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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46)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18)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만약 오랫동안 수행한 대사(大士)라면, 인연 경계가 폭넓은 것이 전혀 방해가 안 되오. 오히려 경계가 넓을수록, 마음이 더욱 오롯이 통일될 수 있소. 그러나 공부가 아직 깊지 못한 초심자들은, 만약 인연 경계가 넓어지면 마음과 의식이 분산되기 마련이오. 지혜는 얕고 업장은 두텁기 때문에, 더러 마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오. 우리 석가모니불과 역대 조사들께서 모두 한결같이 일심으로 아미타불 염송에 전념하라고 가르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오.

 

염불수행으로 삼매를 증득한 뒤에는, 온갖 법문의 무한하고 미묘한 이치가 모두 원만히 갖추어지게 되오. 옛사람들이 큰 바다에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온갖 강물을 다 쓴 셈이고, 몸소 함원전(含元殿) 안까지 들어가 본 사람에게는 장안(長安)을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말씀은,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형용한 비유라고 하겠소.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이 아무나 할 수 있고 깊지도 못하다고, 이를 내버리고 관상(觀像)이나 관상(觀想) · 실상(實相) 등의 염불법을 닦겠다고 나서지는 절대 마시오. 무릇 네 가지 염불 가운데, 오직 명호를 지송하는 방법이 말법시대 우리 중생의 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오. 명호를 지송하여 실상을 몸소 증득하고, 관법을 닦지 않아도 서방극락을 철저히 친견하는 것이오.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은 불도에 들어가는 현묘한 문(入道之玄門)이자, 부처가 되는 지름길(性佛之捷徑)이라오. 요즘 사람들이 교리나 관법을 모두 제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관상(觀想)이나 실상 염불법을 닦다가는, 자칫 악마가 들러붙기 쉽소. 재주를 부리려다 오히려 낭패를 당하고, 위로 올라가려다가 도리어 아래로 추락하는 꼴이 되기 쉽상이오. 마땅히 행하기 쉬운 방법을 수행하여, 지극히 미묘한 과보가 저절로 이루어져 나타나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소?

 

여래의 설법은 원래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이루어졌소. 그래서 실법(實法)을 행하며 권법(權法)을 베풀기도 하고, 권법을 열어 실법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한평생 다섯 시기의 교화가 차례로 있었다오. 그리고 또 중생들이 자력으로 해탈하기는 어렵고, 부처님 힘에 의지하면 해탈이 쉬운데다가, 말세 중생들의 근기가 형편없이 열악함을 아시고, 특별히 정토법문을 열어 두셨소.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이 다같이 이익을 얻어 불퇴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미리 배려하신 것이오.

그런데 세상에는 고상한 것만 좋아하고, 훌륭한 것만 좇아가는 이들이 많소. 시대와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지 못하고, 늘상 거의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수행하라고 가르치고 권하는 것이오. 그 뜻이야 비록 몹시 선하겠지만, 시대와 근기를 그만 놓쳐버려, 힘만 많이 들이고 얻는 이익이 아주 적게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소.

 

한 마음(一心)을 아직 얻기 전에는, 부처를 보겠다는 염주가 결단코 싹터서는 안 되오. 한마음을 얻게 되면, 마음과 도가 합쳐지고 마음과 부처가 합쳐져서, 부처를 보려 하면 단박에 볼 수 있고, 보고 싶지 않으면 역시 아무 어려움 없이 안 보게 되오.

 

그런데 한마음을 얻지도 못한 채 성급히 부처만 보려고 한다면, 마음과 생각이 어지러이 드날리고, 부처를 보려는 염두가 가슴 속 깊이 단단히 맺혀, 수행의 막대한 병폐가 된다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오랜 생애 동안 원한 맺힌 중생들이 그 조급한 욕심과 망상을 틈타, 부처님 몸으로 나타나 숙세의 원한을 보복하려고 덤비게 되오. 자기 마음에 올바른 식견이 없이 온통 악마의 분위기로 휩싸여 있으니, 한번 부처의 환영(幻影)을 보면 크게 기뻐하며, 악마가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미쳐 날뛰기 쉽소. 그러면 비록 산 부처가 나서서 구하려 해도 어쩔 수 없소.

 

단지 한 마음(一心)만 이룰 수 있다면, 하필 미리 부처를 볼 수 있을지 여부를 계산한단 말이오? 한마음이 된 뒤에는, 좋고 나쁨을 저절로 알게 되오. 부처를 보지 못했다면, 말할 것 없이 공부에 정진할 수 있어야 하오. 또 설사 보았더라도, 더욱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행에 전념해야 하오. 그러면 오해나 착각으로 인한 허물은 결단코 없으며, 오직 나날이 향상 전진하는 이익만 있을 것이오.

 

세간에는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 수행해 보고는, 금방 분수에 넘치는 기대를 품는 경우가 많소. 예컨대, 거울을 닦아 티끌과 먼지가 말끔히 제거되면, 틀림없이 맑은 광명이 드러나 천지 만물을 훤히 비추게 되오. 그런데 거울 표면을 닦는 데는 힘쓰지 않고서, 단지 빛이 나기만 바란다면, 어떻게 되겠소? 온통 먼지투성이인 거울에 설령 빛이 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요괴의 빛이지. 거울 본연의 빛은 아니오.

 

혹시라도 마음을 잘못 써서, 훌륭한 이익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신심마저 흔들어 후퇴시킬까 염려되어, 특별히 보충하는 말이오. 영명(永明)대사께서 일찍이 단지 아미타불만 뵙는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라고 읊으셨소. 이제 그 싯구를 본떠, 나는 단지 마음이 어지럽지 않기만 바랄 뿐, 부처님 뵙고 못 뵘은 따지지 않으리.” 라고 말하고 싶소. 이러한 이치를 알았거든, 마땅히 마음과 부처가 합치되는 도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오.

 

때로는 잠시 방편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급하지 않은 일은 거절하는 것도, 몹시 유익한 수행이 되오. 폐관(閉關 : 結制 · 杜門不出) 수행 중의 공부는, 마땅히 오롯이 정신 집중하여 두 갈래 지지 않는(專精不二)’ 일심불란을 주목표로 삼아야 하오. 마음이 과연 하나가 되면, 저절로 불가사의한 감응이 통할 것이오. 아직 하나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조급하고 망령된 마음으로 먼저 감응이 통하길 구해서는 안 되오. 한마음이 된 뒤에는 틀림없이 감응이 통하고, 감응이 통하면 마음이 더욱 하나로 오롯이 집중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