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40)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13)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만약 좋지 못한 경우를 당하거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생각을 해 보시오. 세상에 나를 능가하는 자가 정말 많지만, 나만 못한 이도 또한 적지 않소. 다만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다면, 어찌 꼭 대부호와 고관대작을 부러워한단 말이오? 하늘의 뜻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분수를 알아(樂天如命), 만나는 대로 편안히 여기는 것이오. 이와 같이 하면, 오히려 번뇌도 보리(菩提)로 변화할 수 있거늘, 근심 고통 따위야 어찌 안락으로 전환시킬 수 없겠소?

 

만약 질병이 끊임없이 귀찮게 달라붙는다면, 몸뚱이 자체가 고통의 근본임을 통절히 생각하며, 어서 벗어버리고 싶은 혐오감을 심하게 내시오. 그리고 정토법문을 힘써 수행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여야 마땅하리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불도를 이루셨다오. 그러니 우리도 마땅히 질병을 약으로 삼아, 한시 바삐 생사윤회를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하오.

 

우리 범부 중생에게 만약 빈곤 · 궁핍 · 질병 따위의 고통이 전혀 없다면, 매일같이 여색과 재물 · 명예 따위의 진흙탕을 쏘다니며, 한시도 쉴 수 없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누가 세속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며 득의양양할 때, 고개를 돌려 장차 그곳에 빠져 결국 헤어나지 못할 줄 생각이나 하겠소? 그래서 일찍이 맹자(孟子)도 유명한 말씀을 남겼소.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통과 살갗까지 굶주리게 만들고, 그 몸이 텅 비어 결핍되게 만들며, 그가 하는 일마다 뒤흔들어 어지럽히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고 성품을 강인학 단련시켜, 그가 할 수 없는 부분에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을 성취시킴에는, 대부분 괴로운 역경을 통한다오. 사람은 단지 하늘을 받들어, 그 역경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오. 그렇지만 맹자가 여기서 말한 큰 임무란 주로 세간의 높은 작위(爵位 : 신분지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오. 세간의 지위도 모름지기 그처럼 근심하고 수고해야, 바야흐로 하늘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오.

 

하물며 우리들이 범부 중생의 처지에, 곧장 위로 법왕(法王 : 부처님)의 깨달음 도를 받들고, 아래로 법계의 유정 중생들을 교화시키려 하는 수행이야 오죽하겠소? 가렬 조금이라도 빈곤과 질병 따위에 좌절을 당하는 시련이 없다면, 범부의 미혹이 날로 치성하여 청정한 수행이 성취되기 어렵소. 본마음을 잃어버리고 삼악도에 영원히 빠져, 미래세가 다하도록 벗어날 기약도 없을 것이오.

 

옛날 대덕이 한바탕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를 겪지 않으면 어떻게 매화 향기가 콧속을 찌를 수 있겠는가? 라고 읊으신 게, 바로 이러한 뜻이오. 오직 지성스런 뜻과 마음으로 염불하여, 묵은 업장을 해소하여야 하오. 혹시라도 번잡하고 조금한 마음이 일어,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거나, ”인과응보의 법칙은 허망한 것이고 불법도 신령스럽지 않다.“ 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하오.

 

옛날에 거백옥(蘧伯玉)은 평생 수행하면서, 50세 때에 이르러 49세 때의 잘못을 알아차렸소. 또 공자는 나이가 일흔이 다 되어서도, 오히려 하늘이 자기에게 몇 년만 더 내려주면, 주역을 공부하여 큰 허물(大過)이 없겠다고 기원했다오.(공자의 주역 공부에 관한 문장은 크게 다른 해석들이 있음). 성현들의 공부는,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키는 바탕 자리에, 궁극의 목표를 두지 않은 이가 없소.

 

그런데 근래의 유학자들은 오직 사장(詞章 : 말과 문장만 다듬은 문학류)만 공부하고, 큰 학문(大學)의 기본 출발점인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소. 비록 매일같이 성현의 글을 읽지만, 성현들이 글을 남겨 세상 사람을 일깨우려고 한 근본 뜻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게오. 그들이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행동하는 것을 성현의 말씀과 행동에 견주어 보면, 마치 밝음과 어둠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네모와 동그라미가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크게 다르오. 하물며 은밀하고 미세한 부분의 차이를 따져 볼 겨를까지 있겠소?

 

불경은 사람들에게 항상 참회하여, 무명(無明)을 완전히 끊고 불도를 원만히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소. 비록 지위가 등각(等覺)까지 이른 미륵보살조차도, 매일같이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 예경(禮敬)을 드리며, 무명이 깨끗이 사라져 법신을 원만히 증득하기만 기원한다오. 하물며 그 아래 보살이나 성문 · 벽지불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그런데도 우리 범부 중생들은 몸뚱아리 전체가 온통 업장 투성인데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참회할 줄도 모르는구려. 비록 일념심성(一念心性)이야 부처와 똑같이 평등하다지만, 번뇌와 악업의 장애가 마음의 근원을 뒤덮어, 밖으로 훤히 드러날 수 엇는 현실인걸 어떡하오?

 

악을 멈추고 선을 쌓는 수행에서, 엄격하고 사실대로 자신을 살펴보기로는, 공과격(功過格 : 매일의 공덕과 죄과를 기록하는 표)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만약 마음이 정성과 공경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면, 설령 매일같이 공과격을 빈틈없이 기록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알맹이 없는 텅 빈 종이에 지나지 않소.

 

반면 비록 공과격은 없더라도, 단지 공경과 정성만 마음에 간직하고, 하루 내내 어느 한 순간이라도 헛되고 들뜬 감정이나 게으르고 느슨한 생각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 오직 충실과 용서(忠恕)를 품으면, 아주 훌륭한 수행이 되오. 그러면 어느 때든 어느 곳이든, 사악한 염두가 일어날 수 없을 것이오. 설사 묵은 습관이 발작하여 더러 갑작스레 생기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마음속에 정성과 공경, 충실과 용서가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염두가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금방 알아차릴 수 있고, 깨닫는 순간 곧 없어지게 되오. 사악한 생각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성하게 날뛰고, 언행까지 뒤따라 죄업을 짓는 일은 켤코 없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