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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선의 바른 길

19. 우리가 고향 가는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19.고향가는 준비1986. 09. 07 정기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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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우리가 고향 가는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1986. 9. 7. 정기법회)

 

우리는 봄이 되면 마음이 설레서, 새로운 희망을 품느라고 생활에나 우리 마음에 별로 여유가 없습니다. 여름 되면 더위 때문에 숨이 컥컥 막혀서 여유가 없습니다. 겨울 되면 너무 추워서 깊은 생각을 못합니다. 허나 가을이 되면 우리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생활도 다시 뒤돌아보고 또는 여러 가지 자기 이념 사상도 검토도 해보고 이런 때가 가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인간은 복잡하기 그지없고 자기가 가는 인간 생활이 바른 생활인가, 바르지 않은 생활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회의 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할 때에 자기와 똑같은 차원에서 판단하면 오류를 범합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산기슭에서 보면 시야가 좁아서 시각도 제한되듯이 역시 산 중턱이나 정상에 올라가야 사방이 다 보여서 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산 이편에서 저편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전모를 우리같이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불교 뿐 아니라 딴 종교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권력 있는 사람도 자기 입장으로만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보다 밑에 있는 사람들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러한 관대한 지위는 높은 지위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자리에서 봐야 만이 바로 보입니다. 비록 일상생활에서 헤매는 우리 중생이라 하더라도 가을만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장자궁자長者窮子법화경에 있습니다. 이것은 장자長者란 아주 부자 집이고 지위가 높고 덕 있는 분이 장자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런 장자지만 아들을 잘못 두어서 어려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아들이 너무 빨리 나가버렸기 때문에 그 아들은 자기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헤맵니다. 이와 같이 자기 고향 자기 부모 자기 근본을 모르고서 헤매는 그 어린 방황하는 자식, 그 자식을 우리 중생에 비교하는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은 제 아무리 잘났다 해도 성자가 되어서 인생길을 바로 보지 못할 때는 모두가 다 장자의 아들처럼 헤매는 중생에 불과합니다. 욕계欲界에서 헤매고 색계色界에서 헤매고 무색계無色界에서 헤맵니다.

 

이 자리에는 불교를 연구하신 분들은 굉장히 연구를 많이 해서 보다 고도한 체계를 필요로 하신분도 계시고 그런가 하면 한 번 두 번 나오셔서 불교 술어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신 분도 계십니다. 따라서 제 말씀도 왔다 갔다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조금 깊게 어떤 때는 조금 낮은 차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은 삼계三界에서 헤매는 중생입니다.

 

욕심의 바다에서 헤매고, 성내는 불뚝거리는 흥분된 바다에서 헤매고, 그런가하면 진리의 본바닥을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 학식이 많이 있고 제아무리 유능한 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진리의 본 근원, 인생과 우주의 바탕을 모르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의 세계에서 중생은 헤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처럼 자기 부모도 모르고 자기 고향도 모르고 헤매는 사람과 똑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가 무엇인가? 좀 안다하는 교만심을 떠나서 성자가 아닌 한에는 고향 가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갈록축염渴鹿逐焰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 목이 마르지 않고 물도 많이 마시고 수초가 많은데서 자란 사슴들은 아지랑이 보고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이 마르니까 바로 못 봅니다. 저 멀리 아지랑이가 보이면 아지랑이인줄 모르고서 아지랑이가 마치 물같이 보이지요. 그래서 물인가 하고 달려갑니다. 우리 중생은 그와 똑 같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보고 갑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닌데 행복의 방향도 모르면서 쫒아갑니다.

 

광구설뇌狂狗齧雷라 번개가 치고 뇌성이 온다면 정상적인 개는 그 정도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마는 미친개는 그걸 모릅니다. 그래서 미친개는 소리 나는 데로 멍, ! 짖으면서 헛 입을 놀리면서 씹으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미친개는 필요 없이 짖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중생이 별로 신통한 것도 아닌데 거기에 힘을 낭비하고 남을 미워도 하고 사랑에도 집착합니다. 아무리 영리하게 산다 해도 역시 우리 중생 생활은 그와 비슷한 생활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바로 살 것인가?

