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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25. 갈앙심渴仰心이 극락세계

42-1987.04.05 청화큰스님 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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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45일 태안사에서 청화 큰스님 법문입니다.

 

 

 

써늘한 서남풍이 불 때는 서남풍이 불지 않고서 매화나무가 청초한 꽃을 피웠습니다만 봄이 익어져서 순풍이 불어올 때는 그 생생한 싱그러운 매화꽃은 누그러지고 맙니다. 이럴 때 황당해서 우리 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무상無常을 한결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헐벗은 그런 나목裸木에서 어디에 그런 꽃이 있었던가, 한 겨우내 동안 헐벗은 매화나무는 꽃도 이파리도 흔적도 없었습니다. 이파리도 없고 생기도 없던 그것에서 어떻게 꽃이 피어 나왔는가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계의 신비로움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꽃이 어느 곳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인가? 나무를 몇천 번 쪼개 본다 하더라도 매화꽃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오면 분명히 꽃은 피고 만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부처님의 성품인 우리 근본 자성自性인 그런 불성佛性이 있다. 이와 같이 흔히 말들을 합니다만 그러나 그런 불성은 어디에도 안 보입니다. 초롱초롱한 영가靈駕의 눈에도 안 보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안 보입니다. 허나 분명히 불성은 존재합니다. 비단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그런 생명의 본 근원인 그런 자성의 자리, 참다운 불성은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사람은 미처 못 본다. 말입니다.

 

선가禪家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촉루髑髏촉루리髑髏裏 안경眼鏡이요,’ 촉루髑髏는 이것은 해골이 촉루입니다. 촉루리 안 리[]자 촉루 안에 즉 해골 안에 안경眼鏡이요, 눈이 눈빛이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할 때 해골은 바싹 말라서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헌데 이런 해골 가운데 눈이 빛나고 촉루리 안경이요 고목리枯木裏 용음龍音이라,’ 고목은 마른 나뭇가지가 고목枯木이 아닙니까? 안 리[], 용 용[], 읊을 음[], 말입니다. 고목 가운데 그냥 용이 울부짖고 읊는다 말입니다. 고목에 바람이나 불면 모를까 바람이 안 부는데 소리가 날 리가 만무합니다. 일반 중생이 보는 것은 그냥 해골은 해골로 밖에 못 봅니다. 또 고목은 고목으로 밖에는 못 봅니다. 그러나 중생의 분별 시비를 떠난 중생의 제한된 그런 식을 떠난 그런 안목으로 본다고 할 때는 해골 가운데서 분명히 안경이 빛나고 있습니다. 고목에서도 역시 우리 중생이 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묘음이 영원적인 리듬이 흘러나옵니다. ‘촉루리髑髏裏 안경眼鏡이요, 고목리枯木裏 용음龍音이라말입니다.

 

이런 소식과 마찬가지로 매화나무에서도 어디에도 꽃이 숨어 있지 않지만 인연이 닿으면 그와 같이 꽃이 튀어나옵니다. 지금 우리는 혼란스러운 사회생활을 합니다만 혼란스러운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식도 많고 유능한 사람들이 더러는 가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런 말을 지식인들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정체를 모르고서 마음을 비울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불교인이 아닌 사람은 마음 비운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우겠습니까? 마음의 정체, 마음의 근원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마음을 비울 수가 있는 것이고 마음을 깊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비울 것인가? 그러면 선행해서 마음은 무엇인가? 지금 현대는 불교 말로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합니다. 그 다섯 가지 흐린 것이 꽉 차 있는 결국 사람 살기 어려운 그런 나쁜 세상 즉 악세라 말입니다. 오탁악세란 말은 불교의 술어적 말 같지만 우리 현대에도 오히려 음미吟味해 볼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말씀인 것입니다.

 

오탁이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맨 처음 겁탁劫濁이라, 이란 불교에서는 무량 세월을 말합니다. 세월이 차근차근 이렇게 오랫동안 되면 찌꺼기가 생긴단 말입니다.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맨 처음 텅 빈 공간에서 우주가 구성될 때는 별로 찌꺼기가 안 생겼습니다마는 우주가 구성되어서 오랫동안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찌꺼기가 즉 탁기濁氣가 생긴다 말입니다. 요즘 현대 물리학과 역학에서는 엔트로피라, 엔트로피entropy 불가역不可逆 에너지를 말합니다. 한번 사용한 에너지는 다시 재생하지 못하고 순수한 힘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공해가 쌓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인류의 그런 유형적인 문명이 오래가면 갈수록 찌꺼기가 쌓이는 것입니다. 찌꺼기가 쌓이면 그때는 우주의 분위기가 흐려진단 말입니다. 환경과 분위기를 떠나서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염된 그런 분위기에서는 우리 인간성마저 오염되어 갑니다. 겁탁劫濁은 오랜 세월이 되면서 우주의 찌꺼기가 차근차근 쌓이는 그것이 겁탁劫濁입니다.

 

겁탁이 생기니까 그때는 견탁見濁이라 볼 견[]자 흐릴 탁[], 중생이 보는 견해도 역시 차근차근 흐림이 생깁니다. 나쁜 사상이 생기고 별로 진리에 합당하지 못한 그러한 시설이 생깁니다. 또한 동시에 견탁見濁이 생기면 중생의 견해見解가 잘 못 되면 중생의 견해에 따라서 생기는 나쁜 견해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번뇌가 생깁니다. 자기라는 것을 바로 못 보고 우주의 본바탕을 바로 못 보면 그때는 인간의 마음에는 번뇌가 쌓여옵니다. 이것이 번뇌탁煩惱濁이라, 견해가 잘못되고 또는 중생의 번뇌가 쌓이면 따라서 중생도 흐려 옵니다.

 

