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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28. 청정 무량한 부처님의 생명뿐입니다.

28. 청정 무량한 부처님의 생명뿐입니다.

 

* 1987812일 태안사에서 부산 신도분들께 하신 법문입니다.

 

28. 87. 08.12 부산신도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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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가지가지 그런 고생이 있는 사바세계에 있습니다. 허나 사바세계의 그런 고난을 떠나서 가장 좋은 세계가 있는 것을 우리는 짐작합니다. 이것은 우리는 안보이지 만은 각 도인들이나 부처님은 증명證明도 하고 보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좋은 세계가 내내야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극락세계 아닙니까. 극락세계의 딴 이름을 청량지淸涼地라 맑은 청[]자 서늘한 량[]자 청량지라 그래서 우리 중생은 청량지라는 그런 극락세계를 맛을 못 봅니다.

 

허나 이렇게 아주 더운 때 시원한 냉수나 얼음이나 그런 걸 먹으면 소위 말하는 청량미라고 해서 우리 마음이 굉장히 시원한 것을 느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고난 욕심을 많이 내면 욕심 때문에 우리

가슴도 뜨겁고 머리도 뜨겁고 합니다. 또는 불끈 성내면 성[] 때문에 우리 몸도 뜨겁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달아올라서 병나고 한단 말입니다. 인간들은 병이라고 하면 어떤 세균이나 외부로 해서 감염된 것만이 병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사실은 병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서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병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욕심이 많으면 욕심 때문에 욕심이라 하는 불순한 즉, 말하자면 오염된 분자가 우리 몸에서 확산되어서 병이 난단 말입니다. 성내면 성내는 뜨거운 분자가 우리 몸에서 확산되어서 병납니다. 이와 같이 욕심이나 또는 성[]이나 또는 우리 마음이 어두워서 우리 마음이 본래면목은 그야말로 훤히 밝은 것인데 본래면목을 못 봐놓으면 우리 마음이 어둡습니다. 어둡다는 그 마음보고서 불교 말로 무명심無明心 그러지요. 무명심이라, 없을 무[]자 밝은 명[]자 밝지 않은 마음이라 무명심, 우리 마음이 훤하면 삿된 기운이 우리 몸에 붙을 수가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두우면 어두움 따라서 음습한 것을 따라서, 가령 곤충이나 세균도 음습하면 그때는 발생을 잘하지요. 태양 빛이 쨍쨍 비치면 그때는 세균도 다 죽어버리고 합니다마는 음습하면 그때는 거기에 따라서 습기와 온도에 따라서 세균이나 곤충 같은 것이 발생한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은 내내야 마음이 밝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밝아야 청정합니다. 따라서 밝은 마음에는 그냥 어둠이 거기에서 배길 수 없단 말입니다. 헌데 남도 미워도 하고 욕심도 많이 내고 그렇게 마음먹으면 우리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 암울한 마음 어둡고 답답한 마음, 그런 마음이 생기면 따라서 우리 몸도 병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몸과 마음이 둘이 있다고 봅니다 마는 사실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심신일체心身一體, 부처님 법문은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부모님한테 의지해서 나기 전에 우리가 어디에 모양이 있습니까. 부모님한테서 나기 전에는 그것은 이런 사람 모양이 없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의식, 업식業識이라 하는 식만 있습니다. 모양이 없는 업식이라는 식만 그것이 인연 따라서 부모님한테 오기 위해서 어머님 배 안에 있다가 이와 같이 사람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는 그것은 마음뿐인 것인데 업식뿐인 것인데, 업식이 인연 따라서 결국은 각 물질이나 세포를 주워 모아서 사람으로 구성되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모양이 있다 하더라도 본래는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닙니다.

 

겉으로 봐서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몸인 것이고 알맹이는 결국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도 기분 나빠