먼저 근본 집이 어디에 있는가. 근본 고향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근본 고향을 어렴풋이 안다 하더라도 고향 집이 별로 신통한 것도 없고 오두막살이 이고 아무 식량도 없다면 갈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빌어먹을망정 고향 집에 뭐 하러 갈 것입니까? 허나 고대광실 높은 집이 있고 전답 보화가 많이 있다면 다소 고생스럽더라도 고향 집에 갈려고 애쓸 것입니다. 허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 고향, 인간의 고향은 한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행복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말로하면 너무 허무해서 이 시간에는 근본 고향인 부처님의 공덕에 대해서 체계를 대강 추려봤습니다.

 

불교는 마음공부입니다. 내 마음이 무엇인가? 내 마음에 들어있는 공덕이 어떠한 것인가? 바로 보면 불교는 천지 우주가 마음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마음뿐입니다. 허나 우리 중생은 마음을 못 보니까, 신통치 않은 몸뚱이는 항시 보고 살지만 마음을 못 보니까 마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내 마음이 과연 머리에 있는가, 가슴에 있는가. 마음 찾기 위해서 도인들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로 방편적인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마음에는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헤매는 중생이 자기 고향에 가려고 애씁니다.

 

우리 마음 공덕은 한도 끝도 없어 부처님 말씀으로도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다섯 가지 범주로 해서 마음을 풀이한 법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교顯敎, 밀교密敎 양편에서 다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래서 오지여래五智如來라 불교에서 지혜로 하면 자비가 소외된 지혜가 아니라, 자비가 포함한 지혜를 말합니다. 부처님 법문은 어떤 것이나 하나를 말할 때는 나머지를 다 포함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생은 문자에 착하면 안 됩니다. 하나를 말하면 다른 것도 거기에 포함이 됩니다. 오지여래라 하면,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공덕이 포함된 자리를 다섯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맨 처음은 대일여래大日如來라 여래는 부처이니까 부처 이것은 가장 근본 된 생명이란 뜻입니다. 부처란 뜻이 무엇인가? 모든 것의 제일원인 가장 근본 된 생명, 가장 순수한 에너지 이것이 부처입니다. 다만 해만해도 밝을 것인데, 해를 초월한 모든 광명의 근본 된 것을 대일大日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바세계의 해는 장벽에 부딪히고 벽이 있으면 벽을 못 뚫고 철판을 뚫고 못 옵니다. 허나 대일大日 부처님의 광명 대일 이것은 철판이나 벽이 문제가 아닙니다. 금이나 은이나 어떤 것이든 뚫고 들어갑니다. 어째서 그러가 하면 천지 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대일로 해서 부처님의 광명으로 안 돼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광명이 하도 비춰서 조금도 방해 없이 천지 우주에 비치는 부처님 그것이 대일여래입니다. 인도말로 하면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입니다. 비로자나불 이것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대일여래大日如來 임과 동시에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우주에 두루 깔려있다는 말입니다. 장흥 보림사 가면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일여래를 모셨습니다. 그다음에는 불공여래不空如來, 천지 우주가 장애가 없이 텅텅 비어서 끝도 갓도 없이 한도 없지만 다만 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천지 우주가 텅 비어서 빈 것만이 부처다. 하지만 사실은 빈 것만도 아니고 비어있지도 않습니다. 비어있지 않은 가운데 무량공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미타여래彌陀如來 부처님의 지혜는 천지를 다 비추는 광명인 동시에 또는 거기에는 비어있지 않은 생명이 있고 또한 동시에 일체를 모두를 다 알고 다 할 줄 아는 미타여래입니다. 그다음 아촉여래阿閦如來 이것은 마치 거울 같아서 우주를 모두 비추어서 한꺼번에 볼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 보생여래寶生如來 이것은 일체 공능, 일체 재주를 다 부립니다. 이와 같이 인격적으로 부처의 이름을 표현하면 우주라 말하는 것이고 또는 거기에 포함 된 지혜, 지혜를 주로해서 말할 때는 대일여래大日如來는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라 우주에 충만해 있는 하나의 지혜로 표현한 것이고, 불공여래不空如來는 평등성지平等性智, 조금도 차별이 없이 우주에 충만해있는 하나의 생명을 말합니다.