물론 중생의 마음이 흐리니까 몸도 흐린 것이고 전체가 흐립니다만, 아무튼 견탁見濁, 번뇌탁煩惱濁 그다음 중생탁衆生濁이라 이렇게 되면 차근차근 중생의 견해가 흐리고 중생이 흐리면 즉 중생이 오염되면 거기에 따라서 나쁜 병들이 많이 생깁니다. 요즘 사회를 혼동시키는 AIDS(후천성 면역 결핍증)같은 그런 병들을 좀 보십시오. 이와 같이 혼탁할 때는 그런 알쏭달쏭하고 중생이 잘 모르는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중생계가 오염된 증좌證左입니다. 이런 오탁이 오탁증시五濁增時,’ 더할 증[]자 때 시[]자 오탁이 차근차근 증가하여 우리가 살기 어렵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탁만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은 살맛이 없습니다. 어느 철학자 말씀대로 불교가 아니면 우리 인간은 결국 모두가 다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가 아니면 희망도 없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인데 오탁증시五濁增時의 인간 사회에서 다행이도 역시 불법이라고 하는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오직 출구는 하나 있습니다. 다행히도 불교가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자살하지 않고서 살 수가 있는 하나의 희망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도 불교 아니고서는 최파摧破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이론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런 단순 소박한 그런 교로서는 물론 뒤지지만 이론 체계로 해서는 공산주의 이론을 못 누릅니다. 어째 그런가 하니 보통 일반 관념론觀念論이나 일반 신학적神學的 신학문神學問 그것은 물질세계의 근원을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공산주의를 누르기 위해서는 물질과 정신세계를 합한 그런 이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최파摧破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지가지 그런 혼란스러운 사상을 해결시키고 우리가 보다 더 바른길을 유도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무엇인가,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성의 본질을 모르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철학서, 어떤 종교나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명확한 해답을 주는 그런 교리敎理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비운다고 해도 역시 그냥 상대적으로 조금 더 좋은 마음, 조금 더 허심탄회한 마음 그런 상대적인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마음의 본질을 알아서 마음 특수성을 내세우는 그런 비우는 그러한 바른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법화경法華經에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가지 그런 여러 가지 흐린 것이 증가되는 세계를 다시 또 표현해서 말씀했습니다. 삼계무한三界無限이라, 삼계 이것은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우리 중생이 태어나서 갔다 왔다 하는 이런 세계를 삼계三界라 합니다. 우리 중생은 어떤 사람이나 성자聖者가 되어서 성불成佛을 하지 못하면 삼계에서 모두가 다 갔다 왔다 합니다. 우리는 다 삼계에 얽매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불교 술어가 너무나 어렵고 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개념적인 거리가 먼 관계상 잘 알려고도 않고 불신不信 합니다만, 사실은 캐어 보면 모두가 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조금도 오류가 없는 훌륭한 법문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인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무시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고 눈에 보이는 이것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같은 불교를 하는 분도 역시 심리적인 문제라든가 하는 그런 문제를 떠나서 그냥 현상적인 중생구제 우선 빵이나 해결되고, 우선 사회가 풍요하고 하는 이런 것만 따지는 불교인들은 보통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무시한다. 말입니다 그래서는 근원적인 인간구제는 못 되는 것입니다. ‘삼계무한三界無限이라,’ 우리 중생이 갔다 왔다 하는 세계가 삼계인데 그것도 역시 우리 중생이 아는 것은 다만 욕계欲界만 압니다. 제일 밑에 있는, 겉에 있는 세계만 안단 말입니다.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못 봅니다. 말로는 우리 불교인도 색계 무색계를 말하나 사실은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욕계를 근원으로 해서 욕계보다도 업장이 가벼운 그런 중생이 태어나는 좋은 세계로서 분명히 색계, 무색계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그와 같은 아만심我慢心을 부릴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보이는 한계 내에서는 인간이 좀 더 나은 것이지만 눈에 안 보이는 세계보다 더 우수한 세계가 많이 있습니다.

 

한데 우리 욕계는 물론이지만 더 나은 색계나 무색계나 그런 세계도 역시 참다운 안락安樂은 없습니다. 어째서 안락이 없는가 하면 가사 천상에서 태어난다 하더라도 역시 번뇌는 못 떠납니다. 번뇌 가운데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인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을 미처 못 여의고서는 우리 중생이 사는 욕계도 못 떠나고 색계, 무색계도 못 떠납니다. 즉 다시 말하면 윤회를 합니다. 싫으나 좋으나 우리가 윤회 않고서 참다운 영생을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나라는 것을, 원래 참 나는 지금 보이는 내가 아니라 말입니다. 진정한 참 나는 지금 보이는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는 그런 내가 아니라, 참다운 나를 모르고서 그때는 윤회를 못 벗어납니다.

 

따라서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자란, 참다운 나를 깨달아서 거짓 나를 최파한 이런 분들이 성자이고, 참다운 나를 모르고서 눈에 보이는 것만 나라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이 범부인 것입니다. ‘삼계무한三界無限이라,’ 삼계는 나를 미처 못 떠나는 따라서 안락적인 그런 행복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 삼계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우선 쾌락을 가지고 행복이라 합니다만, 나를 못 떠나는 중생이란 것은 참다운 행복의 맛을 못 보는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순간 찰나의 내내야 고, 고가 뿌리인 것이고 고의 뿌리 위에서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중생의 행복이란 것은, 삼계에는 안락한 것이 없어서 유여화택有如火宅이라마치 이것은 불집이라 불에 타고 있는 집과 같다.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치장도 하고 또는 행복 같은 그런 착각을 느낍니다만, 사실 우리는 지금 불타고 있습니다. 무슨 불에 타고 있는 것인가? 욕심慾心의 불에 타고 있고 또는 자기 마음이 싫으면 그때는 성내는 진심嗔心의 불에 타고 있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나를 못 떠나는지라 나에게 좋게 하면 욕심, 싫게 하면 진심, 이러한 탐심과 진심의 불에 안 타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욕심, 진심을 미처 못 떠났거니 이런 중생이 구성하는 세계는 모두가 다 화택火宅의 세계라, 불에 타고 있는 집이라 말입니다. 바로 보면 우리는 지금 불타고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삼계는 안락한 행복이 없어서 마치 불에 타고 있는 집과 같고 따라서 중고충만重苦充滿, 생로병사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고통이 많이 있고. 그런 고통이 충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이나 또는 늙음이나 또는 삶이나 또는 병이나 이것들을 떠나서도 가지가지 고통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고重苦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심다후회甚多後悔, 결국은 심히 우리가 두렵다 말입니다. 고통이 충만해 있으니 두려움이 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바로 못 보기 때문에 그냥 무상無常을 미처 못 느끼고 그런 허망한 것에 집착한 것에 불과합니다. 상유 생로병사 우환이라 항상 생이나 늙음이나, 병이나, 죽음이나, 기타 가지가지 우환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 여시등화如是燈火 이와 같은 불이 중생의 번뇌로 말미암은 그런 불이 치성무식熾盛無息이라, 불타서 조금도 쉬지 않는다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신문의 사회면 같은 것을 보면 얼마나 무서운 그런 불이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이고, 할퀴고, 싸우고 합니다. 배우나 안 배우나 중생이란 그런 점에서는 역시 아상我相을 못 떠난지라 이런 탐심貪心, 진심嗔心의 불을 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멈출 수 없는데 다만 여래如來 일이라, 여래란 부처님, 문자 그대로 진리에서 온 여래如來 불교에서는 여하다는 것은 이 같은 여[]자 입니다. 진리와 같다는 뜻입니다. 진리하고 하나인 뜻이 여입니다. 여여如如 하다, 모두가 만상이 차별 없이 진리와 같다는 뜻입니다. 어느 것이 조금도 차이도 뭣도 없고 일여평등一如平等의 진리란 것에 있어서는 여여如如 하다란 것을 씁니다. 여래 이것은 진리에서 왔다, 즉 말하자면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 이것이 여래인 것입니다. 삼계는 이와 같이 고통이 많지만 다만 여래, 진리에서 오신 부처님만이 또는 진리를 깨달은 성자만이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이미 떠나 있습니다.

