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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26. 모두가 다 부처님 뿐입니다.

26. 모두가 다 부처님 뿐입니다.

 

* 198713일 태안사 용맹정진 입제법문입니다.

 

26. 37-1987.01.03 용맹정진 입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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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행중無量修行中 참선최제일參禪最第一이라.’ 우리의 수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무량수행無量修行 중 참선이 최제일最第一이라. 참선이 제일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경론經論에 있습니다. 참선 이것은 우리 마음을 증폭시킨다고 해서 즉 말하자면 마음의 볼륨을 증강增强시킨다 말입니다. 그래서 증상심학增上心學 더할 증[], 윗 상[], 마음 심[], 배울 학[] 증상심학이라. 이와 같이 우리가 타고나온 그런 마음을 좋은 쪽의 것으로 해서는 마음의 국면이 더 증폭이 안 됩니다. 우리가 경도 외우고 또 여러 가지 명상법도 하고 하지만 참선법이 아니고선 우리의 타고난 마음의 국면을 넓힐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지평을 더 확장 시킬 수가 없다 말입니다. 헌대 참선 이것은 무량수행 중 참선 제일이라. 이것저것 모든 행법行法이 많지만 참선 이것이 최 제일, 가장 으뜸가는 수행법이라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복이 많으셔서 이 자리에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 제일 가장 수승한 법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우리가 많이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마만치 거기에 이르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할 것인가. 참선은 먼저 바른 정견正見이 앞서지 않고서는 참선은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정견이 선행적으로 갖추어 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떤 것이 정견正見 인가. 여러 가지로 참선 한다고 애를 많이 씁니다. 또 지금은 서구지방 에서도 참선 흉내를 많이 냅니다. 마인드컨트롤, 초월적 명상법 이다 해서 명상법의 가지가지 형태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서 참선법을 흉내를 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어째서 못 되는가. 정견正見, 바른 견해가 아니고서는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정견이 확립이 돼야 만 비로소 참선이란 말을 붙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이 만 사람이 있으면 만 사람 각각 얼굴이 차이가 있듯이 마음도 역시 그 업장의 차이 때문에 가지각색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 한국만 두고 보십시오. 지금은 불교도 수와 기독교도 수가 어디가 더 많은지 모를 정도로 백중세입니다. 그 양편 다 거의가 약 천만 정도 됩니다. 우리 한국 민족이 아주 굉장히 총명한 민족입니다만 또 굉장히 귀가 얇은 민족입니다. 기독교는 지금 제가 비방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불교와 비교하기 위해서 말씀합니다만, 기독교는 근원적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이원적인 사고방식이 되어 있습니다. 사물은 항시 분별로 본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하나님과 대립對立하는 satan(악마)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 있으면 악이 있고 또 내가 있으면 네가 있고 말입니다.

 

기독교 문학관에서 보면 모두가 이와 같이 분열시켜서 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소위 말하는 흑백논리黑白論理 입니다. 이 아니면 흑이다, 하는 그렇게 결론적으로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적인 기독교 구호를 본다 하더라도 우리 한국같이 요원의 불같이 교도 수가 증가 된 곳은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 한국같이 배타적인, 자기가 믿는 종교가 아니면 그것은 아니다 삿된 짓이다 하는, 한국같이 첨예하게 가장 치열하게 배타적인 기독교는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귀가 얇기도 하고 총명 하지만 얄팍한 점이 있습니다.

 

또는 지금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명색이 과격적인 그런 분들 말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해 가지고서 그런 흉내를 내는 그 사람들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소비에트나 중공이나 쿠바에도 많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도 우리 이북같이 극렬하고 소아적小我的이고 독단적인 예는 없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에도 기독교뿐만 아니라 대종교 무슨 교 무슨 교 얼마나 많습니까. 이번에 신년 호에 나와 있는 각 종교 교주들의 말씀들을 얼핏 들어 보았습니다만, 다 자기들 교파만 옳다고 그럽니다. 그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직은 바른 정견正見, 바른 정견을 갖지 못해서 그럽니다.

 