 

미타여래彌陀如來는 묘관찰지妙觀察智라 천지우주를 다 비춰봅니다. 이런 딱딱한 법문은 처음에 들으시는 분들은 따분하실 것입니다마는 불교를 배우시는 분들은 이 정도의 체계는 세우셔야 됩니다. 또 금륜회 마크도 여기서 연원 되어서 알아야 만이 금륜 마크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좀 어렵더라도 현교, 밀교를 공부 할 때는 꼭 알아두셔야 만이 그때그때 납득하기가 편리합니다. 아촉여래阿閦如來 이것은 대원경지大圓鏡智, 마치 큰 거울 같아서 우주를 다 비추어서 봅니다. 보생여래寶生如來는 성소작지成所作智, 일체기능을 일체제주를 다 부립니다. 헌데 이러한 것은 또 물리적으로 표현할 때는 대일여래大日如來는 우주에 충만해 있으니까 공이라고 말하고, 불공여래不空如來는 운동하는 힘이니까, 모두를 변화하는 것이므로 풍이라고 합니다.

 

미타여래彌陀如來는 모든 길을 비추어보니까 불이라고 합니다. 아촉여래阿閦如來는 잔잔하고 맑은 물이 모든 만상을 비추어보듯이, 마치 거울같이 물같이 비추어본다고해서 물이라고 합니다. 보생여래寶生如來는 일체 공능을 갖춘 것은 물질인지라, 이것은 지라고 합니다. 모양으로 보면 지는 네모고, 는 원이고, 는 삼각이고, 은 반원이고 공은 다 모두 합해서 하나가 되어가는 이것 보고 향공상向空相이라 모든 존재가 공으로 향한다는 말입니다. 모아서 공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렵더라도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이것보고 오대五大라고 물리학적으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몸이나 어떤 것이나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또 원래 마음으로 들어가는 공으로 돼서, 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또는 불교에서는 이런 것이 우리가 보는 색이 아니라, 색의 원래 근본 색, 근본의 원색으로 해서 지는 황색, 는 백색, 는 적색, 은 흑색, 은 청색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이 불교를 이론적으로 하다보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두 합친 색이 자마금색紫磨金色입니다. 우리가 경을 보다 보면 어떤 때는 부처님의 자마금색의 광명,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영롱할 때는 그 색이 자마금색입니다. 도인이 돌아가실 때 광명이 나올 때도 역시 자마금색입니다.

 

순수한 금, 가장 순수한 순금도 역시 자마금색인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몇 번 허물어지고 다시 생성되고, 되풀이 된다하더라도 자마금색의 광명은 조금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자마금색의 광명은 항상 우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순수한 생명의 에너지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그때그때 에너지기운으로 우주가 이루어지고 합니다. 이런 것은 금목수화토 오행과도 관계가 밀접합니다. 그래서 우선 불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로서 법·· 삼신이 있지 않습니까. 삼신으로 배대를 시킬 때는 대일여래는 법신法身에 해당하고, 불공여래, 미타여래, 아촉여래 이 삼신三身은 보신報身에 해당하고 우리 중생계, 현상계를 나투는 보생여래는 화신化身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법보화 삼신과도 같이 배대를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친히 부르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 역시 여기에 해당되어서 화신불 경계 이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 에 해당하고, 보신불이 아미타불 미에 해당합니다. 대일여래, 우주의 순수한 광명 그대로는 법신法身에 해당합니다. 아미타불하면 삼신일불三身一佛로 해서 천지우주를 총망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법문은 광대무변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 못 알아먹으니까 그냥 방편으로 해서 아미타불은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극락세계에 계시는 것이지만 그것은 방편적인 말씀이고, 원래 말씀은 우주자체가 바로 아미타불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여래를 합친 아미타불 경계 이런 생명을 다 갖춘 것을 물리적 표현 할 때는 금륜金輪 그럽니다. 보다 구체적 표현은 금강륜金剛輪 그럽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 부처님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불심 그럽니다. 따라서 이것은 불심인佛心印에 해당합니다. 우리 금륜회의 금륜마크, 이것은 바로 불심인佛心印입니다. 다섯 가지 여래, 부처님의 공덕을 갖춘 상징적인 표지, 이것이 불심인佛心印 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배대해 보면 지금 어떤 종교나 학설 논쟁이 많은데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쪽에서 말하는 현교에서 말하는 것과, 중생이 안 보는 경계인 밀교에서 말하는 것과 교리가 상치가 되어서 논쟁을 많이 합니다. 논쟁을 많이 하나, 그런 가운데 가장 보편타당한 교리를 합친 것이 여기에 표현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다섯 가지 여래도 내내야 하나의 부처님의 공덕인데, 각자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공덕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퍼트려 넓히면 천지 우주를 감싸는 것이고, 좁히면 어떤 미세한 것도 마음보다 적을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크고, 가장 적고, 천지 우주가 바로 마음뿐인 것인데 그런 마음속에 갖춰있는 생명 이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인 도식에다 배대 시키면 한 가운데가 대일여래입니다. 동방은 아촉여래, 남방은 보생여래, 북방은 불공여래, 서방은 아미타불입니다.

