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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23)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2. 극락왕생은 믿음과 발원 지닌 염불 수행으로(8)

 

그래서 석가모니불이 아미타경을 설할 때에, 동서남북 상하 육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동시에 넓고 긴 혀(廣長舌)를 드러내어 한 목소리로 찬탄하며, “불가사의한 공덕을 지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보호 염려(護念)하는 경전이라고 일컫고, 우리 석가세존께서 몹시 어렵고 드문 일을 하고 계신다고 칭송하셨소.

 

그리고 석가세존께서도 스스로, “내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이토록 어려운 일을 수행하여 보리를 증득하고, 일체 세간 중생을 위하여 이렇게 믿기 어려운 법을 설하는 것은 몹시도 어렵다.”고 설법 인연을 서술하셨소. 듣는 자들이 믿고 받아들여 수행하도록, 자신이 세상에 나오신 궁극 회포를 남김없이 펼치신 것이오.

 

그런데 이 법문은 몹시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렵소. 비록 모든 부처님과 우리 석가세존께서 서로 번갈아 가며 믿음을 권했어도, 세상에 의심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욱 많기만 하오. 세간의 범부 중생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참선과 교법에 깊이 통달했다는 성문이나 벽지불 중에도 더러 의심하는 분이 있다오. 또 이들 작은 성인(小聖)뿐만 아니라, 권위(權位 : 하급)보살조차도 의심하는 경우가 있소. 법신대사(法身大士 : 등각보살)에 이르면, 비록 진실하게 믿기는 하지만, 궁극 근원까지 철저히 알지는 못한다오.

 

왜냐하면, 이 법문은 아미타불이 과보로 얻은 깨달음을, 그대로 중생들이 수행하는 원인 자리의 마음으로 삼아, 전체가 부처님 경계이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궁극의 경지를 다 알 수 있다오. 부처 아래의 성현들이 잘 모르고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오. 우리 범부 중생들이야 부처님 말씀을 믿고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기만 하면, 저절로 진실한 이익을 얻게 되오. 이토록 불가사의한 법문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자체만도, 오랜 겁 동안 착한 뿌리(善根)를 깊이 심어온 복덕의 결과이거늘, 하물며 믿고 받들어 수행하는 이야 오죽하겠소?

 

화엄경은 여래께서 처음 정각을 이룬 다음, 이 세계 밖의 41분 법신대사를 위하여 한 생애에 부처가 되는 방법을 설하여, 삼장(三藏) 가운데 왕이라 일컬어지오. 그 화엄경에서도 궁극 귀결은, 실제로 십대원왕(願王)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매듭짓고 있소. 거기서 선재(善財) 동자가 증득한 내용은 이미 보현보살과 같고, 모든 부처님과도 사실상 다르지 않은 이른바 등각(等覺)보살이오. 부처와 단지 한 칸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등각 보살도 극락왕생을 회향하고, 화장세계해(華藏世界海)의 모든 보살들도 한결같이 이 가르침을 닦는 것이오.

 

지금 참선과 교법에 제아무리 통달했다는 선지식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타고난 근기와 성품 및 증득한 도가 어떻게 이들 보살을 능가할 수 있겠소? 천만 경론(經論)이 도처에서 이 법을 강조하는데, 믿고 의지할 수 없소? 그리고 예부터 수많은 성현들이 한결같이 서방극락을 향해 나갔는데, 그들이 모두 어리석은 바보란 말이오? 한 마디로 말하면, 업장이 몹시 두터워 해탈할 수 없는 자들인지라, 매일같이 쓰면서도 알아차릴 줄 모르는 것이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의심할지 모르오 :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 안거하고 있고, 시방세계가 끝없고 수없이 많으며, 한 세계마다 염불하는 중생들 또한 끝없고 수없이 많을텐데, 아미타불이 어떻게 한 몸으로 동시에 시방 허공의 끝없고 수 없는 세계에서 염불하는 일체 중생들을, 두루 빠짐없이 맞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리가 평범한 중생의 지식 견해로 부처의 경지를 추측하려는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질문인데, 한 가지 비유로 그 미혹을 풀어 보겠소. 달 하나가 하늘에 떠서 천만 강물에 제 모습을 각각 드리울 제, 달이 무슨 특별한 마음을 쓰겠소? 하늘에 단지 하나의 달뿐데인데, 큰 바다와 강물 및 작은 시냇물은 물론, 작게는 한 바가지 한 방울의 물에도, 온전한 달의 모습이 한결같이 비춰지오. 게다가 한 강물의 달이라도, 한 사람이 쳐다 보면 하나의 달만 그에게 보이지만, 백천만억 사람이 백천만억 곳에서 그 한 강물의 달을 보면, 각자에게 하나의 달씩 똑같이 보이지 않소? 또 백천만억 사람이 각각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움직이면, 달 또한 각자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똑같이 움직이고; 그들이 멈추면, 달도 따라 멈추어 선다오. 그러나 오직 물이 맑고 고요할 때만 달이 나타나고, 물이 흐리거나 움직이면 달은 이내 숨어버리오. 달은 정말 스스로 취사선택하는 바가 전혀 없소.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물이 혼탁하거나 물결치며 흐르기 때문에, 달의 모습을 받아 비추지 못하는 것이오.

 

중생의 마음은 바로 물과 같고, 아미타불은 달과 같소. 중생이 믿음과 발원을 함께 갖추어 지성으로 염불하면, 부처가 그에 감동하여 응답을 보인다오. 마치 물이 맑고 고요하면, 달의 모습이 저절로 비추어지듯이, 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거나 정성스럽지 못하고 탐진치와 어울리면, 부처와는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소. 마치 물이 혼탁하거나 움직이면, 달이 빠짐없이 비추어 주더라도, 그 모습을 드리울 수 없는 거와 같소.

 

달은 세가느이 빛깔 있고 형상 있는 물건(色法)인데도, 오히려 이처럼 미묘하고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소. 하물며 번뇌와 미혹을 깨끗이 제거하고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갖추어, 마음은 허공을 다 감싸고 도량은 시방 법계를 두루 포용하는 아미타불이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화엄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의 중생 앞에 두루 나투시네. 인연 따라 나아가 두루 감응하면서도,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머무시네.”

 

그러므로 모든 법계에 두루 감동하고 호응하더라도, 실제로 부처님은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킨 적이 없으며, 오고 가는 모습도 없다오. 단지 인연이 무르익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와서, 그들을 맞이해 극락왕생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뿐이오. 위와 같은 의심을 일으키는 자가 정말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비유로 대강의 요지만 간추려, 바른 믿음을 낼 수 있도록 권장 격려하는 거라오.