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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22. 천상천하天上天下 무여불無如佛

천상천하天上天下 무여불無如佛

 

* 198548초파일 법문입니다

 

 

 

이날은 비단 이것을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하나의 인간의 탄신일誕辰日에 그치지 않습니다. 비록 석가모니와 나와 사람은 다르다 하더라도 석가모니와 나와 우리와 그러한 마음의 본바탕은 하나입니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실 때까지는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또는 우주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그러한 가장 근원적인 문제, 그러한 문제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개벽開闢이후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철인哲人도 많이 나고 위대한 군자君子도 많이 나왔습니다만 그래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빼놓고 서는 사람의 본질, 사람의 본 사상 이것을 모르고 지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의의, 이것도 모르고 지나왔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우리 인간의 본바탕과 우주의 본질을 바로 밝히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신함으로 해서 우리 인간은 참으로 참 나를 느끼고서 참 행복에 걸맞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비단 석가모니라는 나하고 대립되는 내 밖에 있는 사람의 탄신이 아니라 바로 내 생명 내 본 생명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서로 발견하는 그러한 기쁜 날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그러한 것을 비로소 아는 그러한 날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보배도 많이 있고 또는 가르침도 많이 있습니다만 자기 본바탕, 자기 생명의 본질을 아는 그와 같은 큰 보배는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가장 존중한 보배, 가장 거룩한 그러한 진리, 이러한 진리를 오늘부터서, 오늘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학자는 우주의 개벽을 45억년이라 그렇게 유구한 세월을 말합니다. 45억년 동안에 우리가 우리 인류나 또는 기타 동물들이나 천체가 발전 진화하면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아직 참다운 우주의 본질을 몰랐다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겨우 지금으로부터 2609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함으로 해서 우리가 인간의 본 의의나 인간의 본 바탕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국가적으로 보나 세계적으로 봐서 여러 가지 기념일이나 행사가 있습니다만 오늘같이 가장 경하慶賀스러운 날은 없습니다. 제일 소중한 날, 우리 생명을 바로 아는 날, 우리 갈 길을 바로 깨달은 날, 이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로 미혹되어서 본바탕을 모르고 삽니다만 그렇더라도 사람은 제일 행복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마음은 다 있습니다. 그 사람의 교양에 따라서 그 행복의 척도尺度가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분들은 돈으로 만족하는 그러한 물질의 풍요, 어떠한 분은 지위로 만족하는 그런 지위, 감투, 그러한 것의 자기만족, 어떤 분은 이성적인 그러한 것의 만족, 어떤 분은 음식이나 그러한 것의 만족 각기 나름대로 그런 만족을 채우려고 합니다만, 그 마음 바탕은 역시 완전무결한 완벽한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한된 우리 욕구로 해서는 우리 행복을 충당을 못 시킵니다. 이러한 것을 석가모니께서는 우리 인간은 본래 부처인지라, 우리 인간의 본바탕은 불성佛性이 있는지라, 불성을 우리가 완전히 개발을 못하면, 우리 스스로 우리 본 생명 자리인, 실상인 불성에 우리가 못 들어가면 다른 것으로 해서는 우리 인간의 만족을 채울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의 공허를 메울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와 같이 유행遊行하신다 말입니다. 유행이라 하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도인들이 갔다 왔다 하는 그러한 행각이나, 수행자가 갔다 왔다 하는 그러한 행각을 가리켜서 유행이라 합니다.

