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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29. 참선參禪의 선결조건先決條件

29. 참선參禪의 선결조건先決條件

 

 

* 1987610일 태안사 소참법문입니다.

 

29. 45-1987.06.10 참선의 선결조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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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공부參禪工夫에는 세 가지 잘못된 참선參禪이 있습니다.

첫째 두꺼비선, 하마선蝦蟆禪이라. 두꺼비는 미련해서 뛰는 재주밖에 없는데, 이 두꺼비처럼 두꺼비선이란 것은 자기가 하는 것만 옳다고 아집我執은 물론 법집法執을 버리지 못한 선을 말합니다. 자성自性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서 그야말로 광대무변廣大無邊하고 심수오묘深秀奧妙하여 말과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자성인데 얽매이고 착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면 자성과는 거리가 생깁니다. 다시 말해 광대무변해서 거기에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자성自性,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충만한 것인데 분별 시비하면 벌써 그 순간 우리 마음은 어둡고 흐려져서 제한을 받는 것이니 따라서 두꺼비 선은 피해야 합니다. 두꺼비가 뛰는 재주밖에 모르듯이 자기가 아는 그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가 지적 수준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때에는 자기의 문중門中, 자기가 하는 방식方式만 옳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선을 낳고 대중적으로 승단도 화합되지 못한 결과를 낳고,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배운 것, 자기가 느낀 주장만이 옳다고 하니 남의 아는 것, 남의 살림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만 고집하기 때문에 분별과 투쟁이 생깁니다. 따라서 하마선(두꺼비선)은 피해야 합니다. 하마선은 곧 암중선暗中禪이니 어두운 가운데 헤매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님 말씀을 착하면 병이지만,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바로 성불하기 위한 순로順路인 것이니 전혀 무시하면 막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서 기어 올라가려면 무엇인가 잡고 의지해야 하듯이 우리가 불조佛祖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으면 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조님의 말씀은 수행의 벼리가 됩니다. 불조님의 말씀을 전혀 무시하고 불입문자不入文字에 딱 얽매어 앉기만 좋아하여 암중暗中에 모색하는 것이 암중선인데 이것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문자선文字禪이라. 문자文字만 좋아해서 문자나 언구言句를 익혀 자기 나름대로 이론 체계를 세워 나의 공부가 거의 되겠구나! 부처님이나 도인들의 경지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구나! 이와 같이 헤아려 문자만으로 헤아리는 게 문자선文字禪입니다. 이것도 피해야 합니다.

 

셋째 야호선野狐禪이라. 약간 닦았으나 미처 법의 한계를 몰라 다시 말해 불의 차서次序를 모르니까, 미오未悟를 오로 미증未證을 증으로 착각하는 이것을 증상만이라 하는데 바로 이 증상만을 가리켜서 야호선野狐禪이라 합니다. 선은 모름지기 두꺼비선 같은 암중선을 피하고, 문자만 익혀서 한 소리 하는 문자선을 피하며, 법의 한계도 몰라서 미오를 오로 미증을 증으로 하는 야호선 바로 증상만增上慢 선을 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먼 길 가려면 노자가 필요하듯이 불법 역시 성불의 정상까지 가려면 단박에 되면 모르겠지만 단박에 될 수 없는 경우에는 오랫동안 금생 아니면 내생, 내생 아니면 저 내생 그와 같이 우리 수행자는 영겁수행이 필요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영겁수행永劫修行하겠다는 각오가 서야 합니다. 그러나 속효심速效心을 내서 조금 안 되면 조급한 마음을 내어 마음이 바쁘기만 하고 따라서 몸도 바쁘게 합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성불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영겁수행의 각오가 필요한데 영겁수행은 문미지귀文未志貴. 불교佛敎에서 장부丈夫라는 것은 한번 발심하면 성불까지 한시도 퇴전退轉이 없는 것이 장부丈夫입니다. 장부지관의 뜻을 세워 놓으면 따라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필요하면 경도 약간 봐야만 암중모색 하지 않게 됩니다. 보조국사 선어록에는 수행자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불변수연不變隨緣 체용성상体用性相의 진리를 알아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불변수연이란 것은 불변不變은 변치 않는 자리 곧, 영원永遠이요 자성自性이요 체요 절대絶對를 말하고, 수연隨緣 변치 않는 법성法性이 인연을 따라 변하는 자리, 곧 현상이요 용이요 상대相對를 말합니다. 중생은 상대만 보고 절대를 모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절대가 보이지 않으니 심지어는 부인해 버립니다. 수행자는 절대가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있으면 절대가 분명히 있어야 함은 이론적인 사실이요 필연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절대를 정해야 하는데 상대밖에 모르는 중생은 절대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상대에서 절대를 정해서 절대와 상대가 둘이 아님을 증하는 것이 공부工夫입니다. 불변수연 체용성상이라. 불변不變은 체요 동시에 성이요 수연隨緣은 용이요 상이라는 이치를 알고서 현상밖에 모르는 우리는 참다운 실상實相을 알고자 닦습니다. 이와 같이 분명히 체계를 알고 닦으면 좋은데 그것을 모르면 신심信心도 떨어지고 헤매기 쉽습니다. 분명히 안 다음에는 상에서 성으로 현상現象에서 본체本体로 용에서 체로 수연에서 불변으로 가는 방법方法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화두를 참구 한다든지 염불하고 주문을 왼다든지 하는데 우리 중생은 현상이 있고 체를 미처 못 정한지라 자꾸 걸리게 마련입니다.

