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6. 참선의 바른 길

24. 우리의 주인공은 오직 마음뿐입니다.

24. 우리의 주인공은 오직 마음뿐입니다.

 

* 1987614일 태안사 법문입니다.

24. 45-1 1987.06.14 참선의 방법.pdf
0.24MB

 

요즘 항간에는 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이 나옵니다. 더러는 단전법이라 해서 아랫배에다 힘을 주고서 하는 단전법으로 교수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화두로 의심만을 주로 하는 교수법도 있고, 화두도 없이 묵조黙照 하는 묵조법도 있고 각기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이 제일 우수하다고 주장한단 말입니다. 책을 많이 보신 분은 어느 것을 쫒아야 하는 것인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선 이것은 따지고 보면 가장 쉬운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고 몸도 마음도 상쾌한 것입니다.

 

안락, 안락 몸도 마음도 안락한 것입니다. 나쁜 생각을 하고 번뇌 망상하면 괴로운 것이고 일체 만유를 자비심으로 포용하는 그런 생각은 마음이 개운하고 편한 것입니다. 남을 미워해야 원수가 생기고 뭐가 생겨서 괴로운 것이지 우주 모두를 수용하고 천지 우주에 자기 적이 하나도 없단 생각할 적에 마음이 개운하단 말입니다.

 

또한 더 들어가서 천지와 우주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다. 이 생각같이 마음이 편한 생각은 없습니다. 악마가 있고 사탄이 있고 뭐가 있고 해서 자기와 적대가 되는 것이 있어야 마음이 괴로운 것인데 아무것도 없고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는 그 생각같이 마음이 편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참선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참선을 많이 하고 의심을 많이 하고 염불을 많이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세가 나와 더불어서 둘이고 셋이고 자꾸 갈라지고 분열되면 참선이 못 됩니다.

 

또한 어째서 우리 몸이 안락한 것인가. 우리 몸 자세가 나쁘면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리를 배워서 알겠지만 이렇게 몸을 구부릴 경우에는 척추가 구부려지므로 소화도 안 되고 여러 가지 부작용이 붙는단 말입니다. 척추를 쭉 펴서 단정히 머리로는 하늘을 찌르는 기분으로 해서 앉고 턱은 약간 이렇게 당기고 어깨를 펴고서 긴장을 푸는 동시에 단정한 모습, 그 단정한 자세와 같이 몸이 편한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좀 거북하지요. 그러나 형색을 고치면 그것같이 좋은 것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라서 몸이 단정해지면 그에 따라서 마음도 단정해지는 것입니다. 단정한 사람치고 몸자세를 아무렇게나 앉는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좌선은 이 참선도 신 안락, 안락이란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눈앞에서 현실적으로 위대하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 별로 없어 신통자재한 분이 없어 참선하면 내내야 좋다가 말겠지, 그 정도로만 느끼는 것이지, 참선으로 해서 얻는 무량 공덕은 우리가 별로 믿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원효元曉 스님이나 서산西山대사나 그분들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것을 많이 했지마는 그때 과장해서 퍼트린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지, 경전에 보면 석가모니께서 미간에서 광명이 나와서 천지 우주를 몇 바퀴 돌고 다시 들어가고 하는 것이 다 상징적인 묘사에 불과하겠지, 하고 과소평가합니다.

 

