주가 내 것이 되어 둘이 아닌 경계 이러한 경계가 아니고서는 인간의 욕망은 만족을 못 채웁니다. 우선 그러한 천지 우주가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닌 경계 천지 우주가 내 것이 되는 경계 그런 경계에 이르기 위한 방법적인 인간의 재물, 인간의 조건, 이러한 것이 칠성재七聖財입니다.

 

일곱 가지의 재물입니다. 우리 중생은 물질적인 보화나 학문이나 기능을 구하지만, 성자는 물질, 기능, 학문을 하나의 방법으로 구하는 것이지 목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데 성자의 재물은 방법을 떠나서 목적을 위한 참다운 재물을 구합니다. 이것이 칠성재七聖財. 칠덕재七德財 그럽니다. 즉 말하자면 보통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덕이 깃들어있는 재물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칠성재를 갖추어야 만이 인간이 구하는 무한의 재물, 즉 영원적인 재물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칠성재, 칠덕재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인간이 구하는 참다운 행복 영원의 행복을 보장하는 무한의 보배는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칠성재인가? 맨 처음이 신 믿음입니다.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탐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방법적으로 의심하는 공부가 있다하더라도, 먼저 진리에 대한 의심이 없이 믿고서 그리움에 진리를 깨달기 위해서, 진리란 과연 어떤 것인가. 진리의 무한공덕은 의심하면 모르되 처음부터 의심하면 우리가 진리에 못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진리를 못 봤지마는 성자의 가르침이나, 그런 증언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먼저 믿어야 합니다. 진리는 분명히 있다. 처음부터 회의론자는 진리에 못갑니다. 각 성자가 교지한바 절대적인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진리를 믿는 다음은 계입니다. 아무렇게나 해서는 진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말로 계행불청정戒行不淸淨하면,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 이라 우리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한 삼매가 못 나옵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살생하고 사음하고 욕하는 태도로 해서는 우리 마음이 안정이 안 됩니다. 즉 삼매가 못 됩니다. 마땅히 청정계행, 몸으로 바른 행동, 말로 바른 언어, 생각으로 바른 생각을 해야 만이 삼매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계행을 지켜야 합니다. 도덕적 행동으로 조화를 지켜야 합니다.

 

그다음은 참이라 참괴懺愧 자기가 지은 행위에 관해서 자기 스스로 참회하는 것을 참 이라고 하고 남한테 대해서 대인적인 참회는 괴 라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뉘우치고, 남한테 뉘우친다 말입니다. 참괴라 무참괴중생無慚愧衆生이라 참회할 줄 모르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공부가 안됩니다. 호법선신도 안 돕습니다. 참괴를 해야 만이 우리 마음에 누적된 번뇌가 녹아집니다. 내가 잘 못했구나 이렇게 한번 마음먹을 때, 자기 마음의 잠재의식에 심어있는 번뇌종자는 그만큼 소멸됩니다. 참괴懺愧라 자기한테 뉘우치고, 남한테 뉘우칩니다.

 

그다음은 다문多聞이라, 많이 듣습니다. 쓸데없는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진리에 관한 바른 교법을 듣는다 말입니다. 우리가 바른 법문을 모르면,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고난이 많은지라 고난의 가운데 서는 그때그때 바른 판단을 못합니다. 그러나 법문을 많이 들으면, 그때그때 어려울 때에 바른 판단이 척척 나와서 해결해 나갑니다. 따라서 그런 부처님의 성불에 관한 바른 지혜를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다음은 사리捨離라 버릴 사[] 떠날 리[], 우리가 무슨 법을 증명하지 못하면 자꾸만 자기가 아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화엄경華嚴經본 사람은 화엄경에 집착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본 사람은 반야심경에 집착을 합니다. 그와 같이 중생은 진리의 체를 근본을 증명하면 집착을 안 하지만 진리를 증명하지 못하면, 자기가 본대로 나름대로 얽매이고 맙니다. 얽매이면 남하고 불화스럽게 됩니다. 또는 고집하면 자기 마음도 훤히 안 트입니다. 훤히 안 트이면 진리와 계합이 못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 자기가 소중한 진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착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허망한 것이구나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내용, 개념은 사실은 별 다름이 없는 것인데 하나님은 높게 보고, 부처님은 낮게 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개념은 차이가 없는데, 이름 따라서 집착하고 시비합니다. 이런 마음이 사리捨離 않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다 버려서, 어떤 표현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가 어떤 진리를 지향해서 애쓰고 해야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리입니다. 공부한 사람들, 양심 있는 사람들이 사리를 잘 못 합니다. 내 의견이 옳다고 하면, 자기 마음이 옹졸해지고, 남하고 화합도 잘 못합니다. 지금 각 불교 종단이나, 기독교 각 분파도 역시 각기 사리를 잘 못하는 데서 수많은 종파가 생깁니다. 사리 해버리면 우리가 하나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행동은 최선을 다 할망정, 표현을 가지고서 자기 고집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남한테 보시한다 하더라도, 보시한 행동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은 지혜知慧, 참다운 지혜입니다. 상대유한적인 무엇을 많이 아는 지식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지식과 지혜를 구분해서 이해합니다. 지식은 우리 의식으로 범부의 유한적인 학식이나 앎이 지식이고, 참다운 지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해탈로 인도합니다. 영생의 부처의 경계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지혜입니다. 참다운 믿음, 몸과 입과 뜻으로 바르게 행동을 취하는 계율, 우리 잘못을 뉘우치고, 남한테도 사심 없이 자기 참회하는 참괴慙愧, 진리를 많이 듣는 다문多聞, 또는 진리에 집착 않는 사리捨離, 또 참다운 영생 해탈의 지혜智慧, 이것이 성자가 갖추어야할 재물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물질 면에서 불공정이 많이 있습니다. 허나 인간 자체가 불공평해서 어떤 사회가 되나 완전무결한 평등은 없습니다. 사회적인 구성 문제를 여러분이 더 잘 아십니다마는 이러한 빈부의 격차, 구차한 사람들 구제 때문에 젊은 사람들 소리가 높습니다. 이것도 물론 참 좋습니다. 좋으나, 어떤 것이 정말로 구차한 것인가, 어떠한 것이 참답게 가난한 것인가? 어떤 것이 참답게 부자인가 하는 한계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정신적인 빈곤 마음의 가난은 물질의 가난보다 훨씬 깊은 것입니다.