그러한 바른 정견을 갖지 못하면, 설사 지금 기독교에서 우리도 선 한다 해가지고서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정견正見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정견인가 정견은 부처와 나와 구분을 않습니다. 일반중생과 나를 구분을 않습니다. 천지 우주를 모두 일원적으로 하나로 본다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자기가 납득을 못 해서 그렇게 안 보인다고 하더라도, 억지를 써서라도 하나로 보고 참선을 해야지 하나로 못 보고 참선을 하면 그것은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에도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선지식을 만나가지고서, 우리 중생은 다 어두우니까 나도 보이고 너도 보이고 중생의 차원으로 밖에 안 보인다 말입니다. 으로 보이고 악으로 보이고 그와 같이 밖에는 안 보입니다. 안 보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선지식을 만나서 말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지금 비록 내가 제아무리 죄가 많다 하더라도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안목은 저 몇백 미터만 벗어나도 잘 안 보입니다. 어른거립니다. 우리 중생의 안목은 굉장히 불확실한 것입니다. 비단 그런 시야뿐만 아니라 우리 아는 것이나 모두가 다 불확실합니다. 불확실한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무슨 주의主義 무슨 학설學說이 나오니까 그런 것이 모두 다 상대 유한적有限的인 가치 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무슨 경지에서 말한 것이나, 또한 학술에서 말한 것이나 그러한 것은 상대 유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부처님 가르침 같은 그러한 하나의 생명 하나의 부처님, 그와 같이 보지 않으면 모두 다 상대 유한적인 참다운 정견正見이 못 됩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또한 부처 이것이 비록 부처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별것도 아니면 우리한테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처 그 안에는 어려운 말로 보조국사 어록에서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없을 무[], 셀 누[]자 말입니다, 자 그자는 번뇌란 뜻으로 쓰입니다. 번뇌가 없는 지성이라. 번뇌가 없는 그 지혜로운 성품이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 본래 갖추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 제 아무리 못 나고 어리석고 옹졸해서 남을 미워하고 또는 강도짓을 한다 하더라도 본래 부처님의 성품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사람만이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 돼지, 소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잠재되어 있어 가지고 다 발로發露를 못 해가지고 있다 말입니다. 그런 동물한테서 뿐만 아니라 각 식물도 갖추고 있습니다. 무생물 우리가 말로 하면 유정有情 무정無情이란 말입니다. 의식이 있는 것, 의식이 없는 것, 또는 눈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하여튼 존재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 성품을 모두가 다 갖추고 있습니다. 형체가 있는 것 같으면 그것이 제한이 있고, 적고 크고 나눌 수가 있습니다만 부처님 성품 그것은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배우신 바와 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 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더하지도 못 하고 줄이지도 못 하고 말입니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항시 영원히 존재 한다 말입니다. 영원히 존재 하면서 모든 역량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비단 내 마음의 본질뿐만 아니라, 네 마음의 본질이나 각 도인道人들의 본질이나 어떠한 존재 각각 두두 물물의 존재가 다, 모두가 다 부처님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내 부처님 네 부처님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겉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불성 면에서는 똑같습니다. 구더기 부처님이나 도깨비 부처님이나 다 똑같습니다. 파도가 천파만파 일어나도 똑같은 물이지요 그와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말로 해서 일미평등一味平等 이라 하나의 원융한 진리이기 때문에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이 시[], 마음 심[]자 시심이라. 이 마음이 시불 이 시[], 부처 불[]자 이 시자는 바로, 또는 이것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시심是心이라 이 마음이, 시불是佛 이라 바로 이 마음이 부처란 말입니다. 똑같이 앞이나 뒤에나 이 시[]자 입니다만 달리 쓰입니다.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곧 부처란 말입니다. 시심작불是心作佛 이 시[], 마음 심[], 지을 작[], 부처 불[]자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러한 바른 견해, 지금 내가 아직 못 보고 또 금생 내내 라도 체험도 못 하고 말런지 모르지만, 선지식이나 그런 도인들 말씀 따라서 그와 같이 그러한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을 느끼고서 나의 참 생명 나의 본바탕을 찾고자 공부해야지 비로소 참선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그 사이비 참선 그 사이비 진리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선 젊은이들은 경험도 해보고 많이 연구해서 아십니다만, ‘라즈니쉬의 가르침이 나와 가지고서 사회에서 혼동되고 있는 것 보십시오. 그 정말 하도 좋다고 해서 그래서 또 그 사람도 보고서 저한테 한 권을 주어요. 사실 저는 볼 틈이 없지만, 젊은이들이 하도 좋아하니까 대충 알아야겠다 해서, 좀 봤더니 몇 장 보고서 더 못 봤습니다. 어째서 못 봤는가 하면 우선 남녀男女간의 성 개방적인 그런 말을 너무나 지나치게 한다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인간人間의 윤리倫理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 향락을 위해서 향락을 초월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인간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가장 인간이 좋아하는 성욕을 위해서 또 성욕을 충족시킴으로써 보다 높은 데로 출현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것 참 큰 탈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저한테 준 사람 그분도 스님입니다. 스님은 그 책을 아주 굉장한 책으로 안다 말입니다. 또한 라즈니쉬(Rajneesh Chandra Mohan Jain, 1931~1990)가 저술한 책을 한국말로 번역한 분도 대체로 스님입니다. 또 그분들 말 들어 보면, 어떻게 얘기하는가 하면 20세기의 석존釋尊이라, 현대의 석가모니다 말입니다. 물론 대학교수도 지냈고 지위가 있는 사람이고 얼굴도 아주 미남이고 또 말을 잘해서 말도 그냥 음악적이고 그래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매료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는 바른 정견正見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 말이 어떤 대목은 부처님 말씀과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어떤 대목은 부처님 말씀을 굉장히 쉽게 풀이해, 하는 말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간의 윤리 문제 인간의 용상이 확립이 안 되면, 참다운 가르침이 못 될 뿐만 아니라 그런 걸로 해서 참선에 못 들어갑니다.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성욕을 충족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참선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자기 사기詐欺 일뿐입니다. 자기 기만 일 뿐입니다. 공자님이나 석가님이나 예수님이나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어떠한 가르침이나 철저한 계율을 말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설법도, 석가모니께서 돌아가신 뒤에 우리가 어떠한 법문에 의지하오리까 하고 물어보니까, 이계의사以戒依師! 계율로 해서 스승을 삼으라! 이렇게 말씀 했다 말입니다.

 

계율戒律 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범부는 애써서 행함으로써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성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행해도 그때는 계율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공자님 말씀도 나는 70이 돼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말입니다. 마음이 그와 같이 인격人格이 딱 되어 버리면 그때는 한마디의 말, 일거수 일투족도 다 계율에 맞습니다만, 우리 범부는 번뇌에 가려 있어 우리 행동 하나 하나가 계율에 못 맞습니다. 못 맞지만 우리가 지키다 보면 성자가 되기 위한 그런 행동 또는 성자가 우리에게 보이는 행동 그 행동 이것이 계율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성인들은 맘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성인들은 바로 진리의 순리에 따라서 진리 그대로 행동 합니다. 우리 중생은 나쁜 버릇 때문에 벌써 순리에 어긋나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행동 한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 말이나 또는 행동이나 그런 것이 법도에 안 맞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다 보면 그때는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도 정화가 되어옵니다.