허나 그런 기기묘묘한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묘기神通妙奇는 사실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있을 수가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은 오직 참선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참선의 고요한 가운데서 우리의 번뇌가 딱 녹아진다 말입니다. 참선을 통해서 번뇌가 다 녹아지면 정작 그런 신통묘지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나 그 뒤의 위대한 도인들은 이와 같이 번뇌가 다 녹았기 때문에 인간이 본래 다 가지고 있는 신통묘기를 발휘했단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러기 때문에 우리 참선 한 분들은 비록 눈앞에 그런 신통묘기를 부리는 분도 안 보이고 말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져서 불교를 믿는 분이나 안 믿는 분이나 별것도 아니게 되고 말입니다. 이런 때는 우리의 본성에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은 믿기가 쉽지 않단 말입니다. 자주 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그 컴퓨터 보십시오. 입력만 시켜 놓으면 이상한 힘을 발휘하고 말입니다. 불성佛性, 우리 인간성의 본성이 불성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불교를 상당히 아는 분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 시간만은 주로 모르시는 분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나 우주의 본성本性 이것이 불성佛性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나 산천초목이나 우주 일체 만유의 본성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 위에서 일체 만유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순수에너지 일체 만유를 구성하는 가장 순수한 생명 에너지 이것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이런 불성을 먼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참선 행법으로 해서 이와 같이 앉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교가 많습니다마는, 기교를 익히기 전에 그와 같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은 비록 개발을 못 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내 생명이나 우주의 본성은 일체 공덕을 갖춘 불성이다. 그러면 공덕은 어떤 것인가. 공덕은 다는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도 공덕이 많으니까 경전에서 보면 도인이 되어서 신통묘기를 낸 분들이 몇천 명 모여서 몇백 년 동안 오랜 시간 동안 갖추고 있는 공덕을 다 헤아린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알기도 하고 재주도 있고 글씨도 쓰고 자비도 베풀고 등 기기묘묘한 모든 그런 기술들 또는 기능들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것이 끝도 없고 갓도 없고 원만히 불성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그런 공덕을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이라.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것은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생기고 소멸된다 하더라도 불성만은 영원히 존재 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항시 있단 말입니다. 언제나 존재한단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낙이라 불성 가운데는 일체 안락스러운 고통도 없고, 고통은 상대 유한적인 고통이지 절대 무한적인 영원적인 고통은 없습니다. 안락한 행복 고통이 없는 좋은 것도 또 불성에는 충만 되어 있단 말입니다. 행복스런 즐거움이 충만 되어 있는 것이 낙에 해당됩니다. 는 우리와 같은 작은 아가 아닙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는 그런 아가 아닙니다. 천지 우주를 나로 하는 대아大我 우주가 내가 되는 동시에 대아 가운데는 일체의 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기능이나 재주나 뭣이나 다 갖추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한 컴퓨터 같은 것도 대아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는 것의 일부에 해당 하는 것입니다.

 

레이더를 보십시오. 이상한 힘을 내는 것 말입니다. 전깃불을 보십시오. 전기가 얼마나 빛나는가? 전기가 어디서 오는가, 물론 전자의 흐름에서 오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자란 무엇인가 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의 근본 생명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 가운데 아는 광명이나 재주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힘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라 조금도 흐림이 없이 청정하고 행복스러운 영롱한 것만 그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영생하고 동시에 모든 행복과 안락을 갖추고 있고 동시에 모두를 알 수가 있고 할 수가 있고 또한 동시에 청정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과 낙과 아와 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 불성입니다. 우리 불교는 무엇을 믿는가. 경전 읽고서 외고서 알듯 말 듯 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 가운데 있는 인간성의 본질이요 우주의 본성 가운데 있는 이와 같은 상 영원히 완전무결한 행복 동시에 완전무결한 모든 지혜와 공덕 완전한 청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 본질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안 믿으면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 없지요.

 

개발은 미처 못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잠재의식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불교의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안 이와 같은 육식六識만 가지고 있습니다만, 잠재된 의식은 보다 훨씬 깊은 식이 많습니다.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나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이나 심층심리학을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현재는 육식이지만 그 밑의 제7식 말라식末那識 그보다 깊은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9식 암마라식菴摩羅識 10식 그때는 불식佛識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와 같이 파 들어가고 가면 가장 저변에는 역시 부처인 것입니다. 일반 자연 학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식물 원소에 들어가 보면 끝에는 불성인 것입니다. 부처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은 아까 말씀한 상락아정이란 말입니다. 생을 몇 번 되풀이 하여도 불성佛性은 멸하지 않고 영생하고 말입니다.

 

 