 

석가釋迦, 공자孔子, 예수 같은 분들은 물질의 가난을 문제시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난행 고행한 것은, 물질적인 가난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야 석가모니가 왕자니까 자기가 재산을 보시해서 남 줘버리면 그만이겠지요. 허나 구태여 거기를 튀어나와 설산에서 고행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마음 구제, 정신적인 빈곤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위인들의 전기를 봅니다마는, 어떠한 위인들이나 대부분 다 가난한 가운데, 고난을 극복해가지고 위대한 인격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걸 본다 하더라도 사실 구차한 것은, 빈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정부 당국이나 위정자는 그런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서 과감히 해야 합니다마는, 인간 자체를 생각할 때는 절대로 가난한 것이 불행만이 아닙니다. 저는 승려니까 저한테 와서 집안이 안 된다 하고 호소를 많이 합니다. 허나 사실은 그런 것이 별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불행하기 때문에 불행 그걸로 해서 보다 더 큰 행복이 분명히 올 수가 있습니다. 맹자님 말씀도, 위대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으로 해서 그 마음을 공고히 다진 다음에 위대한 대임을 맡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은총으로 해서 반드시 불행을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이기면 은총이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선 링컨을 보십시오. 링컨도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분도 그런 밑바닥의 고생이 아니면 그런 위인이 못 나옵니다. 저 같은 사소한 중도 과거에 군대 생활도 하고, 형무소에도 가서 보고, 그런 생활 때문에 어느 정도 인간이 약간 단련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더라면 항시 우쭐거리고 심각한 일도 깊이 못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회적인 불공평을 제도할 때는 마땅히 그런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부자는 다 나쁜 놈이다! 그냥 이런 식으로 함부로 날뛰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그렇게 해놓고 보면 나중에 다시 반등이 또 일어납니다.

 

우리는 정부나 사회기관은 자유나 평등을 위해서는 최대한의 과감한 시책을 취해야 되지만, 우리 종교인들은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마음의 풍요, 덕재, 성인의 재물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다하더라도, 이것만 가지면 행복스럽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토굴에서 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양재기나 몇 개 있고 할 때는 참 마음이 푸집니다. 그러나 전기가 있고 무엇이 있고 하니까 도리어 마음이 옹졸하고 거북합니다. 부담만 많고 물론 우리 수행자는 사회생활 하는 여러분과는 다르지만, 아무튼 이와 같이 성자의 길, 해탈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 많으면 자꾸 얽힙니다. 우리 수행자는 같은 걸망이라도 걸망에 무엇이 많이 들어있으면 공부가 덜되고, 걸망에 많이 안 들어있으면 공부가 더 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표준은 아닙니다마는 그런 말을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것저것 얽힌 것이 많다 보면 해탈이라 다 풀어야 할 건데 물론 마음의 번뇌를 풀어야 하지만, 몸에 이것저것이 있으면 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재산이 많이 있고 회사가 많이 있고 하면 평생 동안 공부를 못합니다. 역시 무량의 보화, 무량의 보배는 덕재德財입니다. 참다운 진리를 믿는 것, 또는 진리를 따라서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 우리의 나쁜 행동을 참회하고서 자기 마음속에 들어있는 나쁜 종자를 버려버리는 것이 참회, 참괴 아닙니까? 그리고 진리를 많이 들어야 만이 역시 우리 마음의 구석에 들어있는 잘못된 생각이 없어집니다. 우리 마음은 어둠과 광명의 싸움입니다.

 