 

그러기에 계율종戒律宗이라. 율종律宗이란 종파가 있습니다. 같은 불교 가운데도 계율만 지키는 종파가 있는데 그것은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아까 말씀대로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바른 행동 바른 말만 골라서 한다고 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마음도 정화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라즈니쉬 이 사람은 별로 오래 못 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벌써 성자聖者의 천지天地 용상庸常의 법도에 어긋난다 말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오리건주에 건너가서 무슨 6만 에이커 땅을 사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젊은 사람들은 개방주의기 때문에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유교儒敎 도덕 율에 얽매고 불교 도덕 율에 얽매고 그렇게 얽매였다가, 성 개방을 부르짖으니까 좋아서 거기에 합류 한단 말입니다. 또 거기 가서도 그냥 그렇게 또 더구나 개방적인 미국 사람들 오직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다 요원燎原의 불같이 일어나서 거기다 육만 에이커의 땅을 샀단 말입니다. 육만 에이커 같으면 곡성군 보다 더 넓습니다. 그래 거기다 대학 세우고 그랬습니다. 거기다가 예쁜 여대생을 배신해 가지고 이제 성 개방을 시켜 놨으니 내용 이야 보나 안 보나 그것이 뭣 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냥 이민법에 걸려서 미국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추방당해서 저 네팔로 가서 카트만두에 가 있다가 거기에서도 추방당하니까, 그리스로 갔다가 다른 곳에 가려 해도 이젠 여권을 안 받아 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 방랑자가 됐지요. 사람 잘 되는 것을 바랍니다만 이와 같이 천지天地 용상庸常에 어긋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정견正見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런 걸로 해서는 절대로 성불을 못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상대 유한적인 지식을 가지고서 옳다 그르다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자기가 바로 못 보면서 이것이 도인이다, 이것이 제2의 석존釋尊이다, 이런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너무 말이 빗나가서 본론에서 좀 어긋났습니다만, 하여튼 바른 정견正見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선한다고 모양은 좌선 모양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건강이 좋아질 수 있도록 한다든가, 머리도 시원하고 가슴도 시원해지기 위해서 한다든가, 또는 자기 집안의 복을 빌기 위하여, 한다든가, 또는 무슨 신통을 얻어서 자기가 예언자가 돼서 한번 그렇게 일확천금을 번다든가, 이런 등등의 공리적功利的인 마음에서 한다면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즉 상이 없어야 참선參禪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양에 안 걸리고 문자에 안 걸리고 또는 자기 생각 헤아림에 걸리지 않는다 말입니다. 이런 것이 제가 지금 말씀드린 모양에 안 걸린다는 굉장히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인은 꼭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못 깨달으면 참다운 참선이 못 됩니다. 모양에 우리는 집착하니까 집착하는 대로 해서 거기에 따라서 가지가지의 번뇌가 발생하여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더러 스님은 아주 쉬운 법문 않고서 난삽한 법문만 하니까 무슨 말씀한지 서툴러서 잘 못 알아듣겠다는 그런 말씀을 합니다만, 그런 일은 다분히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야말로 그 큰 바른 청정淸淨음성으로 어려운 말씀을 쉽게 하십니다만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허나 역시 모양이 없다는 모양이 없고 또는 형상에 걸리지 않고 말입니다. 상 없다는 그런 문제는 누가 말해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분명 꼬집어 봐도 내가 아프고 좋고 그르고, 합니다. 분명히 내가 있는데 또는 네가 있는데, 없다니까 그야말로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그러니까 부처님 법문도 보면 맨 초기에는 유교有敎, 중생 차원에서 있다, 없다 그냥 선도 있고, 도 있고 또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와 같이 중생 차원에서 하는 가르침은 유교有敎. 있을 유[], 가르칠 교[]자 유교有敎라 합니다. 유교를 말하면 그땐 다 알아듣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초기에는, 지금도 무식한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듣는데 옛날 더구나 2500년 전에야 거의 다 문맹인데 말입니다. 이요 중도中道 그런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니까 좀 낮은 차원에서 너도 있고 나도 있고 하는 유교有敎적인 낮은 법문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공부를 좀 시켜가지고서, 사실 어떤 공부나 참선이나 염불이나 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그때는 마치 파도가 잔잔해야 달이 뜨면 훤히 비춰 오듯이 말입니다. 파도가 파동을 치면 그땐 빛이 안 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 마음은 지금 파동 치고 있습니다. 욕심의 파동, 미움 파동, 사랑 파동 이렇게 파동을 치고 있습니다. 파동을 치고 있는 마음에서는 진리와 빛이 안 옵니다. 제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그때는 진리가 쑥 안 들어옵니다. 허나 이제 참선도 해보고 염불도 해보고 하다 보면 그때는 아까 말씀대로 마음도 가라앉으니까 말입니다.

