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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61)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5.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1)

 

정성공경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말이지만, 또한 온 세상 사람이 잘 (행할줄) 모르는 길()이기도 하오. 나는 죄업이 몹시 무거워서, 그 죄업을 해소하고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려고, 고승 대덕들의 훌륭한 수행 모범을 무던히도 찾아보았소. 그래서 비로소 정성과 공경이야말로, 정말 평범을 초월하여 성인에 들어가고, 생사윤회를 해탈할 수 있는 지극히 미묘한 비결임을 알게 되었다오. 그 뒤로 나는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이것을 간곡히 말해 주고 있소.

 

경전 공부(閱經), 만약 법사(法師)가 되어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한다면, 먼저 경전 원문(經文)을 읽은 뒤 주석과 해설(註疏)을 연구해야 하오. 그래서 정신력이 충분히 넘치고 견해와 안목이 남달리 뛰어나지 않으면, 마음과 정력만 헛되이 소모하고 세월만 낭비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오.

 

그러나 만약 분수에 맞추어 몸소 경전에서 진실한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지성스럽고 간절하며 몸 · · 생각의 삼업을 청정히 가다듬어야 하오. 혹은 먼저 한참 동안 단정히 앉아,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한 다음,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낭송이나 묵송한다든지, 아니면 먼저 부처님께 예배 드린 뒤 잠시 단정히 앉아 있다가 경전을 펼치든, 순서야 모두 괜찮소.

 

경전을 독송할 때는, 반드시 몸을 단정히 앉은 다음, 성인(불보살)의 얼굴을 직접 대하고 자상한 가르침의 목소리를 듣듯이 해야 하오. 혹시라도 감히 한순간 권태나 시비 분별의 생각도 일으켜서는 안 되오.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 내려가되, 문자든 의미든 전혀 따지거나 음미하지 않는 거요.

 

이와 같이 경전을 독송하면,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곧 두 가지 텅빈 공(二空)의 이치를 깨닫고, 실상법(實相法)을 증득할 수 있소. 또 근기가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업장을 소멸시키고 복과 지혜를 증진시키는 실익을 얻게 되오.

 

육조(六祖) 혜능(惠能) 대사가 단지 금강경을 보기만 하면, 곧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볼 수 있다(但看金剛經, 卽能明心見性).” 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이 보는 방법을 가리킬 따름이오. 그래서 단지()’ 라고 말씀하신 것이오. 이와 같이 보기만 한다면, 모든 대승 경전이 다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게 해줄 것이오. 어찌 꼭 금강경만 그러하겠소?

 

만약 이 구절은 무슨 의미이고, 이 단락은 무슨 취지라고 해석하면서, 계속 분별만 해보시오. 이는 완전히 범부의 속된 감정과 망상으로 추측하고 헤아리는 짓에 불과하오. 어떻게 부처님의 본래 뜻에 그윽히 부합하고, 경전의 본래 취지를 원만히 깨달을 수 있겠소? 하물며 업장이 소멸되고 복과 지혜가 높이 증가되길 바랄 수 있겠소?

 

만약 공경할 줄 안다면, 독송 자체로 착한 뿌리(善根)를 다소나마 심을 수 있다오. 하지만 세간의 일반 서생들이 책 읽듯 대한다면, 외설과 태만의 죄가 산처럼 높아지고 연못처럼 깊어질 것이오. 바로 착한 원인(동기)으로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오.

 

옛사람들은 경전 듣기(聽經)에 오로지 치중했다오. 마음에 분별을 일으키길 수 없는 장점 때문이었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경전을 독송하면, 다른 사람이 옆에서 마음을 집중해서 잘 듣는 방법이오.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또렷하고 분명히 듣도록 마음을 오롯이 집중시키고, 바깥 사물의 소리나 빛은 일체 끼어들지 못하게 것이오. 만약 조금이라도 느슨해지거나 한눈팔면, 금방 끊어져 경전의 문장이 죽 관통될 수 없소. 때문에 고도의 정신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이라오.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은 눈으로 문장을 따라가며 보기 때문에, 마음을 크게 가다듬지 않아도 대강 뚜렷하게 독송할 수가 있소. 그러나 듣는 사람은 오직 소리에만 의탁하기 때문에, 한순간만 정신을 놓거나 딴전 피우면, 곧 문맥이 끊어져 연결되지 못하게 되오.

 

만약 이와 같이만 듣는다면, 지성으로 공경스럽게 독송하는 공덕과 같게 되오. 그리고 독송자가 별로 공경스럽지 못하게 독송한다면, 그 공덕이 오히려 공경스럽게 듣는 자보다 못하게 될 것이오. 요즘 사람들은 불경 보기를 마치 헌 종이처럼 여기고, 경전 오려 놓는 책상 위에도 온갖 잡다한 물건을 경전과 함께 어지럽게 쌓아 놓는 경우가 많소. 경전을 독송할 때도 손도 씻지 않고, 입속도 헹구지 않으며, 더러 몸을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고, 더러 발을 높이 치켜 올리기도 하오. 그 밖의 온갖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경전을 독송하여 죄업을 소멸하고 복을 얻으려고 하는구려. 아마도 불법을 파괴 · 소멸시키려는 마왕(魔王)이나 이를 기뻐하고 찬탄하면서, “아주 활기 발랄하고 융통성 있으며 원만하여, 대승불교의 집착 없는 미묘한 도에 딱 부합한다.” 고 증명할 것이오. 그러나 진실로 수행하는 불자가 이를 보면, 혼자 암담하니 마음만 상하여 눈물을 흘리며, 악마의 권속들이 창궐함에 어찌할 줄 모르고 탄식할 게 틀림없소.

 

지혜로운 자는 경전을 독송하여 활연히 크게 깨닫고 고요히 선정에 들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지를 어떻게 분별심으로 얻을 수 있겠소? 어떤 고승 대덕은 법화경을 쓰는데(寫經), 어찌나 한 마음으로 오롯이 정신 집중했던지, 모든 분별 감정이 텅 비어 버려,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계속 써 내려갔다오. 한참 뒤 시자(侍子)가 들어와 보고는 깜짝 놀라며,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 어떻게 글씨는 쓰십니까?”라고 묻자, 그때서야 손을 펴 보았으나, 손바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고 전하오.

 

이처럼 경전을 보고 쓰면, 참선으로 화두를 드는 것이나 주문을 외고 염불하는 수행과 무엇이 다르겠소? 모두 한결같이 한 마음으로 뜻을 집중하는 것이라오. 공부를 지송하다 보면, 저절로 확 크게 트이는 날이 있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