얼만치 우리 마음이 어둠이 더 많은가, 얼마만큼 광명한가? 양심 있는 사람은 어둠보다도 광명이 많이 있는 사람 아닙니까? 성자는 완전히 광명뿐인 마음입니다. 이런 진리를 많이 들으면, 우리 마음이 들은 만큼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은 증장됩니다. 이러한 다문 또 아무리 좋은 것도 집착 않는 사리, 참다운 해탈의 지혜, 이것이 참다운 보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보배를 재산의 중심으로 하고, 나머지 문제는 그때그때 최선만 다하면 됩니다. 여시법如是法 시칠성재是七聖財 이와 같은 법의 일곱 가지, 참다운 거룩한 재물은 피제중생불어차 모든 중생이 이러한 성자의 재물을 얻지 못하면 극빈궁極貧窮이라 아주 가난하다는 말입니다. 참다운 가난한 것은, 성자의 재물, 덕재가 없는 것이 정말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빈곤만 안 되면 물질의 가난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고 고난의 가운데서 우리가 많이 배웁니다. 그리고 아시는 바와 같이 법사님들의 법문에도 많이 나왔지만, 사실 고생스러울 때 인생을 더 많이 배웁니다. 고생스러울 때 우리 업장을 빨리 녹입니다. 순탄할 때는 가사, 과거세에 아홉의 업을 지었다 하면 업을 지은 것이, 우리가 행복스러우면 우쭐거리면서 아만我慢만 키우는 가운데 그런 업을 못 녹이지만, 고생 가운데 좌절이 되고 실패하고 그런 가운데 반성하고 참회하면서 업장을 녹입니다. 사실은 고생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업장을 더 빨리 녹이는 것입니다. 그런 심심미묘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지옥도 역시 지옥고地獄苦를 받는 가운데, 다생겁내多生迲乃로 많이 지은 업장을 벗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하나의 진리로 뭉쳐 있어서, 어떤 것이나 무의미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가령 사회에서 살인자가 있다고 합시다. 살인자는 밉고도 나쁜 사람입니다. 허나 살인죄를 지었다는 그걸로 우리에게 귀감을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 은혜 가운데서 은승창렬은隱勝彰劣恩이라. 나쁜 것을 내보이고 좋은 것을 숨기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보면 살인 죄인도 부처님 화신인데, 살인죄라는 그 무시무시한 나쁜 것을 보이면서 부처님의 좋은 것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말입니다. 물론 살인 죄인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런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사바세계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 없습니다. 중생이 바로 못 볼 뿐입니다. 은승창렬은隱勝彰劣恩이라. 승을 감추고서 나쁜 것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은혜가 부처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중생이 이러한 거룩한 재물을 못 지키기 때문에, 고명극빈궁故名極貧窮이라, 이것보고서 왈 가난하고 구차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이열반경涅槃經이나 보적경寶積經이런 훌륭한 대승경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부처님 말씀을 잘 알고 좋은 말씀도 잘 한다 할지라도, 정작 내가 어떻게 성불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에 관해서 그런 방법론이 애매하면 깊이 공부에 못 들어갑니다. 내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불자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으실런가 모르지만, 우리 같은 평생 동안 진리하고만 시름하는 사람들은 수행 방법적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떻게 내가 무슨 방법으로 공부할 것인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우리가 공부하는데 그 방법이 자기한테 안 맞으면 노력을 많이 해도 그 성과는 없습니다.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꼭 성자가 가는 길, 석가모니가 공부한 길, 정통조사祖師가 공부한 방식, 그런 방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자칭 도인이나, 무엇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함부로 한 말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습니다. 성불하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하고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염불 아닙니까? 무슨 공부를 하나 염불하는 그런 마음은 항상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를 생각하지 않은 공부가 있습니까? 마치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은 공부가 없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인도 역시 먼저 근본적인 요체를 구해야 합니다. 가지나, 잎 등 지엽적인 문제만 가지고서 하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공부에 깊이 못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불교 법문 가운데, 약능요심若能了心하면, 만약 마음을 깨달으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 가지 가운데 다 들어있습니다. 근본만 깨달으면 나머지 문제는 다 따라오는 것인데, 근본을 못 구하면 자꾸 얽히고설키어 곤란합니다. 염불하는 마음은 근본의 마음입니다. 그럼 염불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 있는가? 염타불念他佛이라, 부처님을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훌륭한 스님들의 좋은 법문도 많이 있는데, 어떤 분들은 염불을 잘못 이해해서 염불을 다만 근기 약한 일반중생들이 한다. 근기가 강하고 수승한 사람들은 참선이나 하지 염불은 필요 없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염불과 참선의 한계를 잘 몰라서 그럽니다. 염불 이것은 근기 낮은 분들한테 대해서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임시로 말씀하신 말입니다.

 

부처님은 밖에 있다.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우리 마음밖에 두고서 마음 밖에 있는 부처님을 타력적으로 우리가 흠모하고 추구하는 식의 염불은 염타불念他佛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마음이 익어져서 부처님은 마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부처님은 자기 마음 안에 있다. 자기 마음 안에서 부처님을 구한다. 이것이 염자불念自佛입니다. 즉 자기 안에서 구하는 염자불念自佛입니다. 따라서 염불하는 차원의 순서로는 염타불에 비해서 염자불이 더 높은 셈입니다. 이것은 밖에서 부처님을 앙신仰信으로 구하는 것이고, 염자불은 우리 자성불自性佛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 가운데 부처님이 계신다. 사실은 부처님은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본질로 해서만 부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내 밖에나 어디에나 빈틈없이 우주에 충만해계십니다.

 

내 밖에, 내안에 언제나 어느 곳에나 계신 부처님, 이것이 염자타불입니다. 그래서 염자타구염불念自他俱念佛이라, 밖에나 안에나 모든 것을 함께 구한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해야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그러나 보통 법당에 불공을 모시는 아직은 무지한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마는, 물론 불공은 모셔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거와 같이, 부처님을 내안에, 내 밖에, 천지 우주에 가득 찼다는 느낌으로 모시면 좋지만, 그러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지만 다만 부처님을 밖에서만 구하면 그것은 하나의 방편 밖에 안됩니다. 우리는 공들이면 들인 만큼 있다고 하지만 큰 공은 못됩니다. 마땅히 천지 우주에 어디에도 계신다는 이와 같이 염자타구염불念自他俱念佛을 생각하면서 모셔야 합니다.

 

법당에 부처님은 불상을 모십니다마는 불상 이것은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나무나 쇠로 만든 것에 부처님이 들어 계신 것은 아닙니다. 천지 우주에 계시는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허나, 천지 우주 안 계신데가 없거니 그런 동불銅佛이나, 석불石佛이나 모두 불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볼 때는 천지 우주 모두가 한계가 없습니다. 즉 간격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뿔뿔이 봅니다마는 사실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전자현미경을 본 일이 없습니다마는 전자현미경으로 본다고 하면, 천지 우주가 이렇게 안 보이고서 하나의 가스체, 가스보다도 더 희박한 공기 같은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 이쁘다, 밉다, 사람이다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제한된 안목으로 봐서 그렇게 보입니다. 사실은 그와 같이 미세한 것으로 본다면 보다 부처의 안목으로 본다면 그렇게 안 보입니다.