 

중생은 분명히 자기가 사는 현상적인 세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은 화택세계火宅世界인 것이고 우리는 지금 탐심, 진심의 불에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선 할 일은 땅보다도, 지위보다도, 자기 집보다도, 동생, 아들보다도 우리한테 있는 자기 자신에 타고 있는 불을 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에도 머리에 불 끄듯이 머리에 타고 있는 불보다 급한 것이 있습니까? 머리에 불 끄듯이 공부하라는 그것이 우리 중생에게 한 법문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도 그와 같이 그런 급한 마음을 가졌기에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출가한 것입니다. 사실은 환경이 좋은 사람으로 출가한 사람은 모두가 이와 같이 촌인극, 자기 몸속에 불타고 자기 수염이 불타고 이것을 끄듯이 바삐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가장 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런 촌인의 절실한 감을 느끼고서 집을 나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이란 집을 나서서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집에 있다 하더라도 역시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불을 끄는 자기 참다운 불성을 모르게 하고, 자기 참다운 행복을 저해하는 이러한 탐심의 불, 진심의 불 이 불을 끄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일대사一大事로 하고 다른 것을 적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본말이 전도 안 되고서 우리 생활이 바른 길로 가서 여래라, 참다운 진리에서 온 성자가 될 수 있다. 말입니다.

 

앞서 말씀한 대로 내가 무엇인가 하는 그 문제에 관해서 우리 중생은 나를 바로 못 봅니다. 나를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보는 이것은 망아忘我, 망령될 망[]자 나 아[]자 말입니다. 중생이 보는 나 이것은 망아인 것입니다. 참다운 나가 못 되는 것입니다. 박사학위가 있고 또는 지위가 높아서 어떤 사회적인 그런 자기의 위치는 높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는 망아를 미처 못 떠나는 것입니다. 선정禪定이 아니고서는 모두가 망아忘我의 굴레를 쓰고 있습니다.

 

망아의 굴레를 쓰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죽을 때까지 욕심만 부려서는 그냥 죽는 순간 황사망黃蛇網이라, 황사망은 무엇인가 하면 누를 황[]자 뱀 사[] 그물 망[]자 말입니다. 그때는 딱 누런 뱀의 허물을 쓰고서 저승에 갑니다. 욕심을 많이 품은 사람은 분명히 죽어서 그때는 좋은 곳으로 못 갑니다. 나쁜 것도 그냥 나쁜 것이 아니라 구렁이 즉 말하자면 굵은 허물을 쓴 구렁이 몸을 받는다 말입니다. 마음은 역시 응당 그곳에 가서는 부처가 있고 다 있겠지요.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중생은 그것을 못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은 참다운 나를 못 보고서 망아忘我에 얽매여 삽니다.

 

그다음에는 가아假我, 거짓 가[]자 나 아[]자 말입니다. 비록 나라는 것을 해독解讀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망아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망령된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은 그때 인연에 따라서 생겨나는 흔적이 있습니다. 인연 따라서 하나의 존재로 생겨나는 하나의 그것이 가아假我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에다 각 원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합해서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하였습니다. 비록 망령되게는 안 되었다 하더라도 우선 인간 존재의 하나인 것이 있다 말입니다. 그것이 가짜의 아인 가아假我입니다. 그것도 역시 참다운 아는 못 됩니다. 참다운 자기 본 생명은 아니라 말입니다. 참다운 자기 본성은 참 진[]자 나 아[]자 그때는 진아眞我 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참다운 생명입니다.

 

석가모니나 각 도인들은 모두가 다 참다운 진아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분들입니다. 우리 중생은 진아眞我가 있는 것을 알듯 말 듯 하지만 보통은 가아假我도 미처 못 느끼고서 그냥 망아忘我, 망령된 우선 금생에 나와서 누구의 자식 누구의 딸 또는 자기 이름을 누가 지어주면 그것을 붙여 그냥 그것을 가지고 살다 갑니다. 이것이 보통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보통은 이런 망아 가운데서 오락가락하다 맙니다. 여기까지 진아까지 잘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사실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한테 꿔온 것도 아니고 원래 자기한테 이런 진아, 참다운 도리가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중생은 게을러서 미처 못 간다 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박 아무개, 김 아무개 하는 우리 중생이 느끼는 망아 이것은 정유리무情有理無, 인간의 그런 망정妄情 분별 시비하고 차별하는 인간의 망정에만 있고서 참다운 원리에는 없습니다. 참다운 원리에는 그때는 망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누구 엄마, 누구 동생, 누구 남편 하는 이런 것은 우리 중생의 분별 시비하는 망정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원래 본질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따라서 전무라 전혀 없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면서 무아無我라 하는, 내가 없다고 하는 무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는 불교를 안 믿는 것입니다.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지금 함부로 말하기도 하고서 그렇게 여러 가지로 논의가 되겠습니다만, 사실은 대승까지 미처 못 가고서 소승이 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아無我는 믿어야 됩니다. 무아를 믿어야 비로소 소승이란 말을 듣는다 말입니다. 즉 망아忘我 이것은 부정할 수 있는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허나 중생은 내 잘난 얼굴, 내 재산, 내 권속 이런 것에 얽매일 때는 아직은 망아忘我의 범주에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망아 이것은 다만 인연에 따라서 잠시만 이와 같이 가아假我가 있을 따름입니다. 가아假我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마치 허깨비 모양으로 뜬구름 모양으로 또는 물속에 비친 달 모양으로 말입니다. 어린애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 물속에 달이 있는 줄 알고서 휘영청 밝으면 그때는 분명히 달이 비칩니다.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속에 달이 있는 줄 알고서 정말 달인지 알고서 건지다가 빠져 죽는다 말입니다. 사실은 그것은 달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데 진짜 달인지 안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행복이요, 또는 권세요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이것은 물에 비치는 달에 불과 한 것입니다. 사랑이고 미움이고 뭣이든 물에 비친 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생활에서 생활 자체를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수중월水中月이라 모두를 물 위에 비친 달로 생각해야만 집착하지 않고서 참다운 진아, 참다운 영생의 행복을 약속하는 참다운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참다운 나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우리 중생의 망령에는 없고 참다운 도리에만 있습니다. 이것만이 참다운 진아眞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 하더라도 이런 진아를 인정하고서 진아眞我가 아닌 가아假我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만이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장수요, 자기가 무슨 집안 어른이요 하는 이런 생각에서는 그때는 마음을 못 비우는 것입니다. 탈탈 털어버리고서 오직 참다운 자기가 진아眞我 뿐이라는 이런 생각을 가져야만 망령스럽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우리가 그런 모순들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아를 탐구하는 참다운 나를 탐구하는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要諦입니다. 비록 자기 인연이 복잡해서 진아로 우리가 모두를 뿌리치고 한 번에 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설사 금생에 못 간다 할지라도 몇 생을 다해 가더라도 진아眞我가 되어야만 인생의 윤회는 끝날 것입니다. 인간의 목적은 결국은 망아忘我를 우리가 부정하고서, 망아를 초월하고서, 진아眞我를 성취하는 것이 이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나 안 믿으나 진아를 얻지 않고서는 인간의 참다운 맛을 못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자기를 모른다 말입니다. 진아만이 참다운 자기입니다.