 

가 훤하니 보여 불변不變함을 알면 만상萬象이 천차만별이었다 하더라도 체성体性은 하나요, 동체同体인지라 헤매지 않게 됩니다. 으로나 을로 보나 모두 체에서 나온 것이니 체에서 나와서 임시로 인연 따라서 갑이요 을로 머무르기 때문에 체와 더불어 조금치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차만별로 무수한 현상이 있다 하더라도 본체本体에서 인연 쫓아 잠시간 상만 보일 따름이어서 상 그대로 체입니다. 따라서 색즉공色卽空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우리는 공 가운데서 석공析空과 체공体空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야심경풀이에서 즉공卽空 바로 체공体空을 말하지 못하면 반야심경의 공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공은 상이나 물질로 분석한 뒤에 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색 그대로 당체當体 즉공卽空이라. 어느 현상을 잡으나 마이크를 잡으나 몸을 딱 잡으나 뭘 잡으나 간에 당체가 공일 때 그때 반야심경의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란 것을 분석分析해 나가면 끝에 가서 공이 되겠지 하는 것은 과학적인 분석 곧 석공析空이지, 당체즉공當体卽空 그 모양 그대로 공을 말하고 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공이기 때문에 공 그대로 색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은 체를 떠나서 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체를 전제로 해서 용입니다. 공은 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알맹이가 색입니다. 다만 중생衆生은 체를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 없기 때문에 용이나 색만 보고 따지기 때문에 분별分別이 생기고 자타시비自他是非가 있습니다.

 

비록 나와 너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똑 같은 체에서 왔기 때문에 똑같은 본성本性이기 때문에 김가 되나 박가 되나 본성은 변치 않습니다. 김가라 해서 김가 권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김가, 박가나 천차만별로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되었다 하더라도 본성은 변치 않습니다. 금으로 해서 본성에서 팔찌를 만드나 금시계를 만드나 금이란 자체는 변함이 없듯이 우리 본성이 어떻게 변화 되던 간에 어떤 상이던 간에 성이 변화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바로 본 사람은 나를 너다 하고 너를 나라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본성 자리에서는 조금도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림자 같은 모양만 차이가 있습니다. 모양 그것은 실존이 아닙니다. 실존實存은 오직 자성체自性体 뿐입니다. 그러나 자성自性 가운데 신비 불가사의한 일체공덕이 들어있기 때문에 인연이 만나면 그때에는 모양을 나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당체즉공當体卽空을 알아 증해야 합니다. 즉공卽空을 보다 더 원만히 풀이하면 당체즉시當体卽是. 개미 한 마리나 그야말로 원소 알맹이 하나라도 당체當体 그대로 즉시卽是요 즉시로 온 우주의 진리가 그대로 표현表現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 나아갈 때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심平常心은 누구를 미워하는 등 어떻게 생각하나, 분별 시비하는 그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의 자성이 부처요 평상심입니다.

 

무색투명한 마니보주摩尼寶珠가 검정색에 가까이 하면 검게 나오고 붉은색에 가까이 하면 붉게 반영되듯이 자성이 어떻게 변화되든 간에 우리 중생은 분별지를 내서 이것은 검다, 저것은 붉다고 나눈 것이지, 실제는 무색투명한 마니보주가 검게 붉게 나타남을 중생이 볼 때 다른 색으로 변화된 것이지 마니보주 그 자체가 변함이 없듯이 우리의 자성自性도 역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그 마음도 당체는 자성이고 좋아하는 그 마음도 당체는 불성佛性 자성自性입니다. 이것을 알아서 마음을 평상심平常心에 딱 두고 공부해야만 마음이 헐떡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도 헐떡이게 됩니다.

