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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63)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5.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3)

 

사경(寫經 : 경전 쓰기)은 병풍 서예와 다르오. 그 정신은 본받되, 그 기법은 꼭 다를 필요가 없소. 사경은 마치 진사(進士)가 조정에서 책문(策文)을 쓰듯이, 한 글자 한 획도 생략하거나 적당히 흘려서는 안 되오. 필체는 반드시 정자체(正字體 : 楷書)에 따라야 하며, 일반인들이 보통 쓰는 서간체는 절대 써서는 안 되오.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체로 사경하여 왔는데, 나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소.

 

요즘 사람들은 경전을 쓸 때 마음 내키는 대로 휘갈겨 쓰는데, 이는 사경이 아니오. 단지 경전 쓰는 것으로 습자(習字 : 서예 연습)를 삼거나, 아니면 자기 필적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 쓰는 것뿐이오. 그런 식으로 경전을 쓰더라도, 물론 전혀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미래세에 제도 될 수 있는 원인을 심는데 불과하오. 그러나 불경(不敬)과 오만의 죄도 또한 결코 작지 않음을 유념해야 하오.

 

그대가 쓴 법화경을 보니, 그 필법이 굳세고 힘이 넘치며 아주 빼어나, 경탄을 금할 수 없었소. 그러나 붓 놀림(用筆)이 아직도 문인(文人)의 습기(習氣 : 버릇)를 다 버리지는 못하였소. 또 속체(俗體)나 첩체(帖體) · 변체(變體) 등을 섞어 써, 통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오. 때문에 불법(佛法)의 도()를 널리 유통시

키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듯 하오.

 

또 고체(古體)를 고집하여 쓴 글자도 많았소. 예컨대, (마귀 마) 자를 (갈 마)로 쓰고, (걸 현) 자를 (고을 현)으로 썼으며, 마노차거(瑪瑙硨磲)瑪瑙車磲로 쓰고, 으로 쓴 것 등인데, 이는 시대에 어긋나는 폐단이 있소.

 

반드시 모두 고문(古文)에 따르겠다고 고집한다면, 지금 통용되는 정자체(正字體)를 거의 다 쓸 수 없을 것이오. 거의 모든 글자를 옛 글자체로 바꾸다 보면, 한 글자도 그대로 쓰기 어려울 것이오. 그래서 양인산(楊仁山)은 옛것에 집착하는 이를 비판하면서, “글자는 모름지기 시대에 따라야 하지, 꼭 옛날에 집착한단 말인가?” 고 반문하였소.

 

만약 반드시 고체를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사람 인()자와 들 입()자부터 고쳐 보는 게 어떻겠소? 옛날에 자는 로 썼고, 자는 으로 썼다오. 만약 두 글자를 고칠 수 없다면, 다른 글자들만 어찌 특별히 고칠 필요가 있단 말이오?

 

또 고체(古體)라는 것도, 맨 처음에 창힐(蒼頡)이 창제한 글자는 결코 아니오. 문자가 처음 만들어진 뒤, 몇 번이나 바뀌어 지금의 글자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없소. 그대가 옛것을 좋아하여 벌레 무늬와 새 글자(蟲文鳥書)를 정자체로 삼는다면, 나는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다면, 결국 아무 일 없어도 되는데, 공연히 일을 만드는 꼴이 되고, 별 공덕도 없으면서 헛수고만 할 것이오. 지금 시대에 순응하고 옛것을 따르지 않음은, 일찍이 성현들도 분명한 가르침을 남기셨소. 장거사(莊居士)가 경전의 유통(보급)에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인(文人)들의 고질 버릇들을 내버리고, 글자마다 시대에 따라 써야 할 것이오. 속자체(俗字體)나 약자체(略字體) 따위는 일체 쓰지 말고, 한 글자 한 획을 모두 법도에 맞게 써야 하리다.

 

경전 독송은 오직 공경을 다해야, 바야흐로 이익을 얻을 수 있소. 만약 공경스럽지 못하다면, 설령 이익을 얻더라도, 자구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익에 불과하게 되오. 업장이 소멸되고 지혜가 밝아져, 자기 마음을 확연히 깨닫는 커다란 이익은, 결단코 스쳐 지나가는 경전 읽기로 요행히 얻을 수 없소. 더구나 불경(不敬)과 태만의 허물만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짓게 되오.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고질병이라,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길이 탄식할 일이라오.

 

예불 의식은, 몹시 바쁜 사람의 경우, 특별히 정해 둘 필요가 없소. 다만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염송하면서, 몸으로 부처님 발아래 예배드리면 충분하오. 부처님이 바로 앞에 나타나 계신 것처럼 정성만 다하면 되오.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에 예배 드릴 수 없고, 총림(叢林)의 선지식들을 찾아가 친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무슨 아쉬움이 있겠소? 단지 불상을 보고도 진짜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불경과 조사 어록을 보면서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직접 눈앞에서 자기에게 설법해 주신다고 생각하면서, 소홀함이나 태만함 없이 공경과 정성만 다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오. 그러면 온종일 부처님과 보살 · 조사 ·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설법을 듣는 셈이니, 사리나 총림을 따로 말할 필요가 있겠소?

 

보살의 명호가 인쇄된 베를 예배용 방석에 쓰는 것도 이미 지극한 모독죄가 되는데, 하물며 좌선용 방석에 쓴단 말이오. 내가 광서(光緖) 20(1894) 보타산(普陀山)에서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이듬해 육왕(育王)에서 다시 보고는 몹시 괴이하게 여겨, 사리전(舍利殿) 전주(殿主)에게 말을 꺼냈소. 그랬더니 그는 이것이 영파(寧波)의 풍속입니다.” 고 답해 왔소.

 

나는 이러한 잘못된 악습을 뜯어 고칠 힘이 없어 몹시 부끄러웠소. 만약 내가 한 지방의 주인이 된다면, 반드시 이러한 행위의 잘못을 널리 크게 알리겠소. 그래서 신심 있는 불자들이 무지로 인해 손해를 당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 보도록 하고 싶소.

 

크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설하신 일체의 존귀한 대승 경전은, 현교(顯敎)나 밀교(密敎)를 막론하고, 모두 그 근본 도리(道理)가 유심(唯心)에 바탕하고 실상(實相)에 부합하오. 그래서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가 다하도록 바뀌지 아니하고, 십 법계가 모두 함께 준수한다오. 원시 근본으로 되돌아가니, 모든 부처님을 인도하는 스승이시고; 고통을 제거하고 즐거움을 주니, 중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