 

참다운 진아眞我를 성취하는 공부 방법의 하나로서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진아를 성취하는 그런 길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주문을 외는 문제, 화두를 의심하는 문제, 또는 염불을 하는 문제, 또는 그냥 명상하는 문제, 진아를 깨닫는 방법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어째서 많은가 하면 사실은 바로 보면 천지 우주가 바로 진아眞我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내 존재 근원만이 진아가 아니라 하나의 피라미나 개미나 모두가 다 참다운 생명 자체는 진아입니다. 따라서 진아가 되는 길도 역시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마치 산봉우리를 올라갈 때 동이나 서나 북이나 남이나 올라가면 다 길이 있듯이 말입니다.

 

헌데 그런 가운데서 이문二門이라,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차정문遮情門과 표덕문表德門, 가릴 차[], 뜻 정[], 우리 망정을 중생이 무엇을 잘 못 보는 망정을 부정하는, 가려서 참다운 것을 발현하는 그런 문이 있는 것이고 또는 표덕문表德門이라 우리 중생의 그런 차별적인 법이 아니라 영원적인 소위 말하면 무가정無假定의 법, 참다운 중도中道 사상의 법 이런 것을 나타내는 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의 각 종파나 또는 같은 불교인들이 옥신각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공부하는 방법 문제에 있어서 차정문遮情門과 표덕문表德門을 잘 구분 못 한데서 옵니다. 만일 그 사람이 경을 본다고 할 때 차정문 쪽의 경을 많이 본 사람들은 그때는 표덕문의 법문에 나오는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방편이다, 이와 같이 부정합니다. 또한 그와 반대로 차정문遮情門만 공부한 사람은 표덕문表德門 법문에 나오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중도적으로 느껴야 합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사대오온四大五蘊은 공이다 소위 제법공諸法空을 말하는 법문은 모두가 차정문 쪽의 법문인 것입니다. 인생은 무상無常하고 인생은 고생이 많고 이와 같이 인생은 무상이라 소위 말하는 고, , 무상無相, 무아無我, 인생은 고생,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 인생은 허무하다, 이런 것을 말하는 법문은 표덕문 쪽의 법문인 것입니다. 참다운 법문은 그저 부정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법문이 부정만으로 그치게 된다면 부처님의 법문은 한낱 하나의 허무주의가 되고 마는 것이죠.

 

부처님의 법문은 일단 방편적으로 우리가 보는 문제를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문제를 부정한다 할지라도 내내야 참다운 목적은 영원한 영원히 존재하는 즉 표덕문表德門적 불교 말로 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원히 존재하는 항상과 영원히 행복한 안락과 또는 참다운 모든 도리를 다 깨닫고서 할 수 있는 아와 말입니다. 또는 청정히 조금도 번뇌가 없는 정과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갖춘 이 자리가 부처님의 참다운 목적입니다.

 

을 말씀하시고 또는 금강경에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말씀이 있지만 그것은 이러한 법을 영원한 법을 나타내는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역시 부정적인 목적은 이러한 표덕문表德門 쪽에 두고서 우선 우리 중생은 망아忘我 우매한지라 차정문遮情門으로 해서 그런 우리가 우리 망정에 있고 참다운 곳에는 없는 그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부하는 우리 수행자들도 보고 일반 중생들을 본다고 생각할 적에 먼저 이런 법을 말하는 부처님의 법성을 말하는 표덕문表德門에만 관심을 둔 사람은 사실은 번뇌를 잘 못 떼어냅니다.

 

참선 공덕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닦을 수[]자 고요할 선[], 선을 닦아 불공이라, 아니 불[]자 빌 공[]자 말입니다. 그냥 공을 이론적으로 공이다 하면 그때는 공에 치우치기 쉬우나 닦아서 얻은 공은 내내야 공의 본질이 중도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공만 닦으면 저절로 중도中道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은 미처 못 닦고서 사실은 모두가 다 부처다, 이와 같이 우선 불성만 믿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그런 문제를 미처 못 닦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만我慢도 걸리는 것이고 더러는 개인도 파괴하고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원시불교에서 말씀하시는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말씀, , , 무상無常, 무아無我, 부처님께서 원시 경전에 말씀하시는 아함경같은 곳에서 고, , 무상無常, 무아無我란 이런 말은 굉장히 음미해야 합니다. 우선 내가 부처라 이것만 생각하고 나가는 사람은 자기부정을 잘못시킵니다. 자기부정을 못 시키면 그때는 욕심에도 걸리고 또 과를 범한다 말입니다. 이러한 몸뚱이가 내가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파고 들어가고 부정할 수 있는 자기비판을 엄격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끝에 가서는 결국 내내야 불성佛性인지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영원한 행복이 나옵니다. 이것이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따라서 우리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차정문遮情門과 표덕문表德門 우리 목적은 부처님의 그런 불성을 갖추고 있는 일체 공덕을 갖춘 그런 것에 목적을 두고서, 또는 우리 관념을 그곳에 두고서 우선 공부하는 방법에는 아까 말씀대로 차정문 쪽으로 고, ,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아는 결국 비어 있습니다. 참다운 진아眞我가 참답게 있는 것이고 내가 느끼는 아는 비어있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율에 대한 부처님의 법문을 소개합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서 유교경遺敎經이라, 이것은 아주 간단한 경인데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 들으실 때 일반대중에게 경계하는 말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적에 자기 손자들에게 고구정녕이 아주 쉬운 말로 우려하고 타이르는 말로 해 놓은 법문이 유교경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이런 경전을 보시면 알지만 아주 간단한 가운데서 또는 평범한 가운데서 우리가 지켜야 할 조목들이 있습니다.

 

계시戒是 이것은 바로 정순해탈지본正順解脫之本 이라 바로 이것은 해탈의 근본에 따르는 법이라, ‘인계생정因戒生定하고 인정생혜因定生慧,’ 계율에 말미암지 않으면 삼매가 못 나옵니다. 삼매가 없으면 참다운 지혜는 못 나옵니다. 우리가 분별 시비하는 즉 말하자면 간혜지乾慧地, 바싹 마른 지혜가 아니라 참답게 비춰보는 생명의 지혜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인간을 초월하는 지혜, 그런 지혜를 알려면 역시 삼매에 들어서 아는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삼매에 들어서 아는 지혜야 만이 과거 현재 미래 즉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합니다.