서 먹어보십시오. 그냥 음식에 체하고 맛도 별로 없단 말입니다. 헌데

그러면, 아까 제가 말한 우리 인생이 가장 좋아하는 극락세계, 즉 아주 시원하고 조금도 마음이 뜨겁지도 않고 마음이 괴롭지도 않은 그런 청량지, 더울 때 시원한 물 마시고, 약주를 마시고 청량음료를 마시는 그런 기분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맑은 기분으로 사는 세계가 청량지淸涼地인데, 그와 같은 극락세계가 바로 청량지인데 청량지에 가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둔 맘을 떠나서 밝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 이것이 불교의 본질입니다. 밝은 마음만 가지면 청량세계, 그런 맑은 기운 시원한 기운은 항시 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어두워서 청량계나 극락세계를 못 보는 것이지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두운 마음, 어두운 마음이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욕을 부리는 마음 또는 성내는 마음, 이런 마음이 어두운 마음입니다. 사물을 바로 판단도 못 합니다. 우리 중생은 보통은 다 어두운 마음입니다. 밝은 마음은 조그만큼 밖에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나그네와 똑같습니다. 다행히 부처님 법 만나서 가까스로 우리가 참다운 밝은 길로 가는 길을 조금 알 뿐입니다. 조금 알 뿐인데, 우리가 부처님 지혜를 아는 정도를 세 가지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부처님 법문을 아는 그런 지혜를 말입니다. 어두운 마음에서 밝은 마음으로 가는 길, 또는 괴로운 중생세간에서 중생의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나 청량지淸涼地 세계로 가는 길, 이런 가는 길의 지혜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론 참다운 지혜는 하나밖에 없겠습니다마는 우리 중생이 차근차근

업장을 녹이고 밝아지는 정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한 가지는 문혜聞慧라 들을 문[]자 지혜 혜[]. 겨우 컴컴한 중생 마음이 부처님 법문 들어서 안단 말입니다. 계행도 지키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면 아, 그런 것이구나. 이와 같이 우리가 들어서 안단 말입니다. 들어서 안다 하더라도 들어서 좀 아는 그걸로 해서는 우리가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냥 한번 들은 대로 해버리면 좀 들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워낙 버릇을 많이 붙여놓았기에 우리 중생의 버릇이란 것이 굉장히 무섭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 법문 좀 들었다 하더라도 집안에 가서 자기 버릇대로 해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귀로 좀 들어가지고서 아는 지혜는 이것은 천박합니다. 그래서 자고로 공부도 천박한 공부를 가리켜서 구이학口耳學이라 입 구[]자 귀 이[]자 겨우 귀로 들어서 할 정도의 지혜를 가리켜서 구이학이라, 입이나 귀에 따르는 저 가슴에 못 들어가고서 귀나 입에서 뱅뱅 도는 그런 지혜를 가리켜서 구이학이라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부처님 법문을 좀 들어서 안다 하더라도 이것은 역시 별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 아 그렇구나, 꼭 내가 지켜야겠구나 그런 사무친 지혜가 안 나온단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조금 더 듣기도 많이 하고 자기 스스로 불경 책도 많이 보고 염불도 해보고 절에 가서 기도도 해보고 이렇게 하면 그때는 차근차근 가슴 쪽으로 그때는 아는 것이 깊어집니다.

 

그것보고 그때는 사혜思慧, 생각 사[]자 지혜 혜[]자 여기 계시는 분들은 우선 귀로만 들어서 입으로만 그냥 조금 옮길 둥 말 둥 하는 그런 얇은 지혜가 아니라 이렇게 뙤약볕에 절까지 오시는 것은 모두가 다 사혜思慧라 깊이 생각해서 부처님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그런 지혜가 되시니까 이렇게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혜에 해당하는 그런 깊은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도는 부처님 말씀은 꼭 옳구나 꼭 지켜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단 말입니다.

 

허나 그것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참말로 참말로 옮겨서 부처님 지혜를 훤히 알기는 어렵단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틀림이 없구나 이같이 느끼고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직은 못 봤으니까 참말 못 느낀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느끼는 지혜가 수혜修慧, 닦을 수[]자 지혜 혜[], 닦아서 참선 염불도 염불이나 참선이나 그때는 사무치게 해가지고서 사무치게 해야 만이 우리에게 나쁜 버릇을 떼어서 없애버립니다. 우리 버릇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금생에 나와서 우리가 익힌 버릇도 얼마나 많습니까,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학교에서 이것저것 배운 그런 지식, 그런 버릇 말입니다. 이런 버릇이 굉장히 많아서 사실은 금생에 익힌 그런 버릇도 다 떼려면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좋은 버릇도 있겠습니다마는 보통은 다 부처님 법에 비추어본다고 한다면 이것이 부정적인 버릇이 많습니다. 그런 나쁜 버릇 가운데서 성내는 버릇이나 남의 사정은 이해도 못하고 괜히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독선적인 버릇, 욕심부리는 버릇, 그런 버릇 같은 것은 이것은 굉장히 떼기 어려운 것입니다. 헌데, 금생에 익힌 버릇만도 떼기가 어려운데 버릇이란 것은 금생에 익힌 버릇뿐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생과 더불어서 금생에 나기 전에 익힌 버릇이 훨씬 큰 것입니다.