 

잔잔한 물위에 달이 비추어 오듯이 우리 마음도 똑 같습니다. 원래 부처건만 마음이 혼란스러우니까 진리가 안 비추어 오다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때는 아 그렇구나, 이와 같이 비추어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좀 안 다음에는 그때는 부처님께서 공교空敎라 말입니다. 사실은 있다고 한 것이 모두 다 비어 있느니라. 어째서 비어있는가?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공, 중도中道, 사제법문四諦法門 그런 법문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살만 좀 붙여놓은 것이지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의 원인 역시 인생의 번뇌인 집이고 말입니다. , , 치 삼독심과 거기에 따른 행 이것이 인생고의 원인인 것이고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그때는 팔정도八正道, 삼학도三學道를 지키는 것입니다. 또는 이상적인 그런 경계는 멸 하면 영생불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법문은 언제나 사제법문四諦法門의 범주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째서 공인가 하면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했기 때문에 공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한편만 잘 해석해버리고 그대로 공부하면 깨닫는 것입니다. 반야심경다 아는 바와 같이 서두에 조견오온照見五蘊 개공皆空이라오온이 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오온이 어렵기도 하고 알고 보면 또한 쉬운 법문입니다. 온통 비어 있습니다. 조견오온 개공이라. 오온이 텅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보아야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이것은 고액苦厄을 떠난다 말입니다. 오온이 텅 비어있지 않으면 모두 인생 고액을 못 떠납니다. 내가 행복하고 싶다. 행복하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하더라도 오온五蘊이 비었다 하는 공사상空思想을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면 그때는 인생고人生苦를 여의고 행복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단 순간적인 찰라 밖에는 못 누리는 것입니다.

 

내 몸은 여러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각 원소와 잠시간 합해있습니다. 내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도 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분별하고 하는 것이 그 부스러기가 모여서 이 마음이 됐습니다. 비록 내 마음의 본질이 부처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선 정상적으로 내가 쓰고 있는 내 몸 이것은 아까 말씀대로 내 몸 이것도 각 원소가 합해있습니다. 평생을 죽지 않고 자기 몸을 붙들고서 사랑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가 죽어 버리면 뭣이 남습니까. 화장하면 결국 재 되는 것이고 땅에 묻으면 벌레들이 먹어서 나중에 흙이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피는 수분이 되어 땅에 스며들고 마는 것이고 말입니다. 아무것도 그때는 없습니다. 각 원소가 합해져서 잠시도 그때는 머물지가 않습니다.

 

순간 찰나도 조금도 그대로 항상 없이 변화가 온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변화 과정을 못 봅니다. 현미경으로 본다면 1초 전과 1초 후가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그냥 중생 눈은 흐려서 그 과정을 못 봅니다. 원소가 합해져서 하나의 현상이 됐으면 내 것이다. 딱 이렇게 보고서 잘 입히고 잘 먹이고 몸을 다듬고 합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은 그야말로 참다운 과학적입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4四大가 불교 말로는 지수화풍 4대인 것이고 지금 현대 술어로는 산소, 수소, 질소, 탄소를 가져다 임의로 각 제반 원소가 되겠지요. 이것이 합해서 잠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내장內臟이나 또는 우리 눈이나 코나 결국은 다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두워서 큰 변화만 봅니다. 10년이나 몇 년이 지나면 그때는 늙고 모두 젊어지고 하는 것이니까 그런 변화는 느낄 수가 있지만 그러나 순간순간 변하는 것은 그때는 우리 중생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다고 하면 그때는 나라고 고집은 못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은 무엇인가. 초등학교 때 배우고 대학에서 배우고 책을 두고 배우고 박사학위 때 배우고 무척 많이 배웠습니다. 배운 이것이 내 것이라고 이것이 내 마음이라고 또 고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를 다 아는 것입니까? 역시 상대 유한적으로 어느 만치 책 몇 권 읽고 학교 어디 만큼 나오고 말입니다. 생각을 얼마나 했고 사색을 얼마나 깊이 했고 그런 것 저런 것 모아서 내 마음이 구성됐습니다.

 

이런 마음으로서 우리가 이제 한 논문을 쓴다고 합시다. 논문을 쓴다면 절대 절명으로 그것이 되겠습니까. 내가 부분적으로 상대적인 것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그 마르크스주의 때문에 그 젊은이들이 몸을 바치고 분신焚身하고 말입니다. 그 당시에 마르크스-레닌 정도의 지식 정도에 있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 당시에 그때 상황에 맞추어서 자기가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도 바로 보면 정다운 진리는 못 되는 것입니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 때문에 사회역사의 추진력이 된다는 그런 견해 이것은 부분적인 것이지 그 전체가 못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누구 학설이나 범부가 모든 사물의 전부를 못 보고 말입니다. 다 그 상대 유한적인 것이고 나름대로 그것이 어느 부분에 가서는 타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못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못 되는 그것 때문에 우리 소중한 생명을 불태우고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들은 아니요’ ‘를 확실히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요또는 하고 좋은 것은 우리가 수긍하고 나쁜 것은 우리가 부인 해야죠. 그런 도덕적인 문제는 엄격히 우리가 한계를 세운다 하더라도 상대 유한적인 데서 이렇게까지 헤매온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서 섣불리 규정을 세워서 남을 이끌다가는 그때는 큰일입니다. 이것은 소경이 한 소경을 이끌다 같이 함정에 빠지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런 상대 유한적인 진리 아닌 것은 사경邪徑이지요. 우리 사경에 머물지 않고서 우리가 정도正道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를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바치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최선의 길입니다. 비록 더디다 하더라도 그 길이 제일 확실한 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문제를 가지고 너무나 시간을 더 오래 끌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계시지만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 딱 그것만 집어서 얘기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또 이렇게 올라와서 보니까 여러 말씀이 나왔습니다만 그와 같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바른 정견正見, 바른 견해가 서야 비로소 참선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외도선外道禪이라. 외도 역시 이런 모양은 똑같습니다만 하나의 공리公利나 명리名利나 무슨 재주를 부립니다. 또한 자기 집안의 어떤 재수를 위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저 모양만 참선입니다. 그러면 사실은 자기 집안을 위해서나, 자기를 위해서나, 사실은 참다운 참선이 돼야 바른 공덕을 입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바른 참선 하면 집안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겠구나, 집안은 공덕을 못 구하나 할런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바른 참선이 돼야만 자기 생명을 위해서나, 자기 권속을 위해서나, 어느 것을 위해서나 가장 최상의 공덕인 것입니다.

