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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41)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14)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소인들이 겉으로는 선을 행하는 척하면서, 실지로는 죄악을 저지르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그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 모르는 자들은, 단지 세간의 범부들 뿐이오. 도를 깨달은 성인은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훤히 아신다오. 천지간의 귀신들도 비록 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타심통(他心通)의 과보를 받았기 때문에, 마음속 구석구석을 다 안다오. 하물며 성문 · 벽지불 · 보살과 모든 부처님처럼 삼세(三世 : 과거 · 현재 · 미래)를 원만히 꿰뚫어 보시는 타심통의 도안(道眼)을 갖추신 분들이야, 마치 손바닥 굽어보듯 하지 않겠소?

 

알지 못하기를 바라는 자는, 오직 자기만 알지 못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오. 자기가 만약 스스로 알았다면, 천지 귀신과 불보살님들은 모든 것을 보고 아시지 않음이 없소.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비록 캄캄한 골방에 혼자 있더라도, 감히 느슨하게 게을러질 수 없을 게오. 천지 귀신과 불보살님들이 함께 보고 아시기 때문이오. 설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라도, 만약 이러한 이치만 안다면, 부끄러워 몸둘 곳이 없을 것이오. 하물며 진실하게 수행하는 선비들이야 말한 나위가 더 있겠소?

 

그러므로 허물이 적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모든 성현과 귀신들이 다 보고 아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오. 공자가 요순 성왕을 국 그릇 속과 담장 위에서 보았고, 홀로 있을 때 조심했는지(愼獨)는 이부자리 흔적에서부터 알 수 있다고 하오. 전해 오는 말들은 세간 범부들의 보통 감정과 생각을 염두에 두고, 비근한 예로 거론되는 것뿐이오.

 

사실은 내 마음과 시방 법계가 보는 눈이 자기 한 몸에 국한된 것뿐이오. 반면 시방 법계의 모든 성인들은, 자기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는 법계장심(法界藏心)을 철저히 증득했기 때문에, 법계 안의 감정 있는 중생들의 마음 움직임과 생각 일으킴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친히 보고 아신다오. 왜냐하면, 똑같이 진여(眞如)의 성품을 받아,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스스로 전전긍긍하며 경각심을 곧추세우고, 정성과 공경을 가득 품을 것이오. 처음에는 애써 망상을 잠재우지만, 오래 계속하다 보면 망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게 깨끗이 사라진다오. 사악한 생각(惡念)도 원래 망상에 속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곧 진짜 죄악이 되고 만다오. 하지만 금방 알아차리기만 하면, 망상이 소명하고 진실한 마음이 나타나게 되오.

 

허물을 적게 하는 수행은, 사실 유교와 불교에 공통되는, 절실하고 요긴한 공부라오. 거백옥은 50세가 되어서 49세 때의 잘못을 알아차렸으며, 공자에게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도 허물이 적기를 바라고 있지만 능력이 모자란다.” 는 말을 전했다오. 이는 정말 생각 차원(意地)에서 수행하는 것이며, (행동)과 입()을 움직여 허물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오.

 

집안 생활을 하는 거사들도 일반 사람들과 왕래할 때, 마땅히 이처럼 수시로 생각을 예방하여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생각(意業)만 깨끗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몸과 입까지 더러 더러워질 수 있소. 자신과 남이 함께 이롭고자 한다면, 옛사람들의 훌륭한 말씀과 행실을 많이 알아, 자기 수행의 귀감으로 삼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오.

 

부처님과 조사들이 생사 해탈하신 것을 배우려거든, 모름지기 부끄러움(慙愧)과 참회(懺悔)를 바탕으로,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止惡修善)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오. 바로 유가에서 말하는 자송(自訟)과 과과(寡過),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뜻하오.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 얼른 사실대로 알아차린 다음, 자기 양심 안에서 스스로 소송 · 심판하는 자송(自訟 : 자아 비판)을 하게 되면, 저절로 허물이 적어지게 될 것이오. 허물을 줄이는 것이 곧 자신을 이기는(克己) 실행이며, 자신을 극복하다 보면 저절로 예법으로 복귀할 것이오.

 

그리고 재계(齋戒)를 지키며 스스로를 경책(警策)하고, 뜻을 몸시 진실하고 간절하게 지녀야 하오. 그렇지만 발은 현실의 바탕을 착실히 디디고 서서, 힘을 다해 실행해 가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妄語) 중의 거짓말이 되고 말 게오. 알기는 어렵지 않지만, 실행하기가 정말 힘든 법이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총명한 사람들이, 단지 말만 지껄이고 실행은 안 하면서 한평생을 끝마치는 줄 아시오? 보물산에 힘들게 들어왔다가, 그냥 빈손으로 되돌아가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범부 중생은 미혹되어 있어, 신심이 견고하지 못하오. 그래서 믿음을 내었다가 물러서기를 거듭 반복하며, 수행에 정진하다가 그만두기를 누차 되풀이하는 모습들을 보이기 마련이오. 이는 최초에 가르친 사람이, 그에게 적합한 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오. 가령 맨 처음에 손쉽게 알 수 있는 인과법칙 등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이처럼 미혹되어 갈팡질팡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지나간 죄악이 비록 지극히 크고 무겁더라도, 단지 마음과 뜻을 다해 참회하고 고치며, 올바른 지견으로 청정한 수행을 닦아, 자기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려는 뜻만 세우고 실천해 가면 되오. 그러면 제아무리 커다란 죄악의 업장이라도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본래 성품의 하늘이 맑게 확 열릴 것이오. 그래서 불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소.

세간에 두 종류의 씩씩한 사람이 있다. 하는 애시당초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며, 다른 하는 죄를 지은 다음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