 

유행하시는데 어디만치 가시니까 아주 놀기 좋은 그런 그늘 밑에서 젊은 사람들이 그냥 우왕좌왕 한다 말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뭣을 분주히 애쓰고 찾고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대들은 대체 무얼 찾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 말이 우리는 지금 남녀가 이와 같이 합해서 행락을 와서 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어느 마음이 좋지 못한 여인이 노는 틈을 타서 몽땅 호주머니를 털어서 갖고 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닌 여러 가지 패물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따라서 그 가져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서 물론 그대들이 도난당한 그런 호주머니 것, 그것도 중요하지만은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들의 참다운 생명, 참다운 나 이것이 중요한데 그대들은 가장 중요한, 제일 급하기도 하고, 제일 소중한 자기를 찾는 그 문제는 망각하고서 그냥 우리 생활이 조금 도움 되는 호주머니 것, 그것만을 소중히 생각한다. 따라서 마땅히 자기를 찾는 공부, 그런 공부를 해야 하느니라하고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그 당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대에도 해당이 됩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름으로 해서 우리 생활은 자꾸만 왜곡되게 빗나갑니다. 정치를 우리가 하든, 또는 교육자가 되던, 학생이 되던, 하나의 농부가 되던, 내가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가령 학교에서 남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인가?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의 본 갈 길은 어떠한 것인가? 이걸 모르면 아동들이나 학생들을 바른길로 이끌지를 못합니다. 정치도 역시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내 문제, 그 생명 문제를 먼저 풀이를 못하면 다스리는 그런 국민들을 바른길로 다스려서 행복스럽고 풍요한 복지국가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저 물질만 풍요하면 복지겠지, 산업이 흥황 돼서 다량 생산만 하면 풍요한 나라가 되겠지, 그럼 행복스럽겠지, 이걸로 해서는 참다운 행복을 가지고 올수 없습니다. 우리 생명 가치는 지금 우리가 짓밟혀있고, 또는 제아무리 못난 무지몽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 생명 가치는 우주하고도 안 바꿉니다. 그러한 생명 가치, 가장 보배로운 가치 이 가치를 무시하면 무시한 그러한 발전이라 하는 것은 참다운 발전 못 되는 것이고, 인류 행복도 못 가져옵니다. 지금 현대사회가 불만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그러한 자기의 가치, 참다운 영원의 가치, 가장 행복스러운 보배, 이것을 잃어버린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개인적인 그런 불행이나 우리 가정의 불화나 사회의 불안정이나 이런 것을 우리가 불식하기 위해서는 역시 가장 기본 되는 그런 가치, 나의 문제, 내 인간성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을 밝힌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그런 시 가운데 천상천하天上天下 무여불無如佛하니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 나 부처와 같은 그러한 거룩한 분이 없으니 시방세계十方世界 역무비亦無比로다, 우주 전부를 다 우리가 둘러본다 하더라도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은, 부처님에 비길 만한 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과 비길만한 분이 없도다이러한 게송偈頌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와 같이 어떠한 것도 부처님에 비길 수가 없습니다.

 

한데 부처님께서는 비단 그러한 우리한테 간단하게 우리 길을 일러준 것에 그치지 않고서 비록 중생이 지금은 어두워서 업장이나 그런 번뇌에 가리어져 미처 발견 못하고 불행히 헤맨다 하더라도, 인간의 불성은 깨달은 나와 같이 천지 우주의 모든 바탕 진리, 행복의 본질을 깨달은 나와 같이 어느 중생이나 다 똑같은 그러한 본성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입니다. 이것이 부처라는 성품입니다. 석가모니란 그런 사람은 하나의 사람으로 해서 우주에 항시 있는 자기 바탕인 동시에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을 깨달은 분입니다. 우리 중생은 석가모니와 똑같이 불성을 다 같이 갖추고 있지만은 불성을 미처 못 깨달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미처 못 깨달은 부처고, 석가모니같이 그런 도인들은 깨달은 부처입니다. 다만 발견하고 못했다는 차이 뿐인 것이지, 본바탕은 똑같습니다.