 

따라서 서방정토란 것도 거기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붙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친근한, 관음보살, 미륵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이것도 역시 여기에 배대가 됩니다. 우리 만자가 있으면 이것도 십자가를 보다 더 깊게 해석하는 것도 됩니다. 십자가도 비단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었다고 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보다 더 우주의 진리 자체의 심심미묘한 십자의 의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운데서 오지의 뜻을 다 포함시켰습니다. 십자의 한가운데 이것은 대일여래를 의미합니다. 동쪽은 아촉여래, 남쪽은 보생여래, 서쪽은 미타여래, 북쪽은 불공여래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되어있고 이쪽의 발을 생각하자면, 이것 보고 불교의 말로하면 가운데 이것은 여래의 사지四智 부처의 네 가지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고 각 발 이것은 보살의 사행四行이라 보살은 역시 자비행慈悲行을 주로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사행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쪽저쪽을 칭하시면서 말씀하심) 보현보살의 행원, 관음보살의 구제하는 원력, 문수보살의 지혜, 미륵보살의 자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굉장히 심심미묘하고 십자도 역시 단순히 하나의 성자가 못 박혀 죽었다고 해서 귀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우주의 근본자체의 진리를 포함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만자 뜻풀이도 십자만 해놓고서 만자의 끄트머리 네 군데에 발이 없이 연꽃만 있는 것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 십자가 있구나 라고 말합니다마는 우리 불교도 십자가가 아니라 이와 같이 오대五大를 포함시키고 보살의 행을 연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범어도 지을 표현해서, 하나의 관법으로 관조하는 방법에도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아무렇게나 마크도 차고 다니고, 또는 금륜회의 상징적인 도식을 봅니다마는, 이러한 불교의 모두를 총망라한 현교, 밀교를 총망라한 심심미묘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오륜관五輪觀이라, 우리가 내내야 본래 고향인 불심을 깨닫는 것이 우리 공부 아닙니까? 불심을 깨닫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습니다만. 불심을 깨닫는 방법가운데, 밀교의 방법은 오륜五輪을 관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아주 단조로울 때가 있습니다. 하다말다 하면 미처 모르나 몇 날이고 계속하면서 한 방법만 취하면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가사 원을 봐서는 원 이것은 부처님의 대원경지大圓鏡智로구나, 인격화시키면 아촉여래阿閦如來구나 이와 같이 납득을 시키면서 공부한다 말입니다. 또 네모를 봐서는 보생여래寶生如來구나, 삼각은 미타여래彌陀如來구나! 이와 같이 각 모양을 보면서 부처님의 명호와 지혜를 뇌이면서 공부하면 싫증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어떻게 공부하든 지간에 내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이니까 거기만 가면 됩니다.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모아져야 하는데, 공부 방식이 시원치 않거나, 싫증이 나면 마음을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으로서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꼭 이런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심련관心蓮觀이라 우리는 생리와 심리를 따로 봅니다 마는 사실 생리와 심리는 둘이 아닙니다. 사람 마음씨도 얼굴과 마음씨가 둘이 아니듯이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심장, , , , 모두가 진리와 합법적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심장, 심장은 우리 공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임상적인 의학을 모르지만, 심장을 해부해보면 심장의 조각은 8개가 있답니다. 우리 범부는 연꽃 봉우리가 합쳐 있듯이 합쳐있고, 마음을 열어서 정화가 되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벌어져서, 공부가 성취된 도인들은 활짝 열려서 마치 여덟 조각 연꽃이 활짝 피어서 훤칠한 찬란스러운 연꽃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은 어느 정도나 열려 있습니까? 탐욕스런 마음 또는 성내는 마음 이런 마음을 제어를 못하고 억제를 못하면 항시 우리 마음은 못 열려 피지 못합니다. 우리 공부도 필요하고, 어떤 경우엔 옆에 사람들의 자문의 에너지도 필요한 것입니다. 화두 이것은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그때그때 행동도 하고 말도 한 그런 가운데서 우리 공부에 필요한 것을 딱 집어서 하나의 법칙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이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하는 말은 화두가 못 되는 것입니다. 도인들이나 부처님들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동을 공부에 필요한 것은 딱 추려서 이것을 하나의 문제로 삼았습니다. 화두 이것은 번뇌를 초월하고, 생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면 그때는 깨달은 경지입니다. 문제를 못 풀면 미흡한 경지고요.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어느 선지식이 사람의 근기에 맞춰서 너는 이걸로 공부해라 그러면 우리가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가운데 마음이 모아져서 깨달아버립니다. 평생 동안 의심하다가 못 풀면 의심하다 판나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의심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이 화두를 드는 선법禪法입니다. 이것만 있는가 하면 사람 기질은 천차만별입니다. 따지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심하는 것을 별로 고생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맨날 의심할 수 있지마는 사실, 의심은 맨날 해야 합니다. 우리같이 참선하는 사람들은 자나 깨나 화두를 의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심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심하기 싫어하고, 따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맞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묵조선黙照禪입니다. 잠자코 비춰봅니다. 불교는 하나의 법을 고집시키지 않습니다. 이런가 하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화두선이 유포되어 성할 때에도, 거기에 반정립 되어 묵조선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력이 거의 똑같았습니다. 지금도 일본의 조동종파曹洞宗派는 묵조를 하고 있고, 임제종파臨濟宗派는 화두를 하고 있습니다. 대만도 역시 똑같이 양쪽 절이 있습니다. 화두하는 절이 있고 묵조하는 절이 있습니다.