 

공자님 말씀도 부모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효자가 아니라 말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것이 참다운 효자라고 하듯이,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그것이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제일 좋은 길입니다. 바른 견해는 일원적一元的인 사고입니다. 모두 하나로 봅니다. 중생이 천차만별로 본다 하더라도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데 명색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데 어떻게 하나인가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운문스님(雲門文偃, 865~949)한테 가서 중국 운문스님은 달마達磨라 부릅니다. ‘여하시如何是 잇고!’ 부처가 무엇인가 물었다 말입니다. ‘간시궐乾屎橛이라,’ 똥마른 막대기라. 그 소중한 부처님, 우리 생명을 바치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런 부처님을 부처가 무엇인지 물으니까 좋은 개념의 답변을 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제일 더러운 똥마른 막대기란 말이냐. 똥마른 막대기가 어찌 부처겠습니까?

 

이것은 어째서 그러한 답변이 나왔는가 하면은 부처님은 그야말로 법당에나 장엄하게 모셔놓고서, 또는 영원적인 것이고 부처님은 그와 같이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다 써야 된다고 생각되었겠지요, 부처란 그와 같이 특별한 것이고 아주 적은 것은 부처가 아니라는 관념에서 인제 물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총명한 도인이 보니까 이 사람 차별심이 있구나. 그래서 그 차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똥 마른 막대기니라. 똥 마른 막대기가 부처거니, 너는 부처 아니고 개는 부처 아니겠습니까. 똥 마른 막대기같이 제일 더러운 것이 부처거니,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부처가 아니겠습니까.

 

그와 같이 모두 하나인지 모르는 사람은 어째서 그걸 부처라 했는가. 어째서 부처가 무엇인지 물으니까 부처를 똥 마른 막대기라 했는가! 그와 같이 의심을 죽도록 해도 무방합니다. 하다보면 결국은 하나의 하나에다가 마음을 딱 이렇게 모우면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 인지라 하나로 딱 모아지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맑아 온단 말입니다. 맑아오면 그때는 정말로 똥 마른 막대기도 부처니까 천지가 다 부처구나, 이와 같이 느껴온다 말입니다. 이런데서 화두를 들어서 의심하는 선의 근거가 있습니다.

 

조주(趙州, 778~897)스님한테 가서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祖師西來 잇고?’ 달마達磨스님께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 달마스님께서 중국에 올 때는 그야말로 부처님의 골수骨髓를 전부 포교하고 전도하기 위해 왔습니다. 달마스님은 부처님의 그야말로 부처님의 정통을 깨치신 분이라 정법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까 결국은 뜰 앞에 잣나무, 그렇게 말한다 말입니다. 부처님을 특별히 생각한 사람은 역시 그도 억장이 무너지겠지요. 하필이면 이것저것 많은데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가. 어째서 그랬는가 하고 의심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 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처한테 가까이 갑니다. 마음이 딱 모아지면 우물 이것은 파다 보면 지하수가 나오듯이 말입니다. 마음 이것도 파다 보면 결국 부처한테 접근되어 갑니다. 이것을 갖다가 아 그렇구나. 학문을 안 배운다 하더라도 참 정말 이것저것 다 부처겠구나 그때 느낍니다.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정말로 결국은 참 의심할 필요도 없이 다 부처로구나, 이와 같이 느낀다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없는 것인데, 무수한 도인들이 다 증명한 말씀인데 또는 우리가 현대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소립자 저쪽에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데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란 그야말로 참 말할 수 없이 위대한 힘인데 이렇게 저렇게 우리가 생각해 본다 생각할 때도 업장이 가벼운 사람은 정말로 의심할 필요가 따로 없구나, 이렇게 저렇게 의심하지 않고서 딱 믿어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심하는 화두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 공부하신 여러 참선 법우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여러 스님들이 공부하실 때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 것인가. 내 공부 방식은 어떤 것인가. ‘불식정법不識正法 고행무익苦行無益이라바른 개념이 안 서 있으면 또 고행무익이라. 애쓰고 해도 그때는 별로 이익이 없다. 말입니다. 마인드 컨트롤을 제아무리 해도 그때는 별로 소득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은 참 별것 다합니다. 서로 같이 앉아서 네가 누군가 내가 누군가 이해하려고 하는 법도 있고 말입니다. 별것 다 있습니다만 그런 법으로 해서는 우리 마음의 뿌리에 못 갑니다. ‘잡수행자雜修行者 만불성萬不成이라.’ 잡식 이것저것 갖다가 잡탕을 시키면 것을 갖다가 만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못 간다 말입니다.