 

석가모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석가모니께서 6년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신 뒤에 맨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깨달아서 보니까 나만 부처인 것이 아니라, 산천초목이나 일체중생이 다 부처라고 갈파(喝破)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할 때는 나쁜 사람, 밉고 또는 좋은 사람 우리가 비웃고 하지요, 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지요. 허나 부처님께서 깨달은 뒤에 본다고 할 때는 비단 깨달은 나뿐만이 아니라 천지 우주가 산천초목이나 또는 일반중생이나 기타 동물이나 모두가 다 부처라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존재가 다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어려운 법문입니다만 현존하는 사회는 하도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많이 있어놔서 이런 기본 된 법문을 알아야 만이 우리가 혼동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한테 도전해오는 그러한 괴상한 학설들, 우리 불교를 박멸하려고 덤벼드는 그러한 학설들, 그러한 종교들을 우리가 막을 수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 중생은 아직 어두워서 못 본다 하더라도 부처님 같은 안목에서는 바로 본다면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없고, 또는 차별적인 것이 많다 하더라도 이것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 가운데 있는 부처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비단 사람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돌 한 개나, 나무 한 개나 또는 하늘에 있는 별이나 모두가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그 본바탕은 생명은 똑같은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는 그러한 부처님이라 하는 우주의 본바탕인 생명을 깨달은 분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까 말씀처럼 그러한 깨달은 안목에서 본다고 하면은 어떠한 누구나 다 그때는 성불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맘에 안 내키면 그냥 밉다고 하고, 자기 맘에 내키거나 조금 이익을 베풀어 주면은 그냥 좋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중생이 본 바탕을 못 봐서 그러합니다. 밑바탕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밑바닥은 다 부처인지라 밑바닥을 본 성자의 안목에서는 그저 전부 다 훌륭한 부처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가르침은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要諦)이기 때문입니다.

 

계행을 지키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이러한 것은 다만 우리의 마음을 깨닫는 경계, 천지우주를 하나로 볼 수 있는, 전부 다 부처로 볼 수 있는 그러한 경계, 그런 경계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님 같이 깨닫지 못하면은 우리생명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많이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금생에 나와서 그저 다행히 병신도 안 되고 또는 우리는 귀머거리도 아니고, 제대로 의식을 갖추고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은 불행한 사람들을 본다면 정말로 참 안타깝습니다. 어느 분은 양쪽손도 없고 말입니다. 양발도 없고, 그리고 더구나 소경이고.......... 그런 채로 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 지구상에 한 두 분이 아닙니다. 복지사업가로 해서 유명한 헬렌켈러 (Helen Adams Keller, 1880~1968)여사, 그분은 귀머거리인 동시에 소경이요, 벙어리였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분도 한 두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분은 자기 본심, 자기 본심이 무한한 가능인의 부처다, 자기 본심이 무한의 가능인의 신선神仙이다. 부처라는 것은 그 사람은 몰랐지만, 신선이다 이것을 믿었기에 자기가 자기 노력으로 해서귀머거리나 또는 소경이나 벙어리임을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에 따라서 굉장히 나쁜 갈래로 우리가 전락이 되고, 더러는 행위가 좋아지면 좋은 대로 우리가 초승에 올라가고 우리는 지금 사람이니까, 우선 편하니까, 우리가 건강하니까 우리는 불행한 사람을 잘 모릅니다. 허나 우리가 짓는 우리말, 우리 행위, 우리 생각, 이것에 따라서 우리중생은 여러 갈래로 헤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자가 보통 알고 있는 윤회 아닙니까. 가장 못되면 지옥地獄, 조금 나아지며 아귀餓鬼, 조금 나아지면 그때는 짐승, 개나 소 같은 짐승 말입니다. 조금 나아지면 싸움만 좋아하는 귀신인 그런 수라修羅, 조금 나아지면 그때는 인간, 더 나아지면 천상天上, 이렇게 해서 우리 중생은 자기 말, 자기 생각, 자기 행위에 따라서 그때는 그와 같이 전락되었다가 올라갔다 하는 것입니다. 안 믿는 분들은 인간의 생명, 인간 윤회를 잘 안 믿습니다만 지금은 심령과학도 역시 이러한 것을 대부분 증명합니다. 비록 사람인 우리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고 그와 같이 헤매는 것입니다. 헌데 아까 부처님 말씀을 인용한 바와 같이 원래 생명은 부처이건 아니건 그와 같이 우리 행위 따라서 그때그때 전락했다가 수승殊勝했다가 윤회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는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앞서도 매체로 말씀한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또한 그런 불성 가운데는 일체 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부처의 성품 그것이 나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 바탕이다 할지라도, 그것이 별로 공덕도 없고 지혜도 없으면 그때는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만 나의생명이 본 바탕인 동시에 또는 우주의 바탕, 하나의 원자나 또는 뭣이나, 개나 소나, 돼지나, 하늘의 별이나, 모두 다 그 본바탕은 부처입니다. 헌데 그 부처 가운데, 그 불성 가운데는 일체 가능이 포함되었단 말입니다. 지혜나 기술이나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기의 혜택을 그야말로 참 굉장할 정도로 많이 봅니다만, 도시 나가서 밤에 높은데 올라가서 도시 야경을 우리가 전망 할 때는 그 황홀한 야경, 황홀한 광명 때문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이와 같이 행복스럽구나, 이와 같이 황홀하구나 이렇게 외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안 보았지만, 안 본 사람도 역시 극락세계가 이런 것인가, 이럴 정도로 도시 야경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 무수한 전등, 인간의 지혜로 해서 약간의 조작操作만 하면 그때는 그와 같은 찬란한 불이 나온다 말입니다.