 

전자현미경으로만 봐도 가스체로 보이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엄밀하고 투철하고, 가장 본질을 볼 수 있는 안목 불안佛眼, 부처님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다 불성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불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불상이나, 쇠로 만든 불상이나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허나 우선 상대유한적인 의미에서라도 역시 법당에 모신 부처님은 천지 우주의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그래야 공부도 되고 성불의 길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됩니다. 중복됩니다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니까 상식적으로 알아두기 위해 말합니다.

 

염불을 구분할 때 부처님을 자기 밖에서 생각하는 염타불念他佛 또는 자기 마음의 본질로 생각하는 염자불念自佛 또 자기 마음 밖에나 안에서 함께 구하는 염자타구염불念自他俱念佛 또 한 가지 구분은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 즉 부처님의 이름을 외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관음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라 부르는 것은 칭명염불稱名念佛입니다. 부처님의 대명사, 이름을 외운다 말입니다. 아라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라한을 모시는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가를 천도하는 때에는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이나 지장보살을 부르고, 그와 같이 부처님의 이름을 많이 있으나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뿔뿔이 생각했을 뿐입니다. 공덕 따라서 붙는 이름을 외우면서 부처님을 외웁니다. 이것이 우선 가장 하기가 쉽고 다음은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어느 상호, 즉 부처님의 화상을 생각하면서, 화상이 지금 눈앞에 없다하더라도 부처님은 훌륭하구나, 부처님의 공덕은 끝없구나 하고 부처님의 공덕이나 화상을 염하면서, 관념적으로 하는 염불, 이것이 관상염불觀想念佛입니다. 그다음은 역시 음은 똑 같은 관상염불觀像念佛이라, 부처님의 상을 앞에 놓고 아미타불, 관음보살의 부처님의 형상을 앞에 놓고서, 우리가 보면서 부처님과 닮아가겠다 하는 그러한 부처님의 상을 놓고서하는 것이 관상염불觀像念佛입니다.

 

그다음은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이것은 아까 말한 염자타구염불念自他俱念佛과 같은 염불입니다. 즉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를 합해서 모든 존재의 근본, 실상, 일체생명 존재의 실존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 실상염불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실상염불에 와서 비로소 올바른 참다운 염불입니다. 어떤 염불이나 공이 있지만, 가령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른다하더라도, 염불은 우리가 불교를 믿는 한에는 평생 해야 합니다. 불교를 안 믿고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역시 표현이야 이름만 다르지 염불은 염불입니다. 하느님도 부처님이나 같은 것이니까요.

 

따라서 여기 있는 법문의 한계를 잘 외워두어야 그때그때 혼돈을 안 느끼고서 누구한테든지 바르게 전달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설사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이름만 외워도 밖에 계시니까 우리를 구제한다. 복을 준다하는 즉 염타불식으로 이름만 외우면 별로 큰 공은 없습니다. 마땅히 이름만 외울지라도, 내 마음 자세는 맨 나중에 있는 실상염불이라, 천지 우주를 우리가 부처로 보고서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타의 구분이 없고 일체만유가 오직 부처님뿐이구나. 우리가 미처 못 봐서 그렇지 바로 보면 부처님뿐이구나. 천지우주는 하나의 부처님 생명이구나.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절대적인 생명, 생명에다가 마음을 안주를 하고서 부처님의 이름을 불러야 참다운 칭명염불이 됩니다.

 

지금 우리네 어버이나 할머니들은 보통은 실상염불을 모르고서 칭명염불稱名念佛을 합니다마는, 그런 분한테도 타일러서 실상염불實相念佛에 마음을 두고서 외우도록까지 유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덕이 많습니다. 그래야 자성이 맑아져서 성불의 길로 걸음걸음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불들이 그때그때 어디에 응용하는가? 응용 따라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다음은 수식염불數息念佛이라. 수식이란 호흡을 하는 것인데, 호흡을 헤아리고 호흡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주로 호흡법하는 사람들이 그냥 호흡하기가 곤란하니까, 부처님의 이름을 들숨, 날숨에다 맞춰서 염불합니다. 자기 호흡에 맞추어 염불하는 것이 수식염불입니다.

 

그다음은 참구염불參究念佛 이것은 이름을 안 외운다하더라도, 자기마음속으로 내 본 성품이 부처거니! 천지우주의 본바탕이 부처거니!’ 이와 같이 부처님을 믿고서 부처를 구하는 염불입니다. 이것은 소리 안내고 마음으로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간화염불看話念佛이라 참선하는 분들이 화두 하는 분들이 의심하는 화두가 있는데 무자無字화두가 있고 뜰 앞의 잣나무 등 화두가 천 칠백이나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의심하는 화두 대신에 아직 우리가 부처가 못됐으니까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천리만리 먼 길이니까, 부처님을 하나의 명제로 하고서, 부처를 구하는 문제를 하고서 부처를 구합니다.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을 화두로 해가지고서 구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명호, 이름을 화두로 해서 구하는 염불, 이것이 간화염불看話念佛입니다. 또는 융통염불融通念佛이라, 융통성 있게 이것저것 안 치우치고 어떤 때는 의심했다가 어떤 때는 가만히 있어 보았다가, 우리 인간의 심리는 원래 원만한 것이어서, 어떤 때는 의심도 하고 싶고 어떤 때는 백 퍼센트 믿고도 싶고 그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한 갈래가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 내키는 대로 영원적인 부처님을 의심도 해봤다가 무념무상으로 해봤다가 염불도 해봤다가 마음의 집착 없이, 부처님의 법 따라서 원융무애하니 하는 것이 융통염불입니다.

