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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47)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19)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그런데 마음이 아직 순수히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감응이 통하기만 간절히 바라면, 그 욕심이 바로 수도(修道)의 제일 큰 장애가 된다오. 하물며 조급하고 망령된 마음으로, 아주 특별한 기대에 잠긴다면 어찌 되겠소? 온갖 악마를 불러들여 청정한 마음음을 파괴할 게 분명하오.

 

손가락에 피를 내어 경전을 쓰는(寫經) 일은 일단 늦추고, 마땅히 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오. 피를 많이 흘리면, 기력이 소모되고 정신이 쇠약해져, 도리어 수행에 장애가 될까 두렵기 때문이오. 몸이 편안한 뒤에 도가 높아지는 법이오. 범부의 지위에서 법신대사(法身大士)의 고행을 본받아 실천하려 들면 안 되오. 단지 한 마음만 얻으면, 모든 법이 원만하게 갖추어진다오.

 

관상(觀想) 염불법은, 먼저 이치의 길이 명백하고 관조의 경지가 익숙하며, 조급하거나 경망스런 마음이 없고, 차분히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뜻을 갖추어야 하오. 그런 사람이 아니면 수행해 봤자, 손해만 많고 이익은 적다오.

 

실상(實相) 염불법이야, 부처님 한 평생 가르침과 모든 법문에 공통되는 최고 미묘한 수행이오. 천태종(天台宗)의 지관(止觀)이나 선종의 참구향상(參究向上)의 수행이 모두 그것이오. 이른바 자기 성품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天眞)스런 부처를 사념(思念)한다는 것이오.

 

이러한 실상염불은 말하기는 쉬운 듯하지만, 수행하고 증득하기는 실로 어려움 가운데 최고 어려움이라오.(이미 도를 얻은 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시 온(再來 : 再臨) 대사(大士 : 보살)가 아니라면, 누가 현생에 단박 몸소 증득할 수 있겠소? 이렇듯이 어렵기 때문에, 명호 지송하는 염불을 아주 특별히 찬탄하고 권장하는 것이오.

 

이걸 알고도, 여전히 자기 힘에 의지해 미혹을 끊고 지리를 증득하여 본래 심성을 회복하려고 고집할 뿐,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서방극락에 왕생하길 바라지 않으려는 사람은, 씨도 없을 것이오. 실상(實相)은 일체의 법에 두루 존재하오.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이야말로, 구체적인 일()이자 추상적인 이치()이며, 얕으면서도 깊고, 수행의 과정이자 성품 자체이며,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의 마음인, 최고 위대한 법문이라오. 명호 지송 염불의 본체와 실상을 알아본다면, 그 이익은 몹시도 크고 깊소.

 

명호 지송법을 도외시하고 실상법만 오로지 닦는다면, 만 사람 가운데 한둘도 진시로 증득하기가 어렵다오. 내생에 소동파나 증로공 · 진충숙 · 왕십붕 등과 같은 과보만 얻을 수 있어도, 이미 최상의 경지에 속하오. 그렇지만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일이, 어찌 큰 뜻을 품고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만 호락호락 이루어질 수 있겠소?

 

염불의 즐거움은, 오직 진실되게 염불하는 자만이 스스로 알 수 있소. 그렇지만 반드시 뜻과 정성을 다해 마음을 추스리고 간절히 염불해야 하며, 바깥 경계나 형상에 집착해서는 결코 안 되오. 그렇지 않으면, 마음 바탕이 확 트이지 않고 관상의 길도 익숙하지 못하여, 악마의 경계가 앞에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할 터이니, 몹시 위험하게 되오.

 

지금 진실로 정토법문을 널리 펼치는 이는, 정말 찾아보기도 힘든 지경이오.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겠다는 염두일랑 걷어 치우고, 일심으로 염불하기로 작정한다면, 그 이익이 무척 클 것이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한바탕 정신없이 힘들고 분주한 헛걸음만 하고 말 것이오. 정말 간절히 당부하는 말이오.

 

염불하면서도 염불함이 없고, 염불함이 없으면서도 염불하는 이는, 염불이 상호 감응하는 때에 이르면, 비록 항상 염불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는 모습이 전혀 없다오.(물론 서로 감응하기 전에는,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염불하지 않는 것이오.) 비록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지만,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늘상 입으로 부르며 염송하거나(稱念) 마음속으로 기억하며 염송(憶念)하는 것이오. 그래서 염송하면서도 염송함이 없고, 염송함이 없으면서도 염송한다고 말하오. 염송함이 없다(無念)는 말을 염송하지 않는다(不念)는 의미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되오. 염송함이 없으면서도 염송한다는 말은,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는 모습이 없이, 염송과 염송이 끊이지 않고 이어짐을 일컫소. 이러한 경지는 얻기가 결코 쉽지 않으므로, 함부로 망상이나 오해를 해서는 안 되오.

 

관상(觀想)염불법이 비록 좋긴 하지만, 보고 생각하는 부처님 형상은 오직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오. 만약 마음 바깥의 경계로 잘못 알면, 혹시라도 악마가 들러붙어 미쳐 날뛸 수도 있으니, 이점을 잘 알아야 하오. 오직 마음속에 나타나는(唯心所現) 형상은, 비록 뚜렷하고 분명한 모습으로 느껴질지라도, 실제로 알맹이 있는 물건 덩어리는 아니라오. 만약 바깥 경계로 착각하여 덩어리가 실제 있는 것으로서 여긴다면, 곧 악마의 경계가 되고 말 것이오.

 

다른 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걸 보면, 다분히 현묘(玄妙)한 곳에 치중하는 것 같소. 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이끌고 있소. 가령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설사 선종(禪宗)과 교법(敎法)을 하나하나 궁구할지라도, 단지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의 원한만 이룰 따름이오. 하물며 선종이나 교법을 철저히 궁구하지도 못하는 범부 중생이 자기 본분마저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