 

우리가 과거 무수생으로 지어 온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만 갖고 나간다 하더라도 성불이 쉬운 문제가 아닌데, 이것저것 넘어다보고 그런 행법行法을 해서는 정말로 참 만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못 갑니다. 순수해야 합니다. 우물도 한 우물만 파야 되겠지요. 꼭 골수 법문 말입니다. 가장 최상법문을 딱 치켜들면 거기다 우리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부처님을 총 대명사로 말할 때는 나무아미타불이고 말입니다. 그 부처님을 자비慈悲로 볼 것 같으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지혜智慧로 보면 그때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요 문수보살文殊菩薩 이요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을 인도하면 그때는 지장보살이고 하나의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또는 부처님을 믿음으로 보면 옴마니반메훔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그때는 이것이 여러 가지로 풀이가 많이 있으나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입니다. 영원한 광명이란 뜻으로도 풀이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심 미묘한 진언 엄밀한 그것은 말로는 표현을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믿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지금은 다종교 사회라 여러 가지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아까 제가 말씀한 하나님을 믿는 분들은 지금 천만을 넘을까 말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따라와라, 그러면 따라오겠습니까. 추기경樞機卿들이 따라오겠습니까. 그것은 못 따라옵니다. 그러나 못 따라 오고서 서로 옥신각신 하면 결국은 또 그것은 월남 재판입니다. 종교전쟁은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보십시오. 지금 영국계 웨일스사태 보십시오. 그 같은 기독교지만 갖다가 신교新敎 구교舊敎 대결 보십시오. 또는 중동 보십시오. 이란 보십시오. 5년 이상 동안 싸운다 말입니다. 같은 종족 같은 이슬람 민족인데도 그와 같이 조금의 견해 차이 때문에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배워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십자군 전쟁 보십시오. 백년전쟁이란 말입니다. 종교란 것이 각기 생명을 주도하기 때문에 한 번 싸움이 붙으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 거의 저쪽이 천만, 우리 불교인들이 거의 천만, 천만 수가 같이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뭣 되겠는가, 따라서 바른 견해 바른 정견을 못 가지면 종교란 차라리 없음만 같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도 통 불교적으로 말한 것이고 불교 뿐만 아니라 종교가 하나가 되어야 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이기 때문에 따라서 부처님을 믿어도 진짜 부처님을 믿어야 합니다. 진짜 부처님은 무엇인가. 진짜 부처님은 어디 한군데 국한되어 있지 않고서 어느 공간 어디에나 머물러 있지 않고서 말입니다.

 

내 마음 안에 내 마음 밖에 우주에 어디나 다 부처님뿐인 것이고 우주에 조그마한 틈도 없이 다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산에 있으면 산신山神이요 물에 있으면 용왕龍王이고 말입니다. 집에 있으면 택신宅神이요 땅에 있으면 지신地神이고 말입니다. 자비로운 기운 총 대명사는 아까 말씀대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한 번에 말하면 그것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요, 우리의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면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고 말입니다.

 

하나의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부처님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진짜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하나님, 하나님도 역시 그러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만 믿는 것이 아니라 역시 우주의 근본 원리 우주의 근본 생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유태 민족의 예수님은 더구나 젊을 때고, 유태민족이 그때는 얼마나 무지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원리 문제를 따지면 알겠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상징과 방편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더 갖다 보태 가지고서 해버렸기 때문에 지금같이 하나님은 밖에 내팽개쳐 있습니다. 심판의 하나님이고 나는 결국 하나님을 상대해 가지고서 하나님을 믿어버렸다. 하나님은 그러면 절대가 못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기에 있으면 절대가 되겠습니까. 절대가 못 되면 영원적인 것도 못 되지요.

 