 

 

그런 전등 생각해보십시오. 불이 어디가 숨었다가 이렇게 전기로 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의 제한된 그런 지혜로는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에는 그와 같이 광명의 하늘,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약간의 조작만 하면 그때는 그와 같이 빛이 나온다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재주나 뭣이나 어떤 것이나 불성 가운데는 완벽히 있습니다. 행복도 완벽히 있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중생이 마음이나 행동을 닦아가지고 보다 더 불성에 접근되면 접근되는 만치 우리 행복은 증장되고 더해집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신 분은 모릅니다만 부처님의 별명이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환희광불이라 말입니다. 환희란 말은 기쁘고 날뛰는 것이 환희 아닙니까. 환희광불이라, 부처님의 별명이 환희광불이라, 기쁨에 충만 되어 있는, 행복에 충만 되어있는 부처라 말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아까도 말씀마따나 광명으로 보나 뭐로 보나 그때는 거기에 완벽히 충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접근되면 된만치 어떤 점으로 보나 우리 인간의 능력은 더 증장됩니다. 가령 수학자가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역시 불성에 접근되면 된만치 그 이상 두뇌가 발달되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만 컴퓨터를 보십시오. 몇 백 명이 우리가 계산해도 못할 그런 계산을 컴퓨터는 몇 분 동안에 해냅니다. 그것 역시 비록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인다 할지라도 우주의 본 바탕에는 그러한 컴퓨터보다도 더 위대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힘을 약간만 조작하면 힘을 내는 것입니다. 원자폭탄 보십시오. 레이다나 그런 장치 보십시오. 이러한 모든 것이 모든 재주나 기술이나 모두가 다 근본 바탕은 불성이나 부처님한테서 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만 사람으로 해서 그런 불성을 깨달은 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류 역사이래 맨 처음으로 불성을 깨달은 분인 것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역시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다만 우리의 선각자先覺者로서 깨달은 분이란 걸 느끼고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역시 깨달은 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의 목적인 것이고, 우리 인간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러지 않을 때는 우리는 아까 말씀처럼 우리가 지은 업장으로 해서 아무리 싫다하더라도 역시, 살생도 많이 하고 나쁜 업을 지으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인연因緣 불가피不可避라 우리가 좋은 일만 하면 우리가 싫다 하더라도 역시 천상에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도업을 닦아서 참선 염불을 많이 하면 그때는 우리가 싫더라도 극락이나 성불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우리 본바탕이 부처님으로 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 본바탕은 일체 행복이나 지혜나 자비를 갖춘 불성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앞에서 말씀처럼 2609년 전에 태어나시고서 25세에 출가하셔서, 물론 다른 설도 있습니다만, 30세에 성도하시고 49년간 중생을 교화하시다가 8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한정된 세월이지만은 이 동안에 아까 말씀처럼 우리 인간의 갈길, 우리 인간의 본 생명을 전부 다 설파하셨단 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 이것이 팔만사천법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법문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만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우리는 이미 인연 따라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서 우리는 잘 못 배웁니다. 잘 못 배우기 때문에 우리 승복을 입고도 조그마한 일로 서로 싸우기도 하고, 또는 집안에서 믿는 분도, 부처님한테 귀의歸依해서 몇 십 년 된 분도 역시 어쭙잖은 일, 사소한 일로 서로 고생하고, 마음을 썩이고, 우리 마음을 우리 소중한 불성(佛性)으로 가는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왜곡을 시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우리한테는 석가모니와 똑같은 원효元曉스님과 똑같은 그런 역량을 분명히 갖추고 있습니다. 인간이 갈 길은 오직 불성을 개발함으로써 만이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어떠한 길도 역시 우리 본바탕, 우리 생명의 근원인 불성을 개발 못 할 때는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행복한 것 같지만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어 가고 맙니다. 이런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내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나 내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나 우리 국가의, 국가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나 세계 인류복지를 위해서나 어떤 면으로 보나 최상의 길은 무엇인가, 이것은 나한테 있는 내 본바탕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닫는 길입니다.

