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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48)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20)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믿음과 발원 없는 염불이, 비록 화두를 붙잡는 참선보다는 공덕이 크지만, 스스로 미혹을 끊지 못하면 자기 힘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오.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부처님의 가피와 영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힘에만 의지하는 일반 보통 법문과 같기 때문이오. 그렇게 하여 도를 증득하기는 정말로 몹시 어렵소.

 

그리고 믿음과 발원으로 극락왕생을 구하는 수행이 비천하고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지 마시오. 화장해회(華藏海會)의 보살들이 한결같이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왕생을 회향 기도하는 것이, 화엄경의 맨 마지막 대단원을 장식하지 않소? 게다가 정토의 모든 보살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가르침도, 모두 믿음과 발원으로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일깨우지 않소?

 

관상염불법이 비록 16가지나 되지만, 이를 닦고 익히는 사람은 마땅히 닦기 쉬운 방법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오. 여래의 백호관(白毫觀)이나 열세 번째의 잡상관(雜想觀)을 행하는 게 좋을 듯하오. 구품관(九品觀)은 수행자가 왕생하는 전인(前因 : 전제 조건)과 후과(後果 : 후속 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뿐이오. 그러니 그러한 사실만 알면 그만이고, 이를 특별히 독립된 관상법으로 행할 필요는 없소.

 

관상의 이치는 잘 알지 못하면 안 되고, 관상의 일(수행)은 천천히 하는 편이 낫소. 만약 이치의 길을 분명히 알지도 못하고 관사의 경계도 뚜렷하지 못하면서, 조금한 마음과 붕 뜬 기분으로 관상법을 수행한다면, 마장(魔障)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오. 설사 관상의 경계가 앞에 잘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만약 마음속에 함부로 기뻐하는 염두가 일어나면, 그 기쁨이 도리어 장애로 변하여, 지금까지의 공부를 다시 후퇴시킬 수도 있다오.

 

그래서 능엄경(楞嚴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

성인이라는 마음을 품지 않아야, 정말 훌륭한 경계라 부른다. 만약 성인이라는 생각을 하면, 곧장 뭇 사악의 침공을 받는다.”

 

한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로 천 번 만 번 확실한 수행을 삼기를 바라오. 지극한 마음이 하나로 집중될 때, 청정한 경계(정토)가 저절로 앞에 나타날 것이오. 법신(法身)이 관상에 들면, 그 이치는 실로 몹시 심오함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마음이 부처라는 일은, 본디 평상(平常)스럽소. 평상스러우면서도 범상(凡常)치 않고, 몹시 심오하면서도 결코 깊지 않다오.

 

13관법에서, 여래께서 특별히 근기가 열악한 중생들을 위해 방편법문을 얼어 놓으셨소. 16(4.8미터 정도) 이나 8(2.4미터 정도) 높이의 작은 아미타불상을 관상하는 법이 그것이오. 또 마지막 제16관법은 죄악과 업장이 몹시 무거운 자들에게, 곧장 아미타불 명호를 불러 왕생하도록 알려주고 있소. 그래서 형상은 비록 크고 작을지라도 부처님은 본래 하나이고, 관상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명호만 염송해도 곧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오.

 

이러한 가르침만 잘 생각해 보아도,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이 최고 제일임을 알 수 있소. 말법 시대 수행인들이 현생에 결정코 극락 왕생하고 싶다면, 바로 이 명호 지송법을 보배로 삼지 않을 수 있겠소?

 

요즘 사람들이 거의 태반이 체면을 차리기 위해 허공에 누각을 지으려고 하오. 한 푼이나 반 푼밖에 없으면서도, 백천만 푼을 가지고 있다고 허풍 떨기 일쑤요. 예컨대, 어떤 거사의 수행 기록은 그 경계가 모두 손과 붓으로 쓴 것이지, 마음 바탕에서 체험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은 정말 거짓을 꾸미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이런 버릇이 있다면, 그 허물은 결코 작지 않음을 명심하시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근본 5계에 포함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함이오. 더러 보고도 안 보았다고 말하거나, 못보고도 보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거짓말에 속하오. 그런데 만약 허공에 누각을 짓고 수승한 경계라고 망령되이 말한다면, 아주 큰 거짓말로 계율을 범하는 것이오.(大妄語戒 : 청화큰스님께서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말하는 죄가 가장 중한 죄라고 생전 법문에서도 말씀하셨음) 체험하지 못하고서 체험했다고 말하거나, 증득하지 못하고서 증득했다고 말하면, 그 죄가 살인이나 강도 · 간음보다 백천만억 배 이상 더 크고 무겁다오. 그런 사람이 만약 힘써 참회하지 않다가, 날숨 한번 들어오지 못해 죽으면, 불법을 파괴하고 어지럽히며 중생들을 미혹시키고 오도(誤導)한 죄로, 그만 아비지옥에 떨어진다오.

 

그러므로 그대는 절대로 신중해야 하오. 자신이 본 경계가 100이라면, 101을 보았다고 말해도 안 되지만, 99만 보았다고 말해도 안 되오. 지나치게 말해도 죄와 허물이 되지만, 모자라게 말해도 허물이 되기 때문이오. 왜냐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수행 경지가 타심통(他心通)의 도안(道眼)을 얻지 못하여, 말하는 내용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만약 이러한 경계를 진짜 선지식에게 말하여, 정사시비(正邪是非)를 확실히 증명받는다면, 허물이 없게 되오. 그런데 증명받지도 않고서 단지 스스로 자랑하고 과시하려 든다면, 허물이 있게 되오. 또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도 허물이 되오. 선지식에게 증명받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털어놓아서는 안 되오. 말해 버리면, 그 이후로는 그런 수승한 경계를 영원토록 다시 얻지 못할 것이오. 이 점이 바로 수행인들의 제일 크고 중요한 관문이기에, 천태종에서 거듭 말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