우주가 다 파괴가 되더라도 불성은 멸하지 않는다. 불성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또한 일체 지혜의 공덕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허나 예술가도 역시 위대한 걸작을 내려면 입신의 몸과 영원적인 영감을 내야 위대한 작품을 내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나 위대한 걸작을 내려면 영원적인 생명의 자리에 뿌리를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작품을 보면 영원성이 빛나고 있습니다. 위대한 문학작품치고 영원성이 빛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다 자기 생명을 발굴해서 영원 쪽에다 뿌리를 두었습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을 딱 믿어야 불교신자인 것이고 또 참선은 특히 현대는 이와 같이 옹졸하기도 하고 못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고 못돼먹었지마는 내내야 우리 마음 본성은 불성을 온전히 갖추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석가모니나 원효나 서산대사나 예수나 그런 분들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단지 개발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습니다. 이것을 딱 믿고 들어앉아야 참선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만 그와 같은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항시 선인 것입니다. 참선 가운데는 화두라 해서 선지식이 문제를 주면 그 문제를 의식하는 선이 있는데 우리 문제의식 가운데는 똥 마른 막대기라 똥 마른 막대기는 지금 문명사회에는 없습니다만, 옛날 중국에는 뒤를 보고 휴지 대용으로 막대기를 썼단 말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 운문(雲門, 864~947)스님이라 운문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 유명한 스님인데 그분 아래서 공부하던 어떤 분이 그 스님 앞에 가서 여하시불잇고?” 어떤 것이 부처인가? 성불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니까 당연히 부처가 무엇인지 물어야 되겠죠. 물론 그 사람은 부처를 갖다가 응당 부처는 무한한 공덕이 있고 찬란하다는 그런 답변을 예상하고서 부처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까 스님은 천만 뜻밖에 똥 막대기라. 그 당시나 지금이나 더럽고 추잡한 게 똥인데 가장 지상 지존의 부처를 물었는데 똥 막대기라, 하필이면 제일 더러운 것을 빗대었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의심하고 의심하다가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우리 마음의 본래 면목이 부처님이다. 마음이 자꾸 분산되어서 힘을 못 내는 것이지 하나로 모아지면 그때는 힘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응집하는 그런 힘 마음이 모이고 모이면 그때는 위대한 힘을 내는 것이란 말입니다. 원래 위대한 힘이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에디슨(Edison, Thomas Alva Edison, 1847~1931)이 연구를 할 때 계란과 자기 시계를 구분 못하고서 시계를 물에 삶은 것 보십시오. 그와 같이 텅 비면 딴 것은 별로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정도로 일념一念이 되면 위대한 것이 나옵니다. 원래 위대한 것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하시불잇고물으니까 똥 마른 막대기라 마음이 하나로 뭉치고 뭉치면 우주가 훤히 보이고 틔어 보인단 말입니다. 기쁠 때 달을 보면 방긋 미소 짓고 슬퍼서 보면 울음 짖듯 보이고 모두가 다 자기 주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뭉치고 뭉쳐 딱 열려버려 열린 마음으로 보면 우주가 조금도 변함없는 찬란한 불성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법당에 모신 저런 부처만이 부처가 아니고 몇천 년 전 가신 석가모니불만 부처가 아닌 것입니다. 각 도인만이 부처가 아니고 본질을 바로 보면 전부 다 부처란 말입니다. 똥 묻은 막대기까지도 그때는 부처입니다. 이와 같이 광대무변한 마음 가지고 덤벼들어야 참선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선한 사람은 아는 것이 오직 천지 우주가 부처뿐이다. 마음을 잡고 참선을 해야 참선이 되는 것이지 나요 너요 미운 사람 고운사람 이런 것이 있으면 그때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하고 거리가 멉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바른 정견이 돼야 선이 나오는 것이지 바른 정견이 못 되면 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선을 하는 모양은 하겠으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른 정견이란 똥 마른 막대기나 구더기나 피라미나 모든 것을 바로 보면 부처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현대적인 과학적인 지식만 배운 사람들은 머리가 굳어버려서 나는 나 너는 너 자꾸 분열만 합니다. 이런 머리로 해서는 잘 안 되니까 마음을 모으고 모아서 모이면 차근차근 열려서 그때는 아! 그럴 법도 하구나 하고 확 열리면 가장 온전한 마음 부처의 마음이 됩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은 가짜 마음입니다. 중생이 온전한 마음이 못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몇만 생을 되풀이 한단 말입니다. 남의 생명을 함부로 여겨 죽이면 분명히 지옥에 갑니다. 지옥 그것은 거짓말로 방편으로 세워놓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너무 많으면 아귀가 되는 것이고 식을 분별 못하는 어리석은 이는 개나 소 같은 짐승이 됩니다.

 

온전한 부처와 같은 마음, 천지 우주가 하나 되는 온전한 마음이 못 되면 생명은 몇만 생을 윤회합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공부만 하니까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부인해 버린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는가, 개념적인 지식만을 배우니까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믿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마만치 마음이 굳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고운 순수한 정신을 무한의 공덕이 있는 영원 속에다 무한히 전개되는 무한의 지혜가 있는 자비가 있는 무한의 세계에다 해방을 시켜야 합니다. 이 마음의 무한경계 무한의 공덕을 갖춘 부처의 경계에 해방시키는 것이 참선인 것입니다.