 

한국은 조계종이 화두를 주로하고 있고, 원불교는 묵조를 합니다. 묵조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것은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 현재 이루어진 공안이라 이것은 무슨 뜻 인가하면,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외워두면 참 편리합니다. 공안公案 이것은 비단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말씀한 것만이 공안이 아니라 바로 본다 하면, 천지 우주가 바로 공안입니다. 천지 우주가 부처님의 화신이거니, 어떠한 것도 부처님의 법에서 벗어난 것이 없거니, 하나의 컵이나, 어떤 것이나 부처님의 진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목전의 일체 만유를 하나의 공안으로 봅니다. 현재 이루어진 모두를 공안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때는 새삼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달이 밝으면 밝은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이것이 인연因緣 불가피不可避의 인과因果 필연성必然性의 이것을 모두를 수용하고서 인연에 수순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따지고 의심할 필요 없이 그냥 우주를 다 부처거니 하고서 닦는 공부가 묵조선입니다.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말입니다. 현성공안 이것만 가지고도 굉장히 이론적으로 심하게 다룬 서적이 많이 있습니다. 허나, 간단히 말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그다음은 염불선念佛禪이라, 하면 이런 화두를 드는 공안선이 있고, 한 가지는 화두가 없이 천지우주를 그대로 시인하면서 내가 원래 부처거니 우주가 부처거니, 새삼 의심할 필요가 없이 하는 관조觀照, 요즘 말로 하면 명상 생활 비슷하게 하는 공부가 묵조선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은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아직 범부인지라, 자꾸 생각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단시일 내에 도인이 되어서 공부가 끝나버리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우리 공부는 쉽게 끝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나의 목표가 필요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과거 번뇌 금생 번뇌가 끝도 없이 나옵니다. 이런 번뇌 때문에 망상분별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화두를 들어서 의심하는 공부를 해도 망상은 자꾸만 나옵니다. 하물며 화두도 뭣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망상 때문에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때 마음을 딱 잡기 위해서 부처님의 명호를 외웁니다. 이것이 염불선念佛禪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명호를 외워야 합니다. 속으로 하던 소리를 내든 상관없습니다. 그냥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외운다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공부가 염불선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선 이것, 참선은 무엇인가? 참선이라고 할 때는 꼭 우리가 선행적으로 해결시켜야 합니다. 