 

저 남극이나 북극에 가면 빙산이 있습니다. 얼음산이 있는데 얼음산은 해면에, 바다 위에 나온 것은 뾰쪽하니 별로 안 큽니다. 그러나 바다에 잠긴 물속에 잠긴 얼음덩이는 굉장히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빙산의 일각이라 뾰쪽이 나온 세상에 나온 그런 빙산은 작다 하더라도 물에 잠겨있는 빙산은 산더미같이 큰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버릇도 금생의 버릇이, 금생에 잘 못 듣고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한 버릇이 마치 물 위에 나온 조그마한 빙산 같다고 하면 물에 잠긴 산더미 같은 버릇은 과거 전생에 익힌 버릇입니다.

 

금생에 나와서는 20년 몇 십 년 그와 같이 몇 십 년에 해당한 버릇밖에 안 되지마는 과거 전생에는 무수 생 동안에 인간이란 것은 천 만생 윤회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어느 생에서는 우리가 돼지가 되어서 돼지 같은, 욕심만 부리는 돼지 같은 존재로 해서 거쳐 왔고 말입니다. 어느 생에서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아주 표독스럽고 그런 잔인한 버릇을 붙여왔고 말입니다. 어떤 때는 아수라가 되어서 싸움만 하는 그런 버릇도 붙여왔고 그런 버릇들이 우리 잠재의식에 우리 실의 근원에 꽉 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생 버릇 금생 버릇을 떼려면 좀처럼 떼기 어렵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 몇 마디 듣는다고 해도 그걸로 해서는 못 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로 들어 익혀서 들어서 얻는 그런 문혜聞慧라 또는 생각해서 아 그렇구나, 부처님 법이 정말 옳구나, 만법을 다 겨루어본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만큼 그런 위대한 법은 없구나, 우리 중생이 꼭 그 법만은 지켜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혜思慧를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근본 번뇌나, 근본 버릇은 못 뗀단 말입니다. 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는 사무치게 애쓰고 닦아야 합니다.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로 해서 거기다가 생명을 딱 걸 정도로 해버려야 하는 것이고, 또는 염불을 배운 사람들은 염불로 해서 생명을 거기다 걸 정도로 해서 자기 공부를 일심一心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쁜 버릇이 나쁜 버릇된 그런 마음들이 싹도 못 트게 말입니다. 우리는 조금 신통한 마음을 좀 내다가도 그만 버릇 때문에 단 순간 동안에 갸륵한 마음은 사라지고 나쁜 마음이 소생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 미워하는 마음 욕심을 지나치게 내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또는 사물을 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들이 싹트지 못하게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염[] 생각 생각에 상속이라 서로 상[]자 계속할 속[]. 부처님 생각하는 마음 또는 화두를 드는 마음 또는 주문 외는 마음, 그 마음이 생각 생각에 이렇게 이어져서 딴생각이 거기에 못 끼도록 그렇게 해야 우리 마음이 그때는 마음에 있는 버릇을 녹인다 말입니다.

 

버릇만 녹이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우리 마음과 부처님 마음과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과 석가모니 마음과 예수님 마음과 공자님 마음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청정 무비한, 광대무변한 마음인데 다만 그놈의 과거 전생에 나쁘게 익힌 지옥같이 익히고, 아귀로 익히고 또는 축생으로 익힌 마음, 금생에 나와서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또는 금생에 나쁜 생각하고 그와 같이 익힌 마음, 그런 악습들이 꽉 차 있으니까 우리가 우리 청정 무비한 본래마음을 못 봅니다. 본래 마음을 본 분들은 성인인 것이고 부처님인 것이고, 본래 마음을 못 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중생이란 말입니다.