 

서울 수선회에서 온 분들의 질문하는 것을 들어보니 요즘 호흡법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혜명경慧命經등을 조계사 등에서 강의해서 관심이 있고 강의하신 분들이 혜명경에서 말하는 호흡법이 육조 스님까지 흘러 내려오는 부처님 것의 접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조단경은 물론 달마 관심론에 호흡법에 관한 출처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능엄경楞嚴經』 『금강경金剛經』 『열반경涅槃經에도 그 흔적이 없습니다. 안반경安般經같은 부처님 말씀 경전에 호흡법에 관한 경전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 까지나 방편상 보조로 말씀하신 것이지 그것을 통해야 성불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혜명경같은 호흡법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길이라고 너무 지나친 강변强辯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 이것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 이것이 바로 자성체自性体이기 때문에 마음 다스리면 몸과 호흡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인데 마음이 거칠면 호흡이 거칠고 역으로 마음과 둘이 아닌지라 호흡을 다스리면 어느 정도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다스려지나 마음과 호흡은 주종主從 관계이니 마음은 주인主人이요 호흡은 종인데 종인 호흡을 주인主人으로 모시면 근원적으로 자성과 계합契合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주하고 말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보조해 주는 정도로 호흡법(요가수트라나 혜명경)이 필요하기는 하나 정심단좌正心端坐하면 기식조화氣息調和. 단정히 앉아 바른 마음 품고서 화두나 염불 등 공부하면 숨은 저절로 쉬어지는 것이니 구태여 호흡에 대해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참 호흡은 요가수트라 호흡법에서 입식入息과 출식出息을 제해 버린 것입니다. 공부가 미숙未熟할 때에는 입식과 출식이 있다가 공부가 익으면 들숨 날숨이 차차 사라집니다.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그때는 몸 자체가 호흡이 되어 버립니다. 법계호흡法界呼吸이라. 법계法界 리듬과 나의 리듬이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때에는 호흡법이 성립될 길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참선 탈취한 가운데 들숨 날숨 하는 호흡 이것은 하나의 제환 곧 하나의 방해 마장魔障이란 것입니다. 입정入定하면 그때는 호흡은 없습니다. 몸이 있으니 호흡이 없을 수 없으나 호흡에 역점을 두지 말고 호흡은 마음 다스리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란 것을 알 때 정당한 평가를 한 것입니다. 외도外道라는 것은 마음을 종으로 하고 모양을 주로 하는 것이니 호흡법을 주로 하고 마음 다스리는 것을 종으로 하면 그것은 바로 외도外道인 것입니다.

 

정도正道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을 이겨야 합니다. 마음 가운데는 몸이 들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일심一心 가운데 진소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요 심불중생시삼무차별心佛衆生是三無差別이라. 중생이나 부처나 마음 모두가 차별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마음이라 할 것도 없고 부처라 할 것도 없지요. 이름 지어서 마음이 부처다 하는 것이지, 그와 같이 오직 하나 그것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하나의 진리眞理 그 무엇 시심마是甚麽화두는 그 무엇을 참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무엇 온갖 일체 지혜 공덕을 갖춘 그 무엇이 내 마음이요 부처요 자성입니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어가지고 공부를 지어갈 때 마음으로 헐떡거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내 몸도 내 마음도 내 환경도 삼천대천세계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거니 육조 혜능께서 말씀하신 본래무일물입니다. 그때는 색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질의 흔적도 없습니다. 본래 우주宇宙가 텅 비어서 그야말로 오직 당체當体가 모두 불성뿐입니다. 불성佛性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거품 모양 그림자 모양으로 결국 물질이나 산하대지를 나투어서 현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뿐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본래무일물인데 죄요 악이요 선이요 병이요 하는 눈앞에 티로 말미암아 잘못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폐결핵 균도 불성이요 원자탄 핵도 체류탄의 알갱이도 따져보면 어느 것 하나 자성自性 불성佛性 아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 계시지 않는 곳이 없고, 천지 우주가 그야말로 변조광명邊照光明이라. 이와 같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딱 한 다음 공부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