그건 천지 우주가 바로 이대로 부처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보면 부처로 안보이고, 나쁜 놈, 좋은 놈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잘못 본 그림자 같은 견해에 불과 한 것이고, 바로 보면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뿐이라 하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부처라는 생각, 이 생각은 안 가지면 정견이 못됩니다. 정견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만이 화두를 들어도 참선이 됩니다. 화두 없이 잠자코 명상을 해도 묵조를 해도 참선이 됩니다. 부처님의 이름을 외운다 하더라도, 이름 외우는 그것만으로도 공덕이 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참선이 못됩니다. 먼저 내 생명 본래가 바로 부처임을 느껴야 만이 염불을 해도 염불선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염불선이라는 선, 참선이라는 선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해오解悟가 먼저 되어야 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많이 들고, 염불을 많이 하고, 명상을 많이 해도, 그런 해오解悟 천지 우주가 부처거니 하는 생각을 못 가지면 참선은 못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한계를 아십시오. 비록 하느님을 부르더라도 역시 천지 우주가 부처님뿐이다, 하나님뿐이다 이와 같이 느끼면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을 파악해야 만이 같은 불교끼리도 화합을 하고 다른 종교하고도 화합할 수가 있습니다. 근본을 못 간추리면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옥신각신 합니다. 염불선은 그런 법문 가운데서 가장 강하게 말하고, 적합하게 말한 분들의 법문을 몇 가지 추렸습니다. 간화선자看話禪者 화두를 의심하는 선법은 진시사견眞是邪見이라 그러니까 각 세 가지가 옳다고 언쟁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잘 보고서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각자 판단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도인 되는 공부이니까요. 자기한테 맞으면 좋은 것이고 안 맞으면 더딜 뿐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면서 공부하는 사람은 진시사견이라. 모두가 다 사견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너무나 지나친 말이겠지요. 이것도 도인 되는 길이네 이분이 몰라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집착하니까 집착을 털기 위해서 방편으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면 도인의 법문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되니까 그런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는 건 필요합니다. 화두를 의심하면서 참선하는 공부는 모두 삿된 견해라. 여운분인如運糞人이라, 마치 똥을 운반하는 사람이, 똥을 운반하면 몸에서 똥 냄새가 나겠지요. 오해심정吾害心情이라 똥을 운반해서 자기 몸을 더럽혀지는 거나 마찬가지로 그대 마음 밭을 더럽힌다 말입니다.

 

본래 부처인데 이것이 무엇이고, 저것이 무엇인지 의심한다는 말입니다. 의심할 것도 아닌데 의심한다거나, 상대 유한적인 문제를 따지면 소중한 본래 부처인 우리 마음 밭을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화두를 잘못 들면 이런 비방을 들을 수 있습니다. 화두를 들 때는 불심의 체, 천지 우주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부처님 그 자리를 안 떠나야만 공부가 안 빗나가는 것이지 떠나면 이 같은 비방을 듣습니다. 화두를 의심하는 사람은 모두가 삿된 견해로다. 마치 똥을 운반하는 사람같이 그대 마음 밭을 더럽히도다. 첩경법문捷徑法門 가장 가까운 법문 이것은 유일염불唯一念佛이라 오직 염불뿐이라. 이것도 역시 자기들만 찬탄하는 그런 말씀이 되겠지요.