 

헌데 그런 삼매 이것은 계행이 앞서지 않으면 삼매는 못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도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이면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시라尸羅는 우리 말로 계율戒律을 말합니다. 계율을 청정히 하지 않으면 삼매불현전이라 삼매는 안 나옵니다. 지금 우리는 대승불교라 붙이기가 너무나 현란하고 현대가 바쁜 세상인지라 삼매 문제가 나오면 그것은 인도에나 있는 법이지 이와 같이 무시합니다만, 현대가 아니라 어떤 사회가 온다 하더라도 역시 삼매에 안 들면 영원적인 참다운 지혜는 못 나옵니다.

 

파도가 고요하지 않으면 설사 만상萬象이 비춘다 하더라도 바로 못 비춥니다. 삼매三昧라는 것은 잠자는 파도, 파동치지 않는 잔잔한 파도 이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 밝을 명[]자 거울 경[]자 거울에 티끌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는 지수라 그칠 지[] 물 수[]자 파도가 없는 고요한 물 말입니다. 밝은 거울에 모양이 바로 비추고 또는 고요한 물에 모양이 바로 비춰오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깊은 삼매에 들어서 고요한 적멸寂滅 경계 이런 경계가 아니면 영생의 참다운 지혜는 비춰올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계율로 해서 우리 몸뚱이나 주위를 맑게 해야 합니다. 내 몸이나 내 마음 가운데 티끌이 없다. 이와 같이 자부심이 안 들고서는 사실은 삼매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지 말고 마늘을 먹지 말고 파를 먹지 말라. 이런 것 저런 것도 없이 모두가 삼매라는 의미에서는 마늘이나 고기나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삼매에 든다고 할 적에 우리 마음에 우리 몸에 조금도 파동이 없이 참다운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마늘이나 고기나 파나 모두가 방해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경전 가운데 신통도 하고 여러 가지 재주를 내는 법이 있는데 그런 법을 한다고 생각하면 사실은 소금기도 안 먹어야 하고 그런 금기가 많습니다. 그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몸이나 마음이 오염되어서는 참다운 삼매에 못 들어간다.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속가에서 이래저래 복잡한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바른 길은 알아야 합니다. 삼매에 평생 안 들고 그냥 남이 말 한대로 뒤만 따라 가려면 몰라도 정작 본인이 삼매에 들어가려면 그런 금기는 지켜야만 삼매에 빨리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 이것은 바로 정순해탈지본正順解脫之本이라,’ 해탈의 근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의인차계依因此戒 이런 계에 의지하기 때문에 득생제선정得生諸禪定 급멸고지혜及滅苦智慧.’ 이런 계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는 모든 선정과 멸고滅苦, 생로병사를 주로 하는 인생의 모든 고뇌, 번뇌를 멸하는 지혜를 얻는다 말입니다.

 

시고是故 이런 고로 여러분 불자들은 당지정계當持淨戒라 마땅히 청정계를 지니고서 물령훼범勿令毁犯이라. 그런 계를 훼범하지 말고 또는 해치지 말고 약침이 없이 해야 하느니라. ‘당지當知 계위제일안은戒爲第一安隱 공덕지소주처功德之所住處,’ 마땅히 알지라. 이것은 제일안온第一安穩, 마음을 가장 안온스럽게 하는 공덕이 머무는 곳이라 말입니다. 우리는 대승이란 변명으로 해서 계율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무시하면 결국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또한 동시에 삼세제불호념三世諸佛護念 선신가호善神加護,’ 우리 중생은 안목이 한정되어 있어서 항시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좋은 이익이 있으면 그것은 좋고 눈에 안 보인 것은 그때는 무시합니다. 우선 시주도 돈 많이 하면 좋고 말입니다. 사회생활도 역시 빵이 풍족하면 좋은 걸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사회적 큰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그 보다 역시 우리 인간 정신 문제가 더 큰 것입니다. 비록 남한테 보시를 하나도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그 정신 자체가 일반중생을 위하여 자기의 아를 멸진滅盡하고 자기의 참다운 진아眞我를 개발하고 또한 동시에 다른 중생도 역시 참다운 진아를 갖도록 하는 그런 자비심 이런 것만 있다고 하면 남한테 돈 한 푼도 보시를 안 해도 그 공덕은 한량이 없습니다.

 

헌데 중생은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우리 중생이 하는 것은 제한되어 버리는 것이고 참다운 순 공덕을 얻지 못합니다. 항시 말씀 합니다만 가사 우리가 사회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나가서 중생과 더불어서 같이 살고 같이 울고 또 울부짖고 하는 것은 참여고 중생을 떠나서 공부하는 것은 참여라고 못 보는 그런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중생의 안목에서 보이는 것만 따지는 그런 좁은 소견인 것입니다. 비록 중생과 같이 안 산다 하더라도 역시 그 마음이 중생과 같이 더불어 있고 자기 신명을 다 바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참다운 참여인 것입니다.

 

마치 임란왜란(壬辰倭亂, 1592)때 서산(西山 休静, 1520~1604)대사는 나와서 그냥 같이 싸워서 공로가 많고 진묵스님(震黙, 1563~1633)은 한 번도 안 나왔지만 진묵스님의 공로는 서산대사의 공로에 못지않습니다. 호국적인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라를 더 사랑했던가 나라를 사랑하는 열도에 따르는 것이지, 나와서 덤벙거리고 안 덤벙거리는 그 점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와 같이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순수한 정신적인 문제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은 비록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삼세 부처님은 영생하게 존재합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라 말입니다. 제불은 존재합니다. 또한 동시에 무수한 선신善神도 존재합니다. 다만 중생은 못 본다 말입니다.

 

우리 같은 중생이 어느 암실에 있으나 또는 어느 암굴에 있으나 우리 인간 존재가 어디에 있든 간에 삼세제불이나 각 선신들은 우리 행동, 우리 말 하나하나를 다 듣고 있습니다. 어떠한 것도 우리 행동의 제 아무리 비밀스러운 것도 역시 각 선신이나 부처님의 안목에서 떠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인과출현因果出現이라, 우리가 짓는 것은 말이나 행동이나 인과에 따라서 받고 안 받고 합니다. 바른 행동, 바른 말, 내내야 계율 이것은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말이 계율 아닙니까?

 

우리 행동이 바른 말, 바른 생각, 바른 행동 이와 같이 우리 신, , 삼업으로 짓는 그런 것이 청정해지면 삼세제불도 역시 분명히 우리를 보고 지키고 또한 동시에 각 선신도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쟁에서 쏘는 탄알도 사람보고 피해 간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어처구니 없지만 사실은 총을 쏘거나 그보다 더 위력 있는 탄알이라도 역시 사람을 보고 분명히 피해 가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니 어떤 공기 속에서나, 각 선신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탄알도 역시, 탄알 속에도 각 선신과 부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모양이 아닌 성령으로써 부처님과 각 선신들이 말입니다. 어떠한 위치에서도 계십니다. 따라서 탄알 속이나 어떤 공간 가운데나 어디에서나 부처님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존재가 우리 행동이 바르면 그냥 즉시에 감응感應이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부처님 기운, 불성의 기운이 사람도 되고 개도 되고 또는 하늘의 별도 되고 다 되었습니다. 원래는 부처님 기운뿐인데 그런 기운이 인연 따라서 사람도 되고 개도 되고 다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개가 되고 사람이 되고 무엇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님 이란 그 점, 부처님의 그런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부처님의 서린 기운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그와 같이 각 원소가 되었다 하더라도 역시 부처님의 기운은 변동이 없습니다. 불성의 기운은 바위에 있으나 피라미에 있으나 또는 구더기에 있으나 똥에 있으나 부처님 기운은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모아서 그것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뱀이 되고 무엇이 되었다 그뿐입니다. 뜬구름같이 아까 제가 말씀한 대로 물 위에 비친 달과 같이 현상만 변할 뿐이지 부처님 기운은 변동이 없습니다.

