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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60)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4. 생사(生死) 해탈을 위한 보리심(9)

 

무릇 태어남과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중대한 일이오. 그래서 이 한순간만큼은 가장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마땅히 한 몸과 같은 자비심(同體之悲心)으로, 죽는 이가 극락왕생의 대업을 원만히 성취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하오. 옛사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소.

 

我見他人死 내가 다른 사람 죽는 걸 보면,

我心熱如火 내 마음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네.

不是熱他人 다른 사람 때문에 뜨거운게 아니라,

看看輪到我 곧 내 차례가 돌아올 걸 생각해 보니.

 

인연(因緣)과 그에 대한 과보(果報)의 감응(感應), 한 치도 어그러짐이 없소. 그래서 스스로 이롭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남을 이롭게 해주어야 하오. 이 글을 적어 동포에게 널리 알리노니, 모든 사람이 각자 주의하고 명심하여 실행하길 간절히 기원하오.

 

5.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

 

(: 진리)에 들어가는 문은 많소. 사람들의 뜻과 취향이 일정한 법이 없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모두에게 공통되는 일정한 것이 있으니, 바로 정성()’공경(恭敬)’ 이오. 이 두 가지는 미래세가 다하도록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도, 결코 바꿀 수 없소. 우리 범부 중생이 업장을 단박에 해소하여 한시바삐 무생법인을 증득하기 바라면서도, 이 두 가지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나무가 뿌리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고, 새가 날개도 없이 날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소. 가능하겠소?

 

세속의 글공부(讀書)는 경외(敬畏)심이 전혀 없소. 새벽에 일어나 세수와 양치질도 하지 않고, 측간(화장실)에 다녀와서는 손도 안 씻는 이가 있소. 더러 책을 엉덩이 깔개(방석)나 베개로 쓰기도 하오. 밤에 누워서 볼 때는 속옷과 함께 뒹굴고, 책상에 앉아서 볼 때도 온갖 잡동사니 물건과 뒤섞여 있기 일쑤요.

 

성현의 말씀 적힌 책(경전)을 그저 못 쓰게 된 휴지 조각과 같이 여겨, 조금의 개의(介意)치 않고, 공경하는 낯빛도 전혀 없소. 심지어 선비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그림 그리는 책(연습장)이 모두 경전이고, 사대부 집안에서 머슴들이 물건 닦는 걸레가 모두 책 종이라오.

 

책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온갖 외설과 모독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소. 폐단이 하도 오래 쌓여 와서, 그 악습을 잘 살필 줄도 모른다오. 그래서 책에 관한 화복(禍福)을 특별히 지적하지 않으면, 대부분 무심코 외설과 모독을 범할 게 틀림없소. 책 내용을 읽어 이익을 얻기도 전에, 책을 함부로 대하는 불경죄(不敬罪)부터 얻을 게 뻔하오. 이처럼 무지(無知)로 범하는 죄가 불쌍하거든, 미리 잘 일깨우고 타일러야 할 것이오.

 

염불 법문은 지극히 간단하고 평이하면서도, 지극히 넓고 큰 법이라오. 반드시 지극히 간절하고 지성(志誠)스러워야, 바야흐로 부처님과 감응의 길이 트여 진실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오. 만약 조금도 정성과 공경심이 없이 게으르고 싫증 나게 염불한다면, 비록 먼 미래의 원인을 씨 뿌리기는 하겠지만, 태만과 불경의 죄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오. 설사 인간이나 천상에 다시 날 수야 있겠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연지해회(蓮池海會)에 동참하기는 결단코 어렵소.

 

그리고 불상(佛像)은 마땅히 진짜 부처님으로 모셔야 하며, 단지 흙이나 구리, 쇠로 빚고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오. 또 경전(經典)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자, 여래의 법신사리(法身舍利)이므로, 역시 진짜 부처님으로 대해야 하오. 결코 종이 위에 인쇄한 먹물(잉크)자국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오.

 

경전과 불상을 대할 때는, 마치 충신(忠臣)이 성왕(聖王)을 받들어 모시듯 하고, 효자가 부모님의 유훈(遺訓)을 읽는 듯이, 공경과 정성을 다해야 하오. 이렇게만 한다면, 소멸되지 않을 업장이 없으며, 복록과 지혜가 부족할 리 없을 것이오.

 

요즘 사대부(지식인) 가운데 불교를 공부하는 자가 상당히 많소. 그러나 대부분 경전의 문장을 읽고 그 의미만 이해하여, 그걸 주둥아리(口頭)로 지껄인 화젯거리나 삼는 듯하오. 아주 해박하고 통달한 대가의 명예나 얻으려고 말이오. 하지만 공경과 지성으로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는, 정말로 찾아보기도 힘든 형편이오.

 

나는 늘상 불법에서 진실한 이익을 얻고 싶거든, 모름지기 공경 가운데서 찾으시오.” 라고 말하오. 한 푼의 공경을 지니면, 한 푼의 죄업이 소멸되고, 한 푼의 복덕과 지혜가 증가하며; 열 푼의 공경을 지니면, 열 푼의 죄업이 소멸되고, 열 푼의 복덕과 지혜가 증가하기 때문이오. 물론 공경심이 전혀 없이 외설과 교만만 부린다면, 죄업만 더욱 늘어나고 복과 지혜는 더욱 줄어들 것이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예불이나 경전 독송, 주문(진언), 염불 등의 각종 수행은, 모름지기 모두 정성과 공경을 위주로 해야 하오. 경전에서 설한 공덕이 설령 범부 중생의 지위에서 원만히 얻어질 수 없을지라도, 만약 정성과 공경만 지극하다면, 그로 말미암아 얻는 공덕만도 이미 생각하고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다오.

 

그러나 정성과 공경이 없다면, 배우가 노래 부르고 연극하는 것과 같을 뿐이오. 배우의 희로애락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허위와 가식에 속하지 않소? 마찬가지로 정성과 공경이 없으면, 설령 공덕을 쌓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바보스런 복덕(人天癡福)에 불과하게 되오. 이 바보스런 복덕은 반드시 악업을 짓는 원인이 되어, 장래 그칠 기약 없는 고통의 씨를 뿌리게 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