 

허나 우리는 삼독심三毒心이나 탐욕을 부리는 탐욕심, 또는 조금 마음이 안내키면 마음을 우리가 혼란스럽게 해서 마음을 동요시켜 흥분하고 불룩거리고 하는 그런 진심嗔心, 성내는 마음, 또 한 가지는 자기 본질이 부처임을 인식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중요한 학설을 모르고 또는 중요한 무슨 교리를 모른다 하더라도 자기 본질이 자기 본바탕이 부처임을 아는 그 사람은 지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지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식은 없다 하더라도 자기 본바탕이, 내가 지금 못 보지만은 내 본바탕이 부처다, 이와 같이 느끼는 분들은 벌써 지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본바탕을 불성이라고 못 보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 자기 분수 이상의 탐욕심, 또는 기분 내키지 않으면 그때는 성내는 마음, 진심 그리고 자기 본바탕이 부처임을 인식 못 하는 마음 이 마음 이것이 삼독심입니다.

 

이 마음 때문에 본래 부처건만 우린 부처가 못되고, 지옥地獄으로, 조금 나으면 아귀餓鬼, 또는 축생畜生으로, 또는 사람으로, 그와 같이 윤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삼독심三毒心을 우리가 못 거두면 우리 윤회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몇 만생 몇 천생을 지나도 우리는 역시 그와 같이 지옥으로, 아귀로 왔다 갔다, 갔다 왔다 하는입니다.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그런 세 가지 독심이라, 그 반대가 불교의 삼학도三學道란 말입니다. 계행戒行을 지켜서 우리 행동을 바르게 하고, 언어를 바르게 하고, 또한 동시에 우리 마음을 항시 고요히 통일하고, 우리 마음을 다스려서 그때는 우리 마음의 바닥을 비춰본다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불교의 참다운 지혜로 해서 비록 내가 안 보일망정, 내 본바탕이나 우주의 바탕은 부처구나, 일체 공덕을 가진 부처구나, 이와 같이 우리가 인식한다 말입니다. 이것이 삼학도三學道입니다.

