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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50)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21)

 

4) 각 수행 방법에 대한 평가

 

정토법문은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를 수만 있으면,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하오.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실다운 수행을 한다면, 틀림없이 왕생하여 극락세계의 대중이 될 것이오. 하물며 이처럼 엄청난 재난이 눈앞에 닥친 위험천만한 말법 시기에, 유한한 정신력으로 그리 급하지도 않는 법문과 사무에 너저분히 손대어, 박통(博通)한 대가라는 명성이나 듣고 체면이나 세우려고 든단 말이오? 그러다가 자신의 전념 수행은 결국 어물쩡하니 흐리멍텅해지고 말텐데....

 

보현보살의 십원(十願)과 문수보살의 일행(一行)을 전념으로 수행할 수만 있다면, 다른 경론(經論)을 전혀 꿰뚫지 못하더라도, 사바 고해의 울타리를 단박에 벗어나 연지해회(蓮池海會)에 참여할 수 있소. 그러나 여기 부처님 힘에 의지하는 법문을 진실하게 믿지 못하거나, 확고히 의지하지 못한다면, 설사 선종과 교법에 심오하게 통달했을지라도, 단지 구두삼매(口頭三昧)에 지나지 않게 되오. 그런 구두삼매로 생사윤회를 벗어나려고 바라는 것은, 정말로 떡을 그려 쳐다보고 굶주림을 채우려는 짓과 똑같이 어리석기 짝이 없소. 그런 사람은 반드시 중도에 몹시 후회할 것이나, 그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오. 지금 세상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는 판인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세월(수명)을 가지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낭비할 수 있겠소?

 

옛 사람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소.

적지만 알찬 게, 많지만 허약한 것보다 낫다.”

큰 기교가 작은 졸렬함만 못하다.”

한 길을 말해도 한 치를 몸소 나아가는 것만 못하다.”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이들은, 이 말들을 잘 생각하고 음미해보기 바라오.

정토법문은 믿음()과 발원()과 염불수행()의 세 가지를 기본 요건으로 삼소. 오직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함께 갖춘 경우에만, 비로소 독실한 염불수행이 있게 되오. 재앙과 해악이 급박하게 닥치면(발 등에 불이 떨어지면)정성스럽고 간절하다가도, 별일 없이 평안해지면 그만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범부 중생의 공통된 병폐라오.

 

그렇지만 지금 시대 상황은, 마치 높이 쌓아 올린 땔깜 위에 편안히 누워 있는 꼴과 같소. 아래에서 이미 불이 붙어 맹렬히 타오르고 있는데, 아직 맨위에 누워 있는 우리 몸까지 아직 타오르지 않은 것뿐이오. 눈 깜빡할 사이에 온 장작더미가 치열한 불길에 휩싸이면, 온 주변 세계에 달아날 곳이 없는 것이오. 그런데도 아직까지 유유자적하니 세월이나 보내면서 나무아미타불명호 한 구절에 전념으로 매달려 구제를 청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지견이 얼마나 짧고 얕겠소?

 

숙세에 혜근을 심어 금생에 정토법문을 만난 인연만 해도, 정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만난 법문에, 정신 집중하여 몸소 증득(결정코 극락왕생)까지 하고 싶지 않단 말이오? 이는 마치 정성 들여 진흙으로 빚은 그릇을, 유약을 발라 굽기 전에 비를 맞혀, 그만 흐물흐물 풀어져 버리는 것곽 같게 되오.

 

세월은 몹시 빠른데, 사람 목숨이 얼마나 길겠소? 날숨 한 번 다시 들어오지 않으면, 곧 내세로 넘어가오. 그러면 아직 도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은, 설령 깨달았더라도 다시 미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만 명 가운데 거의 만이 다 되고, 깨달음 위에다 깨달음을 덧보태 가는 경우는 억 명 가운데 한둘도 없다오. 더할 나위 없는 법의 그릇을 차마 부서지도록 내버려 두어, 내생의 비를 맞고 다시 진흙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싶단 말이오?

 

우리들이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면, 마땅히 부처님의 행실(수행)을 본받아야 할 것이오. 설령 부처님처럼 활연히 무명을 깨뜨리고, 단박에 불성의 본바탕을 회복하여 곧장 미묘한 깨달음의 과보까지 얻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찌하여 세 마음(三心 : 信願行을 가리키는 듯)을 두루 갖추어 정토법문을 독실하게 닦아가지도 않는단 말이오?

 

금생의 육신에서 번뇌와 미혹을 끊어버리고, 이 마음의식(心識)을 연화세계에 기탁하여, 아미타불의 제자와 거룩한 보살 대중의 도반이 된 뒤, 고요한 열반에 안주하여 시방 불국토를 다니면서, 위로 불도를 닦아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고 싶지는 않소?

 

자신이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서, 성현의 경지는 위로 높이 내밀쳐 버리고, 스스로 어리석은 범부라고 자처할 셈이오? 반평생의 수행이 힘들고 수고로울까봐 두려워, 영겁토록 윤회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릴 고초를 달게 받아들일 작정이오? 자기 옷 속에 달려 있는 구슬을 잊은 채 굶주리고, 보물 산에 올랐다가 그냥 빈 손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 신통 상호(相互)가 두루 갖추어진 미묘한 진여성품(妙眞如性)을 가지고, 끝없는 생사 윤회 속에서 번뇌 업장의 허망한 지극 고통을 당하는 것이, 억울하고 분하지도 아니하오? 어떻게 정신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항상 승진을 싫어하고 후퇴 타락을 즐거워할 수 있소? 살아생전에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나 시체 노릇을 하다가, 죽은 뒤 초목과 함께 썩어 문드러지고 싶단 말이오?

 

이러한 중생들을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가련하고 불쌍한 자라고 일컬으셨다오. 우리 모두 각자 잘 생각하고 힘써 닦아야 할 것이오.

 

요즘처럼 위험천만한 세상에는, 흉금(가슴)과 안목(시야)을 활짝 열어 놓고, 정토 염불수행에 힘쓰는 것이 좋겠소. 모든 길흉화복일랑 전혀 따지거나 신경 쓰지 말고, 인연에 따라 변화 적응하면 그만이오. 설령 막대한 재앙이 눈 앞에 닥친다고 할지라도, 나와 똑같이 재앙을 당한 사람이 몇 천만억이나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시오.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아직 믿고 의지할 만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소? 염불과 관세음보살 염송으로 두려움 없는 밑바탕을 삼는 거요.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미리 두려워하거나 지레 겁먹지만 않는다면, 질병도 절로 낫고 몸도 자연히 안락해질 것이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위험한 경계가 닥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위험 가운데 빠져 버리면, 비록 불보살이라도 구제할 수가 없게 되오. 그래서 군자는 평소 환난에 처한 마음가짐으로 환난에 대처하기 때문에, 어디에 들어가든 자유 자재로울 수 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