 

그다음은 관음염불觀音念佛 부처님의 자비심은 우주에 충만한데, 부처님은 그야말로 자비요 지혜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 부처님께서 나오신 것은 다 관음觀音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 안 나오신 것이 없어서, 사실은 일체만유가 다 관음 화신입니다. 잘나고, 못나고,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떤 산하대지 모두가 다 관음 화신입니다. 산도 물도 관음 화신입니다. 천지 우주 모두가 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성령인 관음이구나 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릅니다. 관음보살도 역시 이름을 부르면 날 구제하겠지, 나한테 복이 오겠지 하면 저급한 염불입니다. 관음과 내가 둘이 아니고, 일체 만유가 관음과 둘이 아닌 경계, 모두가 일체 존재가 관음 화신이라는 경계, 이런 것을 납득하고서 염불해야 만이 참다운 관음 염불인 것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아미타불하는 미타염불 또는 미륵염불이라,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근본이 하나임을 알면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불경을 보시면 부처님의 여래십호가 항시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공덕이 많으니까, 이름을 붙이면 하도 많으니까 많지만, 보통 열 가지 이름으로 공덕을 찬탄합니다. 즉 하나는 여래如來, 진리에서 왔다. 진리에서 그대로 오셨다. 우리 성자는 다 여래 아닙니까? 성자는 진리 그대로 왔으니까, 진리에서 바로 조금도 흠이 없이, 진리 그대로 표현된 분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여래라, 여법이 왔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여라 하여 여여如如는 진리 같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응공應供이라, 마땅히 일반 모든 존재의 중생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 같이 번뇌가 남아 있으면 중생의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은 아직은 미달합니다. 허나 부처님만이 번뇌를 녹여 버려서, 나와 네가 둘이 아닌 부처님만이 참답게 일반중생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응공입니다. 다음은 정변지正徧知라 바르고 보편적인 지혜라,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우주의 모두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를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한도 끝없이 부처님의 지혜를 다 아시는 겁니다. 일체를 다 알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이와 같이 정당하면서도 보편적인 치우침이 없는 앎. 이것이 부처님의 공덕입니다.

 

그다음에 명행족明行足이라, 부처님의 지혜가 밝아서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지혜와 행동을 원만히 갖추고 앎 뿐 아니라 실천도 갖추고 있습니다. 다음은 선서善逝, 부처님은 중생이 아니라, 바른 행동만 취하고서 참다운 영생의 피안으로 바로 가신 분입니다. 물론 피안에 머무르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지만, 부처님은 바로 가시고 바로 오신 분입니다. 바로 오신 것이 여래요, 바로 가신 것이 선서입니다. 진리의 바다에서 바로 오시고, 바로 가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진리와 바다에서 바로 오시기 때문에 여래고, 진리의 바다로 가시기 때문에 선서입니다.세간해世間解,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도인들은 도인적인 법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합니다. 장사나 정치를 다 알아야 합니다. 참다운 지혜는 다 알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에 그때는 정변입니다.

 

또 무상사無上士, 인간이나 천상가운데 부처님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라 부처님같이 높은 분이 없기 때문에 무상사無上士, 다시없는 훌륭한 분입니다. 또는 조어장부調御丈夫. 인간의 탐욕심이나 성내며 불뚝거리는 흥분하는 마음이나 무명심이나 모두를 눌러서 조복을 시켰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마음의 적이 밖의 적 보다 더 무서운 것 아닙니까? 마음의 번뇌가 더 무서운 적입니다. 지금 사람은 밖에다만 외쳐봅니다만, 보통은 사실은 자기 마음의 원수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참다운 원수는 자기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의 일체 번뇌를 조복시킨, 정복한 분이 조어장부調御丈夫입니다. 다음은 천인사天人師, 하늘과 인간의 스승, 인간뿐만 아니라 무수한 천상도 있습니다.

 

보통 말할 때는 이십 팔천이라 하지만 무수한 천상, 몇 천개 몇 만개 천상이 있습니다. 그런 천상과 인간을 합한 스승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천인사입니다. 또는 불세존佛世尊이라. 사바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높은 분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입니다. 한도 끝도 없지만 이와 같이 열 가지로 해서 각 불경에는 그때그때 많이 나옵니다. 한 경전에 십호가 몇십 번 나온 곳도 있습니다. 잘 모르면 그때그때 애매하게 넘기실까봐 말씀드립니다.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실상묘해實相妙解를 잘 모르면, 애써 공부해도 큰 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은 무엇인가? 일체 존재의 본질입니다. 참모습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을 실상이라고 안 봐야합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이라, 우리 중생은 참다운 진짜는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꿎게도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 삼독심 때문에 바로 못 봅니다. 우리 중생은 삼독심에 가려서, 거기에 걸려 봅니다. 허나 삼독심에 안 걸리고서 바로 보는 참다운 지혜에 비추는 우주의 참모습 이것이 실상입니다. 실상 이것은 우리가 보는 세계가 아니라, 천지 우주가 오직 부처님 세계뿐입니다. 우리는 금생에 갈런지, 몇 생후에 갈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불교 믿음은 석가모니가 위대하다 누가 위대하다 하는 것도 믿음이지만 가장 옳은 정신正信 이것은 실상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못 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심심미묘한 자비와 지혜 일체공덕을 갖춘 부처다 하는 믿음 이런 믿음을 못 가지면 불교의 참다운 신앙은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별을 내세우고 자타自他를 구분하고 우리 중생이 보면 분명히 자타가 있고, 밉고 고운 것이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다 가짜인 것입니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하나의 생명체 이런 것을 분명히 믿는 묘한 지혜, 묘한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우리가 참선도 하고, 계행을 지키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고, 고행을 하고, 하루 한 끼 먹고 하더라도 공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다만 외도의 고행하는, 고행외도란 보통 바른 지혜가 없이 단식 많이 하는 등 고행을 많이 한 걸로 수행을 삼습니다. 우리가 밤에 잠을 안자고 단식하는 것도 역시 이러한 실상묘혜가 있으므로 해서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경우는 외도의 고행과 똑 같아서 별로 큰 이익이 없습니다.