 

따라서 변동이 없는 부처님의 기운, 그 기운에 따라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계행戒行을 지키고 바른 말을 해온 사람들은 역시 제불보살이 보호해주고 또한 동시에 천신들의 가호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밀교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목草木, 초목草木, 무심호無心呼 소승小乘이라, 초목에도 초목에도 무심이라, 초목에도 마음이 없다 하면 소승이라 말입니다. 우리는 식 그러면 식은 일반사람이나 있고 동물에나 있지, 하고 일반식물이나 무생물에는 없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사실은 천지우주가 식 뿐입니다. 이 만법이라 말입니다. 만법이 식 뿐인 것을 중생은 겉만 본다 말입니다. 은 안 보이는 것이니까,

 

우리 불교인들은 눈에 안 보이는 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마음 만법이 유심인 마음, 일체가 모두 마음뿐이다, 이다 하는 그런 순수 에너지뿐이라는 그걸 믿고서 다음번 문제로 우리가 현상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잘 낫다, 못 낫다, 밉다 또는 강도가 있다, 멋있다, 이것도 역시 겉으로는 강도가 나쁜 것이지, 내내야 근원은 부처님 종자로 이루어진 하나의 심심 미묘한 만다라曼茶羅의 세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부처님의 화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너무나 낭비를 많이 합니다. 마치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마치 조그마한 적은 물에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이나, 또는 우리 발자국에 고여 있는 물이나, 그런 물에 있는 고기나 우리가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약간 길고 짧고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사람이란 것은 내내야 죽고 마는 무상無常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조그마한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에 노는 하나의 고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생명을 생각할 때는 마치 적은 물에 노는 고기떼를 생각해 가지고서 우리는 풀 끝의 이슬 같은 그런 하찮은 목숨, 하찮은 목숨으로 무상을 느낍니다.

 

또한 동시에 도살장에 있는 양이나 소와 같이 금방 죽는다 말입니다. 20, 30년 그것이 우리와 비교 할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백 년을 산다 해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이러한 우리 목숨은 따지고 보면 마치 도살장에 있는 소나 말들이 그냥 금세 죽어가는 그와 똑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상無常을 느끼고 고해苦海를 느끼고 고를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참다운 목적인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보면 인간을 가리켜서 영병궁자竛竮窮子라 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영자 이것은 비틀거릴 영[], 헤맬 병[], 비틀거리고 헤맨다 말입니다. 궁자는 궁할 궁[]자 놈 자[], 즉 말하자면 거지입니다. 우리 중생을 비유해서 비틀거리고 헤매는 거지와 같다. 이와 같이 비유했습니다. 우리 중생은 사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또 물질의 유무를 불문하고서 따지고 보면 결국은 영병궁자라, 비틀거리고 헤매는 하나의 거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 몸도 역시 내 것이 아닌 것인데 내 몸도 결국 각 원소가 합해서 인지간 하나의 형태에 불과한 것인데, 그러기에 이것은 마치 공취空聚, 빌 공[]자 모을 취[]자 공이 모여 있다. 말입니다.

 

우리는 불교의 청정망루淸淨望樓를 다 보고 약간 수행 했다 하더라도 내가 없다 하는, 내 몸뚱이가 텅 비어 있다 하는 그런 생각을 잘못하면 불법의 참다운 진수를 모릅니다. 결국은 피상적으로 가고 맙니다. 내가 비어 있다는 공을 느껴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 몸은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언제 인가도 말씀했습니다만, 공을 제아무리 많이 모은다 해도 공뿐입니다. 제로zero를 몇 만개 더해도 제로zero 인 것뿐이라 말입니다. 그렇게 되듯이 내내야 우리의 몸 또는 만유를 구성하는 가장 미세의 세포 가장 미세한 소립자 이것도 역시 사실은 질량 열량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운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겉피에 불과합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염파念波에 불과합니다. 헌데 중생은 잘못 보고 성자聖者는 분명히, 명명백백히 그러한 참다운 실존實存을 보고서 가상의 텅 빈 공을 본다 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약산 유엄(藥山唯儼, 760~829)선사禪師, 이분은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이분은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선사禪師한테 법을 받은 분입니다. 그때 마침 낭주자사朗州刺史로 있던, 자사刺史란 그 고을을 다스리는 관찰사觀察使를 말합니다. 낭주자사로 있던 이고李翶란 분이 있었는데 이분도 역시 위대한 분입니다. 이분은 비록 관리로는 지내지만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분입니다. 이분은 어디에 자기가 부임하던지 바로 그 관내의 절에 가서 큰 스님을 뵙고 법문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낭주로 가서 맨 처음 들은 것이 약산 유엄 스님이란 분이 자기의 관내에 있단 말을 듣고 이분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고李翶란 관리가 약산 스님을 만나러 갔는데 가서 보니 집도 허술하고 나이가 많이 든 분이라 바싹 말라가지고 아무런 볼품이 없어 보인다 말입니다. 물론 산중에서 공부하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도는 높다 하더라도 볼품은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이고李翶란 분이 하는 말이 비루鄙陋하는 말투로 어떻게 말했는가 하니 보는 것이 듣는 것만 못 하는구나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들을 때는 위대한 도인이라 하니까 얼굴도 훤히 빛나고 할 것으로 생각한 것인데, 가서 보니까 사실 얼굴도 별것도 아닌 것이고, 얼굴은 꾀죄죄하니 바싹 야위어 보인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대뜸 약산 스님이 하시는 말이 그대는 귀만 소중하고 눈은 소중하지 않구나이와 같이 답변 했어요. 사실은 귀나 눈이나 모두가 다 평일여平一如일 것인데 약산 스님이 그와 같이 말하니까 그냥, 이고李翶 그분도 공부를 좀 한 분이라 그냥 마음에 와서 턱 걸린다. 말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이 참 도입니까? 어떠한 것이 참 길입니까? 이와 같이 참다운 길, 도를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약산 스님께서 손을 들어서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킵니다. 다른 신통한 기기묘묘한 몸부림도 없이 단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땅만 그렇게 가리킨다.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큰소리로 알겠는가? 하고 호령을 했어요.