 

공고이진功高易進이라, 공이 높아져야 만이 쉽게 정진한다는 말입니다. 공덕이 높아짐과 동시에 정진이 빨라진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염불선念佛禪이라 염불 이것은 결국 가장 으뜸으로 내세웁니다. 이것은 진헐청료(眞歇淸了, 1089~1151) 중국 송나라 때, 북송北宋 시대 대혜선사(大慧禪師, 1089~1163) 화두를 체계화시킨 대혜선사인데 그분하고 같은 시대 나오신 분입니다. 대혜선사 역시 천팔백 명 제자를 거느린 분이고 이분 역시 많은 제자를 거느렸습니다. 막상막하 쌍벽을 이룬 분이지요. 각기 친한 도반인데 양쪽에 치우칠까봐 이런 말씀을 한 것입니다. 허나 잘못하면 화두도 이런 비방을 듣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적인 문제를 가지고 따지면 공부가 나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어도 하나의 마음자리, 불심 안 놓치고 화두를 들면 공부에 손해가 없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비방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법문은 역시 염불선에 관해서입니다.

고인설참선古人說參禪 고인들이 참선을 말도하고, 재화두再話頭라 화두를 들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지마는 도시부득都是不得이라 우리가 마음이 총명해서 한 마디에 깨달으면 화두가 필요가 있습니까? 영운조사(靈雲祖師, 생멸연대 미상)같이 복숭아꽃 보고 깨닫고 말입니다. 향엄(香嚴, ?~898) 스님같이 지팡이에 돌이 맞는 것을 듣고 깨닫고 이렇게 되어 버리면 화두가 필요 없습니다마는, 우리 부득이 한 사람들 무슨 문제를 오랫동안 탐구해야 될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부득이하게 화두가 있고 참선이 있습니다. 공안수다公案數多라 화두나 공안이 비록 많다고 할망정 유독염불惟獨念佛이라, 오직 홀로 염불만이 가장 적실하고 내용 있는 화두입니다. 사실은 염불도 화두인 것입니다. 단지, 이쪽에 비해 의심 않는 화두일 뿐이지 화두는 화두입니다. 이와 같이 천칠백 가지나 화두가 많이 있지만, 이런 가운데서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관음보살만이 외우는 이 화두가 가장 적실하고 내용이 풍부한 화두란 뜻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로중塵勞中 우리 중생이 얼마나 바쁩니까? 바쁘고 고생이 많은 우리 중생 가운데 티끌에 헤매고 있는 사방세계의 중생이 극이득력極易得力이라 극히 쉽고, 힘을 얻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상으로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2)이라 중국 명나라 분입니다. 중국의 명나라 때 가장 위대한 스님이 누군가 하면, 여러분이 지금 방생을 하시지요. 방생문을 낸 연지대사 운서주굉(雲棲袾宏,1536~1615)이라고도 하는 분인데 선관책진禪關策進도 내셨어요. 운서주굉雲棲袾宏하고 감산덕청憨山德淸하고 이 두 분이 명나라 때 가장 위대한 도인인데, 도인이니까 허튼 말은 안 했겠지요. 고인이 참선을 말하고 화두를 말했지만, 이것은 모두 다 부득이해서 말했도다. 이런 화두나 공안이 많다고 할망정, 그런 가운데서 염불화두 이것이 가장 적실한 화두입니다. 진로중塵勞中 우리가 고생하는 가운데서 극히 힘을 얻기가 쉽습니다.