 

과거 미련할 때는 부처님을 밖에서 구하고 실상을 미처 모르고서 구했지만, 지금 현재는 실상은 모르고 구하면 역사의 수레바퀴에 체이고 맙니다. 우리가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마땅히 부처님과 무수한 성자가 보신 그대로 믿어야 만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것이 실상묘혜입니다. 실상묘혜를 잘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실상묘혜를 간직해야 만이 참다운 수행이 됩니다. 우리 중생은 부처님의 소중한 법문을 많이 들어도 들을 때는 감격도하고 마음이 격발되고 합니다만, 또 가정이나 사회나 사바세계에 들어가면 그때그때 잊어버리고 마음이 해이되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법을 구하면서 난행, 고행하신 그 모습들, 그 자취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구법승들의 전기를 보고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삼 년 결사인데, 삼 년 결사도 지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3년 동안 문밖에도 못나가고, 누구도 못 만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이런 구법승들, 인도에 가서 법을 구하고 하는 천 년 전에 인도에 가서 법을 구하는 구법승들에 비하면 너무나 이것은 안이한 생활입니다. 법현대사나 현장법사玄奘法師나 인도에 갈 때는 인도에 한번 갈 때에 기간이 삼 년이 더 걸립니다. 백 사람이 출발하면 몇 사람도 못 살아납니다.

 

사막을 넘고 파미르 고원을 넘고, 사막의 넓이가 우리 한국보다 넓은데 몇천 리 가도 사막뿐입니다. 이런 고생 고생길을 3년이 더 걸려야 인도에 닿습니다, 그러면 또 말이 다르니 말을 배워야죠, 가서 말 배우면 몇 년, 불경 배우는데 몇 년, 이런 기간이 보통 이십 년이 넘습니다. 삼십에 들어가면 오십이 넘어야 옵니다. 우리가 보는 한문 불경들은 그렇게 해서 구한 것입니다. 진리를 구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구한 것입니다.

 

맨 처음에 가신 분이 법현(法賢, 340~420)스님입니다. 서기 399년이니까 얼마나 오래전 일입니까? 지금같이 문명시대에도 실크로드를 갈려면 굉장히 어려운데, 하물며 천 몇 백 년 전에 실크로드를 가려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사막 가다가 길이 없으면, 가다가 해골이 발에 치면, ‘ ! 이 길이 옳구나.’ 해골이 없으면 길을 모릅니다. 가다가 길에 쓰러진 해골을 보고서 길을 찾아갑니다.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열 사람이가면 아홉 사람은 후퇴하고 한 사람만 들어갑니다. 법현스님은 육 년 걸려서 중국에서 인도에 갔습니다. 그 험난한 사막과 밀림 가운데서 얼마나 헤맸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진리를 구한다는 그 마음, 역시 자기 생명을 몇 번 내던진다는 그런 마음이 없으면 못 구하는 것입니다. 이 법현스님이 갈 때 육 년, 또 인도에서 몇 년, 그렇게 이십 년 동안 걸려서 낸 것이 불국기佛國記라 인도의 나라는 부처님을 어떻게 믿는가 하는 지금도 불국기가 있습니다.

 

그다음은 현장(玄奘, 602~664)법사라, 이것은 손오공 같은 서유기에서 다 아는 법문 아닙니까? 손오공이랑 같이 갔던 현장법사는 들어가기 전부터 위대한 법사인지라, 임금한테 말하니까 승낙을 안했습니다. 당 태종이 승낙을 안 해줘서 몰래 숨어서 출발을 했습니다. 낙타가 몇십 마리 있어야 되고 사막을 넘어야 하니까요. 몇 십 명이 한 대를 짜서 갔습니다. 그러나 다 쓰러지고 몇 명 안 남았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손오공과 저팔계 등 몇 사람 아닙니까? 그렇게 험난한 길입니다. 한 번은 현장법사가 사막에서 물은 떨어지고 식량 떨어지고 기진맥진해 가만히 누워 인제 죽었구나하구서 체념을 하고 힘없이 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님의 장엄스런 모습이 보이면서 새로운 힘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눈을 떠보니까 막혀보이던 길이 훤히 트여 보인다 말입니다.우리는 장애障礙나 마구니 같은 것을 무서워합니다만, 사실 자기 생명을 내 던진 마당에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만이 우리에게 참답게 베풀어지는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천지 우주는 원래 신비에 가득차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미쳐 못 하고 있습니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나 천지 우주 가운데는 여러 가지 보배가 충만해 있지만, 중생이 어두워서 미쳐 잘 못 수행했습니다. 우리 신앙심만 사무치고 정말 성실하면 얼마든지 행복을 받아쓴다 말입니다.

 

중국에 들어가서 공부한 혜초(惠超, 704~787)국사, 혜초 역시 신라에서 나올 때에 십육 세 약관도 미처 못되어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금강삼장에게 공부하다가 이분도 인도로 갔습니다. 이분은 인도에 갈 때 바다로 해서 인도를 가고, 올 때는 육지로 오면서 쓴 것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입니다. , 인도의 다섯 나라의 풍물 풍토를 쓴 것입니다. 이러한 법현대사, 현장법사, 또는 의정법사, 해일법사, 혜초국사 같은 분들이 갔고 이외에도 여러분들이 갔지만, 이분들은 역사에 두드러지게 남은 분들입니다.