따라서 기독교인도 역시 참다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까 말씀대로 내 마음에도 하나님이 있는데 밖에도 하나님 말입니다. 천지 우주에 하나님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바로 심판하며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말만 다른 것이지 결국은 하나라 말입니다. 이렇게 믿어야 만이 우리 불교인도 불교를 바로 해석 할 수 있는 것이고 기독교인도 저렇게 바르게 해석해서 예수님의 본시 뜻을 따르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종교가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역시 우리 한국보다는 문화면에서 상당히 앞선 사람들입니다.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이제 한국에서는 참선 그러면 의례상 어느 스님한테 화두하나 받으면 의심을 자기 평생토록 합니다. 화두를 안 들면 그것은 참선이 아니다, 그래 버립니다. 화두를 의심하는 것 외에는 참선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만 법집法執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그와 같이 협소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동이나 서나 남이나 북이나 산을 올라갈 때도 남쪽으로 올라가나 서쪽으로 올라가나 다 올라갈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꼭 한쪽에서만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허나 지금 대만이나 그런 불교를 보면 참선하는 법도 역시 화두를 받으면 의심하는 그런 법도 있고 또는 아까 제가 말씀한대로 의심할 필요가 없다, 본래 부처거니 위대한 도인들이 다 말씀하시고 다 말씀하셨거니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천지우 주가 그대로 다 부처뿐이구나. 이와 같이 확신한 사람들은 그때는 그냥 묵조선黙照禪 이라 잠자코 그냥 마음으로 부처님을 비추어 보고 하는 참선법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대만이나 그런데는 두 파가 백중세伯仲勢입니다. 두 파가 딱 정립이 되어있습니다. 또한 한국 조계종이나 지금 태고종은 방금 제가 말씀한 대로 어느 선지식한테 화두를 딱 타 놓으면 그것을 갖다가 의심해 화두가 타파打破 되어야 됩니다. 그 외에는 선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은 보다 더 합리적이어서 일본은 세 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화두를 의심하는 그런 참선법이 있고 말입니다. 한 가지는 또 역시 화두를 안 들고서 그냥 부처님을 그대로 온전히 믿어버리고 앉아서 참선하는 법이 있고, 그것이 묵조선黙照禪이고 잠자코 묵[], 비칠 조[], 묵조선입니다. 아까 화두를 드는 것은, 그것은 간화선看話禪이라 볼 간[], 말씀 화[], 간화선입니다. 거기에다 하나 더 보태서 염불선念佛禪이라. 기왕이면 가만히 있어도 그야말로 우리 중생이 업장이 많거니 마음이 정화가 잘 안 는 것이니까, 무엇인가 마음의 촛대를 들어야 쓰겠구나, 이래서 그때는 화두를 염불로 화두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그때는 화두로 합니다. 의심하는 화두를 부처님 명호로부터 대신한다 그 말입니다. 가사 아미타불을 든다든가 관음보살을 든다든가 그와 같이 일본은 화두를 의심하는 선법, 또는 아무것도 안 들고서 그냥 잠자코 비추어 보는 선법, 또는 화두를 의심하는 어떤 문제를 안 들고서 그냥 부처님의 명호 이름으로서 화두를 삼고서 공부를 합니다. 이와 같이 세 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그럼 어느 것이 낫습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 도인들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불 화두 이것은 부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무자無字 화두이 뭣 고나 또는 뜰 앞의 잣나무나 또는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똥 마른 막대기나 화두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 각 도인道人들이 들던 화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라서 우리가 좋다 궂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제가 말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심리는 지와 정과 의3요소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지적知的요소 또는 감성적인 정적情的요소 그리고 의지意志적인 그런 의적意的요소 말입니다. 그와 같이 지정의知情意가 있기 때문에 우리 심령활동이 학교의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우리들 보다 훨씬 깊이 아시고 계십니다만 사실은 교육도 없이 이와 같이 지정의가 다 조화가 되어야지 시험만 치우치고 또는 예술적인 감성에만 치우치면 그때는 안 됩니다. 마땅히 지성적知性的인 면도 있어야 되고 감성적感性的인 면도 있어야 되고 의지적意志的인 면도 있어야 되고 말입니다. 체육은 의지意志 훈련을 시키는 것이고 음악이나 미술은 감성적인 것을 훈련시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함양하고 도약 하는데서 우리의 마음도 좋아지는 것인데 우리의 수행도 그런 범주를 다 떠날 수가 없습니다.

 

역시 우리 감성도 만족하고 말입니다. 지성도 만족하고 또는 애쓰고 밀어붙이는 그런 의지도 만족하고 말입니다. 진리가 다 만족해야만 우리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우리 불성 가운데는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 부처님 성품, 내 본성이 바로 불성인데 불성 가운데는 지혜나 또는 감성이나 우리 의지나 어떠한 것이나 다 원만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갖추어 있어 우리의 목적은 결국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불성을 우리가 개발해야 할 것인데 또는 개발 하려면 개발할 작업 역시 거기에 걸맞은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참선 책을 보십시오. 정혜쌍수定慧雙修. 과 혜 쌍수雙修. 정과 혜를 아울러 닦으라는 말씀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말씀이 왜 있는가 하면 따지고 들어가는 그런 방법이 지혜입니다. 이것을 고요히 비추는 정과 같이 어우러져야 만이 아까 제가 말씀한 대로 우리 심리가 조화가 돼서 우리 불성과 빨리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혼란스러울 때는 우리가 좀 혼란스럽습니까. 살기 참 어려운 때입니다. 지금 비좁고 더운데 제 말씀이 재미도 없고 하지만 참선 하실 때는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줄여서 말씀드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으면 공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같이 이렇게 승복을 입고서 승방에 있는 사람은 모르거니와 집안에서 아귀다툼하고 그야말로 참 탐욕이나 가지고서 싸우고 모두 그런 판에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안 하면 살 수가 없습니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과민해져서 그야말로 참 신경쇠약 되고 몸도 상하게 되고 피로도 하고 그렇게 되겠지요.

 

명색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공부 하는 방법이 훈훈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딱 주어야 쓰거든요. 그러나 화두를 참구해서 의심하는 그런 행법行法은 이것도 역시 도인道人이 제시한 훌륭한 효과를 거두지만 이와 같이 불안스러울 때는 그렇지 안 해도 우리 마음이 불안스러운데 말입니다. 그 힘을 갖다가 알지도 못하면서 애쓰는 그런 행법을 자칫하면 우리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남하고 얘기도 해야 하고 또 어디에 가서 대화도 해야 하고, TV도 봐야 하고 그런 가운데 의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있습니까. 선방에서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들 같으면 모르겠습니다만, 따라서 특수한 재질이 있고 따지기 좋아하는 그런 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인 불안의식 때문에 감당을 못하면 그런 문제는 역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는 부처님을 자기 고향같이 마치 임 같이 구하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처님의 이름을 화두로 하는 선법이 더 어울립니다.