 

자기 언행을 바르게 하는 그런 계율, 또는 그런 마음을 고요히 해서 자기 본바탕, 불성을 비춰보는 그러한 선정 즉 정신통일, 거기에다 비록 자기가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내 본바탕은 부처구나, 이와 같이 느끼는 그 지혜, 이것이 삼학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생은 우리 업장을 녹여 삼독심을 차근차근 힘을 줄이게 해가지고서 본래 고향인, 본래 우리 생명의 근원인 부처로 돌아가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시 어두움과 광명의 양면을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의 어두움은 앞에 말씀처럼 탐욕심이나 또는 성내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 이것이 우리 마음의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이 깔려있을 때는 판단을 잘 못합니다. 한번 성내보십시오, 바로 보는가. 탐욕을 내보십시오, 바로 보는가. 탐욕과 성냄과 또는 내 본바탕이 부처구나 이렇게 못 느끼면 우리 판단은 흐려집니다. 판단이 흐려짐에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보나, 가정으로 보나, 국가 민족으로 보나, 우리는 바른 생활을 못하고 불행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 사회 혼란도 역시 그러한 탐욕심, 또한 성내는 마음, 또는 내 본질이 부처구나,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마음, 그런 마음 때문에 그런 삼독심 때문에 사회, 개인, 국가, 인류 모두가 다 불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고불변千古不變의 진리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 또는 무수한 도인(道人)들이 다 증명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마음 때문에 탐욕심이라 하는, 또는 성내는 마음이라 하는, 내 본질이 부처라는 것을 모르는 그 마음,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방금 말씀처럼 바른 판단도 못하고 우리 생활은 불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어둠을 몰아내는 밝은 생활인가, 광명의 생활인가? 이것이 아까 제가 말씀처럼 계율을 지켜서 살생도 않고, 말도 바른말, 행도 바른 행, 생활도 바른생활, 이렇게 하면서 내 본바탕이 부처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느끼는 지혜, 그런 지혜를 우리가 자아내기 위해서 그때는 마음을 항상 고요히 한단 말입니다. 이런 소위 삼학도, 이렇게 지키면 이러한 것은 광명이 되어서 우리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연등燃燈을 켭니다. 왜 켜는 것인가? 인류 역사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분의 생일을 기념한다 해도 좋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바탕을 밝히고 우주의 본 생명을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기린다 해도 좋습니다. 허나 우리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는 부처님의 광명으로 해서, 진리의 광명으로 해서 우리 무지를 몰아내는 이러한 것이 가장 소중한 오늘의 의의입니다. 불을 왜 켜는 것인가? 광명으로 해서 우리 마음의 광명인 아까 말씀처럼 바른 행동, 바른 생각, 바른 지혜 이걸로 해서 우리의 어두운 무지無智, 어둠을 몰아낸다 말입니다. 삼독심三毒心을 몰아낸다 말입니다.

 