 

의정(義淨, 635~713)스님은 현장법사가 인도에 갔다 와서 유명해지고 또 그분의 공로가 많은데 부럽지만, 그 당시에는 계율戒律적인 율본이 별로 없어서 계행에 대한 책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인도를 갔습니다. 이분도 역시 꼬박 내왕만 해서 육 년입니다. 갔다 온 시간이 이십일 년이란 오랜 기간이 걸렸습니다. 이분이 인도에 가서 하도 답답하고 구법승들의 모습이 애처로와서 그때 읊은 시가 이것입니다. 진송제양당대간秦宋濟梁 唐代間이라 의정스님 갔던 시대가 당나라 때인데, 당의 이전, , , , 양나라 때도 많이 갔습니다. 고승구법리장안高僧求法離長安이라 그런 고승구법들이 장안을 떠나갔는데, 거인성백귀무십去人成百歸無什이라 갈 때는 수가 백을 이뤄도 중국에서 인도까지 구만리인데 얼마나 어렵습니까? 돌아온 사람은 열도 안 됩니다.

 

 

갔다 올까 말까 하는 아득한 길을 떠나야 하는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법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금생에 통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공부안 할 수 없는 것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이런 구법승求法僧들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진리와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중국 장안을 떠나서 갈 때는 백을 이루어도 돌아올 때는 열 사람도 안 됩니다. 후좌안지전자난後座安智前者難이라 뒤에 앉아 편히 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찌 알 것인가? 앞의 사람의 고난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남이 갖다 준 경도 잘 못 봅니다. 게으름을 피웁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법을 구할 때는 이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여튼 우리가 법을 구할 때 간절한 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얼마나 고생스러웠던가를 전달해주는 내용입니다.

 

억상애정별憶想哀情別하니 생각하니 슬프도다, 간절한 마음이 애절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혜초국사慧超國師가 인도 와서 보니까, 우리 한국 사람을 위해서 인도에 가서 공부하다가 고향도 못 가고 죽은 사람이 있어서 인도 법당에서 그 분들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해서 지은 노래입니다. 슬프도다, 그대들이 원대로 못 따랐구나. 누가 알리요 고향 돌아가는 길을! 고향에 가고 싶어 몸 부림도 많이 쳤겠지만, 어떻게 갈 길이 없다 말입니다. 한 달에 가는 길도 아니고, 비행기로 가는 것도 아니고, 몇 년 세월 가도 가기 힘든 길입니다. 부질없이 고향 따라 가는 흰 구름 만 바라본다. 이런 애절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법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게으름 부르지 말고, 우리도 역시 구법승 못지않게 공부해야만, 불법이라 하는 광대무변의 자리, 영생의 자리 가장 행복한 자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의 몸 가운데는 갖은 보화가 들어있습니다. 땅 기운, 물기운, 불기운 다 들어있습니다. 우선 지, , , 사대四大가 모여서 몸이 안 되었습니까? 물론 원소로 하면 산소 수소가 되겠습니다마는, 그런 각 원소가 모여서 우리 몸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삼매에 들어서 자재로운 힘만 낸다고 하면 불을 내고 싶으면 불이 나오고, 물을 내고 싶으면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도인道人이 있었습니다. 그 도인이 승법상인勝法上人이라 위대한 도인 승속 간에 상관없이 위대한 사람한테 상인上人이라 합니다.승법상인이란 분이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삼매에 잠기는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그분은 한번 방에 들어오면 잘 안 나갑니다. 마침 식 때가 되어서 시자侍者가 방안에 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 스님께서 들어가셨는데 방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 있으니까 훤히 불만 보입니다. 조금 뒤에는 불이 물도 되어서 물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시자가 돌멩이를 던져 보았습니다. 한참 후에 스님이 방에서 나오신다 말입니다. 아까는 아무것도 안 보이더니 사람이 나옵니다. 나와서는 가슴이 아프다고 해요. 가슴을 만지면서 몹시 고통스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서 시자에게 내가 들어간 후 무슨 일 없었는가 하고 물어보니, 시자가 사실은 스님께서 안 계셔서 방을 들여다보니 물만 보여서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승법상인께서 그럼 내가 방에 다시 들어갈 테니까 다시 돌을 던져라하고 다시 들어가서 삼매에 들어 물로 화해서 물이 있으니까 그 시자가 돌을 던졌습니다. 그 뒤에 다시 나오셔서는 아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삼매에 들면 모든 신통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저는 아직 천리 만리 입니다만 하나가 되면 모든 힘을 발휘합니다. 실상 가운데는 정변지혜, 자비 등 다 들어있습니다. , 불 또는 각 일체 요소가 다 있어서 참다운 힘만 낼 수 있는 삼매에 들면 다 발휘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무한의 힘 가능을 분명히 믿고서 그러한 것과 하나가 되는 데서 우리 공부가 전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한 염불 방법 중에서 자기한테 맞는 것을 선택해서 우리가 공부는 하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실상염불이라. 실상염불의 본질을 이탈하지 않고서 언제나 어떤 공부를 취하든지 간에 가령 인연이 바뀌어져서 하느님을 믿든지 간에 또한 염불 안하고 다른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자세만은 실상염불 속에 마음을 안주시켜야 공부에 손해가 없고 우리 마음이 산란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만이 염불과 참선이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실상에 안주가 안 되면 염불은 염불대로 들떠서 그것이 참선은 못되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참선과 염불의 관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염불 이것은 정도가 낮다. 기왕이면 참선해야 한다고 참선을 고도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참선과 염불이 본래는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인데 한계를 모르니까 우리가 구분을 합니다. 그럼 어떤 것에 구분이 있는가? 부처님 법문 중에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참선 이것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 교는 부처의 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참선 이것은 우리 마음의 불심, 불심에 입각을 해야만 참선입니다. 아무리 모양을 참선 같은 모양을 취한다 하더라도 불심佛心에 입각을 못하면 참선이 못됩니다. 우리 마음이 참선에 가서 안주하려면 우리 마음이 먼저 불심佛心에 안주를 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어떤 화두를 의심하고 참선 같은 모습을 취한다 하더라도 일체 만유가 하나다. 천지 우주가 원래 부처뿐이다 하는 이런 생각 천지 우주가 진공묘유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텅텅 비어서 원래 있는 것은 불성佛性뿐이다. 이와 같이 본래 불성, 여기다 마음을 두어야 만이 참선이나 선이란 말을 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연 따라서 아미타불을 부르나 뭐를 부르든지 간에 문제가 안 되고 우리 마음만 절대 무차별의 하나의 생명인 불심佛心 자리에 안주하면 다 참선인 것입니다.

