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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58)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4. 생사(生死) 해탈을 위한 보리심(7)

 

3) 임종이 몹시 중요하고 절실함을 알림

 

일체 중생을 위해 회향할 수 있다면, 불보살의 서원과 서로 부합하게 되오. 마치 한 방울의 물이 큰 바다에 흘러 들어가면, 곧장 큰 바다와 똑같은 깊이와 넓이를 지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요. 그러나 바다에 흘러들어 가지 못한다면, 한 방울의 물은 말할 것도 없고, 황하나 양자강조차도 바다와는 천양지차가 날 수밖에 없소.

 

그래서 무릇 부모나 일체 중생에게 베푸는 일이, 모두 결국 자기 복덕을 스스로 쌓는 것임을 알게 되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효심이 있는 사람은 효심이 더욱 증대할 것이고, 효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효심을 일으켜야 하리다. 스님을 초청해 49재 염불을 올려드린다면 아주 좋겠소. 물론 형제자매 가족 모두 함께 따라 염불해야 하오. 부녀자들은 꼭 스님 뒤에 따라 할 필요가 없소. 여러 날 계속 염불하다 보면 사람 감정이 친숙해져, 혹시라도 남들에게 오해나 의심을 살까 염려되기 때문이오. 부녀자들은 따로 한 곳을 마련하거나, 또는 중간에 칸막이(커튼)를 치고, 각각 다른 문으로 출입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소. 이 방법이 도시나 농촌 모두에 통용될 수 있는 모범적인 의식일 듯하오. 아무 기주노가 한계도 없이 산만하게 치르다가, 다른 사람들도 보고 본받는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이 생길게 뻔하기 때문이오. 예로부터 예법(禮法)을 처음 제정하는 사람은 물론 최고 최상의 성현이지만, 그 예법을 지켜야 할 제일 최하의 중생들까지 모두 포함시켜 배려하여야 폐단이 없다오.

 

질병이 위독해져 죽음이 임박하거든, 일체 세상사와 자기의 육신까지 모두 온통 놓아버리시오. 그리고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텅 빈 마음으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성스러운 나무아미타불명호를 염송하시오.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하며, 염불로 아미타불의 영접을 구한다는 일념 이외에는, 어떠한 잡념 망상도 일으키지 않아야 하오. 이와 같이만 한다면, 수명이 이미 다한 경우 틀림없이 극락왕생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것이오. 그리고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는 경우에는, 틀림없이 업장이 해소되어 질병이 낫고 지혜와 복덕이 높아질 것이오.

 

그렇지 않고 어리석게도 오직 병 낫기만 바란다면, 병이 빨리 낫기는커녕, 오히려 병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오. 또 수명이 다했다면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업장에 끌려 사바고해를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오. 홍진의 수고 속에서 불사(佛事)를 행하는 공덕이, 보통의 불사보다 천만 배 수승하다오.

 

4) 임종에 갖추어야 할 지혜로운 배와 노(臨終舟楫)

 

부처님께서 입적한 승려를 화장하도록 규정하신 것은, 본디 그로 하여금 산산이 부서질 가짜 형체를 떠나, 진실하고 영원한 법신(法身)을 증득(證得)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소.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비(茶毗)의 규정을 세우신 이후, 승려 대중은 이를 향상적인 법도로 받들어 지켜 왔소.

 

그러나 법과 도가 쇠퇴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이 생겨나서, 지금 불자들은 경솔하게도 화장하는 일을 부처님의 법제에 따르지 않고 있소. 병든 이가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임종 때에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움직여 감실(龕室: 본래 탑 아래의 방, 불상을 모셔두는 석실인데, 여기서는 시신을 안장하는 화장용 坐棺을 가리킴)에 하루 이틀 넣어 두었다가 화장을 하니, 정말로 부처님 법에 크게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소.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덟 가지 인식(八識)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곧 지식(智識 : 지각)이오. 앞의 다섯 인식(前五識)은 눈()()()()()이고, 6식은 의식(: )이오. 7식은 말나식(末那識)으로 전송식(傳送識)이라고도 하고, 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또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부르오.

 

무릇 사람이 생겨날 때는, 8식이 가장 먼저 오고, 765식이 차례로 뒤따로 온다오. 그리고 죽을 때는, 이 제8식이 가장 뒤늦게 떠나고, 나머지 인식은 역순으로 차례대로 떠나간다오. 무릇 제8식은 곧 사람의 영적 인식(靈識)으로,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영혼(靈魂)이라오.

 

그런데 이 제8식은 신령스러워,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수태(受胎)될 때에, 맨 먼저 찾아온다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은 태아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라오.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은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기를 기다려, 따뜻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 비로소 이 제8식이 떠나간다오. 8식이 떠나간 다음에는 터럭 끝만큼도 지각(知覺)이 없소.

 

그래서 만약 몸에 한 곳이라도 따뜻한 기운이 조금만 있다면, 8식은 아직 떠나가지 않을 것이오. 이때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그 고통을 알아 느끼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히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기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되오. 만약 조금이라도 만지고 손댄다면, 그때 고통은 가장 참기 어렵다오. 단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라오.

 

불경을 찾아보면, 목숨()과 따뜻한 기운()과 인식() 세 가지는,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소. 만약 사람 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인식도 존재한다는 뜻이고, 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아직 끝나지 않는 것이오. 예부터 죽었다가 사흘 또는 닷새나 지나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많은데, 역대 기록을 찾아보면 하나하나 상세히 확인할 수 있소.

 

유교에서도 죽은 뒤 사흘 만에 대렴(大殮 : 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덮어 못 박는 일)의 예법을 행하는데, 이는 가족들이 사모와 비애의 감정으로, 만에 하나 혹시라도 살아나지 않을까 바라는 마음을 배려하기 때문이오. 우리 불교의 승가에서는, 비록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몹시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소. 부랴부랴 움직이고 옮기거나 변화시킨다면, 자비심은 과연 어디에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