우리는 등을 켤 때는 내 남편이 잘되면 좋겠다, 또는 자기 가정 행복을 기원한다, 이것도 좋습니다. 허나 그런 문제는 사소한 문제입니다. 흐린 물이 내려올 적에 흐린 물을 막으려면 상류를 먼저 맑게 해야 합니다. 하류에서 아무리 맑게 하려 해도 상류가 흐리면 하류도 흐리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근원이 마음인지라 우리 마음에서 어둠만 몰아내면 행복은 절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남편의 행복을 바라고 자기 자손들의 행운을 바란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어둠이 깔리면 그때는 행복은 못 옵니다. 어둠만 몰아내면, 계행 지키고 또는 우리 마음을 고요히 해서 부처님의 지혜를 비추어 보고 내 마음이 부처구나! 내 본성이 부처구나! 이것을 분명히 느끼고서 우선 근본 뿌리를 북돋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겸허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가령 박사학위가 한 댓 개가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지혜를 모르고 우리 불성을 못 느끼면 그건 무지입니다. 학식은 있으나 참다운 지혜에는 무지입니다. 우리는 겸허히 자기가 안다 하더라도 영원적인 진리 앞에서는 내가 무지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년경~B.C 399년경)도 자기 무지無智를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의 입문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참다운 불성佛性의 지혜를 모릅니다. 자기 무지無智, 참다운 불성의 지혜를 모르는 자기 무지, 이것을 먼저 우리는 겸허하니 느끼고서 그와 동시에 방금 말씀처럼 바른 광명스러운 우리 생각, 광명스러운 행동, 우리가 부처님을 한번 부르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마음에 광명을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한번 부르면 벌써 귀신들은 훤히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하고 참선하면 벌써 우리 집안은 그대로 벌써 광명에 비춰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말을 안 한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 행동이 바르고 우리 생각이 바르면 우리 불교를 광명으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한테 설사 물질을 베푼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어두우면은 어두운 그 마음이 우리 사회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을 때, 아까 말씀처럼 근원을 다스리는, 근원을 다스림은 마치 뿌리를 북돋우는 나무 이파리 모양으로 그냥 바로 무성해 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파리나 가지만 생각하지 뿌리는 그냥 외면합니다. 탐욕심 버리는 그러한 계행, 우리의 마음을 가장 고요하게 하는 그러한 참선 염불 말입니다.

 

거기다 참다운 지혜, 비록 내가 안보이고, 나는 여태는 몰랐다 하더라도 내 근본이나 우주의 본질은 일체공덕을 갖춘 부처구나 이렇게 딱 믿는단 말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처럼 계율을 지키고, 또는 참선 염불하고 또는 지혜를 닦는단 말입니다. 전단 향나무는 향나무가 한군데 있으면 40리를 사방으로 다 향내를 풍긴다 합니다. 이랑이라는 그런 독초는 나무 한 그루가 그 독초의 냄새 때문에 악취가 그때는 몇 십리 간다고 합니다. 나무도 그렇거든 우리 사람의 나쁜 행동은 눈에는 안보여도 몇 십리, 몇 백리 까지 나쁜 행동이 그냥 분위기로 해서 그것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가령 미국에 누가 있다 합시다. 그 사람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악령惡靈이 전파 이상으로 빨리 가서 그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있는 그 누군가를 우리가 축복한다 그러면은 축복하는 그런 선영善靈이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그때는 그 선령이 미국까지 가서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부사의不思議한 도리道理, 이것은 전자, 원자역학이나 그런 것이 다 발전되어서 우리가 유출합니다만 아무튼 전파나 그런 어떤 자기파 이상으로 그와 같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속도나 역량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벌써 나를 오염시키고 우주를 오염시킵니다. 다시 생각하면, 한 생각의 좋은 생각이 벌써 나를 정화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생각, 자기 행동, 이것이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을 그때는 그르치게 만드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 가정을 망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부디 오늘 광명의 날, 이처럼 가장 훌륭한 기념일, 이날 우리는 기념에서 획기적으로, 당장에 바로 아까 제가 말씀처럼 광명스러운 길인, 우리 행동 바르게 하고 말 바르게 하고, 우리생각을 항시 부처님, 내 본인의 부처한테다가 안주를 시키고 생활하는 그러한 부처님 참다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등을 켤 때도 아까 말씀처럼 내 광명, 내 불성을 밝히는 그런 불, 우주를 밝히는 그런 불, 바로 밝히면 바로 등 하나가 우주를 밝힙니다. 부처님 법문은 원융무애圓融無碍입니다. 하나와 전체가 같이 융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가 잘되면 그때는 우주가 다 그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소중한 등은 부처님의 탄신을 기념하고 동시에 우리 자성自性한테 갖춰있는 삼독심을 몰아내는 그런 불, 우리 가정의 행복을 밝히는 그런 불, 우리 국가 민족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그런 복지의 불, 세계 인류를 영원히 평화로 이끄는 불, 그런 불을 켜시면서 더욱 더 행복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법어法語를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