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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44)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17)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정토 수행의 올바른 원인(淨業正因)이 나와 있소, 부모께 효도로 봉양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을 끊고, 열 가지 선업(善業)을 닦으며, 삼귀의를 받들어 지니고, 모든 계율을 갖추어 지키며, 위엄과 예의를 범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며, 인광응보 법칙을 깊이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수행에 정진하도록 서로 권하는 것이오. 이 열한 가지 조목 가운데 어느 하나만 있어도,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극락왕생에 회향 기도하면, 모두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오.

 

4) 각 수행 방법에 대한 평가

 

내 생각에 수행법문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소. 우선 자기 힘에 의지해 계율 · 선정 · 지혜의 삼학(三學)을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며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것은, 보통법문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와 달리,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갖추고 부처님 명호를 지송(持誦)함으로써,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해 서방 극락에 왕생하는 것은, 특별법문이라고 하오. 보통법문은 완전히 자기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특별법문은 자기 힘과 부처님 힘을 함께 겸비한다오. 설사 제 아무리 선정과 지혜를 깊이 닦아 미혹을 끊는 공부가 뛰어나더라도,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함이 없다면, 역시 자력 수행에 속할 따름이오.

 

이 두 가지를 비유로 견주어 보겠소. 보통법문은 산수(山水)를 그리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붓으로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그어야 점차 완성되는 격이오. 특별법문은 산수(山水)를 사진기로 촬영하는 것과 같아서, 제아무리 수십 겹의 산봉우리와 계곡이 어우러져 있더라도, 단추 한 번 눌러 순식간에 고스란히 완성되는 격이오. 또 보통법문은 도보로 길을 걷는 것과 같아, 튼튼한 자라도 고작 하루에 백수십 리밖에 못 간다오. 하지만 특별법문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윤보(輪寶 : 요즘의 비행기나 로켓트를 대신 상정해 보면 좋음)를 타는 것과 같아, 하루에 금방 사대부주(四大部洲 : 지구상의 오대양 육대주를 상정)에 두루 이룰 수 있다오.

 

우리들은 이 자리에서 즉시 성불할 자격도 없고, 또 미혹을 완전히 끊어 마음대로 행동하더라도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실증도 없소. 그런데도 정토법문 수행에 전념하여, 부처님의 자비력으로 업장을 짊어 진 채 왕생하길 바라지 않겠소? 그렇다면 아마도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록, 여전히 삼악도나 육도 가운데 생사윤회를 계속하면서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만 같아, 슬프지 않을 수 없소. 바라건대 우리 불자 모두 함께 올바른 믿음을 내면 좋겠소.

 

염불법문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소. 지명(持名)과 관상(觀像)과 관상(觀想)과 실상(實相) 염불이 그것이오. 이 네 가지 방법 중에, 부처님 명호를 지니고 염송하는 지명(持名 : 또는 稱名이라고 함) 염불이 중생들의 근기를 가장 널리 두루 포섭하고, 착수하기도 쉬우며 마장(魔障)을 초래하는 일도 없다오.

 

만약 관법(觀法)을 수행하려거든, 반드시 먼저 관경(觀經)을 숙독하여,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이 마음이 부처임(是心作佛, 是心是佛)”마음이 청정하면 부처가 나타나며, 경계가 밖으로부터 오는 게 아님(心淨佛現, 境非外來)”을 깊이 알아야 하오. 그래서 단지 마음이 나타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그 경계가 더욱 심오하고 미묘해지며, 마음 또한 더욱 정치(精緻)하게 순일(純一)해진다오.

 

이와 같이만 한다면, 관상(觀想)의 이익이 결코 사소하지 않소. 그러나 관상하는 경계가 익숙하지 못하고, 마음의 길(心路)도 분명하지 않으면, 조급하고 허황된 마음으로 경계가 한시바삐 나타나기만 바라기 쉽소. 그러면 전체가 망상이 되어, 부처님과도 모두 서로 감응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마장(魔障)의 태반(胎盤)만 잠복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오.

 

이렇게 경계만 얼른 보려고 망상을 품으면, 마음이 더욱 조급하고 허황되기 싶소. 그러면 틀림없이 여러 전생에 맺은 원수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거짓 경계를 나투어 미혹시키려 들것이오. 최초의 원인 자리가 진실하지 못하니, 그런 거짓 경계가 마장으로 나타난 것인 줄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소? 그리하여 크게 기뻐하여 흥분하여 안절부절 못하면, 악마가 곧 몸에 달라붙어, 제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게 되오. 그런 사람은 설령 산 부처님께서 몸소 나타나시어 구제하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소.

 

모름지기 자기 근성(根性)을 스스로 혜아려야 하오. 그래야 혹시라도 오직 높고 뛰어난 것만 붙잡으려다가, 이익은 못 얻고 손해만 보는 어리석음은 없게 되오. 일찍이 선도화상(善導和尙)께서 말법 시대의 중생은 정신과 의식이 날넘고 건방지며, 마음은 거칠고 경계는 세밀하여, 관법 수행을 성취하기 어렵다.”고 하셨소. 그래서 위대한 성인께서 자비와 연민을 베푸사,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명호만 지송하는 염불을 특별히 권하셨다오.

 

명호를 부르는 게 쉽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또 더러 마음을 잘못 써서 마장의 경계에 빠져드는 자가 있을까 진심으로 염려한 까닭이라오. 스스로 잘 살피기 바라오. 또 간절한 정성 자체도 조급하고 허황된 마장을 제거하는 한 가지 비결이라오. 마음과 힘을 다해 실행한다면 정말 다행이겠소.

 

그리고 혹시라도 한 부처님을 부르며 생각하는 염불이 수많은 부처님을 부르며 생각하는 공덕만큼 크지 못하다고 생각지 마시오. 아미타불은 법계장신(法界藏身 : 법계에 감추어져 가득 차 있는 몸)으로, 시방 법계의 모든 부처님들의 공덕이 아미타불 한 분께 전부 원만히 갖추어져 있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마치 제망주(帝網珠)에서 천 구슬이 한 구슬에 포섭되고, 한 구슬이 천 구슬에 두루 나투어지는 것처럼, 아미타불 한 분만 입에 올려도, 모든 부처님이 빠짐없고 남김없이 전부 포함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