 

사실, 우리같이 출가해서 맨날 참선하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같은 신분이 못되고 생활하는 분들은 이렇게 의심하는 화두는 생활에는 별로 안 맞을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기도를 모시나, 염불하나, 나누어 대화를 하나 일을 하나 하기 쉬운 것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겁니다. 다만 그렇더라도 부처님을 극락세계 계신다고 할 때는 화두가 못 됩니다. 그때는 염불 화두가 못됩니다. 염불선이 못됩니다. 내 자성이 본래 부처임을 천지 우주 본래 부처임을 믿어야 만이 염불선, 염불 화두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각하기 좋은 때 내가 얼마만치 고향을 가고 있는가? 내가 떠나온 고향은 얼마만큼 갈려고 애쓰고 있는가? 하고 자기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가을만은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섣부른 희망이나 향수를 지워버리고, 참다운 마음 고향의 향수를 가지고서 우리가 고향 가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하려면, 내 마음 고향의 모양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 고향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 모든 행복 자비가 충만한 고향입니다. 어떠한 것도 부족이 없습니다. 우리 행복을 거기에서 안 구하고, 다른데서 구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고 똑똑하더라도 서로 미워하고, 헐뜯고, 그런데서는 진리는 못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마음 더럽히고, 남도 더럽힙니다. 우리 사회는 지양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휘말리지 않고, 부처님에게 가는 길 뚜렷하게 이 길이라고 목표를 두고 살아야 만이 혼란스러운 상호비방하고, 증오하는 그런 것을 지양시킬 수 있습니다.부처님의 공덕, 이것은 한도 끝도 없고, 우리 중생이 결국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번에 말씀드렸듯이, 지금 못 간다 하더라도, 몇 만 년 뒤에 윤회 가운데 헤매고 헤매다가도 성불을 해야 합니다. 빨리 못 가면 윤회를 더 많이 합니다. 우리 중생은 욕계, 색계, 무색계는 맨날 왔다 갔다 하는 어린 방황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방황만 해야 할 것인가? 비록 자기 생활 때문에, 어떤 직장에 있더라도, 부처님한테 지향하는 뚜렷한 길 그 길을 분명히 봐야 합니다.

 

분명히 봐두고서 그 길을 가는 그 방법을 나한테 맞는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따지기 좋아하고, 의심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화두를 해도 무방합니다. 싫어하는 사람은 역시, 천지 우주가 부처거니 내가 구차스럽게 의심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분들은 묵조 하는 명상이 필요한 것이고, 천지 우주는 부처님의 심심미묘深深微妙한 생명의 화현이거니, 부처님의 인격을 생각해야 하겠구나! 그런 분들은 염불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권해 드릴 것이 무엇인가 하니, 우리 마음은 비약합니다. 지금 우리가 현재 쓰는 마음이 제아무리 좁고, 비록 지금 연리에 비기면 조금도 못 피어나서 봉오리 끄트머리 같이 오므리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부처하고 직결되어 있습니다.

 

초점만 우리 범부심인 것인지, 저변은 부처님 마음입니다. 그러한 우리 스스로의 본래 마음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뚜렷이 보고서 나갈 때, 우리가 인격화 할 때, 거기에서 우리 마음의 비약이 있습니다. 우리 수행법은 비약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냥 따진다. 내가 부처니까 내가 마음 개발한다. 이렇게 만하면 우리 마음을 비약하기 어렵습니다. 허나 우리 마음자리 원래 자성 자리를 흠모하고 추구하는 그 마음 자세 그 마음으로 비약하는 것입니다.

 

정토삼부경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십념호왕생원十念呼往生願이라, 열 번만 부처님 이름을 지성으로 부르면 왕생이라, 극락세계 가는 정도로 마음을 깨달아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죄 많은 중생이, 어떻게 열 번만 불러서 될 것인가 하지만, 비록 지금 마음이 더럽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부처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 사무치면 사무친 순수한 마음 때문에 그리움 때문에 비약해서 부처와 맞닿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참배할 때나, 기도 모실 때는 우리 부처님을 간절히 흠모하는 그런 마음을 꼭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 마음이 비약돼서 범부가 성인 되는 길을, 첩경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성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은 인식을 가지고서, 내 힘은 제한되어 있다. 내 복이 이만큼밖에 없다 이와 같이 제한해버려서 자기를 비하할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는 간격도 뭣도 없이 바로 부처님의 무한 공덕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확고한 신념 가지고서 자기한테 맞는 공부를 간추려 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법문 이만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