 

그러기에 그와 같이 사람 근기에 따라서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부가 생겼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말씀을 많이 했고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부처님을 외우면서 내가 부처님이 되어가는 그런 공부 그런 공부가 염불선念佛禪이기 때문에 안심입명安心立命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입니다. 또는 하도 바빠서 부처님 외우기도 싫다. 부처님은 내가 눈에도 안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외우겠는가, 있는가, 없는가, 우리가 어떻게 알 것인가. 이와 같이 확신이 잘 안가도 또는 바로 내가 부처님인데 부처님 이름을 뭐 하러 욀 것이냐. 이와 같이 자기 성불成佛을 당당하게 내세울 그런 성품의 사람들은 성품이 여러 가지 천차만별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그때는 내가 부처거니 가만있으면 본래 부처거니 들어가겠지 하는 묵조선黙照禪 형식 말입니다. 그것도 무방합니다. 나까소네 일본 수상 같은 이는 묵조선을 합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네가 문제를 주면 그것을 쥐고서 열심히 하다 보면 본래 부처인지라 우리가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갑니다. 처음에는 몰라도 많이 모아지면 알아집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산심정심散心淨心이라. 지금 우리 마음은 이와 같이 흐트러져 있어서 산심散心이지만은 우리 본래 마음은 고요한 정심淨心인 것입니다. 헌데 참다운 진리를 아는 것은 고요한 정신이 아니면 잘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하나로 모우고 해서, 즉 말하자면 응집凝集을 시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몰랐던 것이 알아진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끔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같은 반야심경한 편도 참선을 한 철 공부할 때와 두 철을 공부한 뒤와는 해석이 더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금 제가 말씀한 대로 참선 방법이 먼저 선행적으로 정견正見, 바른 견해 나나 너나 천지 우주가 청정 미묘한 모든 공덕을 다 갖춘 부처뿐이구나. 이말 이것은 우리가 천 번 만 번 되뇌어야 합니다. 되 뇌이고서 부처뿐이구나 하는 생각을 사뭇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부처뿐이구나 그냥 그랬으면 뭐 단순한 하나의 개념적인 이해에 불과하지요.

 

그것은 참선이라고 못 하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나와 네가 더불어서 둘이 없고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생명生命 부처뿐이구나, 이 생각을 애쓰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애쓰고 가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도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할 때는 아미타불이시여 빨리 와서 구해 주십시오.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이지요. 중생이 모르니까 그것을 붙여놓은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일 뿐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뿐 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도 역시 모두가 다 관세음보살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관음보살을 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 생각을 순간 찰나도 놓치지 않고서 즉 불교 말로 하면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우리 중생의 그 섣부른 상대 유한적인 생각에 못 끼도록 항시 이어간다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또는 주문도 외우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되 이것도 저것도 다 싫고 이름도 외우기 싫고 묵조黙照도 하기 싫은 이런 사람들은 옴마니 반메훔이란 말입니다. 옴마니반메훔 하고 있으면 그것이 벌써 우리 마음을 정화 시키는 심심 미묘한 믿음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어 버립니다.

 

원래 부처님의 순수한 에너지 순수함에 준해서 거기에서 딴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외워 가면 머리가 맑아오고 피부가 맑아온단 말입니다. 참선 방법은 이상 제가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 화두를 의심해서 지금 여러분들께서 화두를 어느 큰 스님한테 받아 가지고서 하신 분들은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공부란 것이 나가다 보면 그때는 하나가 딱 되어 버린다 말입니다. 지금 들어갈 때뿐 인 것이지 올라가면 하나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가다가 자기 마음이 시원하고 눈이 시원하고 그야말로 참 딱 한 뭉치로 해서 하나가 되어버리면 그때는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바꿀 레야 바꿔지지도 않는 것이고 바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출발 과정에서 이럴까 저럴까 헤매는 분들은 염불선이나 염불선은 아까 제가 말씀한대로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제일 많이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옴마니 반메훔 이나 그렇게 하십시오. 하기가 쉽고 어느 때나 할 수가 있습니다. 옴마니 반메훔도 우리 호흡과 꼭 들어맞아서 굉장히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다만 제가 선행적으로 되풀이 말씀드립니다만 꼭 천지 우주 하나의 부처님 말입니다. 청정 미묘淸淨微妙한 조금도 차이가 없이 지금 이 스님과 저와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지요. 공간이 있으니 말입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그때는 공간이 없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것이 공간에 꽉 차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데가 있습니까. 다만 중생이 우리 인간의 흐린 눈 때문에 그런 공간이 있는 것을 못 봅니다. 못 보니까 인제 이렇게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사실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체生命体 뿐입니다. 그렇게 딱 느끼고서 화두 공부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도 그렇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내가 부처거니, 나까소네 수상처럼 그와 같이 묵조선黙照禪도 무방하고 또는 그것도 무미하고 생리나 심리를 그대로 정화 시켜야겠다고 하시면 옴마니 반메훔하시고 말입니다. 또는 동시에 이것저것 다 한 번에 해도 무방합니다. 한 번에 해도 무방한데 다만 주의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오직 끄트머리가 근본이 하나인 줄 알고 해야 합니다.

 

관음보살 따로 있고 아미타불 따로 있고 옴마니 반메훔 따로 있고 그러면 그때는 공부가 잡탕이 돼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인 그것을 딱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느낀 다음에는 관음보살을 부르다가 아미타불을 부르다가 옴마니 반메훔을 부르다가 그것은 무방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불안스러울 때는 그때는 관음보살을 주로 부르고, 덜 불안스러우면 이 뭣고로 부처가 무엇인가 의심도 해보았다가 말입니다,

 

들뜨면 가만있어 보고, 마음이 너무 들뜨면 그때는 맘 편히 다 집어 던지고서 가만히 있어 보고 말입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때는 갖다 맹렬히 옴마니 반메훔해 보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요령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혜쌍수定慧雙修. 지혜와 감성과 의지와 조화가 됩니다. 지금 분들은 그냥 고도한 법문만 다 들어 보려고 하지 부처님의 기본 법문을 보통 무시합니다. 사실은 사제법문四諦法門,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또 칠각지七覺支 그런 법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 법문이 여기서 끝났습니다 *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