 

내 힘은 이것뿐이다 생각 하면서 사는 것과 내 마음에다 무한의 힘을 이와 같이 당당히 느끼고 사는 그때는 천 냥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에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공부가 꼴등이라 해도 힘은 분명 무한대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무한의 힘 천재의 힘을 딱 믿고서 덤벼야 하나의 선이고 참선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고 참선을 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몸자세, 몸자세는 이렇게 단정히 앉는 자세가 참선하는 자세 아닙니까. 물론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그런 서서하고 누워서 하는 걸어가면서 하더라도 우리 마음만 부처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사실은 다 선인 것입니다.

 

허나 그런 가운데 이런 좌선은 가장 능률이 오르는 본 모습입니다. 인간의 자세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앉은 정삼각형의 모습 같이 안정된 모습이 없습니다. 도형에서 정삼각형이 가장 안정된 모습이 아닙니까. 소위 가부좌가 가장 안정된 모습입니다. 또한 동시에 불교에서 보면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여래지인 지는 지혜라 인은 부당 인[]자 말입니다. 일체 부처님의 상징이 도형으로는 정삼각형의 모습인 것입니다.

 

네모난 모습 원 같은 모습이 많이 있으나 일체 여래의 지혜인 부처님의 지혜는 삼각형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런 모습이 우리 인간성의 본 바탕인 불성이 가장 발동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한테 있는 천재가 발동하기 가장 쉽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책상에 앉을 때 구부려 앉으신 것과 단정한 모습으로 앉는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비단 책 읽는 일 뿐만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렇게 단정히 앉아야 만이 우리 피가 막힘이 없이 상하로 순환하는 것입니다.

 

 

<녹음상태가 끊겼다가 재생되었습니다.>

돈오頓悟를 하는 것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막히고 너에게 막혀 있습니다. 그런 구속된 폐쇄된 마음 마음을 활짝 열어서 본래 부처라 천지 우주는 물질이 아무것도 없이 오직 마음뿐이다. 그런 심성이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서 물질이 된 것이지 본래 물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병의 뿌리가 없듯이 물질의 뿌리도 없습니다. 다만 거품이 모여서 된 것이 우리 몸과 같습니다. 그래서 공취空聚라 즉 공이 모여서 된 것이다. 우리 몸은 텅 빈 공 기운이 모였습니다. 다만 중생이 잘 못 보기 때문에 내 몸, 내 살 하면서 거기에 착합니다.

 

우리가 한번 죽은 뒤에를 생각해 봅시다.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눈도 내 코도 내 예쁜 손도 죽은 뒤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없는 것을 위해 너무 애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영생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입니다. 마음을 단장해야지 몸은 결국 썩고 마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흔적도 없단 말입니다. 흔적도 없는 것에다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최소한의 것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는 우리가 지은 업장만 남습니다. 불성에 더덕더덕 낀 업식業識만 남습니다. 업식業識을 가지고서 업식業識 따라 욕심이 너무 많으면 아귀로 가는 것이고 또는 남을 미워하고 살생 많이 하면 지옥 가는 것이고 잘해야 사람으로 온단 말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오직 마음뿐인 것입니다. 불심에다가 단장도 하고 장엄도 하고 비록 금생에 성불을 못해서 훤하지 못해 증오證悟를 못한다 하더라도 훤한 가운데서 걸음걸음 가는 증오는, 자기 자성불自性佛 자기 불성 자리에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 인간대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상 대도의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꼭 이 자리에서 마음을 열어서 돈오를 하셔서 그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모두가 부처뿐이로구나, 물질 이것은 허깨비로구나, 이렇게 느끼셔야 합니다. 허깨비, 거품, 그림자, 메아리 이것이 물질인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 모인 공덕으로 우리 대중은 해오解悟를 하신 분들입니다. 문제는 오직 증오證悟만 남았습니다. 증오를 꼭 하셔서 명년明年 우리 해제 때는 반드시 해탈하는 선정해탈禪定解脫, 지혜해탈智慧解脫, 명실상부한 사부대중이 되리라 믿습니다. 제가 불자님도 기회 있을 때 마다 여기 오셔서 공부하시고 집에 계실 때도 염불하시고 염불도 본체를 안 잊으면 참선인 것입니다. 본체 불성을 안 잊으면 주문을 하나 염불을 하나 참선인 것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여서 한 걸음 한 걸음 불성에 가깝게 가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