 

중생이 할 것은 먼저 부처님 법문을 잘 들어서 자꾸만 익혀서 생각 많이 하고 동시에 닦을 수[]자 지혜 혜[]자 수혜修慧, 닦아서 익히는 지혜, 닦아서 익히는 지혜는 우리가 좋다 궂다 이렇게 섣불리 시비하는 그런 중생심을 자꾸만 부정해버려야 합니다. 시야비야是也非也 콩이야 팥이야 그러면 우리 마음이 버릇만 더욱 증장되어서 그때는 우리 중생심만 커나가는 것이지, 본래 청정한 불심은 잘 못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모두가 분립이 되어서 과학 하는 사람은 과학적으로만 많이 나가고 예술 하는 사람들은 예술만 옳다고 하고 또한 철학하는 사람들은 그것만 나가고 이와 같이 자기가 하는 방향 따라서 즉 말하자면 분업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나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을 전부다 합해서 종합적으로는 잘못 봅니다. 마치 코끼리를 뭇 소경이 봉사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다리가 기둥 같구나, 코끼리 배를 만진 봉사는 코끼리가 반구 같구나, 이와 같이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지면 자기가 만지는 부위에 따라서 각기 말하듯이 우리 중생은 과학만 공부하는 사람들은 주로 과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예술만 공부하는 사람들은 주로 예술적으로 그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우리 불교도 마찬가지로 경을 많이 본 사람은 경 그쪽으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화엄경華嚴經공부한 사람들은 화엄종 만들어서화엄경이 옳다 또는 법화경法華經하는 사람들은 법화종 만들어서 법화경이 옳다 이와 같이 자기가 공부한대로 같은 부처님 법내에도 자기가 공부한대로 옳다고 국집局執을 고집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이와 같이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 버릇 가운데서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 이 버릇같이 굉장히 나쁜 버릇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싸우고 맙니다. 우리 불교도 지금 한국에 18종파가 있습니다. 그 종파는 내가 믿는 불법이 최고로 옳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신성한 부처님 재산인 절인데도 같은 스님끼리 내것이다 네것이다 싸운단 말입니다. 얼마나 그것이 모순입니까, 그런 것은 사물의 본질을 못 본 소치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본다면 제 말씀 새겨서 잘 들으십시오. 사물의 본질을 본다면 우리 중생 마음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못 보는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은 본다고 하면 그때는 너 나의 구분이 없습니다.

 

네 것 내 것의 구분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다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항시 와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그 뜻이 무엇인가, 금강경』 『반야심경의 그런 뜻을 한 구절도 못 외운다 하더라도, 반야심경이나 금강경뜻은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또한 내 것이 없고 네 것이 없는 것이고 사실은, 천지 우주가 오직 청정한, 청정 무변한 부처님의 생명뿐이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의 본뜻도 사실은 모두가 그런 뜻인 것입니다. 자타 시비를 떠나서 잘나나 못나나 또는 설사 금생에 나와서 겉으로는 조금 죄를 진다 하더라도 근본 실상, 근본 실상은 조금도 오염되지 않고, 청정무비한 청정 무량한 부처님의 생명뿐입니다. 죄를 짓고 또는 나쁘고 한 것은 그때 뿐인 것이지 속 알맹이는 오염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마치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진흙에 물들지 않듯이, 우리 중생도 역시 비록 중생의 겉만 보니까 좋다 궂다 강가도 박가요 누구요 하는 것이지 그런 근본에서 보면 조금도 차이가 없는 청정淸淨 무비無比한 부처님의 생명뿐이란 말입니다.

 

바다 위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고 또는 거품이 천 개 만개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바다 위의 거품만 보고 물결만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물결이 좀 크다 거품이 좀 작다 이와 같이 차별분별 내세우지만 사실은 물로 해서는 바닷물 똑같은 물이란 말입니다. 바닷물 똑같은 물인데, 겉에 뜬 바람 따라서 일어나는 파도나 거품를 보아서는 파도가 더 크다 높다 또는 거품이 더 크다 작다 합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인간이나 모든 이런 중생도 그 알맹이는 똑같은 내용은 부처님과 더불어서 부처님의 모두가 부처님의 성품 그뿐인데, 겉만 보니까 바다에 뜬 물결이나 거품을 보듯이 겉만 보니까 작다 크다 잘났다 못났다 또는 좋다 궂다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은 그때는 시비是非가 없습니다. 성인들은 자타 시비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이든 자비든 그때는 동체대비同體大悲, 한 가지 동[]자 몸 체[]자 큰 대[], 자비로울 비[]. 동체대비라 천지 우주가 하나의 몸이라는 데서 우러나는 자비라, 우리 중생은 인정을 쓰고, 자비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그냥 항시 너와 나를 구분해서 좀 베풀어줄 정도 합니다. 저 사람 구차하니 베풀어준다. 이번엔 수해가 나서 베풀어준다. 이와 같이 남의 고난을 보고서 베풀어준 그런 베풂 이것은 상이 있는 베풂입니다.