 

집안에서 일하고 학생이 공부하고 경을 보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에 안주하면 선인 것입니다. 즉 무시선무처선無時禪無處禪 이라 때와 장소가 따로 없는 참선, 이것은 우리 마음이 순간순간 찰나찰나 안 떠나 있다 말입니다. 관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르는 그것이 음향으로 그치지 않고서 우리 마음 자세가 겸비가 되어 마음 실상에 부딪혀 안주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안주하는가? 우리가 불심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안주하는가? 불심을 봐버리면 문제가 아닙니다만, 사실은 불성을 보는 것은 천안통天眼通을 통하고 삼매에 들어서 우리 스스로 물도 되고, 불도 되고 하는 경계가 안 되면 불성을 못 봅니다. 천지 우주에 가득한 불성을 보기 위해서는 삼매에 들어서 우리 몸의 모든 번뇌를 녹여버려서 우리 몸이 천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순수한데에 이르러야 불심을 보는 것입니다. 불심을 봐야 참다운 정신입니다.

 

사실 신앙이 불심을 못 보면 미신입니다. 믿어라 믿어라 하지만 아직은 미신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믿는 것이지 불성을 안 보면 확실히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에도 증전證前에는 미신迷信이요 증후證後에는 정신正信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불심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만이 우리 마음을 영원적인 불성에 머무르게 할 것인가? 대체로 아시겠지만, 우리 중생이 보는 경계는 사실은 텅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좋다, 궂다, 밉다, 곱다 하는 경계, 그런 우리가 보는 정도의 것은 사실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에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그림자 같고, 거울에 비친 산 같고, 메아리 같고, 구름 같고 하는 것이 그런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분명히 허깨비인 것입니다. 밉다 해도 참으로 미운 것도 아니고, 좋다 해도 참으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거짓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만이 자기의 무지를 압니다. 수행자는 자기가 보는 견해의 유한성을 알아야 합니다.상대유한적인 유한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절대를 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것을 부정을 딱 시켜서 부정을 시키나. 부정의 실체 부정해 버리는 그 내용, 다 공해 버렸지만 그 공의 내용, 이 아닌 참다운 영생의 생명, 그것이 불성입니다. 그것도 안 보이니까 확실히는 모르지요. 그러나 그와 같이 믿어야 됩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우리가 보는 것은 텅텅 비어서 허무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지만 우리는 무엇인지 모릅니다.

 

묘유妙有가 참말로 있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묘유妙有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있는 것이고, 참다운 것은 묘유입니다. 부처님이나 도인이 보는 무가정無假定의 원리, 가정을 떠나버린 참다운 진리인 묘유, 이것이 있는 것입니다. [법문끊어짐]

 

따라서 부처님 말씀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 청정광불淸淨光佛이요,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명호를 광명 쪽으로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물리학적으로 생각할지라도 가장 미세한 존재인 소립자가 광파光波 광명의 파도위에서 있는 것입니다. 광명의 파도 위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광립자입니다. 양자, 중성자, 전자나 모두 광립자에 불과합니다.천지우주는 광파가 충만한데 광명의 파도가 중생의 업 따라 적당히 결합되고 진동해서 이루어진 것이 각 원소요, 원소가 결합해서 물질이 됐습니다. 우리 중생은 미처 안 보인다 하더라도 참다운 성자는 그런 광파, 일체 물질의 근원적인 광명의 파도를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광명의 파도뿐인 것입니다. 파도 위에서 각 존재가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불성을 안 봐서 모르지만 진공 묘유라 해도 역시 애매하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광명의 표현으로 된 무량광불이라, 무량광불이란 광명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천지 우주가 광명의 생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을 실상에다 딱 매어두려면 분명히 안 보이지만 광명의 생명은 사실이니까, 성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니까 그 성자의 말 따라서, 우리가 안 보이지만, 그런 무량광불, 광명으로 충만 된 것을 상상하면서 그 이미지를 안 놓치면서 아미타불이니 관세음을 부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실상을 안 여의는 공부입니다. 실상을 안 여의면 모두가 참선입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느끼게 되지만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실상을 안 여읠 것인가?

 

실상을 안 떠나는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팔만장경은 현상밖에 안 보이는 중생심이 실상을 안 여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각 말씀이 많이 있다 말입니다. 그런 실상을 안 여의는 공부 가운데 가장 절실한 말씀, 가장 고도한 말씀이 천지 우주가 부처님의 광명으로 충만 되어 있다. 이런 것을 이미지로 부각도 시키고 자기 암시도 주면서 하는 염불이 실상염불인 동시에 어떤 공부나 선이 됩니다. 그래야만이 불심에 계합됩니다. 인연 따라 어떻게 공부하시던지 제일하기 쉽고 인상적인 것이 천지우주를 광명으로 보는 것이니까, 공부를 해가면 미처 도인이 못 되어도 순간순간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때그때 순간에 비치고 맙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그 순간이 길어집니다. 순간이 길어지면 광명하고 완전히 하나가 되겠지요. 분명히 존재하는 광명을 연상하면서 광명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광명과 하나가 되어갈수록 우리 마음은 확대가 되고 우리 지혜는 더욱 더 증장됩니다. 이렇게 해서 무한의 행복 광명이 되어야 만이 비로소 영생합니다. 자기가 본래 갖추고 있는 영원의 생명을 발굴해 가면서 해탈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