 

땅을 가리키고 하늘을 가리키고 인제 알겠는가? 하고 호령을 하니까 이고李翶란 관찰사가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르겠습니다하니 그때 약산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 이라.’ 구름 운[], 있을 재[], 푸를 청[], 또 하늘 천[].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수재병水在甁이라. 물 수[], 있을 재[], 병 병[]자 물은 병 가운데 있다. 마침 약산 선사의 상에 병이 있고 병 가운데는 마시는 물이 있었겠지요. 참다운 불법, 참다운 진리를 물으니까 무슨 기기묘묘한 어떤 난해한 법문이 아니라 맑은 하늘에 구름 있고 또한 동시에 병 안에는 물이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 이라말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길이란 것은 우리 인간 생활을 떠나서 딴 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보고 못 보고 한다는 차이뿐이라 말입니다. 일반중생은 못 보고 참다운 도인들은 볼 뿐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간격도 없이 천지 우주에는 부처님뿐인데 일반중생은 못 봅니다. 하늘에 있는 구름 또는 병에 담겨있는 물, 이와 같이 컵에 있는 차 이것은 모두가 다 본 바탕은 부처인 것입니다. 중생과 도인의 차이로 해서 중생은 못 보고 성자는 본다는 말입니다. 다 그러기에 법본묘法本妙 추유물정醜由物情이라. 법은 본래 묘하고 신묘한 것이지만 추유물정이라. 다만 중생이 망정으로 그르친다.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어떤 종교나 그 신앙이 필요하지만 우리 불교는 특히 바른 정신이 필요합니다. 바른 정신이 못 되면 그때는 바른 신앙에 못듭니다. 바른 정신만이 자기를 구제하고 타인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른 정신이 무엇인가? 이것은 비록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못 본다 하더라도 천지 이대로가 부처님의 심심 미묘한 생명이라 말입니다. 우리 경에는 극락세계가 십만의 국토 저 밖에 있다 합니다. 물론 중생의 이런 오염된 세계를 본다고 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극락세계는 형편도 없이 멀겠지요. 허나 이것도 역시 우리 중생과 성자의 견해 차이뿐입니다. 성자가 보면 그때는 물론 이와 같이 못생기고 못난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라 말입니다.

 

그러나 각 성수星宿의 질에 따라서 마치 토성이 있고 목성이 있듯이, 같은 별도 역시 호법선신이 주재하는 그런 좋은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목성에 사는 존재 또는 지구와 같은 곳에서 태어나는 존재 금성 같은 좋은 곳에 사는 존재가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참다운 실상 이것은 극락세계인데 극락세계는 천지 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의 오염된 눈으로 보면 그때는 이것이 사바세계이고 오염된 그 마음, 그 마음 떠나면 그때는 바로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라 말입니다.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요 오염되면 범부라 말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그런 문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바른 정신이 먼저 앞서야 합니다. 비록 내가 지금 탐, , 삼독심三毒心으로 가리어서 조금도 맑은 세계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맑은 세계를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맑은 세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천지 우주가 깨달음 뒤에 청정한 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이라, 본래 청정함을 인정해 놓고서 닦아야 만이 공부가 빠른 것이고 우리 마음에 갈등이 적다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아까 말씀드린 유교경遺敎經,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설법하신 유교경속에 있는 법문입니다.

 

지족공덕知足功德이라.’ 자기가 만족하는 것을 안다, 말입니다. 바른 신앙이 없으니까 우리는 자기만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헌데 이런 만족을 아는 공덕은 어떤 것인가 하니 여등비구汝等比丘, 이것은 우리 비구뿐 아니라 사부대중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비구들이 약욕탈제고뇌若欲脫諸苦惱, 만약 고뇌를 인생고를 없앤다 하면 당관지족當觀知足이라, 마땅히 족함을 우리들은 관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만족을 모르니까 그에 따라서 차근차근 여러 가지 망동을 취하고서 죄를 범한다 말입니다. 지족지법知足之法이라 우리가 만족을 아는 법은 어떤 것인가 하니 이것은 즉시부락안온지처卽是富樂安穩之處 이라.’ 우리가 만족을 알면 그때는 재산의 유무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만족을 아는 그 마음, 청정한 마음으로 해서 그냥 그것이 부락富樂이라 말입니다.

 