 

즉 말하자면 이것은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 이 있는 보시란 말입니다. 허나 천지 우주가 하나의 생명임을 분명히 보고서 또 느끼면서 하는 보시 이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그때는 상이 없는 보시란 말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고서 하는 보시가 되어야 참다운 베풂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극락세계 또는 청량지淸涼地, 자기 마음이 조금도 어둠도 없고 항시 마음이 훤히 개어서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그런 광대무변한 마음자리, 원래 본래 마음은 그와 같이 광대무변한 마음자리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나쁜 뜻은 조금도 안 붙어옵니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라놔서 광대무변한 청정한 마음에는 나쁜 병도 안 붙어옵니다. 그런 마음 되기 위해서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의 세 가지 지혜 가운데서 문혜聞慧라 들어서 아는 지혜, 생각해서 아는 사혜思慧, 닦아서 아는 지혜라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들어서 아는 지혜나 생각해서 아는 지혜는 상당히 많이 하셨습니다. 허나 아직은 닦아서 그때는 증거證據 해서, 천지에 두루해 있는 우리 생명의 본질인 불성을 보고서 아는 지혜는 아직 모르십니다. 불성을 딱 보고서 참으로 불성과 나는 둘이 아니고 너와 나가 둘이 아니고 그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인데 닦는 것이 아직 부족하니까 그와 같이 불성은 아직 증명은 못한다 말입니다.

 

불성佛性을 증명해야만 극락세계를 맛볼 수 있고 청량세계를, 항시 개운하고 시원한 세계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남 미워하면 미워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사실은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도 미워하는 자기 마음이 더 괴로운 것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염불도 많이 하시고 그런 노보살님들 보면 집안에 가서는 그냥 자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잔소리가 많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기에 계시는 분들은 한 분도 그러는 분이 안 계시는 걸로 믿습니다마는 부처님 법문을 외신다 하더라도 그런 수혜修慧 즉 말하자면 닦아서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집에 가서는 도리어 말만 많이 배워서 그 전보다도 말씀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래 버리면 불법은 보람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우리가 배웠다는 것은 인정이 적은 사람은 인정이 더 많아지고 말수가 많은 사람이 말수가 적어지고 말입니다. 시끄러운 사람은 고요해지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마음이 부처님 쪽으로 좀 가까이 서 있어야만 부처님을 믿는 가치가 있습니다.

 

참선이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내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느끼고 천지 우주가 본래 불성임을 딱 느껴버리면 즉 부처님을 저 밖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부처님을 내 마음에서 구하고 또는 어디에서나 부처님을 구하고 천지 우주는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입니다. 하나의 시냇물이나 돌이나 초목이나 모두가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잘 못 봐서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구할 때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저 밖에서, 저만치 계시다 이렇게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을 우리가 외우고 관세음보살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 아미타불을 저 만큼 밖에서 구한다면 그때는 방편입니다. 그것은 방편 공부입니다.

 

참다운 공부는 내 마음에서 부처님을 구하고 또는 천지 우주의 도처에서 시시각각 부처님을 구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우주에 가득차 있거니 또는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어디에서도 부처님은 다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부처님을 구해야만 그때는 참다운 부처님을 구하는, 즉 말하자면 수혜修慧 하는 부처님을 닦는 공부인 것입니다. 이렇게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염불을 하면 그때는 염불선念佛禪이고 화두를 들면 그때는 화두선話頭禪이고 주문하면 그때는 주문선呪文禪이고 다 그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순간 찰나로 부처님을 안 떠나면 그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꼭 무엇만 의심하고 화두만 들어야만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부처님 자리에서 어려운 말로 하면 당처에서 안 떠나면 그때는 참선이란 말입니다. 염불하면 염불 참선이고 주문 외우면 주문 참선이고 화두 의심하면, 화두 참선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다운 공부, 즉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그와 같이 참선 공부로 해서 바른 지혜, 바른 실상 지혜, 바른 지혜를 얻어서 하루빨리 행복스러운, 영원히 죽음도 없고 윤회가 없는 그러한 행복스러운 일체 인생고를 다 떠나버린 그런 영원한 안락지安樂地인 그런 극락세계, 또는 청량지淸涼地 세계, 그런 데를 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으면서 말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