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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62)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5.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2)

 

 

() 나라 때 설교(雪嶠) () 대사는 영파부(寧波府) 소재지 사람으로,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다오. 중년에야 출가하여 아주 고생하며 힘써 참구 했다오. 남들이 참을 수 없는 걸 죄다 참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도 모두 했다오. 그 고행은 정말 어지간한 수행자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오래 지속하여 결국 확철대오 하였다오.

 

그 뒤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말은 모두 선기(禪機)에 미묘하게 들어맞는 설법이 되었소. 그때만 해도 아직 글자를 모르고 쓸 줄도 몰랐는데, 한참 지나 글자를 저절로 알게 되었고, 다시 한참 뒤에는 손에 붓을 잡고 종횡무진 글씨를 써 내려가는 대서예가 명필이 되었다오.

 

이러한 모든 이익은 한결같이, 분별심 없이 오롯이 정신 집중하여 참구하는 수행 안에서 나온 것들이오. 경전을 보고 독송하는 공부도, 마땅히 이러한 방법을 최고 모범으로 삼아야 하오.

 

경전을 볼 때는 절대로 분별심을 일으켜서는 안 되오. 그러면 자연히 잡념 망상이 스러지고 천진(天眞)스러움이 드러나게 되오. 만약 경전 내용의 이치(의미)를 연구하거나 주석 해석을 뒤적여 보고 싶거든, 마땅히 별도의 시간을 내서 연구에만 종사하는 게 좋겠소.

 

물론 연구할 때는 독송할 때만큼 엄숙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렇지만 전혀 공경스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오. 다만 독송할 때에 비해서 다소 편안하고 자유스러울 수 있다는 의미라오. 아직 업장이 해소되고 지혜가 밝아지기 이전에는, 모름지기 독송을 위주로 삼으시오. 연구는 대략 간단히 수반하는 정도로 하는 게 좋소.

 

그렇지 않으면 온 종일, 그리고 한 평생 단지 연구에만 종사해도 끝이 없소. 설령 그렇게 연구하여 구름을 헤치고 달을 본다고 할지라도, 이는 방문을 열고 먼 산을 한 번 쳐다보는 것과 같아서, 단지 입만 살아 있는 꼴(口頭活計 : 口頭禪과 비슷한 의미)이 되고 마오. 마음과 성품 수행이나 생사 해탈 같은 근본 문제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게 되오. 그래서 섣달 그믐날(임종의 상징 비유)이 들이닥치면, 터럭 끝만큼도 쓸모가 없는 물건으로 판명 날 게 틀림없소.

 

만약 앞에서 말한 대로만 경전을 독송한다면, 반드시 업장이 소멸되고 지혜가 밝아지며, 세 가지 감정 견해(三種情見)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게 텅 비어 버릴 것이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독송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감정 견해가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거니와, 숙세의 업력이 발동하여 사견(邪見)을 일으키고, 인과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면 부정하게 될지도 모르오.

 

나아가 사음 · 살해 · 절도 따위의 온갖 흉악한 번뇌 죄업이 불길처럼 치열하게 솟아 이어지는데도, 오히려 대승 수행인은 일체 걸림이 없는 법이라고 스스로 강변할 것이오. 마침내는 마음이 평안하면 어찌 계율을 지키는 수고로움이 있겠는가?” 라는 육조 혜능 대사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면서, 모든 계율은 깨뜨리면서도 깨뜨림이 없어야 비로소 진짜 지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할 것이오.

 

수행인이 진실한 정법을 얻기란 정말로 몹시 어렵소. 그래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정토법문을 주장하고 권하신 것이오. 부처님의 자비력을 받아서, 업력이 발동하지 못하도록 제압하고 조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마땅히 염불을 주요 수행으로 삼고, 경전 독송을 보조 수행으로 곁들여야 하겠소.

 

무릇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경전과 불상뿐이오. 그래서 만약 흙이나 나무 · 금속 · 물감으로 조성한 불상을 진짜 부처님으로 여기고 받든다면, 업장을 소멸시키고 번뇌와 미혹도 깨뜨리며, 삼매를 얻어 생사윤회도 벗어날 수가 있다오. 그러나 만약 흙이나 나무 · 금속 · 물감 따위로 간주한다면, 그저 평범한 흙 · 나무 · 금속 · 물감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오. 문제는 단순한 흙 · 나무 · 금속 · 물감 덩어리라면 모독해도 허물이 없지만, · 나무 · 금속 · 물감으로 조성한 불상을 모독하면, 그 죄가 하늘을 가득 채운다는 점에 있소.

 

그리고 불경이나 조사 어록을 독송할 때도, 바로 눈앞에 부처나 조사들이 나타나 나에게 친히 설법해 주시는 것처럼 여기고, 조금도 소홀함이나 태만함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정말 이와 같이 행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반드시 구품연화 위에 우뚝 올라, 진리를 철두철미하게 증득할 것이라고 감히 말하겠소.

 

그렇지 않다면, 이는 문자 유희(文字遊戲 : 글자놀음, 말 장난)의 법문일 따름이며, 그로부터 얻는 이익도 단지 박학다식에 불과하게 되오. 말하기는 청산유수처럼 또렷하고 명료한데, 조금도 진실로 받아 쓰지(受用)는 못하오. 기러길에서 주워 듣고 길거리에서 지껄이는 것을 능사로 삼는 자들이오.

 

옛 사람들은 삼보(三寶)에 대해서 모두 진실한 공경심을 품었으며, 결코 입으로 빈말이나 그럴듯하게 지껄이지는 않았소.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입으로조차 굽힐 굴() 자 하나 말하려고 하지 않는구려. 하물며 몸소 굽혀 실행하기를 기대하겠소?

 

나는 최근 손가락을 찔러 흘러나오는 필로 경전을 쓰는 사람을 보았는데, 단지 업장만 지을 뿐 공경심이라곤 전혀 없었소. 피를 내어 경전을 쓰려면, 한 번에 상당히 많은 피를 흘려야 하오. 그런데 봄, 가을에는 이삼일 지나면 냄새가 나고, 여름 같으면 반나절만 지나면 금방 악취가 나기 마련이오.

 

또 피가 말라붙으면, 글씨를 쓸 때 물로 다시 개어 써야 하오. 그렇게 쓴 글씨는 거칠기 짝이 없어, 전혀 공경스럽지 못한 것이오. 이는 혈서(血書)로 자신의 의지와 정성을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단지 자기가 피로 경전을 쓸 정도로 진실한 수행을 하고 있다는, 헛된 명성을 널리 떨치려고 하는 과시욕의 소치로 보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