지족지인知足之人 수와지상睡臥地上이라.’ 비록 땅 위에 누웠다 하더라도 유위안락猶爲安樂이라,’ 오히려 안락스럽고 말입니다. 마치 공자가 물먹고, 나물 먹고, 팔 베고 누웠어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하듯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면 비록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다 하더라도 별로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당장에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별로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만족을 모르면 도처가 고통뿐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극락이란 것은 원래 불성佛性은 무한의 가능성이 있어서 원래 불성은 무한대의 불성이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불성에 까지 못 가면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불을 못해 놓으면 충족감을 못 느낍니다. 이성으로나 또는 돈이나 어떤 것으로나 말입니다. 성불하기 이전에는 우리는 완전한 만족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먼저 만족이란 뜻을 잘 모르면 도처에 불만뿐입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땅위에 누웠다 하더라도 오히려 안락이 되는 것이고 부지족자不知足者는 만족을 모르는 이런 사람은 수처천당雖處天堂이라천당 같은 우리 환경이나 물질은 풍족해서 모자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역불칭의亦不稱意, 제 마음에 맞지 않다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지족자不知足者 수부이빈雖富而貧이라,’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비록 부자라 할지라도 가난한 것이고, 반대로 만족을 아는 자는 가난 하더라도 부자인 것입니다. 부지족자不知足者,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위오욕常爲五欲 항상 오욕에 얽매여서 지족자지소련민知足者之所憐愍 시명지족是名知足이라따라서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은 항시 마음이 오욕의 노예가 되어서 참다운 만족을 아는 현자들에게 빈축을 받는 것이고, 가여운 마음으로 해서 연민 밖에 못 받는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자기가 처해 있는 것이 구차하다 하더라도 역시 성자의 말은, 이것은 진어眞語라 여어如語라 성자의 말은 진어, 여어입니다. 참 진[], 말씀 어[], 성자의 말은 이것은 참다운 말입니다. 성자의 말은 여어如語라 여여한 말이라 말입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내 참다운 생명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망령된 망아忘我가 아니라 진아가 나일 바에는 진아眞我로 가는 길, 참다운 청정된 길은 모두가 다 부자인 동시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재산이나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참다운 자기를 모르는 길은 역시 가시밭길이고 구차한 것입니다. 학식이 많이 있고 또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은 자기 신앙을 생명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소홀히 합니다. 불성은 나에게도 있겠지. 이와 같이 이치로만 따지고 자기 생명으로까지 공감을 하는 그런 신앙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신앙 대상을 간절한 앙모심仰慕心, 간절한 그리움으로 구하는 그런 수행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부처님을 우러러 보는 자기가 불성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우러러보고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그런 마음이 굉장히 우리 마음을 정화 시켜주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 현대인들은 배우는 것이 하도 바싹 마르고 또는 우선 물질에 오염되어서 말입니다. 우리 신앙 대상인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는 추구하는 앙모仰慕하는 힘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인의 신앙으로부터 참고를 해야 합니다. 정말 그리움으로 해서 부처님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념신해一念信解 공덕이라, 한 생각 우리가 믿고서 해석하는 공덕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말하는 법문입니다. 기유중생其有衆生 어느 중생이 문불수명장원여시聞佛壽命長遠如是,’ 부처님의 수명이 무량해서 그때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을 듣고서 안다 말입니다. 우리는 법신 부처님을 단순히 이치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생명인 것이니까. 내가 생명이듯이 내 본질이고 천지 우주의 본질인 부처님 바로 이것이 생명인 것입니다. 우주의 순수한 생명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생명이 장원長遠이라, 특히 영생하고 또는 무량수인 것을 의미하고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부처님의 생명이 무량수임을 듣고서, ‘능생일념신해能生一念信解 소득공덕所得功德이라,’ 능히 한 생각 믿고서 해석하는 것을 얻는 공덕이 얼마나 큰가 하면 내가 부처지 하고서 그냥 자기를 초월하는 자기 본 생명 자리, 영원의 자리를 무시하면 그때는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생명이 영원한 것을 듣고서 믿는 그 마음 그 공덕이 얼마나 크냐 하면, 그때는 무유한량無有限量이라 한량이 없다 말입니다. ‘약유선남자선여인若有善男子善女人만약 불교를 믿는 그런 착한 사람들, 착한 여인들이 위무상도僞無上道이고 해탈을 위한 무상의 진리를 위해서 보시를 하고 계행을 지키고 인욕을 하고 말입니다. 또는 정진을 하고 참선을 하고 이와 같이 바라밀을 많이 닦는다 하더라도, 이런 공덕은 비전공덕만분천분比前功德萬分千分 불급기일不及其一이라.’ 앞서 말한 부처님의 생명을 무량하게 믿는 그런 공덕에 비교하면, 그냥 그것을 모르고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보시도 하는 공덕은, 부처님 생명의 영원스러운 것을 믿는 공덕의 10000분의 1도 못 되고 1000분의 1도 못 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큰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공덕은 역시 무량하다. 즉 영원적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런데서 불상 숭배나 방편적인 신앙이 나온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직 따지고 보면 이런 오바라밀五波羅蜜, 보시報施, 인욕忍辱, 지계持戒, 선정禪定, 정진精進 이런 오바라밀이 기초가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부처님을 이와 같이 공경스럽게 아! 그리운 부처님이시여 하는 간절한 갈앙심渴仰心, 이런 갈앙심이 순간순간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에서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한 생각 청정하면 그 일념으로 해서 우리가 극락에 간다 말입니다. 다만 중생은 일념 그것이 순수하게는 못 되는 것입니다. 일념이 순수하면 그 즉시 신통도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바위가 불성뿐이다, 바위나 또는 공간이나, 나무나, 무엇이나 다 순수한 불성뿐이라, 불성은 물질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또는 내 몸도 불성뿐이다. 내 몸도 각 원소가 합해서 이와 같이 현상적인 사람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실은 지금 불성을 감추고 있는 살아있는 불성뿐인 것입니다. 헌데 이와 같이 모두가 다 불성뿐 이라고 정말로 믿으면 우리가 공간을 날아 갈수도 있고 신통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오염된 습기 때문에 그와 같이 100% 못 믿는다 말입니다.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믿을 신[]자 가득할 만[滿]자 성불이라 말입니다. 사실은 믿음만 100% 믿게 되면 그때는 그것으로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그렇게 못 믿는다 말입니다. 따지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 또는 습기 때문에 가리어서 100% 못 믿는 것입니다. 100% 못 믿기 때문에 병도 안 낫고 공덕을 입지도 않습니다. 일체가 가능한 것이 불성이기 때문에, 따라서 단순 순박한 염불이라, 일념도 흐림이 없는 순수한 공부를 유도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방편을 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명이 무량無量 무수無數함을 딱 느끼는 공덕이 얼마나 큰가 하니 비록 금생 내내 보시하고 인욕을 하고 또는 정진을 하고 계행을 지키고 참선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이런 공덕은 부처님을 참답게 믿는 공덕의 몇 분의 일보다 못 합니다. 이와 같이 갈앙하는 갈앙심渴仰心의 공덕은 큰 것입니다.

 

특히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부처님을 갈앙하는 갈앙심渴仰心 즉 우리 고향은 바로 극락세계이고 우리 참다운 자리는 부처님입니다.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 참다운 자기 생명은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그리움 그것이 없으면 거기에 못 간다. 말입니다. 갈앙심이 순수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을 정화시켜서 비약적으로 성불하고 맙니다. 그래서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으니까 이제 훌쩍 뛰어넘어서 끝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부처님께서 맨 나중에 말씀하신 유교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경전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여기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새기고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불언佛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박문애도博聞愛道는 도필난회道必難會말입니다. 널리 듣고서 도를 탐하는 사람들은 그 도를 반드시 만나기 어렵고 학문의 바다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팔만장경을 다 공부한 뒤에 우리가 성불 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성불을 못 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많이 듣고서 닦는 그런 행법은 도를 만나기 어렵고 말입니다. 수지봉도守志奉道는 그러나 비록 학문은 별로 없다 하더라도 순수한 뜻을 지키고서 수지봉도라. 그런 진리를 받들고서 갈앙하면 이것은 그런때는 도 이것은 기도심대其道甚大’. 깊고 크다. 그런데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문자를 배우지 말고서 마음을 딱 집어서 마음 깨달아라이런 말씀을 합니다.

 

마땅히 복잡다기한 그런 것에만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가운데서 마음을 닦는 가운데서 깨우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을 미처 못 배우고 그런 잡다한 공부를 못한 분도 역시 이런 박문애 도博聞愛道를 능히 듣고서 도를 사랑하는 그런 것은 도필난회道必難會, 그런 도는 반듯이 얻기가 어렵고 말입니다. 뜻을 받들어서 도를 희망하는 그런 순수한 길은 도가 깊다. 그런 것을 명심하셔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저 설산에서 한고조寒苦鳥란 새는 찰 한[], 괴로울 고[]자 말입니다. 한고조寒苦鳥란 새는 아주 게으름이 많은 새인데, 평소에는 설산이 춥지만 낮에는 햇빛이 오니까 게으름 피우고 놀고, 밤에는 추우니까 후회하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도 성불의 길이 좋은 길이란 것을 대강 짐작 하지만 한고조와 같이 그냥 좋은 미끼에 빠져서 거기에 속아서 참다운 성불의 길을 못 갑니다. 우리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작은 물속의 고기와 똑같습니다. 그와 같이 허망하단 말입니다. 또는 지금 곧 도살장의 소나 말이나 똑같습니다. 그러한 것이 중생의 제한된 운명입니다. 마땅히 머리에 불 끄듯이 자기 현재의 위치가 어느 위치라 하더라도 성불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